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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간_대화라는_표현의_위험성
 WRITER: 관리자  (118.♡.103.201) DATE : 10-10-25 14:43 READ : 1359
1. '종교 간의 대화' 라는 표현의 위험성

'종교 간의 대화'라는 말 자체는 하나의 추상적 표현이다. 그것은 종교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라고 할 때,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대화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의 종교에 대해 얘기 할 때 그것은 추상적으로만 가능하다.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교 신앙, 불교신앙, 힌두교 신앙, 유대교 신앙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고 나의 친구 그리스도인의 신앙, 나의 이웃인 유대인의 신앙이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독립된 개인 인격체들이다. 우리들은 각자 한 개인 인격체이지 어떤 규격화 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다.

신앙은 개인 인격체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각자 직접적이며 개인적으로 진리를 만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축적된 전통은 나나 같은 종교를 지닌 사람이나 비교적 비슷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같은 의례에 참여하고 같은 설교나 설법을 들으면서 자라났고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종교의 역사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내 친구의 신앙과 다르다. 아니, 같은 사람도 어느 날 아침의 신앙과 그 전날의 신앙과도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이 한 개인에게도 신앙의 변화가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이겠는가? 어떤 크리스찬도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는 그리스도교에 제한된 얘기가 아니라, 어느 종교이건 한 특정인이 대표할 수 있는 종교는 없다. 이를 감안할 때 종교 간의 대화라는 표현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위험성을 지닌 표현인지를 알 수 있다. 난쟌종교문화연구소는  “그리스도교는 불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책을 편집 출간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표현은 “어느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도로서의 나는 어느 한 불자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종교간의 대화는 이를 무시한 체, 마치 자신의 사상이 그리스도 전체를 대표하는 양, 대화를 시도해 왔다. 설사 그가 아무리 자신이 지닌 사상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전통을 대표한다고 해도 그것은 틀에 갇힌 범주 내에서의 대표성이지 결코 그가 속한 종교 전통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2.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종교간의 대화

올해 25주년을 맞이한 난잔종교문화 연구소는 종교간의 대화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하면서 일본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종교간의 대화의 주축이 되어왔다. 내가 일본에 간 이유도 이 연구소에서의 종교 간의 대화를 배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양종교(불교와 그리스도교간)의 대화는 교또학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또학파는 니시따 기따로를 중심으로, 니시타니 게이치, 히사마쯔 신이찌, 아베 마사오 등을 들 수 있다. 교또학파는 불교의 기본개념을 갖고 신학의 여러 단편들과의 만남 즉 불교적 신학을 시도해왔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1. 하느님과 공(절대무)

2. 즉의 논리(즉비의 논리)

- 相卽神學- 즉의 논리(本多正昭)
-교또학파- 공과 하느님(니시다 기따로, 니시타니 게이치)
-성령과 장소-성령신학(小野寺功)
-직접경험-야기세이찌(八木誠一)

이는 그들의 종교간 대화가 주로 교또학파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 역시 석사논문으로 히사마쯔 신이찌의 선사상를 썼고 이어 박사논문으로  그의 제자인 아베마사오를 중심으로 해서 논문을 준비해 보려 한 것도 기존에 행해져온 종교간 대화의 조류를 타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난잔연구소에 있으면서 아베마사오의 저작이 그리 많지 않음을 발견하고 니시타니 게이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약1년간 그의 저작집 26권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니시타니는 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까지 설명해보려 했다.

즉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공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그가 의도한 바에 가장 근접할 가능성을 지닌 사상이다. 그래서 니시타니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특히 마이스터 엑카르트 사상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했다. 니시타니는 여느 선불교학자와 달리 그리스도교를 상당히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교 이해 역시 ‘공의 입장’이라는 자신의 기본적 틀 속에서의 이해였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교 연구시 신비주의를 그 비교대상으로 삼은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신비주의가 그리스도교 중심일수 있는가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교또학파의 종교간 대화가 지닌 한계는 바로 그들의 연구방법론이다. 그들은 종교철학적으로 각 종교를 이해하고 비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이 과연 실제 종교인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들이 하는 소위 종교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몇몇 학자들 이외에 과연 평범한 종교인들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들의 종교간 대화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까?

3. 도겐선사와의 만남

종교간 대화와 관련된 이러한 일련의 사유를 하던 중 나는 도겐선사를 만났다. 물론 그건 그분이 남긴 텍스트를 통한 만남이었지만 이는 단순히 언어의 세계, 학문의 세계에서의 만남이 아니었다. 나는 선사의 삶의 태도, 그의 지향과 신앙, 그의 깨침의 세계를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짐을 느꼈다. 그분과의 만남은 바로 나의 신앙, 나의 삶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 붓다를 철저히 모방하려는 그의 수행관
  -佛道 때문에 佛道를 수행하는 只管打坐
2. 唯佛如佛; ‘佛로서 佛과 함께’라는 佛道를 사는 그의 역동적 신앙
3. 일상의 聖化영성-洗面, 洗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