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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
 WRITER: 관리자  (58.♡.239.137) DATE : 21-01-31 12:08 READ : 1220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침묵>을 통해 본 -

                                                                                            (청담동 성당 강의 2018.11.21.)

1) 엔도슈사쿠와 그의 생애

엔도는 일본의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다. 그는 평생 <아시아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갖고 작품활동을 했다. 오늘 우린 그의 대표작인 <침묵>을 통해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그것은 우리 역시 그처럼 아시아인이고 서구로부터 그리스도교 전통을 신앙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생애 중 그의 작품세계를 깊은 영향을 미친 부분을 살펴보자.
 엔도는 아버지를 따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만주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이혼당한 후 1933년 엔도와 함께 고배로 온 어머니는 언니의 권유로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이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서양 양복을 입은 듯.(비자발적 세례)
-부모의 이혼과 비자발적 세례는 엔도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체험
-가톨릭 신앙과 일본의 정신풍토(신도)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엇던 거리감이 엔도작품의 근본 모티브이나 이는 어머니에 대한 동경과 비자발적 세례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맴돌았다.

-신도란?
일본의 고유종교, 다신교(800만) 태양신(아마테라스)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미가 있다고 본다. (범신론적 사유)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의 거리감 (초월적 신관)

2) <침묵>의 배경

⓵ <침묵> (1966년, 44세)의 배경은 17세기초,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지던 때이다. 주인공인 세바스찬 로드리고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 쥬세페 키아라(Giussepe Chiara)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스승 페레이라가 일본 선교 과정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이 존경하던 스승이 배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스승의 배교에 대한 의문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로 일본에 들어온 그는 결국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한 후 배교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오카모토 산에몬이라는 일본명을 부여받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키리시탄을 유폐시키는 주거지에 살다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⓶ 병중체험과 후미에

엔도 슈사쿠는 폐결핵으로 세 차례 대수술을 받아 약 2년 7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다. 병상에서 그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체험을 하면서 신의 침묵에 대해 실존적 불안을 안고 살았던 그는 어느 날 나가사키에 방문했고 거기서 우연히 후미에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다.
 “나가사키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오오라 천주당 안에 발로 밟힌 성화 후미에가 놓인 집이 있어서 가보았다...오랜 투병생활 도중 마멸된 후미에의 그리스도 얼굴과 그 옆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검은 발가락의 흔적을 몇 번이고 마음속에 되새겨 보았다. 배교자라는 이름만으로 교회도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역사로부터 말살된 그들의 침묵 속에서 다시금 되살리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투영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동기이다” 김승철 흔적과 아픔의 문학(1), 기독교 사상 2015 3. 대한 기독교서회 193

도쿠가와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고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단가제도(檀家制度)’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어딘가의 사원에 소속하여 호적을 등록해야 하는 제도이다. 매년 한번씩 자신이 소속된 사찰에 가서 그리스도인인지 여부를 조사받았다. 모든 사람들은 매년 사찰에서 실시한 후미에 밟기에 참여해야만 했다. 당시 기리시탄들도 후미에에 새겨진  예수상과 마리아상을 밟았다.
  “후미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밟아서인지 나무에는 발의 모양이 나 있었고 밟혀진 그리스도의 얼굴은 이그러져 있었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그 그림을 밟았던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그들에게 떠올랐던 것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분, 가령 꿈이나 이상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라면 연인의 얼굴이나 어머니의 얼굴이라든지 그런 것이 떠올랐을 것이다.”
 엔도는 성화를 밟고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상을 밟으면서 신앙생활을 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을까 하는 물음이 자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⓷ 가쿠레 키리스탄(隠れキリシタン)-잠복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일본은 아시아 중에서 가장 먼저 카톨릭을 수용했다.
(1549년 가고시마로 하비에르 신부가 들어오다)
 에도시대에 천주교를 수용한 것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서방과 무역이 활발해지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역을 위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허용해줌으로써 1607년 당시 일본에 약 140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있었고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틴회도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정토종을 신봉하는 인물이었고 그곁에서 불교에 관한 조언을 하던 승려는 천주교를 비방했을 뿐 아니라 도쿠가와가 따르던 禪師인 수덴(宗傳 1569-1633)도 천주교 박해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또한 하야시 라잔도 예수회 수사 하비안과 토론 한 후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도쿠가와 곁에서 학문연구하고 그의 후손을 교육하면서 천주교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된다.
 
그러나 1614년 전국에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내렸다. 그들은 이미 전국시기에 아미타불 신심에 기초한 신앙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잇코잇키를 통해 신앙공동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공포한 그리스독교 금교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페인에서 믿는 종교교리와 일본종교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교활동을 그만두시는 게 서로를 위한 길이라 믿습니다. 이와 별개로 무역의 규모를 늘려 서로 간의 이해와 관계를 증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셉제네스 홍성언 역, <일본천주교 수용사>, 경희대학교 출판 문화원, 153쪽.

 이렇듯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1619년 교토에서 25명, 1622년 나가사키에서 55명, 1623년 에도에서 50명, 1627년 운젠에서 16명이 순교했다. 이는 문헌으로 확인된 순교자의 숫자이며 그들을 포함해서 에도막부 시대에 순교한 사람은 총 4045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4만 명 정도 되리라고 본다. 실로 일본 그리스도교의 엄청난 박해와 순교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순교하는 방법도 십자가형, 화형, 열탕을 붓는 고문, 거꾸로 매달려서 귀에 구멍을 뚫어 죽게 하는 방법 등 각양각색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런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간 것이다.
 
1644년 이후 다시 서구와의 문호 개방이 이뤄지기 전까지 가톨릭 교회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듯 천주교 박해는 250년간의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그 후 가톨릭 사제들은 모두 추방당해‘ 250년간 일본  교회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1853년에 안세이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일본에 있는 미국인은 자기 나라의 종교를 믿고 교회를 거류지에 건립해도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다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서구와 문호 개방으로 사제들이 들어오자 일본에 기리시탄들이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단(かくれ·キリシタン)이라 부르는데 그들은 약 200년 가까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면면히 맥을 이어온 것이다. 도히 아키오, 김수진 역, <일본 기독교사>, 기독교문사, 2012, 57쪽 참조.

이들은 어떻게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해온 것이다. 이떻게 가능했을까? 이들이 비밀리에 신앙을 지녀왔던 것은 일본인 특유의 조상에 대한 애착, 마을단위, 공범자 의식이라는 심리라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리시단 신앙이 금지된 후에도 신앙을 계속 지켰던 것은 그 신앙이 자신의 조부나 부모가 믿었던 종교라는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소리>, 동연, 2016, 111쪽.
 
이들은 매년 사찰에서 실시되는 후미에 밟기에 참여했다. 그렇게 후미에를 밟은 그날 그들은 자신들의 비겁함과 참혹함에 돌아와서 오텐펜사라고 불리는 줄을 매단 채찍으로 몸을 때렸다. 오텐펜사는 포르투칼어의 테시피리나를 가쿠레가 잘못 사용하던 말로서 채찍이라는 의미다. 같은 책, 171쪽.
 이처럼 당시 가쿠레 신자들은 자신들이 배교자라는 자각을 지니고 살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은 마음의 빚을 지닌 자의 신앙, 곧 승리자가 아니라 폐잔한 자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어두운 신앙을 지녔던 가쿠레 기리시단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데우스의 어머니 산타 마리아 우리들은 한 번 더 빕니다. 우리 악인들을 위해서 빌어주소서‘” 그들은 그토록 성모님께 매달렸던 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켜가는 또 다른 출구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기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감에 있어 아버지의 이미지보다 어머니의 이미지가 더 가깝게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 종교로의 이행이 바로 마리아를 섬긴 이유였다. 그런데 그들은 성모마리아상 대신 마리아 관음상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불자들이 소지한 관음상과 흡사하게 성모상을 만듬으로써 마치 불교 관음상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가쿠레 키리스탄의 모습이 나온다. 엔도는 말한다. “내게 있어 가쿠레(숨어있는 기리시탄)가 흥미로운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이 자손들은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배교조차 하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의 거짓된 삶의 방식에 대한 후회와 꺼림칙하고 어두운 마음과 굴욕을 간직하며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세상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면서 본심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이중적 생활방식을 일생 지니지 않으면 안된 가쿠레에게서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어머니 되시는 분>
 

3) <침묵>에 나오는 약자들

엔도가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아니라 바로 가쿠레 기리시탄처럼 약자들이다.
<침묵>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약자가 바로 기치지로이다. 그는 로드리고일행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다.
 교활한 눈빛과 비굴한 웃을 지닌 나약하고 비겁한 겁쟁이의 모습을 지닌 그들 로드리고는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에 비유한다. 로드리고가 기치지로를 유다에 비유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팔린 것처럼 나 자신도 기치지로에게 팔려 지금 지상의 권력자들에게 재판을 받으려 한다“
이처럼 강하다고 자부한 그는 체포된 후 두려움을 느낀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엄습해오는 육체의 공포를 견디기 힘든 상태를 경험하면서 그는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기치지로의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적대시해온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이 그가 지녀온 (강자와 약자, 성자와 평범한 인간 영웅과 두려워하는 자,) 이분법적 대립 구도의 경계를 허물게 만들었다. 렇듯 엔도는 <침묵>을 통해 강자와 약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침묵>의 주인공인 로드리고는 일본땅에서 그간 자신이 추구해 온 이상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자신의 참된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놀랍게도 유다와 같이 약한 기치지로를 통해서였다. 종전에
기치지로를 성서상의 유다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던 로드리고는 기치지로에게 강한 분노를 느꼈다. 그런 기치지로가 배교한 자신을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받겠다며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닌가. 이미 교회를 떠난 기치지로는 울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같이 약한 사람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
 나도 하느님을 굳게 신앙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된다.” 기치지로의 고백을 들은 로드리고는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주님,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 것을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자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은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어라’고 말했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엔도는 이렇듯 약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하느님은 강한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약자들의 하느님임을....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엔도는 그리스도 얼굴의 변용을 통해 그리고 있다.

4) 그리스도 얼굴의 변용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엔도는 로드리고에게 다가오는 예수의 변모된 얼굴에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있다. 이로서 그는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일본의 풍토 안에서 어떻게 변모되어가야 할지를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침묵>에는 13번이나 예수의 얼굴이 언급된다.
 엔도는 예수의 변형된 얼굴을 통해 예수에 대한 이미지가 자신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처음에는 아주 강하고 위엄 있는 이미지였다가, 로드리고가 순교를 결심했을 때에는 온화하고 자긍심을 잃지 않는 얼굴로, 로드리고가 순교를 결심한 후 순교장으로 갈 때는 마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면서도 꿋꿋하게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얼굴로 떠올랐다.
로드리고가 후미에를 밟으려는 순간 그분은 로드리고에게 이렇게 말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김승철 아픔의 문학 306
 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엔도는 변용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강한 하느님의 이미지에서 약한 하느님의 이미지로 변모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약한 하느님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이 참된 모습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쟝 바니에--“내 체험은, 하느님께서 도대체 얼마나 상처입기 쉬운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무도 우리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것이지요.
 요한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듯이,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만 상처입기 쉬운 상태가 되어 버렸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상처입기 쉬운 상태가 됨을 의미한다.
 (… ) 하느님이 도대체 사랑이시라면, 그건 하느님이 끔찍할 정도로 상처입기 쉬운 분(terribly vulnerable)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하도록 강요하는 상태,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오길 원치 않으십니다. 묵시록의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주면 내가 들어가리라.” 여기서 정말 제 마음을 울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 다시 말해 발로 차거나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문을 열어주겠니? 듣고 있니?”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머리와 마음 속에 바삐 오가는 것들, 염려와 계획들이 너무 많아서, 하느님이 우리 마음의 문에 노크하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결국, 지금 정말 제 마음을 깊이 건드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상처입기쉬움입니다. 강요하시지 못하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과연, 사랑하면 –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은 당장 아실 테지만 – 사람은 약해집니다.
사랑하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늘 깊은 상처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잘 머물면, 비로소 “하느님이신 사랑”(아우구스티누스)의 허약함과 상처가 내 몸에도 감염되어 흐르게 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느님께서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보통 소설 침묵을 하느님의 침묵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엔도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한 것은  <침묵>이 아니라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김승철, 흔적과 아픔의 문학(1), 기독교 사상 2015 3. 대한 기독교서회 189
 이 사실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엔도가 <침묵> 말미에 부록으로 남긴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이다. 이것은 그 일기가 옛날 일본 관공서의 문서 작성에서 사용되던 소로분으로 쓰여 졌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엔도가 왜 그 일기를 소설의 부록으로 삽입했는지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히로이시는 이를 신앙에 대한 글을 쓰라고 명령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볼 때 마치 페헤이라가 <현위록>을 써서 기독교가 잘못된 가르침임을 증명하도록 강요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드리고도 기독교가 오류임을 알리는 글을 쓰도록 명령받은 것으로 오독했다는 것이다.
 
그 일기를 보면 “오카다 산에몬은 도토노미카미님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에 대한 글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는 장이 나온다. 거기에 나오는 ‘오카다 산에몬’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로드리고 신부이다. 또한 그 일기에는 기치지로도 여전히 기리시단 신앙을 갖고 있다고 쓰여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는 메달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관리인으로부터 그것이 로드리고에게서 받은 것인지 추궁받았지만 그는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에둘러했다. 약하고 비굴했던 그가 어느새 강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책 20


어떻게 그는 약자에서 강자로 변화되었을까 바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준 로드리고를 통해 약한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 남긴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흔적의 의미

“우리의 인생을 단 한번이라고 스쳐 지나간 건 거기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만약 신이 정말 있다면 신은 그런 흔적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닐까”(<내가 버린 여자> 중에서)
-예수의 몸에 남은 흔적 (성흔)
-후미에를 밟은 사람들이 남긴 검은 발자국
-페레이라의 귀에 뚫린 고문자국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고문당한 흔적)
-로드리고의 흔적
“나는 전향하였다. 그러나 내가 신앙을 버린 게 아님을 당신은 아신다.
바로 그 흔적이 <기리스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에 드러난다.
“가령 그분이 침묵하고 계셨더라도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 인생에는 어떤 흔적이 있는가? 그 흔적 속에 숨어계신 신이 나를 구원하신다.

**영화 <사일런스>는 로드리고 신부가 죽은 후 손에 갖고 있던 십자가가 나온다. 감독이 <기리시탄 관리인의 일기> 내용까지 충실히 살렸다.

2. 성경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지혜

1. 바오로
사도 바오로는 약함의 역설을 통해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를 알려준 사도다.  허약함을 잘 드러난 곳이 1코린 1-2장과 2코린 10-13장이다. 오직 바오로만이 긍정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약함’의 역설逆說을 통해 하느님의 ‘강함’을  적절하게 풀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를 ‘허약함의 사도’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1 27-28에서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건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사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뭔가 여기에 영적인 해석을 하거나 이를 에둘러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 아무도 이것을 진정으로 믿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 가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힘세고 강한 것 돈많은 것 등을 추구한다. 하여 이와 역행하는 가치들을 선뜻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신 게 아닐까?

 바오로가 터득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없는 것’을 선택하셨다. (1코린 1,27-28).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구세사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한결같은 원칙이다.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 지혜와 힘이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 형벌 자체는 어떤 ‘우리’에도 소속되지 못하게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의 지혜 하느님의 지혜 바오로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약해졌을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마저 내려놓을 때 비로서 그 분의 복음을 알아듣게 된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 정체성에 몰두하는 우리자신을  비우고 잃을 때...
-조금씩 나이 들어 갈수록 스스로의 한계와 약함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큰 병이나 사고 등을 겪으면 도대체 자기의 힘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절실히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기 “살 속의 가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알아듣게 되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허약함’의 신비는 복음의 핵심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성공의 체험보다 실패의 체험, 빛의 체험보다 어둠의 체험, 정상의 체험보다 바닥의 체험을 해본 자만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신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지혜, 예수의 지혜는 약한 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지혜를 진정 믿고 살았던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장 바니에이다.
그는 1964년 발달 장애인을 위한 라르쉬라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자신이 뭔가를 계획하고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는 장애인들과 함께 전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들은 대개 약한 이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패배감 불행 무능 한계 나약함 추함 고통이 아니던가?
그러나 바니에는 약한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나의 자아를 실현하도록 도와주었고
나의 인간성을 조금씩 드러내 보여주었다.
또한 그들은 내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을 일깨우는 우정과 공감의 세계로 날 이끌어주었다.
....그들은 내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건 존재 관계이고 사랑임을 가르쳤다.” 장바니에 항상 너와 함께 278
 
바니에는 장애인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상처받은 아이를 발견했고 우리 모두 내면 어딘가에 그런 아이가 숨어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 아이는 오랜 세월 많은 장벽에 갇혀 소외되어 이제 거의 잊힌 아이다. 바니에는 장애인들을 통해 자신의 심층적 자아를 둘러싸고 찬찬히 구축되어 있던 방어벽이 서서히 허물어짐을 깨달았다. 장바니에 항상 너와 함께 279
 

마태 11 25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2. 베드로 1) 반석과 사탄 사이
어느 날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마태 16,16). 스승을 향한 베드로의 이런 고백에 화답이라도 하시듯, 주님께서는 그를 두고 이렇게 고백해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그러자 예수께서 많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 되살아나실 것을 밝히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런일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말린다. 그러자 그 직전에 그를 두고 ‘반석’이라 불러주셨던 주님께서 이제 그를 ‘사탄’이라 호명하십니다(마태 16,21-23 참조).


1) 호언장담과 세 번의 부인

베드로의 허약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때는 세 번에 걸쳐 주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밤입니다. 그는 분명 주님을 안다고, 그것도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호언장담하던 그가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다. 도대체 한 사람 속에 있는 이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가 안다고 한 그 ‘앎’은 얼마나 뿌리와 실체가 없는 것이었는지, 그의 부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무지(無知)가 탄로난 그 극심한 어둠의 한 복판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을 만납니다.
루카는 바로 그 순간을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 보셨다”(루카 22,61).

과연 주님께서 말없는 눈길을 통해 무슨 말씀을 베드로에게 건네셨을까요?
 많은 경우 입으로보다 눈으로 우리는 더 중요한 말을 건네곤 한다.

드멜로 신부는 그 순간 눈빛으로 전하신 말씀은 “얘, 괜찮아!” 라고 해석한다.
제 아무리 크고 끔찍한 죄라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로막을 정도로 힘이 센 건 없다.
 “네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게 너를 향한 나의 사랑과 우정과 신뢰를 파괴하지는 못한단다. 지금 내가 네게 바라는 꼭 한 가지는, 네가 바로 그것을 믿어주는 것이야.”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끊임없이 해주시는 어처구니없도록 놀라운 자비의 한말씀, 곧 “얘, 괜찮아!”가 아닌가!

성경은 베드로가 그 다음 순간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는 기록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 울음은, 옛날 ‘상등통회(上等痛悔)’에서 솟는 것입니다.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단순한 죄책감에서 솟는 반응과는 다르다.
베드로는 지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고 그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자)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는(마태 5,4)
베드로는 바로 그 참된 행복(眞福)의 은총을 누렸던 것이다.


3) 세 번 부인하던 밤의 기억이 필요한 이유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찾아와 물으신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5-17)하고 물으십니다.
“그 밤에 세 번 당신을 부인했기로서니, 이 새벽에 당연한 고백을 세 번 시키며 무안을 주신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정녕 베드로에게 기억시켜주고 싶으셨던 것이 과연 그 밤에 그가 지었던 죄, 그가 겪었던 비참함일까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달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정작 기억시켜주고 싶으셨던 것은 그 밤에 그가 체험했던 하느님의 자비였다는 것입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죄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피선되신 직후 제일 먼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셨다.
이는 그저  의무적으로 내뱉은 ‘영혼없는’ 대답이 아님을 그 후 교종께서 하신 대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 예수회원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는 교종께 묻습니다. “(인간) 호르헤 베르골료는 누구입니까?” 교종께서는 잠시 침묵하셨고, 조금 지나 이렇게 대답하신다. “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가장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하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정말로 저는 죄인입니다”
교종의 좌우명이 “불쌍히 보시고 부르셨다(miserando atque eligendo)”란 사실도 이를 증언합니다.

4) 성모님

<성모찬가(Magnificat)>를 보면 성모님께서도 자기 부르심의 신비를 이 비슷하게 알아들으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46-56/마니피캇)’

성모님 기쁨의 유일한 이유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루카 1,48)
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 아시는 그분이 우리의 비천함을 보시고 구해주셨다. 우리가 그분의 은총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비천함(tapeinosis)’, 곧 ‘보잘것없음’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 마음이 측은지심으로 미어지고 애가 끊어지시기 때문입니다.

3. <늙어감>

나이가 들수록 나 자신의 육신이 약해진다. 이렇듯 육신이 약해지면 자연히 마음도 약해진다. 이러한 나이들어감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 인정하되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약함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을 만나자. 아니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자.
나이를 먹는다는 것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약해진다는 건 다른 말로 부드러워진다는 것이고 그건 도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그만큼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강한 분이 아니라 약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시선은 늘 약자에게 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동전 한 닢을 넣은 과부, 18년간 하혈병 앓은 여인, 어린이, 나병환자, 연못가의 앉은뱅이
아들 잃은 과부
이렇듯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만난 많은 사람들은 강자보다 약자들이 훨씬 많다.
우리가 약하다면 그만큼 하느님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은 약자들에 대해 끝없는 관심과 사랑을 지니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




<노자가 말한 도>

 성경에서 만나는 허약한 하느님을 통해 우리는 동양의 영성 동양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노자가 말한 도의 속성은 물 어린아이 부드러움 어머니 등이다.
공통점은 모두가 약하다는 것이다.

노자56장 : 티끌과 하나되기(和光同塵)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말하지 않고 
 知者不言 [知之者弗言]
(그것을) 말 잘하는 이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言者不知 [言之者弗知]
 
(그것을 아는 이는)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는다 
 塞其兌 閉其門 (색기태, 폐기문)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킨 것을 풀고 
 挫其銳 解其分 (좌기예, 해기분),
그 빛을 조화시키고 세상의 티끌과 하나가 된다(어우러진다) 
 和其光 同其塵 
이를 일러 현묘한 하나됨이라고 한다  是謂玄同 
그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故 
(그와) 가까워질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고 
 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그를)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고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그를)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그러므로 하늘 아래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故爲天下貴 

성인은 날카롭기보다 부드럽고 튀어나기보다 남과 조화를 이루며 조용하게 잠겨있어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엉켜서 풀기어려운 일들을 지혜롭게 풀어가고 이 세상이 더럽다고 떠나기보다 그 오염된 물속에 함께 살면서 서서히 정화되도록 이끌어간다.
성인은 일을 하면서도 내적으로 자유로워서 어떤 권력이나 재력으로도 그를 유혹하거나 해칠수 없다. 김승혜 노자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영성생활 260


<노자의 화광동진 和光同塵>은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 있다는 뜻으로, 자기의 뛰어난 지덕을 나타내지 않고 세속을 따름을 뜻한다.
깨달음의 빛은 일반 속세의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 눈부셔서 처다볼 수조차 없다.
그런 깨달은 이가 빛을 누그러뜨려 속세의 사람과 함께하여 속세의 사람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이 화광동진이다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 동거”하라는 和光同塵은 빛과 먼지의 동거는 빛을 사랑하고 먼지를 미워하는 애증심을 발산시켰을 때 가능하다.
미워하는 사람을 더 미워하면 상대방의 증오심은 더 커진다.
애증심은 그게 누구와의 관계이든, 어떤 무엇과의 관계이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낳기 마련이다. 화광동진은 애증심을 내려놓을 때 가능하리라

선불교 3조 승찬은 <신심명>에서 ‘애증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훤하게 명백해진다.(但莫憎愛 洞然明白)”
사랑함에 대한 집착과 미워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도는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도 동거하는 화광동진이 가능하리라.
빛만을 좋아하고 먼지는 더럽다고 버리는 택일이 아니라, 빛과 먼지와 함께 동거하는 삶의 자세야말로 성인의 삶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여길보는 화광동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단다.
“빛은 먼지 밖에선 그 빛이 밝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건 빛은 먼지와 화합하여  먼지와 구별되지 않는 까닭이다. 먼지는 빛과 동거할 때  먼지의 어둠이 사라지니 빛과 동거함으로써 그 차이가 사라진다.” 이처럼 빛은 먼지의 반사없이 그 빛의 밝음이 나타나지 않고 먼지도 빛 안에서는 어둡지 않다. 이와 같이 빛의 밝음과 먼지의 어둠이 서로 별개로 존재치 않고 상호 차연의 관계를 이뤄주는 것이 바로 도의 세상이다. 김형효, 같은 책, 95쪽. 
 

그래서 빛의 밝음은 먼지의 어둠과 화합하고 먼지의 어둠은 빛의 밝음과 동거한다고 노자가 말했나 보다. 도는 티끌인 세상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티끌 모습이 곧 道의 顯現이라니 우린 과연 티끌 속에서 빛을 만난 적이 있는가?

2) 미명(노자 36장)

노자 36장에 미명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將欲歙之 必固(古)張之
 將欲弱之 必固(古)強之
 將欲廢之 必固(古)興之 
 將欲奪之 必固(古)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強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장자 오므리고 싶으면 반드시 그것을 펴주고, 장차 약하게 하고 싶으면 그걸 강하게 만들어준다. 장차 없애고 싶으면 반드시 그걸 일으켜 세우고 장차 그걸 빼앗고 싶으면 반드시 그것을 준다. 이를 일컬어 미명(微明)이라 한다.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김형효 286쪽
 
움추림 약함 거둠 이것을 일러 미라하고 펼쳐짐 강함 창성함을 일러 명이라 함

"장욕흡지將欲歙之에 필고장지必固張之하고" 거두어들이고자 할 적에는 반드시 베풀어야 하고,
 "장욕약지將欲弱之에 필고강지必固强之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강하게 해야 하고,
 "장욕폐지將欲廢之에 필고흥지必固興之하고" 장차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일으켜세워야 하고,
"장욕탈지將欲奪之에 필고여지必固與之하니" 장차 빼앗고자 하면 반드시 줘야 하나니, "
시위미명是謂微明이라" 이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빛微明'이라고 한다,

**노자의 핵심표현은 무위자연이다.
그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의미는 존재의 이분법적 대비를 넘어서는 지혜를 터득할 때 가능하다.  부드럽고 약함 즉 柔弱(유약) 과 굳세고 굳셈 즉, 剛强(강강)
柔弱은 물처럼, 자연에 잘 순응하는 반면, 剛强은 무위함에 반하는 유위함이 크다.
그러므로 柔弱함이 剛强에 비해 자연에 잘 순응하는 것이다.
자연에 보다 더 잘 순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처럼, 나무와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하듯이, 나라와 백성은 상호 얽힘으로 존재하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3. 습명

 노자 27장에 나오는 <습명>에 대해 살펴보자.--습명은 빛을 가린다. 총명함을 가린다
는 의미로 사용

“성인은 사람들을 잘 도우니 버리는 사람이 없다.
그는 물건을 잘 이용하니 버리는 것이 없다.
이것을 밝은 빛을 가림(습명)이라 한다.“
못된 사람이 있다 한들 그들을 왜 버리는가.
 덕으로 미움을 갚으라.
.습은 가린다는 뜻이 있다. 옥편에 습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도포를 입는 것 곧 웃옷을 하나 더 걸치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몸을 가리는 것이다.  노자에서 빛은 있되 그 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누그러뜨리고 그 빛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 (52장)이 노자의 태도다.

습명은 총명함을 가린다는 뜻이다.
 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 빛을 안으로 수렴하라는 것이다.


<襲明과 微明의 의미>

36장에는 微明이, 27장에 습명(襲明)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노자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微明의 微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동기나 목적이 아직 잘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반면, 明은 그걸 미리 꿰뜷어 아는 것을 의미한다. 김충열 228
 김형효는 미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미명은 새벽 동틀 무렵의 희미한 빛을 의미하여 밝음과 어둠의 중간지대를 상징한다.”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294

 즉 미명은 약함과 강함의 이중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틀 새벽녘이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듯이 참된 道는 이원성으로 나누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명에 대한 해석은 27장에 나오는 습명과도 일맥상통한다.
습명의 ‘습자’는 ‘옷을 껴입다’ 혹은 ‘-을 싼다’의 의미를 지녀 습명은 ‘밝음을 싼다’로 해석가능하다. 김형효는 습명을 밝음의 광도를 줄이기 위해 옷을 껴입듯 그렇게 감싸는 뜻으로 해석한다.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289
 밝음을 천으로 감싸면 밝음의 광도가 줄어들어 밝음과 어둠이 공존케 된다. 이러한 명암의 이중성이 도가 지닌 성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자가 습명과 미명을 통해 도는 가림없이 모두를 포용함을 말하고자 한다.
습명이나 미명의 의미와 유사한 표현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들 수 있다. 도덕경 4장 참조. 김형효, 사유하는 도덕경, 88쪽참조
 화광동진은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 동거”하라는 의미다. 빛과 먼지의 동거가 가능하려면 빛을 사랑하고 먼지를 미워하는 애증심을 먼저 발산시켜야 한다. 애증심은 그게 누구 혹은 어떤 무엇과의 관계이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낳기 마련이다. 선불교 3조 승찬은 <신심명>에서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훤하게 명백해진다.(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다. 빛만을 좋아하고 먼지는 더럽다고 버리는 택일이 아니라, 먼지와 함께 동거하는 삶의 자세를 노자는 지향한다. 빛은 먼지의 반사없이 그 빛의 밝음이 나타나지 않고 먼지도 빛 안에서는 어둡지 않다. 이와 같이 빛의 밝음과 먼지의 어둠이 서로 별개로 존재치 않고 상호 차연의 관계를 지님이 바로 도의 세상이다.  도는 티끌인 세상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티끌 안에 있다. 우린 과연 티끌 속에서 빛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외에도 연못이나 웅덩이라는 표현 역시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연못이나 웅덩이는 모든 것을 품어준다. 웅덩이에는 맑은 물과 탁한 물이 공존한다.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이 모두 웅덩이 속으로 흘러들어 혼융되어 있듯, 웅덩이와 같은 세상 속에서 선악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가 노자가 말한 성인의 태도다. 이런 웅덩이와 같은 마음이 바로 무위적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 보이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한다.
이런 무위적 태도는 일을 잘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공을 세워도 자기 것이라 집착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내 것이라 소유하지 않는다. 이런 성인의 모습을 노자 37장에서 우린 만날 수 있다.

노자27장 : 잘 가는 걸음은 자국을 남기지 않고

 第二十七章 曳明 (巧用) 
 잘 가는 걸음은 자국을 남기지 않고 
 善行 無轍跡 
잘 하는 말은 흠이 없고 
 善言 無瑕謫 
잘 하는 셈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善數 不用籌策 *1
잘된 잠금은 문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 수 없고 
 善閉 無關楗而不可開 
잘된 묶음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다 
 善結 無繩約而不可解 
 
이로써 성인은 
 是以聖人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常善救人 故無棄人 
항상 사물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常善救物 故無棄物 
이를 '빛을 가린 밝음' 또는 '은은한 밝음'이라 한다 
 是謂襲明 
본디 
 故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善人者 不善人之師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도우미이다 
 不善人者 善人之資 
 그 스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도우미를 아끼지 않는다면 
 不貴其師 不愛其資*2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해질 것이다 
 雖智大迷 
이를 일러 묘한 요체라고 한다 
 是謂要妙 [是謂眇要] 
* 1 :  가장 좋은 책략은 무책(꾀가 없음, 획책하지 않음)이다.
- 노자77장 :  이처럼 성인은 자신의 (천하를 구제하려는 어진) 덕행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 노자62장 :  도라는 것은 ~ 선한 사람의 보배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사람이 선하지 않다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 노자49장 :  나는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나는) 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노자36장 :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부풀렸음이요
 第三十六章 微明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부풀렸음이고 
 將欲歙之 必固(古)張之 *1~ 
장차 약화시키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강화시켰음이고 
 將欲弱之 必固(古)強之
장차 폐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흥하게 했음이고 
 將欲廢之 必固(古)興之 
장차 빼앗으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주었음이다 
 將欲奪之 必固(古)與之   
이(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是謂微明 
 부드럽고 여린 것이 억세고 굳센 것을 이긴다  柔弱勝剛強 
 물고기가 못에서 나와서는 안된다 
 魚不可脫於淵 
나라의 이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國之利器 不可以示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