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2일 종교강좌
맹자, 순자 읽기 - 인성의 문제
종교강좌의 주제를 동아시아 영성이라 붙였는데, 우린 왜 지금 이 시대에 왜 공자, 맹자, 순자인가? 기원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상을 왜 지금 되돌아보아야 하는가?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은 바로 덕(德)입니다. 덕으로 세상이 다스려지기를 원했죠. 이것을 덕치(德治)라고 이야기하는데, 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꿈꿨죠. 그러나 어땠나요? 잘 안 됐죠. 공자도 실패했고, 맹자도 성공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사실은 실패한 사람들인 것인데, 우리가 왜 돌아보는 것일까요? 그들이 처해있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주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아주 어지러웠던 세상에서 공,맹,순이 태어났고,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다시 사회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다른 것은 급성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경제적 도약을 이루어냈습니다. 몸도 급성장하게 되면 부조화가 일어나듯이 급성장, 경제라는 한쪽으로만 집중적으로 급성장 하면서 사회전반에 일어나는 여러 부조화들이 지금 우리가 안팎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아픔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에요. 그게 실천이 안 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세월호도 그렇고요. 선장이 매뉴얼을 다 알았음에도 매뉴얼대로 실천되지 못했어요. 세월호 선장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정치 지도자부터 시작해서, 사실 또 그들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시민들, 사회 안에서도 조금만 준법정신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면 법망을 피해서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색적 이기주의’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왜 우리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원색적 이기주의로 변했는가, 원래 그랬는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원색적 이기주의의 삶의 형태를 갖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살게 하는가. 이런 사태를 접하면서 저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되돌아봄에 원천적인 부분이 바로 우리 인성, 본성의 문제입니다. 오늘 맹자와 순자를 통해서 우리의 인성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찰하고 바꿀 수 있을지를 함께 고찰해보려고 합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자본주의라는 가치관이 서구로부터 한국으로,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죠. 이 자본주의 가치관의 근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많은 사상가들 중에서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입를 예로 들어서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존 로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천성을 착하지만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건 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의 총량을 늘려가면 사회의 조화를 개선될 것이다.” 여러분이 들을 때는 이게 별로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아퀴나스에 이르는 고대와 중세까지는 부가 행복의 걸림돌이 된다고 가르쳐왔어요. 그러나 근대에 오면서 부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로크만 그런 사상을 펼친 게 아니라, 아담 스미스에게서도 비슷한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스미스는 이기심을 덕이라고 봤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 그래서 각 개개인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이들이 각자의 이익을 챙겨서 윈윈(Win-win)하게 되면 경제가 발전하게 되고 경제의 발전은 우리의 행복으로 이끌어 나간다는 사유를 <국부론>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이죠. 각자가 부를 축적하면 사회의 부가 된다는 사유방식, 경제논리는 도덕성을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갖고 오는 기계적인 패러다임은 우리의 이기심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행복으로 이끌어간다고 이야기 하지만 결국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가 부를 축적하게 하는 것은 맞지만 그 부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각자의 이익을 조정할 필요가 생겨납니다. 이것을 조정하는 게 바로 법입니다. 법으로 규제하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법치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법이 이 사회의 필요조건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법이 이 사회의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법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이죠.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 사회에 축적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해결법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하는 것은 예의 문제와 도덕의 문제입니다. 동아시아 철학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와 도덕이 바닥으로 떨어진 사회에서 이것들의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5,6월동안 살펴본 공자는 도덕의 핵심은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자기 인격을 수양하고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인간답게 사는 기본이죠. 공자의 사유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인간답게 사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자기를 닦고 남의 삶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수기도, 치인도 안되는 것이죠. 도덕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인간다워지는 것 이것을 공자는 한마디로 인(仁)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인(仁)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공자도 이야기합니다. 공자는 인한 인격자를 ‘군자’라고 얘기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먼저 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배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배움에서 그치면 안 되고 배움이 자기 성찰이 되어야 합니다. 학(學)과 사(思). 학은 배움에 해당하고, 사는 단순히 생각하고 사고한다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학과 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공자는 습(習)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 보면 하얀 백(白)이 있죠. 하얀 새에요. 하얀새는 뭘까요? 아직 어린 새에요. 어린 새가 날개짓(羽)을 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습(習)입니다. 반복해서 배우고 성찰하고, 이렇게 학과 사가 반복되어서 내면화가 되고 습관이 되고 자기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차원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학습은 배워서 익혀서 자기 것이 되어 결국 나는 것, 그게 진정한 학습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누구나 인(仁)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인(仁)해질 수 있다는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뭘까요. 내가 인(仁)해질 수 있는 요소, 씨앗을 내가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공자를 계승한 맹자는 사유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본성 안에 바로 인 해질 수 있는 씨앗이 있구나. 이 씨앗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해낸 사람이 바로 맹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인의예지의 사단, 이것이 네 가지의 단서, 즉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을 선하게 보는 것이고, 성선설이죠. 그렇다면 순자는? 순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순자는 맹자와 다른 차원에서 본성을 바라봅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라고 봅니다. 어떤 쪽이 현대에 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까요? 맹자보다는 순자겠지요. 순자의 경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욕망을 인정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가 바로 순자의 사상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악설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인데, 성악설은 순자 자신의 사유는 아니고 그의 후학들에 의해서 성악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순자 자신은 정악(情惡)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요.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가 성악설을 이야기했고, 정악설(情惡說)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와 순자가 상당히 다르게 본성을 바라보고 있고, 또 그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내놓는 것도 다릅니다. 양자를 비교하면서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맹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맹자는 생몰이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재밌는 것은 B.C.800에서 서기 200년까지 역사를 보게 되면 성인들이 한꺼번에 대거 출현하는 시기에요. 예수, 붓다, 공자, 맹자 등. 이것을 야스퍼스는 기축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의 축을 이루는 시대라는 것이죠. 이 까닭을 기축시대를 전후하여 교통수단이 발달하게 되죠. 실크로드 등을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다 통하게 되면서 사유를 공유하는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눈을 뜨게 되어서 많은 사유가들이 대거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맹자도 그 기축시대의 멤버 중 하나입니다. 맹자사상의 특징은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전국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았습니다.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안에 그 힘이 있고 원동력이 있다라고 봤습니다. 이렇게 맹자가 바라보게 된 배경에는 당시 춘추말기에 접어들면서 씨족집단이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해체되면서 사회 전체가 개인의 집합체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개인이라는 것이 사유의 중심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죠. 맹자 이전에 묵자, 양주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 개개인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생애를 잠깐 보면 공자 사후 100년경에 활동했던 사람이고요. 그의 선조를 보게 되면 상당히 귀족 출신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가 맹자를 길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맹모삼천지교는 잘 아실 겁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갔던 이야기이죠. 맹자는 어렵게 어린 시절을 살았고 공자의 사상을 자기가 이어받는 계승자라는 강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백가라고 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상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는데, 유가는 맹자 당시에 빛을 보지 못했고 조금 기울어져가는 사상이었습니다. 부각되었던 사상은 묵가나 양주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맹자에 의해서 공자의 사상이 부각되었죠. 맹자가 당시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묵가와 양주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나왔는데요. 어떤 지점에서 비판하고 공자를 재해석 했는지 보겠습니다.
맹자 등문공 하 9에 보면 ““양주와 묵자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양주 아니면 묵자에게로 돌아간다.” 라고 나와있어요. 양주는 각 개인의 본성과 욕구를 굉장히 강조했어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굉장히 이기주의적인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펼쳤습니다. 나를 챙기고 나서 남을 챙겨야지 그렇지 않으면서 남의 행복을 찾는 것은 맞지 않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렇게 되니까 결국 이 세상에 임금도 부정하고 사회공동체 내에서 책임도 부정하게 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양주의 자아중심적 사상에 대해 맹자는 강하게 비판을 합니다. 자아, 나라는 것은 닫혀있는 존재가 아니고, 열려있는 존재라는 것, 관계 속에 있는 나라는 것이 양주사상을 비판하는 맹자의 핵심입니다. 묵자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묵자는 왜 이름에 묵이 붙었을까, 했을 때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죄인에게 주홍글씨처럼 죄인의 이마에다 먹으로 표시를 했다고 해요. 묵형이라고 하는데, 묵자도 그것이 있었다고 해요. 묵자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 어떤 종교, 정치 결사대가 결성이 됐어요. 수도 단체처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강력한 종교적이고도 정치적인, 그러면서도 학술적인 단체였죠. 그의 사상 안에서 허례허식을 배격하는 등 하층민 중심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묵자는 예수 사상과 아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묵자와 예수를 비교한 논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묵자는 양주와 완전히 반대에요. 자신을 헌신적으로 희생하고 사회전체를 위해서 자기를 내놓기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묵자는 유가를 비판을 하게 됩니다. 묵자의 입장에서 유가는 별애(別愛), 묵자 자신은 겸애(兼愛), 겸상애(兼相愛)라고 이야기합니다. 두루 사랑하는 것이죠. 유가 사상은 가까운 사람부터, 가족, 형제에서부터 출발하죠. 가족 이것을 멀리하고 남을 가까이하는 것은 유가사상이 아니에요. 묵자는 아니에요. 나의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에요.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봤어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강생: 내 아버지도 소중하듯이 다른 아버지도 소중하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묵자는 내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의 구분이 없어져야 한다고 봤어요. 그러다보니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孝)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죠. 유가의 윤리도덕의 기본이 효와 충에서 출발하는데 그게 사라지게 된 것이죠. 공자는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합니다. 아주 곧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을 때, 곧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가 물론 잘못했지만 아버지를 아들이 그래도 보필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공자에게 있어 곧다는 것은 효를 벗어나서는 곧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심포지움에서 제가 재미있게 들었던 것이 있어요. 탄자렐라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보편적인 사랑이 지닌 함정.” 보편적인 사람을 말할 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함정이 있다. 아무도 제대로, 구체적으로 사랑하지 못할 가능성, 그런 위험성이 내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너의 삶의 현장에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해라. 이게 유가 사상의 특징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맹자는 묵자를 비판합니다. 아비 없는(無父) 상태가 생겨나면 효가 제대로 설 수가 없죠. 맹자의 사상 안에 전체를 위하자는, 그래서 혈연관계를 부정하는 묵자도 비판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자며 군신관계를 부정하는 양주 사상을 다 비판하면서 다시 자신의 사상을 펼치게 됩니다.
맹자사상의 핵심은 그의 인성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내재성이 맹자에 그대로 계승된 것입니다. 맹자 제 1장에 보게 되면 양혜왕과 맹자의 대화가 나오고 있어요. 당시가 춘추전국시대니까 나라마다 부국장정책을 내놓았겠죠. 맹자는 “군주는 왜 이익만 말합니까.”라고 충고합니다. 당신이 만약에 이익만 생각한다면, 당신들의 신하도 다 똑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백성들도 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니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맹자가 가장 경계한 것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어요. 맹자에게 있어서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리(利)입니다.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될 때, 선의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우리의 본래성이 본래 그렇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맹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래성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우리의 본래성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으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참을 수 없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죠. 아이가 우물에 기어가 빠지려고 하면 누구나 다 가서 아이를 잡겠죠. 내가 저 아이를 구하면 부모가 고맙다고 말하고, 상을 받을 것이고 이런 생각하지 않고 바로 가서 행동하잖아요. 그것은 내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일어나는 행동입니다. 누구나 다 그래요. 누구나 다 그런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죠.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걸 차마 볼 수 없는 그 마음. 그래서 맹자는 불인인지심에 근거해서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올 빛은 인간의 내면 안에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본성을 맹자는 천성(天性),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성이라고 합니다. 공자 사상에서는 성(性)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요. 성이라는 표현은 맹자에게서 시작되었죠. 공자는 그럼 뭐라고 했을까요. 바로 천명(天命)입니다.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다고 썼어요. 이것이 맹자에 와서 하늘로부터 내가 부여받은 본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원시 유가의 사상이죠. 천명(天命)과 천성(天性). 이것이 신유학, 주자학에 오게 되면 천리(天理)가 됩니다. 유가 사상은 천(天)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가 본성을 제대로 회복하게 되면 어지러웠던 사회질서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의 회복입니다. 결국 예를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에서 사단(四端)을 볼게요. 맹자의 책을 읽게 되면 왕들과의 대화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제선왕과 맹자가 대화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를 끌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당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흔종의식이라고 불렀는데) 도살장에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를 제선왕이 보게 됐어요. 소가 자기가 도살장에 끌려간다는 것을 안다고 해요. 왕이 소를 보니까 벌벌 떨면서 눈물짓는 모습이에요. 왕이 그 신하에게 소를 놓아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신하가 “그러면 제사를 어떻게 합니까, 제사를 지내지 말까요?” 물으니, “제사는 지내야지, 소 대신에 양을 써라”라고 했어요. 그래서 양을 잡아다 제사를 지냈어요. 그랬더니 소문이 파다하게 났어요. 안 좋은 소문이죠. 맹자가 이 얘기를 들었죠. 그리고서 제선왕이 맹자에게 내가 백성들을 잘 통치를 할 수 있을까 질문을 했을 때,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예를 든 것입니다. 맹자는 ‘그렇다'고 답하며 그 이유로 ‘당신은 소를 보고 차마 소가 죽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 측은지심이면 당신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했죠. 그럼 양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양은 왕이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가에서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소는 보았고 관계가 이루어졌죠. 하지만 양은 아니에요. 바로 이 측은지심은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게 된 근거가 됩니다.
맹자는 “사람이 4가지 단서가 있는 것은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4단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다.”(공손추 상)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바로 불능(不能)과 불위(不爲)에요. 맹자 양혜왕 상 7에 보면 “어떤 이가 왕에게 아뢰기를 ‘저는 100鈞(720kg)을 들 수는 있지만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며, 눈의 시력이 가을철 짐승의 미세한 털끝을 살필 수는 있지만 수레에 실린 섶나무를 보지 못합니다.’고 한다면 왕은 그 말을 인정하시겠습니까? - 아니요, 인정하지 못합니다.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며, 수레에 실린 섶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밝은 눈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백성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께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시는 것은 하지 않는 것(不爲)이지 할 수 없는 것(不能)은 아닙니다.” 불능과 불위가 어떤 차이를 갖는지 분명하게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사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발현되지 않는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맹자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성찰해 봐야 할 좋은 성찰거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단이 주어졌는데, 왜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까 라는 질문이 생겨나는데요, 맹자는 이에 대해 수양론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생각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유가에서는 학(學) 안에 사(思)가 들어가 있습니다.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생각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학(學)과 사(思)가 늘 같이 겸해야 합니다. 이것을 반복하는 습(習)이 이루어졌을 때 덕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이 어지러운 까닭은 덕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결국 학습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배우기만 하고 성찰하지 않은 사람, 혹은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 뿐인 거죠. 이 두 가지를 겸해서 습(習)을 했을 때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덕을 통해서 어지러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맹자는 말합니다.
맹자는 구체적으로 수양론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렸고, 이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구방심(求放心)이라고 해요.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 맹자는 부동심과 호연지기를 이야기합니다. 부동심(不動心),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지요. 구방심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맹자가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연지기에 대해서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에요. 맹자는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방법으로 과욕(寡慾),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우화가 하나 있는데, 우산지목(牛山之木)입니다. 우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산의 나무를 벌목을 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사이에 우산은 민둥산이 되어버렸죠. 맹자는 이 우화를 들고나오면서, 원래 우산이 민둥산이었는가? 아니죠. 사람들이 벌목을 하면서 민둥산이 되었고, 인간의 본성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도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자꾸 베어내는 것이에요. 이 베어내는 것이 욕망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진심 상 35에 보면 “음을 배양함에 있어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욕망이 적으면 본성을 보존치 않고 있어도 과실이 적다. 그 사람됨이 욕망이 많으면 본심을 보존해도 실행함이 적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소욕지족(少慾知足)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것은 그리스도교와도 맞닿는 것입니다. 소욕지족, 적게 가짐으로써 만족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구방심(求放心)의 과욕, 부동심은 결국 우리 마음의 바깥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는 40세를 불혹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에서 나에게 다가오더라도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하죠. 이것과 부동심은 상당히 일맥상통합니다. 맹자는 우리 안에 이미 선의 싹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사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고도 합니다. 좋은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良知) 그리고 능력도 있어요.(良能) 그런데 이것은 그냥 씨앗일 뿐이죠. 씨앗에게 물을 줘야 발아가 되잖아요. 물을 주지 않으면 그냥 씨앗으로 있는 것이죠. 이 씨앗을 잘 키워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맹자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소체(小體)와 대체(大體)라고 불렀습니다. 몸을 따르면 욕망을 따르는 것이죠. 소체를 따르게 되면 소인이 되고, 대체를 따르게 되면 대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에는 유혹이 너무 많죠. 눈을 뜨자마자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 많아요.
호연지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것은 기(氣)에요. 호연(浩然)이라는 것은 “물이 광대하게 흐르는 모습을 형용하는 것으로 마음이 활짝 열려서 모든 것이 명확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활짝 열려있는 경지이죠. 이 경지가 쉬운 경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기라는 표현이 재미있어요. 맹자는 마음, 심(心)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심(心)만이 아니라 기(氣)에 대한 것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심(心)과 기(氣)의 관계를 우리는 호연지기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심을 기르는 것을 양심(養心)이라고 하고, 기를 키우는 것을 양기(養氣)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언제 기가 우리 안에서 커지느냐. 맹자는 양기는 양심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의(集義)라는 것이 나옵니다. 의(義)를 모은다는 것인데, 공자 사상에서 인이 중요했다면 맹자에서는 의(義)에요. 내 삶의 자리에서 작게 작게 의를 행할 때 의가 축적되고, 이렇게 집의가 이루어지면 덕을 쌓게 되고, 이것이 성인으로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성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일상에서 작은 의를 계속 축적해나갈 때, 그 의가 모아져서 덕을 받게 되고 성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공맹사상은 핵심은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데, 가까이있는 데서부터 먼 곳으로, 사회로 확산되어 나아가는 실천을 강조합니다.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을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고 하는데요, 이때 가까운 바운더리를 친친(親親)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이지요, 여기서 경장(敬長), 다른 어른으로 점진적으로 확장되어가야 한다고 맹자는 말합니다. 이 메세지는 우리로 하여금 가족 공동체에서 친친과 경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질문하도록 합니다. 맹자는 사회의 어지러운 길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성찰하고, 남과의 관계 안에서는 친친과 경장으로부터 의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선설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보편적인 사랑 이전에 구체적인 사랑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사랑, 고양된 사상이나 도덕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마 모질게 할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그러한 실천이 반복되어 의가 이루어지고, 바로 그 집의(集義)가 우리의 사회를 다시 회복시켜 나가간다는 것이 맹자가 주는 메세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순자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순자는 기원전 323년 조나라에서 출생했는데, 조나라는 춘추시대 진나라가 한, 위, 조로 삼분되었는데 그 중 하나입니다. 순자는 당시에 제나라로 유학을 갔는데, 제나라는 당시 학문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으로 직하학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에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인 곳이었고, 순자는 거기서 20년 동안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연마했으며 직하학궁의 수장을 3번 역임했습니다.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의 사상들을 종합해낸 아주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사상을 이은 사람으로 순자가 아닌 맹자를 듭니다. 그 이유는 그의 제자 중 법가 사상으로 나아갔던 한비자와 진시황의 재상으로 유명한 이사가 있는데, 이러한 제자들의 이질적 행동이 순자를 유가에서 이단자로 몰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맹으로 유가사상이 맥을 잇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순자는 성(性)을 맹자하고는 다르게 바라봤어요. 맹자는 굉장히 이상적이었다면 순자는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하고 보다 현실적으로 예를 실천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사상을 펼쳤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순자의 인성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순자 32편 중에서 성악설이 나오는 곳은 19번 나오는데, 모두 23편(성악편)에 나오고 있습니다. 순자 책의 1~22편까지는 순자가 쓴 것이 확실하나, 그 나머지는 그의 후학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바로 23편이 성악편이에요. 이 말은 곧 순자 자신이 성악(性惡)을 이야기 했다기 보다는, 순자의 후학들에 의해서 성악설이 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성악론에 보면, “맹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틀린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순자가 한 말로 이렇게 나옵니다. 바로 이어서 “인성은 악하다 그것이 선하게 나타나는 것은 후천적인 僞(작위)의 결과이다. 지금 이성을 보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好利(이익을 좋아함)한다. 이를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빚어지고 사양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한다. (성악 1)” 그래서 인성은 악하며 욕망을 갖고 있고, 선하게 되는 것은 후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순자는 본능적인 부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순자는 지(知)와 능(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맹자는 지와 능도 본성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순자에 오게 되면 이 지와 능은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안에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인 이것의 실천은 외부로부터 온다고 본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악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 순자가 바라보는 성에 대한 입장입니다. 순자편의 정명을 보게 되면, “정이 드러난 것에 대해 마음이 취사선택하는 것을 사려라고 한다. 마음이 사려한 뒤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인위라 한다. 사려를 거듭하고 훌륭하게 습관을 기른 다음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을 인위라 한다(正名)” 인간의 마음이 선택해서 생각을 통해서 행동하다는 것인데, 여기 사려라는 것에서 순자가 공자의 사상을 잇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려, 생각을 통해서 그것을 행위로 나타내는 것인 인위에요. 인위(人僞)라는 것은 사려를 거듭해서 습관을 기른 다음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배움이 아주 강조됩니다. 왜냐면 “배워서 행할 수 없고 노력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한다. 배워서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작위”이고 인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매워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성과 위는 서로 합쳐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성위지합(性僞之合)이에요. 지(知)와 능(能)을 합쳐서 위(僞)라고 해요. 내가 배우지 않고 갖고 있는 게 성(性)이에요. 이 성과 위가 합쳐지는 이것이 순자 성품론의 핵심입니다. 이 부분이 잘 나타나는 것이 순자 19편 예론편에 잘 성명되어 있습니다. “성이라는 것은 본래 시작이며 재료로서 소박한 것이다. 위는 문화와 이치가 융성해진 것이다. 성이 없으며 위가 더할 데가 없게 되고 위가 없으면 성은 스스로를 아름답게 할 수 없다. 성과 위가 합한 연후에야 성인의 이름이 이루어지고 천하를 통일시키는 공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합하여 만물이 생기고 음양이 접하여 변화가 일어나듯 성위가 결합되어야 천하가 다스려진다.” 지금 인위적인 노력을 위(僞)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지와 능을 통해서 성이 변화되는 거에요. 성위지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내 성(性)이 바뀌는 것이에요. 이것을 화성(化性)이라고 합니다. 성이 변화해서 위를 일으키는 것, 이것을 화성기위(化性起僞)라고 표현합니다. 지와 능을 통해서 성을 변화시키고 위를 일으켜서 사람의 도리인 예가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순자 사상의 절정은 예에 있어요. 오늘날 예는 조금 변질되어 있죠. 순자가 이야기하는 예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성이 변화되어서 위를 일으켜서 생겨난 것이죠. 바꿔 얘기하면 성이 변화되고 지와 능을 통해서, 앎과 행을 통해서. 배움과 사思)가 같이 이루어져서 지(批)가 되고 그것을 내가 실천하는 것이고, 실천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학습을 통해서 지와 능이 합쳐져서 도덕적인 행위가 가능하니, 이 도덕정 행위를 순자는 예라고 불렀습니다.
예론에 구체적인 예의 기원에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예는 어찌하여 생겼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욕망이 있다. 바라되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함에 한도가 없으면 다툼이 없을수 없고 다투면 어지러워진다. 선왕은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여 예의를 제정하여 분계를 정함으로써 사람의 욕망을 길러주고 사람의 구함을 대주어서 욕망이 그 대상이 되는 걸 무분별하게 추구하지 않고 또 욕망의 대상이 고갈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예가 생긴 까닭이다.” 번역이 조금 어려워서 다시 풀어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의 기원이 어디인가를 순자가 예론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욕망을 다 갖고 태어났다. 바라되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함에 한도가 없게 되면 다툼이 일어나죠.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세상은 어지러워집니다. 선왕(先王)은 이러한 사회의 어지러움을 없애기 위해 제정했으니 그것이 예이다. 다툼을 안 하도록 예를 통해서 분(分)한 것입니다. 분계를 정함으로서 사람의 욕망을 길러주고. 여기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기른다고 표현했다는 게 재밌는 부분인데요, 욕망을 긍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에 의해서 욕망을 기르고,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것입니다. 예가 하는 일은 욕망이 무분별하게 추구되지 않도록 욕망을 잘 절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맹자와 아주 다른 부분입니다. 욕망을 인정하면서 이 욕망이 잘 절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의 역할입니다. “욕망의 대상이 고갈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예가 생긴 까닭이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라는 것은 인간이 갖고 태어난 정을 잘 길러주기 위한 것이 예입니다. 그냥 방치하게 되면 악한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방치하지 않고 반복되는 학습, 그게 바로 지와 능이죠.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서 성위지합을 함으로써 예를 갖고 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죠.
수양론 부분에 이것에 대해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자가 의도적으로 공자사상을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공자 논어의 첫 권이 학이(學而)편이죠. 순자의 제 1편은 권학(勸學)입니다. 공자가 굉장히 학(學)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공자가 자기 아이덴티티를 이야기할 때, 뭐라고 이야기 하죠? 공자는 자기자신을 호학자(好學者)라고 했어요. 배운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단지 지적인 배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권학편, 학문을 권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순자 역시 맹자처럼 공자의 사상을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순자는 학습의 전통을 이었습니다. 권학편에 보게 되면 구체적인 수양의 과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배움이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가? 經을 암송하는데서 시작하여 禮를 읽는데서 끝난다....그러므로 교과과정을 배우는데서 끝이 있으나 그 내용(義)를 체득함에 있어 잠시도 그만둘 수 없다.” 그래서 경을 암송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예에서 끝난다는 것에서 경과 예의 상관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지적인 배움과 도덕적인 실천(예)을 권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뒷부분에 보면 배움이라는 것은 실천 했을 때 그 효능이 드러난다는 것을 순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실천되었을 때 비로소 그치는 것이다 (배워서 안 것을) 행할 때 밝게 이해되고 밝게 이해하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의 완성은 능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능의 작용은 축적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순자가 성인라고 얘기했을 때, 인간이 지와 능을 통해서 쌓아올렸을 때,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맹자와 순자의 비교하게 되면 차이가 있는 것은 맹자는 인과 지가 인간 내면 안에 있다고 봤다면, 순자는 인은 안에 있지만 지는 바깥에서 온다고 봅니다. 그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사상 안에서는 교육을 통한 후천적인 훈련이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학습과 더불어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예를 통해서 우리 본성을 교정할 수 있고, 이 성이 교정될 때 사회의 어지러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순자의 사상입니다.
순자의 예를 좀 더 보자면요, 사실 공자도 예를 강조하는데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공자에게 있어서 예는 삶의 규범이에요.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예에 따라서 행해져야 합니다. 이런 예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예와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는 정해져 있는 도덕률, 딱딱하고 정해진 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순자가 이야기하는 예는 우리의 삶의 규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삶의 어떤 방향성을 예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맹자가 공자의 인을 의로 재해석 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순자는 인을 예로 재해석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순자에서 공자의 인은 구체적인 내 삶의 자리에서 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의 의미를 넘어서 있죠. 내 마음 안에 있는 인의 구체화되어서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의라는 이미지에 조금 변화가 올 필요가 있겠습니다.
순자가 맹자를 비판을 하게 되는데요, 맹자의 사상은 순자가 잇지 않고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당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재해석 했는데 그것이 이제 핵심이 바로 예의 문제였습니다. 예가 구체적으로 순자에 있어서는 바깥에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또 순자에 있어서 예는 선험적인, 선왕(先王)의 중요하지만 지금 왕도 중시합니다. 이 부분이 맹자의 사유와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순자가 당시에는 상당히 각광을 받았ㄴ고, 주류 유학으로서 공인이 되었었는데 한나라가 출현하면서 급격하게 순자는 이단으로 취급받고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이은 정통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순자의 사유 안에 그의 제자인 한비자의 법가사상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있기 때문이었죠. 법가 사상은 핵심은 성악설, 본성은 악하다라는 것이에요.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악을 다스리려면 군왕이 내리는 법칙,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비자에게 있어서 법은 강제성을 띱니다. 바로 이 사유가 진나라를 통일시키는 이데올로기였죠.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넘어가면서 진나라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한비자와 순자를 이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맹자와 순자를 비교를 했는데요, 순자를 바라보며서 순자가 말하려고 하는 메세지는 예에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순자가 위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모습, 분위기는 바로 법치사회라고 일컫는 것이기에 법가사상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법치사회 안에서 결국 이 법으로 모든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법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고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를 되묻게 됩니다. 여기서 사회라는 것은 전체 사회일 수도 있고 가족공동체일 수도 있죠. 법, 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바로 예와 도덕에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우리의 본성쪽에 초점을 맞춰서 씨앗을 다시 발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고, 순자는 우리는 욕망을 갖고 있고 이 욕망을 어떻게 컨트롤 할 것인가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유와 서양의 사유의 큰 차이는 서구적 사유방식은 개인이 중시되고 개인의 욕망이 굉장히 중시되죠. 서구 사상에서 욕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사유입니다. 오늘날 현대 욕망론 안에서 부각되는 사람은 정신분석가에요. 자크 라캉이라고 프로이드 계열에 있는 사람인데요, 철학적인 사유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넘어가 욕망론을 받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라캉은 욕망을 없앨 것이 아니라 욕망의 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순자하고 맥이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리스도교 안에서 억제, 희생 이런 것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라캉은 욕망의 질을 변화시키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인이니까, 우리 신앙 안에서 욕망 부분을 어떻게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안에서 욕망과 관련되어 이야기하는 부분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절대 아닌 것 같아요.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죠. 많이 소유했는데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적게 소유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훨씬 많더라고요. 행복은 객관적인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관적이라는 것은 바꿔 이야기하면 행복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내가 행복이라는 씨앗을 갖고 있는데, 이 씨앗에 내가 물을 주면 행복해지는 것이고 물을 주지 않으면 씨앗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복론으로 제시한 마음의 가난을 유지하는 것, 이것은 욕망을 줄이는 부분을 맹자에서 이야기했던 그런 부분으로 우리가 해석할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비워야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겠죠. 이것을 마음의 가난으로 예수는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맹자와 조금 만날 수 있는 것 같고요. 우리 욕망의 원인을 세상 것에 두지 않고 하느님께 둔다면 사유세계의 절충선상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교 예수가 제시했던 메시지가 다시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