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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종교대화강좌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바라본 몸, 마음, 명상' 강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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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172.206) DATE :
14-01-17 13:47 RE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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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강의록.pdf (272.5K), Down : 12, 2014-01-17 16:38:30 | |
2013 12월강좌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바라본 몸, 마음 명상
1. 서양철학의 몸과 마음 이해
-플라톤의 이데아(영혼)중심 사상이 서구철학 신학의 기초가 되었고, 이러한 사고는 데카르트에 와서 더욱 강화되어 몸을 기계나 물체(기계론적 몸 이해)로 이해하는 틀이 되었다. 이러한 플라톤, 데카르트 사상은 서구사상의 중심축이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몸 마음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몸과 분리된 마음도, 마음과 분리된 몸도 없으며 이 둘은 不二의 관계에 있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이원론적 인간론으로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 현대의학은 몸을 육체로 이해하는 데에서, 마음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예) 플라시보(placebo)효과
가짜 약을 주면서 "이것은 진짜 약이다"라고 속이며 환자에게 줄 때 놀랍게도 약 효과가 나타난다. 이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믿는 대로 사람의 신체와 생각이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가 배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나, 군대서 <배 아플때 아까징끼 발라도 낫는다>라는 말, “할머니 손이 약손” 모두 플라시보 효과와 관련
예)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얼어죽은 선원의 이야기
2. 그리스도교의 몸, 마음이해
그리스도교도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중시해온 경향이 짙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몸의 신학>-“몸도 인격이다 ”<몸의 신학 181쪽>
1) 예수의 성육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요한 1, 14)
하느님 말씀이 육신(몸)을 취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느님은 인간, 아니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 몸을 제대로 이해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서 육신은 사륵스(sarx) 곧 살이다. 이는 말씀이 살(육체)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예 살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플라톤에서 영혼이 몸에 갇힌다거나 들어온다는 것과 다르다.
2) 최후만찬
‘받아라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성체성사의 신비
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당함으로써 모든 게 끝장난 것처럼 보였지만 하느님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부활사건을 통해 보여주셨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가 되듯 예수의 몸은 부활하여 시공간을 넘나드는 몸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함에 있다. 어떻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다. “주님, 주님 부른다고 하늘나라에 가는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첫째 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사랑을 사는 길이다. 기도나 명상은 이 구체적인 사랑을 더욱 잘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3. 기도 명상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
**파충류의 뇌--신경과학자들은 네가지 F라고 부르는 메커니즘에 대해 말한다.
먹이feeding, 투쟁fighting 도망fleeing 번식fuxxing이 그것이다. 우리의 파충류 조상들은 지위 권력 지배 영역 섹스 개인적 이득 그리고 생존에만 관심이 있었다. 호모사피엔스는 이런 신경학적 체계를 물려 받았으며 뇌 기저의 시상하부에 위치한 이 체계덕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50년대 미국의 신경과학자 폴 맥린은 인간의 뇌가 진화 발달을 단계별로 나타내는 3개의 구조인 파충류뇌(기본적인 생존작용 주관-생명의 뇌), 대뇌변연계(감정 등 정서작용 주관-감정의 뇌), 대뇌피질(고차원적인 사고작용 주관-이성의 뇌)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생명본능인 식욕 색욕 탐욕은 파충류의 뇌의 작동에 해당한다.
파충류의 뇌를 많이 사용할수록 그 뇌는 우릴 점점 더 강하게 지배한다.
-미국 신경과학자인 폴 맥린이 자비심 기쁨 평온함 그리고 모성애라는 긍정적인 감정들은 시상하부 아닌 피질 아래 위치한 변연계에서 발산되는 것이라 주장.
-온혈포유류 등장은 남들을 보살필 능력 갖춘 뇌의 진화로 이어졌고 보살핌의 초보수준에서 새끼 위해 보금자리 짓기 시작 새끼들의 건강 성장 지키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 익혔다는 것이다.
-셈족 언어에서 자비라는 단어의 어원은 rehem자궁과 연관되어 있다. 어머니와 자식의 聖像은 인간적 사랑의 전형적 표현. 이는 비이기적이며 무조건적 이타주의 위한 우리능력을 만들어내는 모성애를 자아낸다.
인간은 다른 종보다 더 근본적이고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뇌는 남을 보살피고 남들의 보살핌이 필요하도록 진화되어왔으며 이 양육과정이 부족하게되면 뇌가 손상될 수 있는 정도까지 진화되어 있다.
명상이란 이기적인 본능의 뇌인 파충류의 뇌의 작동을 적게 하고, 인간의 뇌의 작동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뇌(신피질)의 작동은 오래된 파충류 뇌에 자리한 본능적 네가지 f만큼 강력하지 않다. 이를 활성화시키려면 명상이 필요하다
4. 몸 기도
영육 이원론적 사유는 그리스도교의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영’(마음) 중심의 기도로 치우치는 결과를 낳았다. 기도를 깊이 해본 사람이라면 마음 기도만으로 우리 몸 깊숙이 자리 잡은 죄성의 뿌리를 없애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의식이 정화되었다 해도 몸에는 여전히 습기(習氣)가 남아 있기 때문.
1) 동방의 예수기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1데살로니카, 5, 16)
늘 깨어 기도하며 살고픈 열망을 지닌 러시아의 한 ‘이름 없는 순례자’는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영성 지도자들을 찾아 다녔고 마침내 한 스승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매일 천 번씩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 전 지역을 순례하면서 이 기도를 바쳤고, 마침내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심장이 뛸 때마다 박자에 맞추듯 저절로 예수의 기도를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함.
이 기도 방법은 동방 정교회의 신비 전통(hesychasm)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필로카리아Philokalia에 상세히 나와 있다.
동방 정교회 전통의 신비가들은 이 기도문 안에 복음 전체가 집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구약과 신약의 성취가 모두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도 뒷부분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그리스어로 eleison을 뜻하는데 이는 올리브 나무와 거기서 나오는 기름을 의미하는 elaion과 같은 뜻.
창세기의 노아가 홍수가 끝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를 밖으로 보냄. 이때 비둘기는 작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올리브 가지는 하느님께서 다시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밖에 올리브유는 구약시대에 왕과 사제의 도유식에 사용되기도 했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에 나오듯이 병을 낫는 데에도 쓰였다. 이렇게 볼 때 올리브유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통해 그분과 관계를 회복함을 드러내주고 있다.
2) 예수기도와 유사한 각종교에서의 기도 방법
㉮ 불교의 염불(念佛)
정토종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아미타불 신앙에 입각한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중심 수행으로 삼고 있다. 특히 일본 가마꾸라 시대의 호넨(法然, 1132~1212)은 염불을 모든 수행 위에 두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주장했다.
전수염불이란 ‘오로지 염불만’ 하는 수행 방법을 말하는데, 호넨은 염불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아미타불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정토왕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
㉯ 니치렌종(日蓮宗)의 법화창제(法華唱題,
법화창제는 묘법연화경이라는 다섯 글자를 계속 암송하는 수행
니치렌은 법화경이야말로 우리가 귀의해야 할 바로 최고의 경전이라 믿었기에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나무묘호렌게교)’이라는, 경전 이름을 부르는 법화창제를 주장한 것.
㉰ 티베트 밀교의 ‘옴 마니 파드메 훔’(한국발음으로는 ‘옴마니반메훔’)
㉱ 힌두교의 ‘하레 크리쉬나’라고 하여 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름
㉲ 이슬람교에서도 ‘라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드 라술룰라’를 외움
-각 종교나 종단에서 자신들이 신앙하는 핵심 교의가 담긴 단어나 구절의 암송을 중시한다는 건, 반복적인 기도가 우리 자신을 자기중심적인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해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각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실재와 일치하게 해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기도든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면 마음뿐 아니라 몸 전체에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마음 기도만이 아니라 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3) 호흡기도
호흡기도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맞추어 우주에 가득한 하느님의 영 기운이 내 안에 임하도록 성령께 마음을 여는 기도. 구체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 ‘예수’, 내쉴 때 ‘나’를 내보내면서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방법.
4) 엑카르트의 하느님 아들의 탄생
마르타와 마리아 비유에 대한 엑카르트의 해석은 독특하다. 마르타에게 있어 이 세상현실로의 회귀는 하느님 돌파하여 신성의 무로 뚫고 들어가는 돌파의 실제수행이다. 사랑의 고삐를 매는 것이야말로 육과 싸우는데 수천배나 더낫다. “사랑으로써 그대는 육을 빨리 극복할 수 있다.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한 짐을 진 자는 모든 참회와 고행을 통해서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
엑카르트의 초탈 수행은 철저한 비움을 통해 하느님 아닌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도 나도 해체되어 완전히 하나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아들의 탄생’이 이루어진다.
4. 불교의 몸 마음 명상
(1) 초기불교의 몸, 마음 이해
불교에선 몸은 사대(四大)곧 지대(地大) · 수대(水大) · 화대(火大) · 풍대(風大)로 구성.-지대는 견고한 자성(뼈)을 지니며, 수대는 습한 자성(물 70%, 혈액)을 지니고, 화대(36.5도)는 따뜻한 자성을 지니며, 풍대는 움직이는 자성(호흡)을 지니고 있다.
--오온(五蘿)은 사대가 형성하는 물질적인 색온(色蘊)에 정신적인 사온(四蘿) 즉,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네 가지 요소를 합한 것을 말한다.
-受는 느낌, 想은 생각, 行은 의지작용, 識은 판단 분별.-오식 육식 칠식 팔식
-붓다는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 보나? 무상, 영원하지 않으며 조건에 따라 변한다고 봄.
그래서 찰라생 찰라멸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이다.
-나는 나 아닌 요소로 되어 있고, 꽃은 꽃아닌 요소로 되어 있다.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한다. 이것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
곧 니르바나에 도달케 된다.
(2) 초기불교의 명상
1) 팔정도(八正道) 수행
-부처님께서 입멸하실 당시, 제자 수바다(善賢, Subhadda)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수바다야,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지금 해탈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다. 해탈을 원한다면 팔정도를 닦아라.”
-팔정도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과 비견
- 계戒는 자신의 행行을 제어하는 계율을 말하고, 정定은 명상 수행에 해당되며, 혜慧는 계율과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를 의미. 팔정도 중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계戒에 해당되고, 정근正勤․정정正定․정념正念은 정定에,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는 혜慧에 해당.
㉮ 정견正見
붓다는 제자인 수보리에게 “지각이 있는 곳에 기만이 있다”고 했다. 하나의 사물도 각자가 처한 상태에 따라 또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불교 수행은 이러한 인간의 의식세계 안에 가려진 사물의 올바른 견해(正見)를 드러냄에 있다.
㉯ 정사正思
바른 견해를 지니기 위해선 바르게 사유하는(正思)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 정념正念
정념의 ‘념念’은 금今과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온 마음과 온몸으로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온전하게 머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몸과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도록 마음집중을 하는 수행이 정념 수행이다.
㉱ 정정正定
바르게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을 향하는 수행을 정정正定 수행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호흡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정념 수행이 결실을 얻으려면 꾸준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근(正勤, 正精進)이다. 정념과 정정, 정근 세 가지는 팔정도 중 명상 수행(定)에 해당된다.
㉲ 정근正勤
㉳ 정어正語
말이란 자기 생각을 표방하는 수단이기에 올바르게 말을 하려면 올바른 생각(正思)을 해야 함.
㉴ 정업正業- 바른 행위를 하며 사는 것.
㉵ 정명正命-바른 생계수단을 갖고 사는 것
2) 위빠사나 수행(vipassana)
위빠사나는 ‘vi’와 ‘passana’가 합쳐진 복합어인데 ‘vi’는 ‘꿰뚫다’는 의미이고 ‘passana’는 ‘passati’(보다)의 명사형으로 '봄'을 뜻함. 위빠사나 수행은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Suttanta)』에 근거하는데 Maha는 大라는 뜻이고 satipatthana는 념처(念處)를 말하며, 거기에서 sati는 ‘-알아차린다’는 뜻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 알아차림의 대상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를 四念處(身, 受, 心, 法)라 한다. 몸에 집중하는 신념처(身念處)와 느낌에 집중하는 수념처(受念處), 마음에 집중하는 심념처(心念處), 법에 집중하는 법념처(法念處)가 그것이다.
➀ 신념처(身念處)
신념처(身念處) 수행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를 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땅의 요소(地大)- 뼈와 같은 단단한 성질이고, 물의 요소(水大)는 우리 몸의 70%가 물, 불의 요소(火大)는 우리 몸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열. 바람의 요소(風大)는 호흡을 통해 외부로부터 내게 들어오는 공기와 내가 바깥으로 내 보내는 공기이다. 신념처 수행 중 바람의 요소에 해당하는 호흡관법이 많이 사용되는데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호흡관법으로 배의 움직임을 통해 일차적인 대상을 알아차린다.
이는 복식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불러오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는 것을 관하는 것으로 들숨과 날숨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때 일어남과 사라짐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배의 움직임과 감각의 느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을 하면 자기의 내면에서 여러 가지가 일어남을 느낌--그 모든 것이 알아차림의 대상. 일차적 알아차림의 대상은 '배의 움직임'이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여러 생각과 몸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 또한 알아차려야 할 대상.
내가 지금 생각에 빠져 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일차적 대상인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간다. --이를 통해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사라지게 됨을 자각하게 됨. 그러나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생각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수행 도중에 침이 많이 고였다면, 그 사실을 얼른 알아차리고 침을 삼켜야겠다는 의도도 알아차리고 행한 후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간다.
수행 중 몸의 느낌도 알아차린다. 피곤함, 뻣뻣함, 가려움 등. 수행을 계속할 때 게으름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게으름’을 알아차리고 이 수행법이 올바른지 의심이 생길 때 ‘의심’을 알아차린다. 수행의 좋은 결실을 원하면 ‘원함’이라고 알아차리고 수행에 진전이 없고 후회에 빠지면 ‘후회’라고 알아차린다. 수행이 향상되어 행복한 느낌을 맛볼 때는 ‘행복’이라고 알아차린다.
모든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일 뿐이며 결국 모두 사라지는 것. 이렇게 계속 수행하다보면 그 대상이 무엇이 되든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모든 것이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을 자각하게 되어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
3) 간화선
➀ 간화선의 3요체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는 『선요(禪要)』에서 화두를 공부할 때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함을 강조한다.
㉮ 대신심(大信心)
수미산과 같은 흔들림없는 큰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하신 것.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모습에는 각자 차이가 있어도 일체중생의 불성은 다르지 않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 대분심(大憤心)
과거의 조사들은 모두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여 대자유인이 되었는데 왜 나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하며 깨닫지 못한 자신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더욱 분발하여 자신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큰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킴.
〮㉰ 대의심(大疑心)
대의심(大疑心)은 화두를 끊임없이 의심함으로써 마음 속에 망념이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것. 의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사고의 작용을 멈출 수 있기 때문. 이와 같이 화두선이란 하나의 화두를 끊임없이 의심함으로써 마음에서 일어나는 천만가지 사고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➁ 화두참구와 깨침
화두를 ‘든다’는 것은 빈틈이나 끊어짐없이 화두를 의식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
정중(靜中)공부는 화두를 공부할 때 고요한 장소에서 화두를 들고 간절하게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고 동중(動中)공부는 일상생활 중에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함을 의미. 정중공부와 동중공부가 함께 이루어질 때 진정한 깨침에 이르게 된다.
궁극적 깨달음의 세계는 황홀경(엑스타시)이나 신비체험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데 있다. 체험을 깨달음으로 보아 이에 집착하여 수행한다면, 우리는 수행의 본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수행은 다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수행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修證不二)
5. 불자들의 수행과 그리스도교인의 기도의 접점
붓다의 결정적 성찰은 도덕적으로 산다는 건 남을 위해 사는 것이었다. 단순히 종교적 경험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저잣거리로 나가 자비를 실천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후 자신이 찾아낸 초월적인 평화에 안주하고픈 유혹을 물리치고 40여년간 자비행을 펼쳤다. 연기의 깨달음은 자비행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자비행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인 사랑과 만난다.
성 어거스틴은 성서는 ‘자선밖에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말한바 있다. 여러 시대를 걸쳐 종교는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데 쓰여왔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자만과 욕심에 있다. 신앙심 깊은 많은 사람들은 배려심이 많고 싶기보단 옳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기도 역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완성에로 나아감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는 비단 양종교의 핵심만이 아니다. 유대교의 위대한 랍비이며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힐렐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한 이도교가 그를 찾아 왔다. 그러고는 만약 그가 유대교의 가르침을 한쪽 다리로만 서서 모두 암송한다면 자신이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다. 힐렐은 한 쪽 다리로 서서 이야기 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그것이 토라(유대교 율법)다. 나머지는 전부 해설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전통들은 황금률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그들 전통의 중심에 놓는다. 예수가 나타나기 500년 전에 공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다른 이가 했을 때 네가 싫어할 행동을 다른 이에게 하지 말라." 공자의 말에 의하면 이 내용은 그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었으며 공자의 제자들로 하여금 매일 계속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했다. 또한 '황금률'을 통해 공자가 말하는 "仁"이라는 초월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며 종교의 가장 의미있는 부분은 다른 이를 긍율히 여기는 마음이다. 세계 모든 종교의 공통교리는 “네가 싫어하는 건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마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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