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타니 사상의 한계>
니시타니는 왜 도겐의 불성사상을 후기에 중시했는가? 그것은 그가 도겐의 불성사상에서 무아의 주체성의 방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기에 가서 土의 문제를 중시한다. 그는 불성을 土의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주체적이지만 어디까지나 무아인 것, 무아이면서 주체인 것,(17, 203) 이것이 니시타니가 생각한 불성이다. 이 불성의 장에서 土의 문제가 생각되는 것이 아닌가? “불성이 곧 여래”라든가 대신심은 불성이라는 것이다. 信은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빼고는 생각할 수없다. 또 주체성 즉 자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같이 주체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은 타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17, 203)
신란의 경우에서 ‘대신심은 불성이며’ ‘불성 즉 여래이다’는 거기서 土의 문제를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17, 203) 니시타니가 도겐의 불성을 중시한 것은 도겐의 몸의 문제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즉 도겐의 사상안에서 마음은 몸과 떨어져 있지 않고 몸과 마음이 늘 함께 있다. 그래서 도겐은 수행 즉 행을 중시한다. 도겐의 깨달음의 세계는 신심탈락인 것이다. 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동시에 탈락되는 것이다. 니시타니가 왜 도겐의 사상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니시타니 사상은 한마디로 자기중심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이다. 니시타니는 이 자기중심의 문제가 모든 종교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문제의식을 지니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선의 입장에 있다. 그는 종교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즉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체가 불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이 어떻게 온 것인가? (什麽物恁麽來)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여기서 ‘어디’라는 것이 문제이다. 불성이라는 문제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이것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실유가 불성이라는 것이다. ’ 실유불성에서 유불성은 불성의 유무로서의 유가 아니다. 유불성 무불성은 같은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 면에서 일관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 관점에서 도겐을 읽고 있다.
도겐의 불성사상은 ‘이미, 아직’이다. 즉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孔性이면서 空化이다. 니시타니는 신을 孔性(ekkenosis)이라고 보고, 예수를 空化(kenosis)라고 본다. 그는 신을 불성이라고 보고, 예수를 성취된 업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니시타니와 도겐의 불성사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즉 니시타니는 불성의 일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불성이라는 점, 그러나 도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미와 아직이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을 떼어서는 도겐의 불성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이미이면서 아직이다.
이 모순이 인간의 실존이다. 우리의 실존은 이미와 아직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안에서 이 양면을 발견한다. 도겐은 붓다 안에서 이 면을 발견한다. 즉 그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본각을 지니고 있다면 왜 수행을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도겐은 우리가 본각을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자체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그 불성자체가 우리존재이지만, 우리는 붓다처럼 끊임없이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도겐의 문제의식은 ‘이미 아직’에 있지만 그가 수행을 강조한 측면에서 아직의 측면이 더 강하다. 즉 도겐에게 있어선 공성보다 공화의 측면이 강하다. 행의 강조이다. 그러나 니시타니는 행의 측면의 강조보다 이미의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니시타니는 도겐이 본 붓다영역과 이 세계의 영역 간의 이원론의 초월을 강조한 측면을 중시한다.(즈치다 도겐의 수도영성 281) 즉 이사무애가 아니라 사사무애로서의 세계이다. 니시타니는 도겐의 신심일여(몸과 마음이 둘이 아님)의 측면을 사사무애의 측면에서 본다. 그러나 여기서 도겐은 그러므로 수행을 강조한 반면, 니시타니는 수행의 측면보다 이를 즉의 논리라는 관점에서 본 면이 강하다. (종교적 측면이 약화)
니시타니에게 있어 도겐의 수행이 지닌 의미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니시타니는 도겐선과 임제선의 차이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기사구명은 선뿐이 아니라 어떤 종교에서도 근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23권 249) 그것이 불성이라는 것이다. 즉 니시타니에게 있어 도겐의 붊성은 이런 측면에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정토진종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므로 니시타니에게 있어 도겐의 특성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는 즉의 논리 안에서 도겐을 해석하고 있다.
도겐은 왜 본각사상을 비판하고 있나? 중국에서 본각사상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도겐은 본각사상이 본래의 불교사상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하나의 격의 불교의 사상이다. 즉 본래의 부처의 사상은 본각사상이 아니다.
無常, 苦, 無我, 不淨과 常樂我淨의 관계, 갈등의 문제(정법안장의 갈등 장 읽을 것), 身心一如는 行(佛威儀), 공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우린 무엇을 배우나? 이것은 하나의 개념이고 형이상학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行(佛威儀)이다. 一箇半箇, 作佛, 見佛, 現成, 修證一如, 唯佛與佛(법화경), 佛道, 洗淨, 洗面, 典座敎訓, 僞經(疑經)-起身論, 首愣嚴經, 圓覺經은 본각사상이다. 妙覺, 淨覺, 수증일여-수행은 깨달음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행과 깨달음이 같다는 것은 이해되나, 여기서 도겐은 무명(원죄)의 문제를 간과한 것은 아닌가? 지관타좌를 통해서 무명을 없앨 수 있는가? 여정은 이것을 가능하다고 보고 신란은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즉 신란은 아미타불의 힘만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쯔치다의 도겐의 수도영성>-
각각 모든 행동은 초월을 돕기 위해서 도달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붓다를 드러내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증명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성스럽게 되어야 함.
281 몸과 마음을 함께 한 길에서의 투쟁
도겐은 붓다영역과 이 세계의 영역간의 이원론의 초월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연히 그의 배움의 사상에서 그길은 마음과 정신뿐 아니라 몸도 따라야 한다. 이것은 공 우리는 이것을 정법안장의 ‘신진가꾸도(身心學道’)(몸과 마음이 그 길을 배운다)에서 볼 수 있다. 도겐이 이해한 몸과 마음은 두가지 특색이 있다. 몸과 마음은 진리를 발견한 후의 우리가 전존재로서 붓다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주내의 모든 존재와 하나로서의 진아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이 몸과 마음의 질서에 정착해야만 함을 인식하는 것이 참 진실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방법의 배움에서 일어나거나 그 길을 몸과 마음에서 깨닫게 될 때 일어난다.
자아와 전 존재가 하나라는 이 깨달음(모든 존재의 불성을 깨달음)은 시냇물의 소리에 귀기울리게 되고 하나의 산의 색깔의 변화에, 꽃의 핌에 귀기울리게 된다. 단지 우리의 죄안에 신앙없이 파묻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와 우리 삶 사이의이 하나됨을 볼 수 없다. 도겐의 선은 우주안에서 존재의 융합의 지평을 연다.
<見佛>
도겐의 붓다의 길은 먼저 붓다를 모방하고 석가모니처럼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특히 (능가경의 신(Lord)처럼) 도겐이 이해한 견불은 정토종에서 아미타불을 보는 그것과 다르다. 정토종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의 이름을 헌신적으로 부르는 수행을 통해 죽을 때 아미타불이 나타나 그를 서방정토에 데려간다는 것이다. 도겐의 ‘견불’은 보다 신비적이지만 그것은 붓다와 같은 실행으르 구체적 실행으로 하며 죽을 때아미타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인격적 변화를 하게 되는 신비주의이다.
정법안장의 장 안에 진리의 명확한 심볼로서 空華를 말한다. 그 은유는 많은 불경에서 보이나, 쇼렝엔칭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쿠게경에서는 붓다와 같은 순순한 마음이 본래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의 꽃, 우리자신의 마음 밖의 열반을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었다. (자신의 마음 밖에서 열반을 추구함을 경계) 우리는 젊은 도겐이 참된 초월을 붕괴하는 일종의 내재주의에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도겐의 초월과 내재를 볼 것)
이 방법 안에서 우리는 존재의 피어남 안에서 그 붓다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써 보는 이와 함께 사는 붓다를 볼 수 있다.
<붓다중심의 실행>
283 도겐의 응답은 단순했다. 좌선은 불사의 진리에 들어가는 진리의 문이다. 예왜하면 석가모니가 그것을 실행했고 그것을 증명했고 그것을 가장 놓은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붓다가 했던데로 산다는 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붓다타와 성취>
도겐은 사토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열반경에서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든 존재에게는 붓다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겐은 모든 존재는 붓다에 의해서 이미 초월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모든 존재는 붓다의 존재이다. 즉 존재는 초월이며 더욱 초월된다. 붓다와 다른 스승들이 발견했고 증명한 진실이 우리에게 열려진다. 존재를 통해서 그것을 깨닫는 한.
우리가 붓다의 길 우리의 존재의 구체적 행동에 참여할 때 우리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붓다의 진리를 깨닫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든 존재는 붓다의 시간이 계속적으로 공급되는 빛으로 철저히 빛으로 목욕된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의 길은 끝이 없다. 거기에는 고정된 불성은 없다.(말과 개념으로) 그것은 단지 붓다의 길에 여행자로서의 초월적 삶이 계속될 뿐이다.
<말하는 것>
“붓다의 도를 깨달음은 붓다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도는 붓다스에 의해서 붓다스에게 가르침의 행동이 가르침의 행위로 정확히 전해진다. 이는 붓다의 법륜의 돌림이다. 이 법륜의 돌아감을 통해 우리는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을 깨닫게 된다.
니시타니는 일상생활을 어떻게 육화 신앙의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니시타니는 현재 역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근본무명은 자기중심성이고 자기내폐쇄성이다. (업은 원죄, 참된 자기중심성은 자기 없는 자기중심성이다. )
1. 니시타니의 종교관
브락트는 니시타니의 종교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시타니의 종교관은 높은 곳에 머물러 있어 산밑에 있는 사람들의 종교생활과 괴리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화는 천국에서의 대화가 아니라 지옥 중에서의 대화이다. ”(18, 62) 이것은 그만큼 자신을 깊이 드려다 보고 드러내며 상대를 진리로서 수용하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고 있음은 알수 있다. 이와 같이 니시타니가 가장 깊은 곳에서의 철저한 대화를 말하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그의 대화론에는 나무나 풀 그리고 새들과 같은 것이 없이 삭막한 사막과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니시타니의 종교관은 한 마디로 ‘공의 입장’에 선 종교이다. 물론 이것은 불교의 공사상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는 공의 입장을 불교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종교관도 설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공의 입장’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핵심 안에서의 만남을 시도하지만, 그의 공의 입장은 여전히 종교적 접근이라기 보다 철학적인 접근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사상이 전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목요연한 논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전반에서 풍기는 인상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즉 그는 종교적 따뜻함을 자신의 사상 속에 함께 녹여드리지 못하고 철저하게 공이라는 외길로 치달아간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 정의로서의 공
니시타니는 후기에 가서 ‘定意로서의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니시타니는 왜 이 용어는 채택했는가?
그의 공사상으로는 불교에도 그리스도교에도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양종교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만남을 전제로 한 그의 사유는 결국 종교생활 그 자리에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인식은 염두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후에 가서 그에게 ‘情意로서의 공’이라는 용어를 낳게 되었다.
그럼 그가 말하는 ‘정의로서의 공’은 그가 그전에 사용했던 공의 개념과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가? 그전의 공개념이 색즉시공이었다면, 정의로서의 공은 공즉시색으로서의 공이라고 할 수 있나? 그는 정의로서의 공이라는 표현을 통해, 불교의 법리를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법리의 정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정의라는 표현은 공즉시색으로서의 공을 말하기 보다 시인들의 정의안에서 표현되는 것으로서의 공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의로서의 공이라는 표현은 그의 색즉시공이라는 공의 입장에서 공즉시색으로서 공에로 나아가는 설명이라기 보다 공즉시색에 대한 시적 정의로서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ㄱ) 양종교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지 못함(니시다의 철학과 비교)-니시타니의 역과 니시다의 역대응의 관계를 다시 볼 것.
<니시타니사상 중의 공즉시색적 측면>
니시타니는 자신의 사상을 공이라고 보지 않고 공의 입장이라고 본다. 이는 그가 특정종교로서의 불교로서의 공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즉 그의 문제의식인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것으로서의 공의 입장이다. 따라서 그의 공의 입장은 한마디로 “허무주의를 통해서 허무주의를 초극”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니시타니의 공사상은 한 마디로 “자기는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이다”(종교란 223)이다. 여기서 앞의 ‘자기는 자기가 아니면서’는 색즉시공으로서 ‘무자성’(무아)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니시타니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색즉시공이 자기’라고 본다. 즉 공즉시색이다.
그의 후기 사상은 공즉시색에 대한 설명이다. 정의로서의 공, 사사무애로서의 공(현성하는 사물 그 자체가 바로 공의 발현이라고 봄-후지다의 설명),
니시타니의 사상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색즉시공에 머물러 있지 공즉시색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지적한다. 과연 니시타니의 공사상에는 공즉시색의 세계가 빠져있는가? (브락트의 예언자로서의 니시타니논문) 또 니시타니 사상에는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우에다의 비판, 우에다는 니시다사상을 중심으로 니시타니 사상을 본다. 즉 역동성의 결여라는 지적의 내면에는 니시다사상은 이사무애로서의 이아 사사이의 역동성이 있으나, 니시타니는 이사무애를 넘어선 사사무애의 세계로 들어갔기 때문에 거기서 이와 사간의 역동성이 니시타니사상에는 없다고 해석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필자는 위 두 관점 모두 니시타니 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먼저 브락트가 지적한 니시타니에게 결여되었다는 공즉시색의 세계는 니시타니의 공사상의 핵심을 놓친 해석이라고 본다. 물론 니시타니의 공사상 안에는 색즉시공을 말하는 부분이 강하게 드러남이 사실이다. 즉 그가 바쇼의 하이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색즉시공의 세계이다. “황량함을 마음에 바람에 얼은 몸”의 표현은 무상을 철저히 무상으로 받아들이는 즉 무상의 세계 안에 자신을 투신하는 색즉시공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들에 버려지게 됨을 각오하고 여행을 떠남은 자신을 죽음의 끝까지 철저하게 깊이 내려감을 의미한다. 즉 무상이 자신의 그런 내면을 통해서 깊이 수용됨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무상의 세계 안에서 무상을 철저히 살아감으로써 길을 연다는 것, 무상 안에 철저히 사는 것 무상이깊게 자신 안에 들어옴을 깊게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시타니는 색즉시공에 머물지 않고 공즉시색으로 나아갔다.
“공의 근본적 입장은 자기가 공이라기보다, 오히려 공이 자기라는 것, 사물이 공이라기보다는 공이 사물이라는 것에 있다. 그러한 전환에서 비로소 허무가 존재의 피안으로서 보여지는 입장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할 때 우리를 초월해 있는 단순한 피안이 아닌 우리가 실재로 피안에 도달하여 피안에 섰다는 입장이 나타난다. ”(종교란, 207)
“일상적 삶의 세계가 본원적인 세계이다. (니시타지 현대사회의 제문제와 종교 , 종교란 231참조)
이와같이 색즉시공이라는 절대부정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공즉시색이라는 절대긍정의 세계에로 나온 세계가 니시타니의 진정한 의미의 공의 입장이다. 그의 후기 사상은 전반에 걸쳐 이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니시타니는 선의 갈송, 시들에서 공즉시색의 세계를 발견한다. 이러한 공즉시색으로서의 공은 후에 니시타니의 ‘정의로서의 공’으로서 드러난다. “허무주의를 통한 허무주의의 초극‘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정의로서의 공은 그의 공사상의 도달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니시타니의 공의 입장에는 분명 공즉시색의 세계 뿐 아니라 색즉시공의 세계가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안에서 아직 무언가 허함을 느끼게 됨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의 사상이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적 손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즉시색을 말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그의 사상의 전체에 흐르고 있는 색즉시공으로서의 공보다는 그 색체가 약함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가 <종교란 무엇인가> 의 주저에서 보살도를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사상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역시 니시타니 사상의 중심은 “허허로운 벌판에 홀로 서서 그 살을 찌르는 듯한 바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언저리에는 옆의 사람의 따뜻한 손잡아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홀로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람들에게 니시타니가 보여준 종교상은 자신은 도저히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더 위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람마져도 끌어 안아 줄 수 있는 따스함이 종교의 핵심이 아닐까? 니시타니가 말한 “허허로운 벌판에 홀로 서서 찬 바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 힘이 따스함으로 변해서 옆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종교적 사랑, 생명으로 변화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니시타니는 시들을 통해 공즉시색의 세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문학, 예술) 이것이 종교의 실천의 세계에까지 나아가는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이 아쉽다. ) 이런 점에서 그는 역시 자신이 자신에게 붙힌 ‘철학자’라는 명칭에 철저히 산 분이라고 볼 수 있다.
2. 공에 대한 니시타니의 해석( 정의로서의 공)
니시타니는 후기에 가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공의 입장에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전 중기에 있어 니시타니의 공의 입장은 주로 색즉시공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불향상의 입장, 기사구명으로서의 입장) 그러나 그는 후기로 가면서 공의 다른 면 즉 공즉시색의 측면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공즉시색의 측면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사사무애로서의 공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시타니는 후기에 가면서 사사무애로서의 공의 입장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잘 드러내주는 그의 후기 작품은 <선의 입장> <반야와 지성>-이것도 반야지를 비판한다.
즉 반야지는 이사무애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이사무애적 입장을 탈피하고 사사무애적 입장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사상적 측면을 볼 수 있다. <공과 즉>에서는 ‘정의로서의 공’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구상력을 중심으로 공을 해석하고자 한 시도이다. 이러한 구상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해석은 반브락트와 하세를 통해 정토진종의 세계와 연결되어 설명된다. 그리고 <정법안장강화>, 중국에 있어서 선의 역사적전개 중에서 선의 고유한표현형식으로서 발달한 詩文, 즉 갈송의 세계를 고찰한 시논문 예를 들면 <시갈>(1961) 한산시(1974)이 집필되어있다. 즉 그의 후기사상은 선을 테마로 많은 논문들이 집필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색에 변화가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공과 즉>에서 드러난 ‘情意로서의 공’이다. 즉 그는 공을 지각과 감정의 매개인 구상력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의로서의 공-허무로서 허무를 극복-경험과 자각 혹은 언어의 不二>
니시타니는 정의로서의 공의 표현은 그의 종교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공즉시색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기보다 색즉시공이라는 종전의 자신의 사상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술에 드러난 종교적 표현이다. 종교에 드러난 예술적 표현이다. 이와같이 정의로서의 공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공해석-공즉시색으로서의 공-은 되지 못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허무의 끝을 경험한 자가 그 허무의 끝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한 표현이라고 본다. 색즉시공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 그것이 바로 정의로서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시타니의 정의로서의 공은 니시타의 경험과 자각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의로서의 공은 공으로서의 이메지이다. 그는 결국 끝에 가서 공을 情意로서 해석한다. 즉 종교를 예술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정의 안에서의 공)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동서양의 전통적 이질성이 문제로 남는다.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니시타니에게는 없다. 그러나 니시다의 입장에 보면 불교에서 나와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
니시타니의 공사상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니시타니는 양종교가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공의 장소라고 보았다. 이와같이 니시타니는 공사상을 통해 양종교의 통일점은 추구했으나 양 종교가 지닌 고유한 특징을 살리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이러한 공의 입장에서 양종교의 공통분모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의 허무화된 표층적인 면 밑에 잠재되어 있는 동서양이 다시 큰 문제로서 부상되어 나온 것이다.
니시타니가 제시한 동양의 전통으로부터 나온 사색의 의의가 하나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세계의 표층을 굴절시켜서 그 밑으로부터 드러난다면, 그것과 연속적인 활동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전통적 이질성이 문제로서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으로부터 도전을 받아온 동양뿐만이 아니라, 서양 측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로써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과 동양을 하나의 장소로써 사색한 니시다의 의의가 있다고 우에다는 본다. (우에다 대승선 96,5.6 )-니시타니가 제시한 自己全露體的 차원, 즉 교의를 초월한 돌파의 차원은 현대세계의 현실 안에서 가능한가? 즉 니시타니에 있어서는 동서양의 전통적 이질성이 문제로 남는다.
2. 종교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철학에 머뭄, 실천적인 면이 부족하다.
니시타니의 불교적 사상에서는 불교의 문화적 유산(건축, 의식 등)을 무시하고 공을 모든 것으로 본다. 이런 약점은 후에 ‘정의로서의 공’이라는 표현으로 그는 완화 혹은 보충하려 하지만 그의 근본사상은 역시 삭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이 더 강함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종교상은 색즉시공에 머문 것이 아닌가? 즉 그에게 공즉시색이 약한 것이 아닌가? ‘종교란 무엇인가’의 뒷부분에서 보살도를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그의 전사상에 극히 적은 일부분이다. 이와 같이 그의 종교상이 색즉시공에 머문 것같은 인상이 짙음은 그의 사유세계가 종교적 색체보다 종교를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에서 다다른 결과라고 본다.
타나베는 니시다가 실천적인 면이 부족하고 사변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니시타니는 역사, 현재문제를 보면서도 이를 공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한다. 사막과 같다.
- 니시타니는 현대의 문제가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나온다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니시타니는 인간의 자기중심을 바로 인격중심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는 인격중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선에서 발견했고, 선을 통해 다시 철학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여기서 니시타니는 철학에서부터 종교에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의 문제 즉 깨달음 후에도 현실은 여전히 번뇌의 세상이라는 사실, 인간은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현실의 문제를 철저히 다루지 않고 있다.
여기서 니시타니의 사상이 철학의 선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인간의 실존 속에 감추어 있는 근본무명의 문제이다. 즉 자아중심을 극복하고 공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으나 인간이 진정 자아중심을 극복할 수 있는가가 당면문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무명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니시타니는 근본무명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는가?
3. 공과 무명
'선과 종교철학, 155쪽' <비인격적 인격성의 입장과 죄의 문제>
니시타니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한 하느님의 완전에 관한 이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인격적인 인격성의 성격을 갖고 있고 하느님의 편재와 전능의 실존적인 해석과 함께 기독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발하기 위한 통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156 그러나 니시타니의 토론 속에서 죄는 궁극적으로 의심의 문제와 함께 허무의 용어로 파악되어 있다.
157 이와 같이 니시타니가 궁극적으로 죄를 허무로 환원하고 그것을 허무의 문제로 평가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신적인 의지에 대한 반역인 죄의 고유한 면을 빠뜨린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가 하느님의 완전 전능을 고찰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사실 과 관련된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은 비로소 자기 계시를 약속하며 인간은 하느님을 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 실재적인 죄와 죄로부터 회개인 신앙에 대한 자각이 생겨난다.
그는 하느님의 비인격적 인격성을 신성의 무의 방향에서만 찾았지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을 배제하였다.
<니시타니의 신과 예수>-그리스도관
니시타니는 무아를 근저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 놓여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나?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예수의 경우에는 하인의 형상으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자기를 비움으로서 신의 뜻에 따르게 되었다. 신을 거역한 죄인까지도 용서하려는 신의 사랑, 그 용서의 사랑은 선인도 악인도 모두 평등하게 표용하는 신의 완전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신자신 속에도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예수의 경우 그는 원래 신의 모습에서 하인의 모습을 취함함으로써 자기를 비웠는데 비해 신의 경우에는 신의 완전성 속에 처음부터 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신이 신이라는 바로 그 사실 속에 본질적으로 자기를 비운다는 성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 그것은 성취된 업이며, 신의 경우는 본래의 본성이다. 아들의 경우를 에크케노시스(空化)라고 하면, 아버지의 경우는 케노시스(空性)이다. 그것은 동양적으로 말하면 무아라는 것이다”(종교란 무엇인가 101)
즉 니시타니에게 있어 예수는 엑크케노시스라면, 신의 경우는 케노시스이다. 그것을 동양적으로 말하면 무아(안아트만)이다. 니시타니는 신의 완전성에는 무아라는 성격이 본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니시타니는 ‘신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길’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는 길’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에서의 깨달음의 정점으로 본다.
그럼 니시타니가 말하는 ‘성취된 업’과 ‘본래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니시타니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참된 사랑은 우리가 인간적 차별적 사랑에서 신적인 무차별적 사랑으로 옮겨갈 때 자기를 비우는 사랑이 성립된다고 본다. 그 사랑은 신의 완전성을 모방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종교란 102) 즉 니시타니는 신의 완전성은 예수가 자기를 비우는 행위보다 더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신의 완전성 속에는 자기를 비운다는 성격이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나, 예수의 자기비움의 행위에는 신의 완전성의 모방으로써 성립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할 점은 니시타니가 본 예수는 완전성인 사랑의 작용이며, 신은 사랑의 완전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작용은 인격적인 성격을 지닌데 비해, 신의 완전성은 인격적인 비인격성이라고 본다. 니시타니는 신의 완전성을 인격적인 비인격성으로 규정하고 인격적 존재 뿐 아니라 비인격적 존재까지도 포함한 무한한 사랑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시타니는 그리스도교의 신의 완전성 즉 비인격적 인격성과 불교의 무아개념을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 즉 니시타니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이 비인격적 인격성 안에서의 이해이다. 따라서 그는 부정신학 즉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사상에서 그 면을 발견한 것이다.
즉 니시타니는 엑카르트의 사상을 빌려 예수의 성육신사건을 인간 내면의 영적 문제로 본다. (니시타니가 엑카르트사상을 높이 평가한 것은 엑카르트가 서구의 어떤 사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존재의 절대부정 즉 脫自性까지도 넘어선 경지로서의 절대무의 장을 열었기 때문이라도 설명한다. (종교란 110)
여기서 니시타니에게 있어 예수는 비인격적 인격성을 완성한 ‘하나의 인격성’으로 드러난다. 즉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신의 완전성을 지향했고, 이를 성취한 하나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시타니에게 있어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에게 부여한 사상과 조금 차이가 있다. 즉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는 삼위일체안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니시타니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우리와 동일선상에서 이해된다.
한스 반덴펠스는 “니시타니에게 있어 史的 예수의 모습이 결여되어 있다. 삼위일체가 나오지 않는 것뿐 아니라 칼 바르트가 신의 자기계시를 신의 자기방기로서 해석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라고 비판한다. (정의로서의 공 218) 또한 한스는 그리스도교에 있어 공은 필립비서 2장 7절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또 니시타니가 예수의 엨크케노시스(空化)가 신의 본질적 케노시스(空性)에 기초한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케노시스에 대해 말할 때 다시 삼중의 신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스는 성령안에서 무아적 인격, 비인격적 인격을 본다. 또한 한스는 니시타니가 그의 저서의 말미에 예수나 붓다가 아니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주목하고 있음을 든다. 즉 니시타니에게 있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엑카르트와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정의로서의 공 219)
<니시타니의 프란치스코>
그는 자신이 니시다를 만나 철학을 배우기 전에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프란치스코를 든다. 프란치스코의 만남이 하나의 결정적인 차원 전환축이 되어 성서의 이해도 그로부터 보고 있다. 타케우치는 니시타니로부터청빈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기를 권하고 프랕치스코책을 받았다. 타케우치는 프란치스코연구에서 살아있는 붓다를 만난 것 같은 심지를 지녔다고 쓴다. (정의로서의 공 263) 또한 타케우치는 니시타니의 사상 전체가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프란치스적 종교적 결단과 경건, 즉 청빈의 심지로부터라고 본다. (정의로서의 공 264)
3.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이해 -아베의 지적
니시타니가 엑카르트 사상을 통해 비인격적 인격을 강조한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즉 니시타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간과하고 있다.
< 아베마사오의 신관>
불교에서는 생멸변화, 무상성이 문제가 되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죄성이 문제가 된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 무명을 무명으로 자각함, 철저한 무명의 자각, 무명과 자기가 하나임을 자각함을 공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신앙을 중시한다. (선과 종교철학, 현대신학참조) 아베는 불교는 존재적 차원 즉 죽음을 중시하며, 그리스도교는 가치적 차원, 죄을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아베는 니시타니가 불교적 입장에 서있으므로 가치와 죄의 문제를 깊이 문제시 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은 아베가 잘못본 부분, 즉 그리스도교의 죄 역시 가치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
아베는 죄를 단순히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차원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의지을 완전히 부정적 측면에서 본 즉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상반된다고 본 루터의 사상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죄에 대한 견해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악한 것으로 봄으로써 그는 죄를 하느님의 의지에 상반된 인간의 의지의 발동 즉 하느님의 명령에 거역한 것으로 본다. ) 그러나 이런 아베의 죄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교의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해석은 존재론적 차원보다 가치론적 차원으로 본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아베는 그리스도교에서 이 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밖에는 없다고 본다.
(자아와 자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을 니시타니는 자기사랑의 절대부정으로 해석한다. 즉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에 대한 사랑의 부정을 의미한다. 즉 이 말 속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에 대한 절대부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무화해서 타자를 자기의 주체로 삼는 것 자기를 종으로 놓고 타자를 자기주인으로 삼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자신처럼이란 참된 자기자신을 말한다. 참된 자기자신은 자기중심적 사랑을 하는 자기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자기를 절대부정한 곳에서 드러나는 자기이다. 즉 무아의 실존이며 자타불이적 실존이다. (이러한 니시타니의 해석에서 우리는 그의 인간의 주체에 대한, 자아와 자기에 대한 해석에서의 기독교적 해석과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
<< 자아에 대한 니시타니의 사상- Daniel Charles>.>- God, The Self and Nothingness
213 하느님의 내재에 대한 실존적 만남은 자아에 있어서 무의 실제화와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아는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중심으로 한 자아이해는 깨어지고 무는 실제로 자아에서 실제화되며 인격적 존재는 또한 실제적으로 자아안에서 실제화된다. 이것은 절대부정 즉 절대긍정을 의미하며 인격성으로 불리우는 어떤 것이 절대무로 융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실존적 전환없이는 이것은 의미가 없다.
214 역사는 초역사-모든 특수성이 다른 특수성에 상호침투할수 있는 영역-에 근거하고 있다.
“A는 A 그 자체이다. B는 B 그 자체이다. A와 B는 상호 침투한다. 이것을 우리는 지타푸니(자아와 다른 것이 둘이 아니다)라고 부른다. A와 B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들은 상호 침투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니시타니는 인간이 상호침투의 영역으로 인간이 드러난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의 독특성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자기성을 지니며, 모든 것들의 중심의 존재유형을 보여준다 각각과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며 하나의 절대중심이 된다. 이것은 그 실재의 절대득특성이다.
215 자아는 모든 다른 것의 근제에 있다. 자아는 자아가 아니라 공과 융합된 존재이다. 자아는 절대중심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니시타니의 역사성에 대한 주제의 핵심에 도달한다. 상호간에 앞과 뒤는 시간의 다른 규모사이에서 획득된다. 그것은 역사의 초역사적 이해의 방법을 열어준다. 니시타니의 논리는 히사마쯔의 그것과 유사하다. 즉 참된 자아는 역사적 변증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근원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출연이전에. 어떻게 역사적 자아로부터 초역사적 자아로 되는가?
니시타니는 첫째 우리는 동시적으로 시간의 안과 밖에 있다는 것이다. 216둘째, 안과 밖의 동시성은 시간의 일종의 지질학을 깨닫게 한다. (즉 상호침투되는 원리에 따른 여러 가능한 시간전략의 통합에 따른 )세째 니시타니는 즉비의 논리가 동시성의 상반성임을 보여준다.
217 니시타니는 토인비의 대승불교에 있어 시간의 개념에 대한 토인비의 해석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원형적인 성격만이 역사적인 의식의 모든 가능성의 부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한고 토인비의 논문이 니시타니에게 문제핵심을 지적한 것으로 보여졌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자아중심으로 언급된자아는 인격성으로서 그 자체안으로부터 행동한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있다.
218
( 인간과 만물을 동일선상에서 봄)
여기서 니시타니는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즉 태양의 노래에서 물과 불, 바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형제 자매이다. 그는 달아오른 철봉으로 눈을 수술받게 되자 “형제인 불이여,(종교란 393)으로 노래했다.
여기서 니시타니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인류를 대신한 속죄의 사랑과의 본질적 관계를 본다. 즉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불과 그의 관계를 묶어준 그 장은 바로 신의 아가페에 묶여진 장이며, 즉 자기와 타자의 관계위에서 이루어진 십자가는 타자를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는 행위요 타자를 형제자매로 사귀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종교란 394)
4.니시타니는 선을 궁극적인 것으로 두고 서양사상 전체를 그 밑에 둔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경지는 공의 입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신비주의는 신과의 합일, 힌두교의 범아일여도 진정한 무아의 입장일 수 없다고 본다.
5. 민족주의적인 면
< 역사성과 공의 관계>
토인비에 의하면 인류 전체의 문제를 규정지을 깊은 대립의 장벽은 불교적 사상과 서양적 유태적 사상의 대립이다. 토인비가 본 불교사상의 특색은 순환적 시간관과 인간과 우주를 지배하는 비인격적인 달마의 개념이다. 이에 반해 서구사상은 직선적 역사관과 인격적 존재에 의한 지배를 말한다.
서구의 사고방식은 역사는 하나의 드라마처럼 시작이 있고 줄거리에 따라 전개되고 종말에 이른다. 이러한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의지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어디까지나 개입된다.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중심성과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죄로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러게 해서 신앞에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오직 신에 복종하고 신의 의지에 순순히 따르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다시 선택된 자라는 의식을 갖는다. 즉 거기에 다시 한번 자기중심성이 드러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서구종교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끊임없이 따라붙어 한번 부정해도 다시 신의 선택받은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에 대한 완전한 자기 방어, 완전한 비하가 다른 인간에 대한 자신의 우월감을 뒷받침하게 된다. 거기에는 자신의 자기중심성에 대한 종교적인 자기부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중심성의 깊은 뿌리가 남아 있다. 무의식적인 반작용이 나타나서 그 자기부정이 또 다시 무의식적인 자기중심으로 역전하게 된다. 이 점은 포이에르바하나 니체에 의해 지적되었다. 자기 중심성의 뿌리가 무의식의 힘으로 남기고 있다는 점은 자기반조가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뿌리에 무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89 이와 같이 역사가 자기중심적인 퍼스낼리티를 지닌 자기 입장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역사는 본질적으로 무명을 포함한 존재의 세계이며 업과 宿業의 장이라고 니시타니는 본다. 종교와 역사사이에 발생한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종교와 역사는 서로 모순을 이루는 것일까? 불교의 역사의식이 뚜렷하지 않다는 토인비의 생각은 서양적인 역사 사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니시타니는 실제로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고 본다.
기독교에 포함된 문제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존재의 자각에 함축되어 있는 3가지 점 즉 죄의 자각, 자유의 자각, 시간의 일회성의 자각과 관계가 있다.
첫째 문제점은 기독교에서는 역사의 시원에 죄를 상정한다. 190 유대적,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하느님 앞에서의 죄로서 부정되지만 신자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스스로가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라고 하는 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차원에의 일종의 자기중심성이다.
역사의 성립과 전개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존재와 본질적으로 하나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또 그 자기 중심적인 존재성의 극복 즉 속죄와 신과의 화해를 통한 구제도 역사 속에서 신의 아들로 나타난 예수의 성육신과 관계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성립하는 종교적 입장은 다른 종교 사이에 어떠한 공통성도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인 절대성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역사의 사실성은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혹은 현실재라는 점에서 절대로 공통 요소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93 이런 경우 종교적 진리가 일반적으로 요청하는 절대성은 역사적 사실의 일회성과 결부되며 그 결과 신앙의 입장은 배타적인 절대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니체의 역사관은 역사의 종말이 역사 가운데서 생긴다고 하는 기독교적 종말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 역사의 무종성을 제창한다. 그러나 의지(그것이 신의 의지이든 힘에의 의지이든 ) 라고 하는 유가 초역사적 차원에서의 역사의 원리라고 생각되고 있는 한 역사는 완전히 무시무종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
니시타니는 기독교의 신중심적 역사관,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근대계몽주의적인 인간중심적 역사관, 이두 역사관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난 니체의 영원회귀의 역사관 이 모두는 의지를 역사의 기초로 삼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기독교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의지, 근대계몽주의의 경우에는 인간의 이성적 의지, 니체의 경우에는 힘에로의 의지가 역사의 원리로 각각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선과 종교철학 176) 니시타니는 이와 같이 서양에서 “시간과 영원의 문제, 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의 문제는 결국 의지의 개념과 늘 결합된다”(종교란 무엇 330쪽)고 본다. 즉 하느님의 의지, 인간의 의지, 힘에의 의지는 역사의 근저에 작용하고 있는 의지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불교적 사고는 서구사고에 비해 하나의 장점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내면에 갖추고 있는 자기중심성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율동이 순환적이라든가 우주나 인간이 비인격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에 중점을 둔다. 토인비는 그것을 개체가 보편 속으로 소멸돼 가는 입장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기중심성을 초월할 수 있다. 그 대신 그 입장에 서면 역사의 의미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 모든 것이 보편적 입장으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본질적으로 새로운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같은 일이 항상 거듭되기 때문이다.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이 어떠하든 역사는 신심탈락하지 않은 미망의 인간계에 의해서 전개된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의 입장에서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입장은 흔히 초역사적이고 따라서 비역사적이라고 보는 점에서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이 역사를 보는 방식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285)
184 니시타니가 말하려는 역사와 공의 관계를 해명하려면 우선 그의 업에 관한 견해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가 말한 공의 입장은 업의 입장을 극복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시타니의 업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러한 우리의 존재는 끝없는 세계 관련 위에 성립하고 있다. 시간에서의 우리들의 유는 본래 부단하게 무엇인가를 한다는 행위를 강요받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부채이다. 그러나 부채의 부단한 보상은 그 보상한다고 하는 유위 그 자체에서 다시금 새로운 부채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업의 기본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二義性(새로움과 무상)을 지니고 있다. 시간은 우리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으며 우리로 하여금 쉬지않고 앞으로 전재하게 하며 무엇인가를 하게 하고 새로운 변화를 강요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요하게 되면 존재는 자신에게 무한의 짐으로 덮쳐온다. 그래서 시간이 우리에게 무한한 부채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有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만 자신을 보전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깨 위의 짐을 덜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우리의 유와 시간은 우리 자신에게 본래부터 지원진 짐과 같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더욱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불가피성, 그 내적 필연성이 우리 자신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절없는 무한한 충동으로서 우리이 현존재 그 자체 안에서 자각을 일으킨다.
311 이러한 무한 충동을 탐애라든가 욕애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삶의 본질 혹은 세계 내 존재를 구성하는 이런 무한충동에 쫓겨 끊임없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수 없는 우리의 존재방식에 포함된 인과적인 역관이 모두 업으로 나타난다. 업의 관념 속에는 유와 시간이 우리에게 한없이 무거운 짐이라는 존재자각과 동시에 시간의 본질에 대한 자각이 나타나 있다. 이와같이 니시타니는 역사를 업 안에서 이해한다. 니시타니는 역사는 자아 중심적 인격성의 가진 자아의 입장 즉 의지의 입장에 서있다고 본다. (선과 종교처학 153)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서 서로 연결된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나타난다.
그 끝없는 인연의 끈이 인류전체 생물전체 세계 전체등을 나의 존재와 행동과더불어 운명적으로 엮어준다. (종교란 337) 이러한 세계 연관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끝없이 다른 것과 관계한다는 무한성이 들어 있다. 이 무한한 연관성 속에서 인간은 좀처럼 자신의 근본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종교 339) 즉 자기 중심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자기 중심성이 바로 곧 무명이라고 본다. 인간은 세계와의 무한한 연관성 속에서 자기중심적, 즉 자기에 집착하여 살아간다.
188 자기가 세계의 중심으로 화한 자기내 폐쇄성을 동반하는 업의 입장에서의 자기 중심성과는 달리 공의 입장에서의 자기 중심성은 자기와 타자가 상호투입하는 ‘무아적인 자기 중심성’이다. 거기에서는 자기 중심성과 타자 중심성이 역동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즉 공의 입장에서의 한다는 행위는 무위 곧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유희라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한다는 끝없는 부과이지만 그것은 이미 외부에서부터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내면의 밑없는 깊이에서부터 자각된 사명이다. 그것은 부채가 없는 부채이다.
공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인격으로서 자기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가 다른 모든 것의 수단이라는 입장으로의 전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인격들끼리의 회호적 관계뿐 아니라 자기와 일체의 사물들 사이의 회호적 관계까지도 본다.
이 곳에서는 자기의 목적을 자기 속에서가 아니라 만물 속에서 본다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부정과 자기 속에서가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본래적인 자기의 주체를 본다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긍정이 하나가 된다. 그것이 공의 입장에서 가능하게 된다.
<존재론과 가치론>
7. 존재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 공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문제에 치중하여 가치의 문제에 대한 언급이 부족, 즉 윤리의 문제언급치 않음
<공의 장에서 존재의 문제 뿐 아니라 가치의 문제도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
*(종교란 무엇인가 202) 공의 입장에서는 존재론은 가치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공은 업의 문제 뿐 아니라 죄의 문제까지도 극복함으로써 가치론적으로도 자각되며 실현되어야 한다. 업의 자각과 원죄의 자각은 차이가 있다. 즉 업은 존재론적 의미이며 원죄는 가치론적 의미이다.
(그러나 니시타니는 업이 원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다) --아베에 있어 업과 원죄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베는 니시타니의 업의 개념에는 그리스도교의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된 채 남아 있다고 본다. 즉 아베는 니시타니의 업의 개념 속에는 존재론적 차원만 있지 가치론적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베는 니시타니가 죄의 문제를 단순히 무시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니시타니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절망의 관념과 비교하면서 업은 원죄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인정한다.
아베는 니시타니의 업의 개념 중에 다음을 원죄적인 측면으로 든다.
“ 업에서는 자유와 인과필연이라는 두 모습이 하나로 된다. 그 자유는 완전 인과 필연적 한정력에서 나온 자유요, 끌려나온 강요된 자유로서 다른 것을 향한 집착 속에 자신을 묶는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묶여지지 않는 자유로서 모든 다른 것을 자기의 중심에 모은다. 이런 자유가 원죄의 모습이다.” (종교란 원본, 347) 아베는 이러한 업의 관념에 대한 니시타니의 통찰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해석이 그리스도교의 원죄에 대한 올바른 파악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지닌다. 업에서 자기폐쇄성이나 자기중심성이 깊이 자각된다고 해도 업의 자각이 공 원죄의 자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베는 어떤 점에서 업과 원죄의 불일치를 보는가?
아베는 기독교의 죄는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의미하며 그러한 죄와 그 역인 죄는 가치론적 문제라고 본다. 즉 아베는 기독교의 원죄 속에는 존재론적인 차원 뿐 아니라 선에 상반되는 가치론적 차원도 있다고 본다. <선과종교철학 203)
아베는 이와 같이 불교의 업과 그리스도교의 죄의 개념이 지닌 차이를 양 종교의 가치론적 불일치적 측면으로 본다. 그럼 그 가치론적 불일치란 어디서 비롯되는가?
아베는 토마스 카슬리스의 니시타니에 대한 비판의 논문을 인용하여 이를 설명한다. “공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에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지만 각 사람은 하느님에 의하여 암석보다 더욱 중요하다.그러나 니시타니의 존재론에서 보면 이 점은 부정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 ((선과 종교철학 206)
분명히 공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은 그 여실성에서 평등하다. 이와 같이 불교는 공의 자각을 통하여 만물이 그 여실성에서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차별을 떠난 행동을 악평등으로서 거부한다. 즉 불교에서의 평등은 차별에 즉한 평등이다. ‘평등즉 차별 차별 즉 평응이다. 이것이야말로 니시타니가 말하고 있는 존재론적 질서이고 존재의 로고스이다.(선과 종교철학 206) 이 관점에서 모든 것은 그 여실성에서 평등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암석보다 중요하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즉 각 사물의 여실성은 그 자체의 고유성이 있다.
산은 산으로서, 물은 물로서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의 여실성이 있다. 아베는 산이나 물의 여실성은 ’하여한 한다‘고 하는 당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나와 너의 여실성은 불가피하게 당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연 사물과 달리 당위의 문제와 근원적인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대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인간이 암석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선과 종교철학 208-209) 즉 여실성이 그 가장 깊은 뜻에서 충분히 자각되는 것은 인간존재에서 뿐이라는 것이다. 즉 원죄의 문제를 포함한 당위의 문제를 그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극복함으로써 그 여실성에 눈뜨는 것은 인간존재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불교에서도 인정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 아베는 기독교에서는 평등성이나 인간의 중요성이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자각되는 데 비해 불교에서는 초인격적인 공의 자각에서 파악된다고 하는 점이다. 여기서 아베가 문제삼은 것은 공의 여실성에서 인간의 원죄나 근원악이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니시타니의 공의 해석에서는 이 면이 충분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니시타니의 업의 개념>
니시타니는 <참회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통해서 업을 설명한다.
“내가 옛부터 만든 여러 악업은 모두 무시이래의 貪嗔癡에 연유한다. 그것은 身 口 義 三業으로부터 생긴다.”
니시타니는 업을 신구의의 삼업에 의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작용 즉 무한 충동이라고 본다. (종교란 332) 우리 자신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무언가를 행한다. 마치 죄인이 죄의 대가로 교도소에서 부역에 종사하는 모습과 같다. 니시타니는 이것이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마에 땀흘리며’ 일하며 산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본다. 즉 죄에 대가로서 지불되는 노역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노역의 영원성, 한계없음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니시타니는 우리가 부단히 무엇을 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유위적 존재방식은 무한한 부담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아베의 원죄의 의미>
아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배반이라고 본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아는 지혜의 나무열매를 먹지말라는 금지의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을 배반하고 거슬렀다는 것, 그것을 죄의 핵심으로 본다. ( 선과 현대신학 319) 즉 거기에서는 하느님의 명령 하느님의 말이 대전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전제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아베는 신에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서 죄를 이해하고자 한다. 즉 자신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살아가면서 자기모순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즉 바울이 말했듯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이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인가?“
여기서 막다른 곤경에 빠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있다. 그 곳에서 바울은 “누가이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인가?라고 절규한다. 이 죽음이라는 인간 그 자체의 한계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을 초월한 것과의 관계 한가운데에 들어서게 된다. (선과 현대 신학 322) 인간을 초월한 것과의 관게 곧 종교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 곳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신이라고 한다.
인간이 자신 안에서 죽음의 육체라는 자각을 할 때 의로운 하느님의 빛에 조명된다. 여기서 아베는 인간의 근본악이 하느님의 빛에 조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일 수는 있어도 죄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즉 악이 아니라 죄가 자각되는 것은 하느님의 빛에 조명될 때라는 것이다. (선과 현대신학 323) 거기에 인간에서부터 하느님으로의 방향이 하느님에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으로 전환되는 곳이 있다 이것이 참된 회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주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인가 라고 절규할 때 거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 이 죽을 운명으로부터의 구원은 바로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 죄인까지도 구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절대사랑의 의지를 믿음으로써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과 현대신학 333)
<아베의 불교에서의 업의 의미>
불교 특히 원시불교에서는 죄나 원죄라고 말하지 않고 업을 문제삼는다. 기독교에서는 죄와 죽음이 분리될 수 없듯이 불교에서는 업과 죽음이 분리할 수 없는 문제로서 자각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죄로서의 죽음이 문제가 되지만 불교에서는 업으로서의 생사가 문제가 된다. (선과 현대신학 337)
왜 내가 소경으로 태어났을까 라는 질문 앞에 과학은 답을 줄 수 없다. 거기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신앙으로 단숨에 비약하는 길밖에 없다. 즉 기독교에선 왜라는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수평의 차원에서 수직의 차원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선과 현대신학 339)
그러나 불교에서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을 믿는 것에 있지 않고 공을 자각함에 있다. 연기의 이법에 눈뜨는 것이다.(340) 불가에서는 내가 장님으로 태어난 것은 아버지의 죄책도 조상의 업에 의한 것도, 신의 사업에 의한 것도 아니라 나 자신의 업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의 업을 수용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장님으로 태어났다는 것에 대한 원인을 자기밖에서 찾지 않고 스스로의 업으로 수용하고 있어서는 것, 이것을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342)
아베는 바오로의 사상 안에서 죄와 하느님의 의를 설명한다. 즉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의 상반성, 즉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 간에는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죄는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에 배반하도록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346 즉 하느님의 의에 대한 인간의 의지는 불의인 것이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업으로 본다. 그러나 아베는 불교 중에서도 정토진종은 업을 죄업으로 본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신란에게서 죄업은 미타의 본원을 믿지 않는다는 것, 곧 서원을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380 따라서 신란에게 있어 죄업을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공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즉 그에게 있어 깨달음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음에 있다. 횡초에 있다. 이것은 공을 법신으로서가 아니라 보신으로서 자각함이다. 이와 같이 신란에게 있어 공의 입장은 선에서의 입장과 다르다. 선에서의 공이 법신을 말한다면, 신란에게 있어 공은 보신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공의 양면성을 보게 된다. 절대무로서의 공(법신)과 보신 아미타불로서의 공(보신, 화신)
이상에서 살펴본 아베의 기독교의 이해는 바오로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이해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오로의 원죄관과 신관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원죄관과 신관을 해석한다. 이는 다음의 아베의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울과 불자들간의 일차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행한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죄이다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원죄에 돌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일하는 하느님의 구속적인 사랑 속에서 해결책 혹은 구원책을 찾는 반면 불자는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업에서 실감하고 연기와 무아의 진리에 대한 눈뜸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다.”(선과 현대신학 429)
즉 아베의 기독관은 인간의 죄성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에 대한 신앙을 말한다. 이러한 기독관과 불교의 업과 공을 비교한다. 물론 그의 기독관은 그리스도교의 기독관의 일부이다. 그러나 아베의 원죄론이 그리스도교의 원죄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그의 원죄론은 바오로의 원죄관에 기초한 원죄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베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론 속에 존재론의 측면보다 가치론적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론은 아베가 본 가치론적 측면보다 니시타니가 보았던 존재론적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본다.
즉 니시타니는 원죄를 자신의 업의 개념 안에서 해석한다. 니시타니는 업을 신구의의 삼업에 의한 무한 충동으로 해석한다. 이런 업의 해석의 맥락에서 원죄를 설명한다. 즉 아담(인간존재)이 무한상의 근본에 운명적으로 발목이 잡혀 시간의 유 속에서 이마에 땀흘리며 일하며 산다는 사실로 해석한다. (334)
<불교와 기독교의 가치론적 불일치의 원인>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인간이 암석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즉 인격적인 유일 절대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각되고 있다. 하느님 앞에서의 평등성은 모든 사람에게는 적용되지만, 인간 존재와 자연 사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상징되는 기독교의 인격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니시타니는 공을 궁극의 원리로 자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평등성은 모든 존재의 평등성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인도 인간이 암석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공에서 자각되는 만물의 평등성이 만물의 차이와 서로 모순됨없이 상즉하기 때문이다.
208 공 밑에서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그 여실성으로서 자각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이나 물의 여실성과 인간의 여실성은 그 질에서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209 원죄의 문제를 포함한 당위의 문제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그 여실성에 눈뜨는 것은 인간존재뿐이다. 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여실성에 눈뜨게 될 때, 인간은 동시에 산이나 물, 나무나 돌의 여실성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209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가치론적 불일치는 기독교에서는 평등성이나 인간의 중요성이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자각되는 데 비하여, 불교에서는 평등성이나 인간의 중요성이 인간과 자연에 공통하는 여실성을 충분하게 자각되는 초인격적인 공의 자각에서 파악된다고 하는 점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통하는 여실성이란 인간존재의 고유한 반가치성, 곧 원죄나 근원악의 자각까지도 극복할 만큼의 깊이에서 자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있다.
8. 무아가 세계의 고통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가?
9. 공에 대한 情意적 해석
공에 대한 정의적 해석이 구체적인 인간들의 곤궁 절망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가? 과연 니시타니가 제시한 허무를 직시하는 선의 방법은 허무의 근원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현대 윤리적 세상의문제의 궁극적인 답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니시타니는 철학에서 출발하여 선을 거쳐 다시 철학으로 돌아간다. 즉 그에게 있어 선 즉 공의 입장은 철학으로서의 공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공은 종교로서의 공이 아니라 철학으로서의 공이다. (이에 반해 니시다에게 있어 선과 철학의 관계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다. 즉 니시다는 선‘과’ 철학의 양자 사이의 관계가 그의 사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가고 있다. )
3. 근본무명 및 원죄에 대한 의식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현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실의 근본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내놓은 공의 입장에 대해서는 설명한다.
분명 니시타니가 제시한 자기중심의 극복은 문제해결책이 될 수 있음에 분명하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자기 중심 극복이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실천적인 면의 설명이 부족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철학적 한계를 지닌다. 즉 자신이 제시한 공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 안에서 실천이 가능한지 설명 부족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우리가 공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물론 이것은 단 니시타니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불교도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설명불가능하고 깨달음의 영역, 직접체험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과연 몇사람이나 깨달았고 그 극소수의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공의 입장에 현실안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필자는 니시타니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근본무명의 문제를 그대로 베일 속에 감춘 채 결론으로 도달한 공의 입장 자체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나같은 범인은 근본무명 즉 자기중심성 자기내폐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질수 없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니시타니도 이 무한한 자기중심성이 인간존재의 바로 밑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니시타니의 사상은 종교적 수행이 결여된 철학적 사상이 지닌 한계를 갖고 있다. (즉 그는 신란처럼 인간의 한계성과 모순에 대한 이해가 부족, 신란은 인간의 근본무명 즉 원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봄. 그러나 니시타니는 어떻게 근본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지 설명하지 않는다.)
업의 입장에서 공의 입장에로의 전환, 즉 자기중심에서 무아의 입장에로의 전환이어떻게 가능한가?의 설명이 없다.
4. 공의 현실성의 결여
니시타니의 공의 사상은 브락트의 말처럼 풀한포기 없는 삭막한 사막과도 같다. 니시타니 자신은 볼트만과의 대화에서 십우도의 8도를 강조한다. 나는 니시타니 사상이 십우도의 8도를 너무 강조하여 그 뒤에 오는 9, 10에 대한 설명에 부족하다고 본다.
5.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이해
그는 공의 입장에 서서 신비주의자 엑카르트의 사상만을 중시하고 그외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서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교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본다.
6. 인간과 사물을 동일선상에 놓고 봄
7. 니시타니는 자신의 공의 입장이 선을 전제로 한 철학의 입장도, 동양적 무의 사상을 전제로 하여 서양의 有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초월하려는 입장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사상에는 다분 선을 궁극에 두고 서양의 사상전체를 그 밑으로 두는 경향성이 있다.
8. 니시타니는 현대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불교와 그리스도의 만남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니시타니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불향상이라는 선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즉 불향상의 입장에 설 때 현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절대적 입장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즉 실천적인 면에서의 설명이 니시타니 철학에선 부족하다. 즉 니시타니의 사상은 철학에 머무는 한계를 여기서도 드러내고 있다.
9. 실천적인 면의 결핍
니시타니에게는 니시다에게 있는 사변적경향이 있다. 다나베는 니시다의 사상에 대해서 무의 장소에는 자기의 행위를 통한 점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타나베는 실천, 행위를 강조한다. 즉 그는 처음부터 <헤겔철학과 변증법> 그러했다.. 그는 죽음의 문제도 행위와 결부해서 본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니시타의 장소적 논리는 비행위적 비실천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나베는 니시다철학을 예술적이라고 말했다. 직관적 행위에 대해서 심미적이라는 느낌이다. (절대무와 신, 254-255)
그러나 현재 역사는 신심탈락하지 않는 미망의 인간세계에 의해서 전개된다. 종교를 통해 어떻게 인간이 구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일이다. 역사 속의 사회는 개개인의 구원과는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입장은 초역사적이고 따라서 비역사적이지 않은가
니시타니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공의 입장이 역사를 보는 방식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문제삼았다. 즉 공의 입장에서 현재를 보는 방식, 즉 공이 인간 사물 중생에 현성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색즉공, 분별중의 무분별, 二 중의 不二는 설명하면서 무분별 중의 분별, 不二중의 二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시타니는 바로 이 부분을 문제삼는다.)
그는 우선 기독교는 인간 중심성이며 이러한 자기 중심성이 역사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중심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다.
8. 니시타니의 사상을 살펴본 후에 내게 남는 공허감은 왜 생기는 것인가? 그것은 브락트가 지적했듯이 니시타니의 사상속에서 모짜르트의 알렐루야의 환호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 그의 사상세계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한계는 아베의 지적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니시타니의 사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양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없는 비교 연구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비교작업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 문제가 현대세계의 과제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니시타니도 지적했듯이 자신의 문제의식도 다른 교또학파의 그것과 같이 민족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이 지닌 보편성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분명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을 대상화한다. 이런 대상적인 신관을 지닌 우리에게 불교의 공관은 신의 실재성 즉 신의 본래성은 인격성을 지니기 이전에 그 본래성 안에는 비인격적 인격성이라는 니시타니의 표현을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니시타니의 사상이 지닌 의의를 여기서 발견하고 그의 시야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신의 더 깊은 이해아래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세울 때 더 풍요로운 신앙이 되지 않을까? 대상화 이전의 그 밑의 신의 본래성,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본래성이다.
그 지적이 그리스도전통 안에서 엑카르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니시타니는 이 점에서 엑카르트의 사상을 높이 산 것이다. 우에다가 지적했듯이 엑카르트 사상은 선에서 말한 그것과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브락트는 니시타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종교란 무엇인가>에는 주 앞에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의 감정이 있는가?..나는 니시타니의 생활에는 모짜르트의 알렐루야에 대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놀라게 된다. <브락트 JR. 4/4 63)
3장 신의 공의 형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한스는 니시타니가 예수에 대해서 소극적 자세를 지닌 것에 대해 그의 기독관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그의 상응하는 교의체계의 배후로 후퇴한 근대철학사 특히 니체와 하이데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본다. <한스 306)
이상에서 니시타니에 있어서 절대무가 아니라 공을 근본범주가 된 그 사태를 사상이 과제를 준 역사적 경위로부터 조명해 보았다. 니시다는 논리라고 하는 것을 주관심을 가진 데 (절대무는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이라는 논리어로 분절된다) 반해 니시타니는 ‘情意로서의 공’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같이 시의 境涯로 사색한다. 그러나 니시타니가 절대무대신 공을 근본범주로 본 것이 니시다가 절대무로서 사색한 것을 파괴한 것은 결코 아니다.
브락트는 니시타니의 사상 특히 그가 지닌 실존적 관심은 일본의 지성인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니시타니의 일본 종교성의 이해 273)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락트는 니시타니가 일본종교전통과 깊은 접촉을 통해 그들의 가장 깊은 면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
<니시타니와 듀이의 자연주의적 휴머니즘>-<<니시타니의 종교철학>>
양자는 모두 세속주의와 과학문제, 서구종교와 도덕전통에 관심을 지니고 있다. 양자는 과학과 세속주의는 전통 유신론을 유지할 수 없고 거부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종교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접근은 다르나 그들 사이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같다. 실재 자아 윤리 종교경험에 대해서 양자의 견해는 무엇인 같고 무엇이 다른가? 니시타니는 니체, 토스토예프스키, 싸르트르를 통해서 공에 들어가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니시타니는 영혼의 문제가 인간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고 보고 만일 마음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다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문제의 참된 의미에서의 해결은 힘들다고 본다.
고타마는 인간의 고통문제가 자아가 있다고 하는 환상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니시타니는 서구문화의 기본문제를 이해하는 열쇄로서 서구의 자아와 에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당연하다. 니시타니에게 있어 현대 정신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아의 주관적 자율 때문이다.
207 니시타니에 있어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자아의 기본적 문제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니힐리즘의 문제이다. 이것이 비관주의나 비인간화를 초래한 것이다. 니힐리즘은 니힐리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고 니시타니는 본다. 따라서 그는 과학과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재화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새로운 형태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8 그는 종교와 과학, 신앙과 절망의 문제는 세계와 자아의 참된 본성을 보는 문제가 된다. 자아의 눈뜸에 대한 그의 이해를 보기에 앞서 니힐리즘의 문제를 본다. 그는 그 문제의 뿌리는 실재로부터 세우거나 사물의 실재본성에서 설정한다.
<저작집 4권, 세계관과 국가관>
277 현대 국가에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보여지는 것은 현대 국가가 절대주의 국가의 이념인 철저한 강권과 자유주의국가의 이념인 철저한 자유와의 종합이라고 할만한 국가이념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 종합은 이 두 개념의 타협이 아니라 양자를 통일한다는 의미이다.
278 국가권력과 자유가 철저하게 고차원적으로 대자적으로 되며 따라서 모순된 것이 된다면 단적으로 하나로 결부해서 현대국가의 존재방식의 근저에 드러나 온 것이라는 곳에 문제가 있다.
국가가 고도의 정치성의 요구로부터 일방에는 자유의 영역의 근본에까지도 규제하고, 다른 쪽에는 같은 근본적인 자유로부터의 납득을 해서 그 규제를 의 증된다는 것을 필요하다고 할 때 거기에 어떤 것이 드러나는가? 국가가 이런 강도의 규제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국민 공동체의 자기형성이기 때문이다.
285 국가 자신에 내재한 초국가적 세계성이란 국가가 그 구조자체안에 자기부정성 혹은 자기초월성의 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국가의 자기부정성이라는 것은 국민 공동체의 자기형성이라는 통상의 의미의 국가로서 피안인 것,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따라서 국민 공동체라든가 국가라든가의 측으로부터 자기부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어서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든가 국가가 국가아닌 것
290 그 자유이념은 절대주의적 국권에로의 반동으로서 작용한 결과 초국가적 자유로서 단순히 초월적이며 그 국가를 해소한 결향을 합하여 국가에 내재적
국권의 특에도, 자유의 특에도 종교적 기초가 있어 그 기초가 양방을 매개한 기초로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국권이 자유를 부정하는 힘으로서 작용해 국권을 몰각시킨다. 또는 자유가 국권을 부정하는 힘으로서 활동해 자유자체을 몰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종교적 기초는 국권과 자유, 국가와 국민과를 매개하는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기초로서의 뜻, 그 진실성에 있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291 현대국가들은 이런 기초를 자기 안에서 개발해야하는 필연성이 있다. 우리국가의 국체는 처음부터 이런 구조를 지닌다. 철저한 국가규제와 철저한 자유자발의 지양, 국가로서의 고차의 정치성과 세계에 대한 개방성과의 통일이 일본국가 구조에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다.
권력과 법과 윤리와의 통일점을 초월적으로 해서 내재적 내재적으로서 초월적인 중심을 지닌 우리국가에 대해서는 그 중심은 정치적 윤리적과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이념의 인격적 구현으로서 우리 국가의 역사 안을 부동한 객관적 사실로서 그 권위는 그 자신이 국민의 그것에로의 신뢰의 기초이다.
<존 브라크의 니시타니의 민족주의>-“Rude Awakenings"
234 교또 철학자의 국가주의는 과거의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오늘날의 물음이다. 토인비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인류에게 가장 위험한 집약된 이기주의라고 표현했다. 토인비는 집약된 이기주의는 모든 종교의 원리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그의 진단에 동의한다면 니시타니가 말한 종교는 자아의 가장 깊은 뿌리를 제거하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 그의 진단에 의문이 생긴다.
235 역사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부족적 이기주의를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토인비가 말했듯이 우리는 기도시 우리자신이나 우리부족을 위해서 기도한다.
교또 학파는 소화시기의 위기의 국가주의에서 그들의 철학을 거리두고 있었나. 그들의 가르침은 일본민족주의의 조류속에 있는가? 브락트는 교또 철학이 민족주의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237 어느 정도 일본의 민족주의가 교또철학내에 들어갔는가?
보통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말하나, 나는 일본역사를 볼 때 훨씬 전부터 민족주의가 있었다고 본다. 우리는 이를 타나베의 ‘종에 대한 특수주의’라고 부른다.
238 왜 일본인은 다른 민족보다 민족주의적인가? 그것은 이 나라가 섬나라라는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 역사를 통해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그래서 일본인은 자신의 국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大和魂이라고 불렀다.
소화초기에 일본 정체성의 양면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벨라는 말하기를 “태평양전쟁은 일본에게 그 문화의 정체성에 가장 심오한 문제를 주었다. 즉 동양과 서양문화의 관계와 일본의 과거와 현대의 관계에 대해서.
민족주의는 장점은 애국주의이지만 이것이 지나칠 때 민족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1.가정
교또 학파가 민족주의를 넘어서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국가에 대한 지나친 초점에 반대해서 개인의 창조성, 세계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 강조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신도의 절대성에 대해서 불교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241 니시타니는 1952년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을 공식적으로 변화시켰다기 보다 오히려 질문을 피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면에 투신했다. 이것에 대해서 짐하이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아이러니는 일본의 민족주의 목적의 실패가 그들에게 민족주의에 사로잡히기보다 그들의 기본적인 영성에 돌아가도록 한 교또철학자들의 참된 목적의 승리였다.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교또철학자뿐 아니라 그들의 철학과 민족주의의 관계를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면 교또 철학은 내재적인 민족주의인가?
244 교또철학의 기본적인 정신은 사회, 정치, 윤리에 속하기보다 초월, 형이상학, 종교 그리고 무신론적 영역에 속한다. 그들은 주관적 정신의 철학이 아니라 절대적 정신이다. 나는 캄마텔이 니시타니의 1941년의 세계관, 국가관에 대해서 한 평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은 종교철학이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이다. 니시타니는 그의 종교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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