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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 읽기 - 세상과 道의 길
 WRITER: 관리자  (175.♡.48.178) DATE : 16-11-21 16:05 READ : 1867


2016년 10월 종교강좌
노자


지난 시간에 했던 순자 사상을 심화시키고 공자 사상과 비교하면서 유교사상을 한 시간 동안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 나서, 노자로 넘어가겠습니다. 제목을 ‘유가의 시중사상’이라고 해두었는데요, 제가 볼 때 유가사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 하나를 짚으면 바로 시중(時中)사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시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계속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데요, 그래서 시중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에 맞추어서 적중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 즉 모든 면에 있어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서야 할 때 서고, 앉아야 할 때 앉는 것. 이것은 덕을 닦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간순간에 중(中)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시중 사상을 좀 더 깊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유교의 時中사상이 지닌 의미

오늘은 유가 사상 전체를 살펴본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유가 사상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유가 사상 안에서 지난 시간에 맹자를 다루었죠. 맹자는 철저하게 하늘, 천으로부터 성품, 본성을 받았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요. 天은 誠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천으로부터 품을 받은 인간의 본성 역시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죠. 공자를 이은 맹자의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측면이 인간은 본래 하늘로부터 받았고 그래서 본래 선하다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지 않는 모습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바로 그런 측면에서 순자는 사회와 욕망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죠. 맹자는 욕망의 문제를 안 다룬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몸의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마음(大體)이고 하나는 몸(小體)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각각 심지관(心之官), 이목지관(耳目之官)이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는 것, 즉 소체에 따르게 되면 소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내게 말하는 것에 따라서, 곧 대체에 따른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대인이고 더 나아가서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보는 겁니다. 보통은 이목지관에 따라 삶을 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욕망이 계속 증폭이 되는 것이죠. 이 욕망을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과욕(寡慾)을 통해서 맹자는 우리 시선을 계속 마음 쪽에다 옮기면 마음 안에 있는 우리의 본래성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과욕이라는 것이 이제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죠. 욕망을 줄여나감을 통해서 대체를 따르도록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맹자 진심 하에 보면, “마음을 닦는데 과욕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맹자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움, 사회 혼란을 어떻게 평정하게 할 수 있을까 했을 때 맹자가 추구했던 것은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도덕이 아닌 욕망의 바다로 들끓는 각 개개인의 마음자리뿐 아니라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경험하면서 맹자의 심(心)담론의 한계를 인지했고, 이를 넘어서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사람이 관자(管子)입니다. 관자는 유가 전통 안에서 곁가지처럼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오늘날 관자 사상이 빛을 보는 것은 순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가 썼던 <관자 내업> 편에 보면, “‘心之中又有心’ 마음 안에 또 마음이 있다. 마음이 중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죠. 하나는 심도(心道)요, 또 하나는 심욕(心慾)이다.” 이렇게 마음의 중층을 이야기합니다. 관자는 심도(心道)는 정(靜)하고 심욕(心慾)은 동(動)하다고 말합니다. 움직인다는 것이죠. 이 활동성이 정에 의해서 제어되면 된다고 보는 것인데, 이처럼 욕망 부분에 조금 더 긍정적인 측면을 봤다는 점에서 맹자와 조금 다릅니다. 순자 사상이 갖고 있는 것이 욕망에 주목을 하는 것이죠. 순자만 욕망에 주목을 한 것은 아니고, 법가 사상의 한비자 등도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맞춰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사실은 성악설은 한비자, 법가사상이에요. 상군서 산지에 보면 “인민의 본성은 재보고 긴 것을 취하고, 달아보고 무거운 것을 취하고, 견주어보고 이익되는 것을 찾는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에게 이익된 것을 찾는 것,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것.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갖고 있는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법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비자가 법가를 중시하는 것이죠. 그것에 반해서 순자는 법가와의 차이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악하다고 보기 보다는 이러한 경향성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교화될 수 있는 가능성도 또한 갖고 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예에 의해서 교화를 하면 인간의 본성이 변화할 수 있다. 이게 순자 사상에서 아주 중요합니다.화성기위. 성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순자 사상의 핵심이고 공자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禮)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는 어떤 것인가요? 제사 지낼 때, 삼강오륜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지만, 근본적으로 예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넘어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됩니다. 예라는 글자를 보게 되면, 위에서 번개가 치는 모양(示)이에요. 하늘하고 관계있는 것이죠. 曲은 바구니, 豆는 제기를 뜻해요. 하늘에다가 제사를 지내는 의미를 본래 갖고 있었어요. 고대 사회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 천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서 제사를 올렸었죠. 이것이 본래의 예의 의미였는데 유가 사상을 지나오면서 인간의 관계로까지 의미가 확장 되었습니다.

순자는 예의 기원을 어떻게 보았나를 보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순자 예론에 보면, “사람이란 제마다 욕심이 있는 바,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면 스스로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하려 할 때 '도량(度量)'과 '분계(分界)'가 없으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혼란스러워지고,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궁해진다. 그리하여 선왕들은 그 혼란을 싫어하며 예의(禮儀)를 제정하고 분계(分界)를 정한 것... 즉 적절한 분배를 통해 모든 사람의 욕구가 충족 가능토록 한 것이 바로 예(禮)의 기원이다.” 순자는 예의 기원을 적절한 분배라고 봤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이고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러나 자연, 재화 등 모든 것이 한계가 있으니 잘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이렇게 분배하는 것이 예라고 순자는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죠. 우리 현대사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바로 생태문제와 빈인빈 부익부에요. 이 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조절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고 있어요. 어떻게 이 사회가 제대로된 분배를 할 수 있는가를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죠. 순자가 이야기한 예가 지금 2천년이 지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순자 정명(正名)>편을 보게 되면 인간의 본성, 위(爲), 지(智), 능(能)의 개념을 아주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그러한 것을 性이라 하고, ...性의 好惡喜怒哀樂(좋아함 미워함 기뻐함 노함 슬퍼함 즐거워함)을 일컬어 情이라 한다. 情이 그러한 가운데 心이 사려하여 能이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僞라 한다. ....아는 까닭이 인간 안에 내재한 것을 知(인식능력)라 하고 그 知가 (도와) 합치됨이 있는 것을 일러 智라 한다. 행하는 까닭이 인간 안에 내재한 것을 能(행위능력)이라 하고 그 능력이 (道와) 합치된 것을 일러 또한 能(도덕행위)라 한다.” 순자는 인간 안에 성이 있고, 이 성이 발현된 것이 정이죠. 여기까지는 아직 악이 아니에요.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욕망의 무한함이 뻗어나갈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인간 안에는 지와 능도 있다. 가능태로 지(知)와 능(能)이 있다. 이것이 현실태로 드러나는 것은 지(智)와 능(能). 같은 능을 쓰지만 이것은 행위를 하는 것, 후자는 지를 통해서 도덕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것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죠.그는 이미 벌써 성 안에 가능태가 있다고 봤어요. 그것이 지와 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죠.
지와 능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악의 근거를 순자는 어떻게 보았는가. 욕망 그 자체가 만족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것을 악의 근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문지기라 해도 그의 욕망은 제거할 수 없는데 그건 본성에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天子라 해도 그의 욕망은 다 만족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외부로 나아가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집단 간의, 국가간의 전쟁과 분쟁이 생기게 되고 인간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순자는 어떻게 무한한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고 봤을까요. 순자는 인간의 마음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각작용이 있는데, 이 마음의 사려판단에 의해서 욕망이 제어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 판단이 정말 믿을만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죠. 이에 대해 순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심(心)의 징지(徵知)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징지는 ‘마음에 의해서 명석화된 인식’을 말합니다. 명석화된 인식이 있어서 인간이 대상세계로부터 오는 것들을 기억하고 내 안에서 해석하고 종합해서 정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데, 순자는 예가 그 기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는 구체적으로 뭐냐? 이것이 오늘 함께 공부해야할 부분입니다.
예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죠. 그래서 순자는 학습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공자를 했을 때 학(學)을 굉장히 강조했죠. 순자가 맹자의 제자임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모순이 되는 것 같은 게, 유가는 인간 안에 자율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는 바깥에서 온다고 하면, 순자의 논리 안에 모순이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순자는 이 예는 성인들로부터 배우는 것인데, 성인들은 어떻게 예를 규정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성인들도 또한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성(性, 지와 능)을 통해 위(爲), 바깥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지요. 바로 이 성과, 바깥으로부터 오는 위가 합쳐져서 덕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사유 방식입니다. 예는 성인으로부터, 성인이 터득한 예를 배우는 것이죠. 그러면 성인은 예를 어디서 배웠을까? 그 성인 역시 성위지합을 통해서, 자기 안의 성과 바깥에서부터 오는 위를 예를 종합시켜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사상은 바깥에서 오는 것과 내 안에 있는 것이 같이 종합되어서 나의 인격을 완성시켜나간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란 욕과 지와 능을 지녔던 성인이 치기양심술(자기 안에서 닦음)을 실천하여 이루어낸 것입니다. 즉, 예라는 것은 단순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가 이루어지기까지 쌓아 놓은 것을 내가 전수받는 것이지요. 그 예를 배움으로써 나의 성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각 수도원은 자기 수도회의 카리스마, 곧 영성이 있죠. 영성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것과 자기 안의 성(性)이 합쳐질 때 덕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예로 보나요? 예의 기준은 예수의 가르침에 있죠. 예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바깥에서부터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죠. 그 예(禮)가 내 안의 성과 어떻게 합쳐서 내 것이 되는가, 이것이 순자가 말하는 성위지합입니다.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서른 살에 섰으며(而立),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耳順),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從心)” 여기서 30에 섰다는 것의 의미는 예를 배워서 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다는 것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서구 사상과 동아시아 영성의 차이를 비교하면 서구 사상은 존재론 중심이고, 각 개개인(Individual) 중심인데 반해, 동아시아 영성은 개개인이 아니라 관계를 중시합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而立, 곧 섰는데 이건 홀로, 단독자로 선 것이 아니에요. 많은 것들을 습득해서 인간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서는 거에요. 예라는 것은 관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죠. 예로써 섰다는 것은 바르게 행동하고 책임지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權과 時中

유가에서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시중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공자에게 있어 시(時)의 의미는 그냥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해있는 시대의 문화, 정치상황,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위치, 사명을 포함한 전체의 현실, 그게 시(時)에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 전체를 통틀어서 시(時)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공자에게 있어 시(時)는 시간의 의미를 넘어서 공간의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時, 현실의 상황 안에서 적중하는 것, 그게 시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적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좀 막연해요. 하느님의 뜻이 뭔가? 유가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이 때를 이해하게 되면 하느님의 뜻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상황 전체 속에서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가 전통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뜬 구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처해있는 이 현실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공자는 시중을 사는 방법으로 권(權)을 강조합니다. 저울질할 권(權) 자입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말해야 해, 침묵해야 해? 이걸 저울질하는 이에요. 구체적인 상황에 두고 식별하는 것이죠. 유가 전통에 종교성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도 시시비비하는 중입니다. 유교가 조선 500년을 이끌어 온 정치이데올로기이지만, 정치라는 것은 두 사람만 만나도 정치에요. 따라서 이 권이라는 것은 사실 두 사람만 살아도 필요한 것입니다. <논어 자한편> 30에 보면 권에 대한 가르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께 한 자리에서 배울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있다 하여도 그것만으로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함께 權을 행할 수는 없다.(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권입니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없다. 도에 함께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서는 것은 좀 어렵다.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을 행할 수는 없다.” 저울질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만큼 식별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주자는 논어집주에서 권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울질을 해야 하는가 했을 때, 공자의 가르침 안에서 엿볼 수 있는 것, 잘 저울질 하기 위해서 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절사(絶四)입니다. 절사 전에 ‘무적무막 의지여비(無適無莫義之與比)’ 잠시 살펴볼게요. 무적(無適)이라는 것은 “이것은 틀림없어, 이것은 꼭 맞아”라는 식으로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절대로 아니야”라고 절대부정하는 것이 무막(無莫)이구요. 공자는 무적으로 통해 절대적으로 긍정할 것도 절대적으로 부정할 것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유교가 윤리만 가르치는 줄 알았더니 영성을 갖고 있군요. 불교의 영성과도 연결이 되죠.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것이니 우리는 의를 좇아야 한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의일까요? 의라는 것은 한 개인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저울질해서 얻는 공의(公意)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제대로 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는 것이죠.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백성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수렴하고 공의가 무엇인지를 식별하고 분별해서 결정해야 하죠. 공자는 이것을 권의라 했고, 이것이 바로 공동체적인 식별입니다.
공동체적 식별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나를 내려놔야 합니다. 내가 내 아집을 갖고 있으면 공동체적 식별은 이루어질 수 없지요. 내려놓아야 할 것으로 공자께서는 절사(絶四)를 이야기 합니다. 이는 공자 사상의 깊이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절사는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를 말합니다. 무의는 자기 의지를 끊는 것, 무필은 나의 생각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끊는 것, 무고는 고집을 끊는 것, 무아는 내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나를 끊는 것을 말합니다. 무아의 毋는 無, 不, 금지한다 등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불교에서도 무아를 이야기하는 데 이 毋를 쓰지 않고 無를 씁니다. 공자사상 안에 이런 깊은 영성이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자기를 계속 비워내야 공동체적 식별을 잘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계속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표현 중 하나가 극기복례입니다. ‘자기를 극복해서 예로 돌아간다’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동전의 양면성이에요. 이 두 가지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극복하게 되면 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공자사상이 주는 메시지가 얼마나 강한지. 논어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우리 것으로 삼는다면, 나의 변화가 주변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순자의 權과 時中

이러한 공자사상은 바로 순자에게 영향을 주는데요. 논어의 권 사상을 후대에 권모술수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풀어준 것이 바로 순자입니다. 순자도 권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바라고 싫어하는 것과 취하고 버릴 것을 저울질해 결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겠다. 자기가 바라는 걸 보았을 때에는 반드시 앞뒤로 (저울질해서) 그것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점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그것이 해가 될 수 있는 점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울러 그것을 저울질해 보고 잘 헤아려 본 다음 자기가 바라고 싫어할 것과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언제나)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익되는 것과 손해되는 것을 놓고 저울질해서 잘 식별해서 선택을 하라는 것이 순자가 가르쳐주는 권입니다. 공자의 갖고 있는 권 사상을 이어받은 것인데요, 맹자가 공자를 이어받은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공자사상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는 마음을 닦는 수양 쪽으로 강조했다면, 순자는 예를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덕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같은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았지만 다른 부분을 우리가 엿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식별사상

저는 유가의 시중 사상과 그리스도의 식별사상을 비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때라는 것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중에서 카이로스에 해당됩니다. 카이로스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구약, 신약에 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유명한 것은 구약 코헬렛에 보게 되면 “모든 것에 때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때’는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이 하느님의 손 안에 달려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이 코헬렛이 때를 통해서 우리한테 전해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때라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를 의미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때를 잘 식별하는 것에 대해서 카톨릭 영성가인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을 보게 되면 영적식별에 대한 가르침이 나와있습니다. 장상과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만일 장상과 의견 충돌시 나는 왼쪽으로 가고 싶은데 장상이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저는 왼쪽입니다’라고 말하라. 그래도 장상이 오른쪽이라 하면 ‘알았습니다’하고 따르다가 그래도 아니다싶으면 다시 가서 이야기하라.” 식별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그렇게 세 번 까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장상이 ‘오른쪽’이라 하면 그 때는 오른쪽이 하느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올바른 태도다.” 숙명과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율성 안에서 저울질 하는 것이죠.
권이라는 것은 오늘날 복잡다단한 현대사회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고,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타협해야 하고,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결정하고 따라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가 어떤 기준을 갖고 해야 하나. 유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성 쪽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요. 자율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천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유가에서는 자율성을 중시하고 있고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섭리를 중시하는데, 왜 자율성을 중요한가요? 성경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늘 괴리가 있죠.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내 마음 안에 깊은 자각이 생기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남의 지식이 될 뿐입니다. ‘아, 그게 정말 맞구나'라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행동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것은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고, 내 마음이 동(動)하는 것이 바로 자율성입니다.
유가 전통과 그리스도교 안에 서로 배워야할 많은 것들이 있는데, 다산 정약용의 사상 안에서 두 영성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천명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내 안의 천명, 그것을 영명성(靈明性)이라고 합니다. 내 안에 본래 밝음이, 신령하고 밝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라고 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천명, 환경으로부터 오는 천명입니다. 다산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서학을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에 18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죠. 다산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을만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18년 때문에, 그가 바깥으로부터 자기에게 온 고통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신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한탄을 하고 끝나버립니까? 상황 속에서 자기 안에 오는 천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산이 다신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가 전통의 시중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얼마만큼 큰 울림이 있는지, 저 나름대로 성찰하고 나누어 봤습니다.

노자

유가전통하고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지금까지 막연히 알고 있던 노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노자는 흔히 피세지사(辟世之士)로 알려져 있죠. 세상을 피해서 사는 은둔자로 말입니다. 일단 먼저 우리는 문제의식을 던지고 노자를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노자는 피세지사였는가?’하는 점입니다. 저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 문제의식을 갖고 노자사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사실은 정확히 모릅니다. 전국시대에 제가백가가 출현하여 사상 논쟁이 활발했는데 노자도 그 당시 인물 중 하나로 추측합니다. 최초로 노자전을 쓴 사마천 <사기>에 보면 노자의 성명은 李耳로 기록되어 있으며, 초나라 사람으로 주 왕실의 장서실을 관리하는 수장리(국립 도서관장)를 지냈다고 합니다. <노자 도덕경>에 보면 유가사상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맹자 이후일 것이다. 또 한비자가 노자를 해설한 <해로> <유로> 두 편이 있기 때문에 도덕경을 한비자 이전으로 봅니다.
<노자 도덕경>은 여러 제자들이 함께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도덕경의 흐름을 볼 때 한 저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논어> 에도 공자가 세상을 피해 사는 은자들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논어의 은자들은 공자의 노력 자체를 비판한데 반해, 노자는 무위(無爲)로 백성을 키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노자를 단지 避世之人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노자는 그저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죠. 그러나 사실 노자 사상의 중심이었던 것은 정치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의 정치적인 안목은 유가와는 다른 안목이라고 이해해야겠습니다.

노자 도덕경

도덕경은 1~37장 상편, 38~81장 하편으로, 상편은 도에 대해, 하편은 주로 덕에 대해서말하고 있어서 각각을 도경과 덕경이라 부르고 이 둘을 합쳐서 도덕경이라고 부릅니다. 노자 38장에 보면, “도를 잃은 후에 덕이 생겼고 덕을 잃은 후에 인자함을 말하게 되었다. 인자함을 잃자 의로움을 언급하고 의로움을 잃은 후에야 예를 내세웠다” 하여 유가의 인의예지에 대한 덕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자는 인의예지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인의예지를 전부 인위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위적인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다. 무언가를 애써서 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가 사상은 유위성을 갖고 있는 것이 노자의 유가에 대한 비평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 인의예지는 벌써 춘추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덕목이기 때문에 덕목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지 유가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결국 유위적인 것을 다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는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은 상명(常名)이 아니다. 뭔가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은 도다’라고 실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름붙일 수 있는 것도 진정한 도가 아니다. 그럼 도가 무엇인가? 그 아래에 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며, “有名, 萬物之母”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니 도에는 유적인 것도 있고 무적인 것도 있다. 도의 양면성입니다. 도가 갖고 있는 양면성은 도는 무적인 면도 있고 유적인 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적인 면으로 보면 천지가 시작되는 것, 유적인 것으로 보면 만물이 태어난 어머니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의 도는 우주발생과 연결시켜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제대로 된 해석은 아니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도가 우주발생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라고 나와있는데요, 상무(常無)에서 도의 지극히 미묘함을 보고자 하고, 상유(常有)에서는 그 도의 경계를 보고자 한다. 윗부분에 상과 무를 대비시키고 있고, 다시 상무(常無)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지점은 노자 사상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은 전부 서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有無를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자사상에서는 유/무를 칼로 무자르듯이 자를 수 없다고 봅니다. 도는 이것을 함께 어울러 갖고 있다는 양면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깊이 봐야 하는 부분인데요. ‘常’자는 ‘항상 상’자이잖아요. 영원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것은 항상 영원한 도라고 해석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러나 원래는 恒(항)자였어요. 한무제의 이름 자인 항을 쓸 수가 없어서 항(恒)을 상(常)으로 바꿨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영원불변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늘 변합니다. 저희가 지난 3월 강좌에서 주역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주역에서는 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이고요. 세상을 영원불변하다고 보는 것은 동아시아 영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서구적인 지식을 갖고 있으면 그렇게 해석하기 쉬운데 동양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묘(妙)와 요(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교에서는 묘(妙) 자를 많이 씁니다. 묘수(妙修)라는 말이 있는데 묘한 수행이라는 뜻이에요.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돈오라고 하는데, 이렇게 깨달았다면 끝인가? 깨달았다고 끝난 게 아니지요. 어느 한 순간의 깨달음뿐이지. 그의 삶의 자리에 얼마나 냄새가 많이 나는지. 한 번의 깨달음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합니다. 깨달은 후에 닦는 수련을 묘수라고 합니다. 도가 갖고 있는 묘함이 바로 이런 것이에요. 도가 無的인 면으로 봤을 때는 묘(妙)의 면, 有的인 면으로 봤을 때는 요(徼)의 면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徼)는 드러나는 것,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줄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이 양자는 같은 곳에서 나왔으나 다른 이름이고, 같음을 일컬어 현(玄)이라 하고, 현(玄)하면 또 현(玄)만 것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玄이 나옵니다. 검을 현(玄)자에요. 도가 갖고 있는 속성을 노자는 玄에 비유하고 있어요. 검은색은 단지 검다는 것을 넘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색이 다 모아졌을 때 내는 색깔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유학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이 어떻게 생성됐는가를 이야기할 때, 무극에서 태극이, 태극에서 음양이 나온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요, 이 태극 이전의 무극의 상태가 현(玄)의 상태입니다. 양극이 그 안에 숨어 있으면서 장차 현현될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도는 만물의 총상이다.” 이것이 노자 도덕경 1장에서 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1장을 계속 다른 방법으로 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을 잘 이해하는 것이 노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2장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끝이 뻔해하지요. 선은 반드시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주인공은 살아남아 승리합니다. 왜? 그가 선이기 때문이죠. ‘선은 반드시 악을 이긴다’는 선악 이원론적 논리가 그 저변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대립논리는 투쟁과 갈등으로 점철시키게 됩니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름다운 것과 미워하는 것을 대립 지어놓고 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한 줄 내려가서 보시면, 유무(有無)가 대립으로 나오고, 다음에는 난이(難易)가 대립구로 나오고, 다음에는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音聲), 전후(前後)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있는 대립구조입니다. 대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보게 되면 이 대극간의 갈등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아름답다고 하는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노자의 관점은 바로 이것을 대립관계로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예를 들면 선인은 악인의 스승이 될 수 있지만, 악인도 선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서는 고칠 것을 배우게 됩니다.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정말 아니다, 하고 접어놓은 사람에게도 내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또한 선인도 타락할 수 있고, 악인도 개과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 선인도 없고 절대 악인도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이죠. 앞서 공자가 말한 ‘무적무막(無適無莫)'와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공자는 이것을 권(權)으로 풀려고 했다면, 노자는 무위자연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방법론은 다르죠. 유가는 권, 저울질. 도가는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노자가 이야기하는 무위는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무위도식은 뭔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죠. 적어도 노자가 이야기한 것은 무위도식의 무위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위는 인위적인 행위, 계산된 행위, 자기 중심적인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무위적이냐라고 했을 때, 목적이나 고의 없이 행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목적을, 목표를 세우고 살잖아요. 그 목표가 이루어지면 그 다음 목표를 세우고, 이렇게 살게 되는데, 나이를 먹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지?’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럼 목적 없이 어떻게 살라는 건가? 노자가 가르쳐주고자 한 것은 목적의식을 갖고 삶을 살게 됐을 때, 전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전체의 삶은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만을 바라보며 그저 끊임없이 달려만 가면 내 삶은 수단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무위적 삶은 순간순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목적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매 순간을 목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무위적인 삶입니다.
옳고 그름, 잘하고 못함, 좋고 나쁨은 모두 유위의 자국들입니다. 무위적 삶에는 자국이 없습니다. 내가 무얼 했다는 게 없이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위를 사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노자의 그것과 많이 통합니다. 노자를 만나셨으면 무척 즐겁게 이야기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깊이 알려면 노자를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가 유위적 삶을 산 듯 보이지만 그 분은 무위적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무위적인 삶을 사셨기에 지금 우리에게까지 그 분의 말씀이 큰 울림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자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듯이 말이죠. 자연이 알려주는 것은 때가 되면 잎을 떨굴 때 떨구고, 다시 새로운 봄이 되면 새순을 내고, 푸르름을 우리한테 줍니다. 그렇게 자연은 무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자연을 통해서 무위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나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장

3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위정치에 대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시면, 불상현(不尙賢)이 나오는데요. 묵자를 공부하시면 상현(尙賢)이 나옵니다. 묵자가 주장했던 10가지 가르침 중에 하나가 상현입니다. 이것은 현명한 자를 숭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현자를 노자는 어떻게 해석하냐면 인간의 지식을 숭상하는 것으로 봤어요.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지식이죠. 노자가 중시하는 것은 자연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지 자연을 해석하는 것은 2차적인 것이에요. 현(賢)은 자연의 해석이고 인간의 지식입니다. 그것을 숭상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민불쟁(使民不爭)이라고 나옵니다. “不尙賢, 使民不爭” 직역하면 상현을 하지 않으면 백성으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 불귀난즉지화 시민불귀도(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얻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불견가욕 사심불난(不見可欲, 使心不難)이 나옵니다. 성인이 하지 않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노자는 성인이 하지 않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건 뛰어난 이를 편애하거나 과도한 칭찬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상현(不尙賢)이에요. 그러니까 공평하게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난즉지화(難得之貨)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값비싼 것을 다른 것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렇게 하게 되면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사람들이 탐내는 걸 드러나게 보이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불견가욕 사심불난입니다. 이 세가지를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 된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다스리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편애하거나 그 사람을 숭상하지 말고, 값비싼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또 남이 탐내는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이고, 그런 성인이 다스리는 것, 바로 그것이 성인의 다스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인은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弱其骨” 마음을 비우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를 든든히 하고 뼈를 강하게 하라.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고 뜻을 약하게 하고 중시해야 할 것은 배를 튼튼히하고 뼈를 강하게 하는 것이죠. 당시 시대적 상황은 백성이 굶주리는 상황입니다. 나라 간에 싸우고 투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냈고, 백성들은 살아가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使民無知無欲”. 이 무지무욕이라는 것이 무위정치의 또 하나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무지는 인위적인 것을 비판하는 의미로 무지(無知)를 이야기합니다. 무지를 인위적인 지식들을 비워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무욕(無欲)은 마치 욕심을 없애는 것처럼, 금욕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지(知止)와 지족(知足)이라는 의미를 같이 봐야 의미가 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지(知止)라는 것을 멈춤을 아는 것이고, 지족(知足)은 만족함을 아는 것이죠.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을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지지와 지족을 할 수 있으면.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지지와 지족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소비는 미덕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더 많이 소비해야 하고, 계속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계속 자극하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무욕하기는 너무 힘들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정말 행복해지려면, 욕망을 계속 충족시켜 나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욕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지와 지족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자와 예수의 가르침이 이렇게 만나는 것이죠. 굉장히 많은 것들을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장은 다음 달에 다시 이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