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교학담론>
종교의 내용이 본질적 핵심요소로 환원된 종교본질론을 중심으로한 연구가 주된 연구대상이었다.즉 그것 없이는 종교가 오늘날의 종교일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기초로서 확인된다.그러다가 종교의 최초의 자료를 회복하려는 종교기운론이 나왔다.이 두 경우 모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를 밝혀내고 그것을 따로 떼어내거나 드러내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은 의도와 의향이 지나치게 고의적으로 단일화 된 것이 특색이다.그러나 종교가 그와같이 간단한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서 다른 연구방법이 나왔다.
즉 단일한 핵심요소로부터 연관성의 패턴으로의 전환으로 다원성의 힘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종교는 하나의 간단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성분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같이 단일한 것에서부터 다원적인 것들로의 관심이 전환되면서 어떤 밑바닥에 깔린 핵심에까지 관통하려는 관심은 줄어들고 대신 내면적인 상관성의 패턴이 들러나도록 종교의 특성들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의 전환은 연구방법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이제 데카르트식 선례는 포기하고 포괄적인 체계이면서 종합적인 묘사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1.다양한 초점과 묘사
간단한 것에서 유기적으로 상호연관된 다원적인 것들에로의 관심의 변화는 현상학적 연구방법을 불러일으켰다. 즉 단일하고 분명한 핵심요소를 확인하려고 하거나 종교의 기원과 발전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드러나는 종교현상이 인간 경험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학은 밑바닥에 깔린 원인이나 본질 혹은 종합적이고 철저한 설명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종교의 형식 구조 및 가지적인 윤곽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설명을 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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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철학적 현상학>
그의 입장은 칸트의 철학에서처럼 실체와 현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는 실체적인 실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 즉 사물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그리스 시대에는 모든 다른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변치않는 실재가 영원한 형상들의 세계에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었다.플라톤철학에서 영원한 형상이 개별세계를 구성하고 구조화하는 질서를 나타낸다. 즉 생성이 존재를 반영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심으로부터 후설은 차원높은 순수지성으로 관심을 돌렸고 그리고 나서 사물 그 자체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것이 현상의 세계이며 생활세계이다. 후설은 단순히 관념주의에서 경험주의노선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다. 그는 확실성의 기초를 주체 안에 두고 있다. 확실성은 사실 세계에 앞선 본질적인 존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이것은 후설이 매개적 자아라고 묘사했던 그 자아가 모든 대상을 받아들이고 기초를 수용하는 근거임을 뜻한다.
후설은 지식이 확실하려면 그 인식적 맥락속에 있는 주체의 역할을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원주의적 해석을 막기 위해 후설은 생활세계의 내용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목표를 성취키 위해 그는 에포케라고 불렀던 방법론적 기술ㅇ르 사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현상이 현상으로 고려되도록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모든 가정들이 괄호쳐지는 것이다. 즉 목표는 사람들이 살고 느끼고 행하고 생각하는 생활세계로 접근하는 것이다.즉 에포케는 생활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다. 다음에 일단 생활세계가 발견되었을 때 현상학자는 근본적 구조를 밝혀내려 하게 된다.생활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현상학적 작업을 묘사하기 위해 그는 본질직관 또는 형상적 직관이라는 용어를 썼다.
<모리스메를로 퐁티>
그는 삶을 해독키 위해 어떤 선험적 차원의 통찰과 해석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육체 주체가 스스로 지식을 얻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은 불필요하다.즉 그는 의식과 세계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거기에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중구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방식이 중시된다.
이와같이 후설과 퐁티의 현상학사이에는 종교의 본질과 기원의 연구방법론과 유사한 차이가 있다. 후설은 영원성을 확인하려는 강한 노력을 보여주나 퐁티는 그것을 억지로 잡아야 한다고 보지 앟는다. 후설은 선험성과 매개적 자아를 인정하므로 신적 존재에 대한 묘사를 뒷받침하나 퐁티는 무신론적으로 보인다.
<엘리아데>
그의 의도는 종교경험의 패턴이나 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의 <비교종교학의 패턴들>은 그의 일생동안의 종합적인 업적을 잘 예시하고 있다. 그는 패턴과 구조에 집중함으로써 종교에 접근한다. 그는 종교의 영속적인 측면들을 밝히고 묘사하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그가 뽑은 항목들이 성스러움의 형태론을 통합적으로 형성해 내는데 도움이 됨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다.
그의 업적은 첫째는 앞서 본 성스러움의 형태론으로 오토는 서스러움에 대한 경험의 비합리적인 성격(전적인 타자성)에 집중했다. 엘리아데는 비합리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축소하진 않으나 이를 더 포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즉 “비합리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 속에 있는 성스러움의 현상을 다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다”즉 그는 종교의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종교전체속에 있는 성스러움에 관심을 가졌다.
고대에는 성스러움이 그들의 경험의 특징이었으나 현대에는 성스러움을 벗겨냄이 특징이다. 이것이 현대세계를 속된 양식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는 속된 양식은 성스러운 양식과 분리 될 수 없다고 본다. 즉 그는 성속의 관계를 히에로파니의 현존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스미스>
스미스는 종교라는 본질과 그 본질의 구체적 사례로서의 종교들이라는 기존의 익숙한 구도를 답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구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스미스가 그 구도를 극복하려고 했다는 것은 곧 그가 구체적인 종교전통을 탐구하기 전에 미리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고 들어가는데에 대해서 극력반대했음을 뜻한다. 정의를 내려놓고 그 정의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증명해 나가는 방식이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과 사례라는 구도를 수정하자는 정도가 아니다. 종교에 대한 정의나 규정은 내릴수도 내릴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다. 스미스는 종교전통을 단순히 실증적으로 묘사하거나 종교의 형태를 분류하는데 만족치 않고 종교의 의미를 파헤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선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여러 종교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앙은 단순히 종교의 한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한 자질이다. 살아있는 종교로 받아들이는 이슬람은 신앙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이슬람과 전혀 다르다. ”
이와같이 스미스는 주체의 내면이라는 차원 즉 신앙인이 그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학은 그런 방향으로 새 출발을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신념에서 스미스는 종교라는 말도 또 그 복수형종교들이라는 말도 이제 버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종교라는 말대 신 전통들, 종교라는 말대신 신앙을 쓰자고 제안했다.
스미스는 종교대신 전통과 신앙의 두개념으로 나누어 보고자 했다.종교전통이든 신앙이든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지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아니며 그 본질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429신앙은 개인의 자질이고 다양한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 표현된 형상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과 신앙이라는 두 초점을 중심으로 해서 스미스는 관찰자와 신앙인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될 접근 방법을 고안하려 했다. 스미스는 관찰자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지라도 종교인에게 별 의미가 없고 알아들을수도 없는 해석은 지양하고자 했다.
스미스의 접근방법은 인간의 종교이해가 진보적으로 발전한다는 신념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스미스가 말하는 축적된 전통이란 결코 고정된 현상이 아니라 살아있고 역동적이며 늘 강력한 성장요인이 작동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
430스미스가 주목하는 문제는 이론적인 것도 학자들만의 관심거리도 아니다.
“현대세계에서 종교간의 문제는 이론적인 공식으로 해결될수 있는 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근본문제는 역사적 문제이며 인류가 관여된 문제이다.역사적 문제란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며 우리 문면이 나아갈 방향과 우리가 인류역사의 새로운 국면에 성공적으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런 전망을 그는 <세계신학을 지향하며>에서 말한다. 그는 통일된 종교사나 보편적 자의식과 같은 개념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종교전통이든 간에 지금까지 전개된 인류의 전체 종교사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어느 것이든 간에 특정종교전통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각자 나름대로 신의 삶에 참여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존휙>-종교체험의 완성에 각 종교들이 일조하다.
종교란 일상의 세계 너머에 있는 하나의 신이나 여러 신들 또는 절대라든가 초월적 질서나 과정의 관념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에 대한 이해와 그 안에서 적절하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휙의 종교정의)
휙의 기본시각은 하나의 신이 전세계에 걸쳐 자신의 본성을 드러냈는데 각 지역에서 이미 전개되고 있던 사회와 문화의 양상에 부합되도록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계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 계시와 각성의 사건들은 엄청난 힘으로 새로운 종교문화를 조성했고 그 뒤 세계의 주요 문명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는 신이나 초월에 대한 관념이 모두 타당하다고 믿지 않으며 모두가 같이 타당하다고 믿을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앞으로 세상사람들이 지구촌 공동체의 특성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주요 종교들이 서로 대립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압도적으로 전개되는 세속화라는 보편적인 추세와 함께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이 힉의 신념이다.
<비교종교학에 대한 검토>
종교의 비교연구를 할 때 모든 종교는 이상적인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점 즉 기존의 종교전통은 그 어느 것도 그 규범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결론이 난다. 이런 맥락에서 그 이상적 규범이 종교전통개혁의 원칙으로 작용할수 있다. 즉 이상적 종교관을 세워놓고 각 종교가 이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말하는 그들은 이미 분석가가 아니라 종교운동가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차이를 초극하고 서로간의 장벽이 없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교종교를 통해 종교의 본질적 실체를 밝힐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교연구의 타당성을 상실케 된다. 그것은 종교전통들이 서로 협력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비교종교학이라 보는 태도는 비판적 학문의 경계선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러한 동기자체가 이미 학문적 안건만이 아니라 실제로 종교적 안건가지 떠맡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굿이너프는 종교학이 엄격히 과학적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방법이란 중립성 객관성 개방성을 유지함을 말한다.과학적 방법은 신비를 신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 적절하게 접근해 갈 능력이 있다는 것이 그의신념이었다. 그러나 그의 과학적 접근도 일종의 새로운 종교로 신봉하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종교학의 미래>
종교에 대한 연구분야는 다양한 문제 관심 주제를 취급하는데 다양한 연구방법이 사용된다. 종교학은 단일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접근방법만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주제도 접근방법도 다양하다.
또 종교학은 다른 학문과 깊은 연관이 있고 다른 연구분야와 그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종교학의 뿌리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 의해 수정되면서 종교의 본질을 분리해 내려는 시도로 변형되었다.즉 그것은 간단한 초점(종교의 뚜렷한 하나의 본질)과 하나의 고립적인 이성적 관심(그것없이는 종교가 될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인가?)이었다. 그들을 자극한 것은 하나의 조직원리를 가지고 지적 일관성을 수립하려는 욕구였다.단일성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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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기원자들의 욕망은 종교를 종교이게 하는 본질적 요소를 밝혀내거나 그것의 근본원인 혹은 그것들의 조합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다.
그 주제의 방법론적 전개에서 단일자료의 질문에 대한 몰두는 종교적 현상을 다양한 용어로 묘사하려는 다양한 시도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그렇게 양보하게 된 것은 단일 원리의 일관성이 충족되었거나 실패했다고 깨달앗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지적 관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그 주제에 관해 알수 있는 지식의 범위를 채워나가려는 의도같았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의 내용물이 수집되어서 설명보다 기술을 택함으로써 종교연구는 기술의 특별한 문법을 계발하게 되었다. 이로서 종교적 현상을 분류하는 종교현상학이 발전했다.
서로 구별되는 종교전통의 경계를 가로질러 패턴 구조 주제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다양성의 세계가 드러나자 기술적 설명은 기능적 설명이 될 수 있었다.
종교의 본질이나 기원에서 현상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고 다시 종교의 기능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와같이 관심이 바뀌고 입장이 바뀌면서 그 주제도 바뀐다.입장 통찰 그리고 발견은 함께 제휴하며 나아가는 것이다.입장 없이 발견도 존재할수 없다. 발견은 통찰과 입장 모두에 의존한다. 그리고 통찰은 입장을 확대하고 정당화한다.
456 종교의 기원을 밝혀내기 위한 자극중 하나는 종교의 본질은 밝혀내는 것에 대한 관심은 기원들의 탐구에 의해 부분적으로 대체된 이후에도 잠복해 있엏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초기부터 반복해서 표면화되었고 현대 종교기원자들의 자랑이었다. 종교의 필수불가결한 것을 밝혀내려는 시도를 대체한 종교의 기원에 대한 탐구자체도 대체되었을 때 종교현구의 방법론적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된다.그것은 단일한 초점에서 다원적 초점으로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였다.기원에 대한 연구는 재건되었다. 단 기술적이고 현상학적인 근거위에서 재건되었다. 모범적인 방법론들은 결코 소멸될 것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추가적 특징을과 결합하여 다시 태어난다.
하나의 추론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제 방법 의도 그리고 통찰이 하위분야와 연구분야간에 효과적인 상호작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463종교학은 안정성의 요소 즉 반복 가능한 형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발전해왔다. 안정성의 요소로서 평해지는 것은 확정이나 조직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명칭이다. 예를 들면 루돌프오토는 종교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거룩한 것을 밝히고 있다. 니니언 스마트는 비교종교학적 맥락 속에 나타나 있는 조직적이거나 결정적 요소를 밝힐 때 성분이나 차원을 선택한다.이같은 오토 스마트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의 방법론적 방향은 접근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구적이고 불변한 위치를 떠받치고 있는 것을 밝히기 위한 형식적 원리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470 종교학은 종교라는 주제를 지성적이 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성적으로 명료화 하게 하는 그런 노력을 살펴보면 종교라는 주제가 우세한 패러다임의 작용에 부분적으로만 의존해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합리적 지성의 범위 밖에 있는 종교자리의 탐구 종교와 종교적 경험에만 꼭 들어맞는 언어를 만드는 노력 논리이전의 세계라고 정의되는 미토스세계.
종교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종교학의 내용은 종교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2종교학이 종교를 방생시키거나 제시할수 있는 유일한 양태는 아니다. 이 모든 사실은 확립되어 있는 규범인 비판적 합리성이 직접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지 못한 주제의 양상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종교안에는 합리화의 과정에 저항하는 의미들이 있다.
종교학은 종교가 종교학적 언어로 완전히 옮겨낼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폴틸리히>
그의 기본적 시각은 종교의 필수불가결한 것이 무성이냐를 밝히고자 하는 관심이다. 그는 종교의 본질을 궁극적 관심이라 했다. 즉 세계종교는 각자 궁극적 관심을 집어내고 표출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고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것이 아니다.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행한 조직신학을 위한 종교학의 중요성이라는 강연에서 계시는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접근방식의 개요를 제시했다.
즉 계시는 유대교 기독교의 체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종교를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로 나누는 범주화는 쓸모없다는 뜻이다. 계시의 사건이 수용되는 것은 반드시 특정 사회 문화 역사적 정황속에서라는 것이다. 즉 계시는 언제나 실제 삶의 조건과 결부되고 그것을 반영하여 인식되며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 계시는 일화로서 일어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틸리히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계시의 체험은 연속된다.”틸리히는 계시의 과정이 어떤 본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유형으로 전개되는가를 밝히려 했다.
틸리히는 계시가 개진되는 과정의 기본적 역동성을 바로 성스러운 것의 현존 또는 실재라고 보았다. 성과 속과 나란한 것이 아니라 속의 심부 즉 근본이다. 즉 성이란 지속적인 계시의 과정을 일으키는 역동적 실재를 일컫는 말이다. 지속적인 계시과정의 기본적 핵심요소를 거룩한 것 궁극적인 것이라 적시하는 것이다.
끝없이 뻗쳐나가는 진보적 발전이란 없다. 거룩한 것을 체험하는데 기본요소가 있고 거룩한 것이 체험되는 경우라면 어디에나 그런 요소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그런 다양한 구성요소가 있는 것은 계시의 가정이 역동적인 긴장을 계속해서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역동적 긴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틸리히에 의하면 모든 종교에는 세 필수요소가 있다. 성례전 신비 윤리가 그것이다. 성례전은 거룩한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성례전은 우상숭배화되는 경향 즉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거룩한 것 그 자체로 착각하는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오류를 수정키 위해 신비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윤리의 요소는 성례전의 부정적 산물을 수정키 위해 필요하다. 종교체험의 세 번째 요소는 해야 한다는 당위의 요소이다.
성례전에 집착함으로써 빚어지는 사악한 결과 거룩한 이름으로 정의를 부정하는 것 등을 비판하는 것이다.이 지속적인 심사와 균형의 과정을 낳는 산물을 두고 그는 구체적인 영성의 종교라고 불렀다. 구체적인 영성이라는 말이 내재된 목표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나탄 쇠더블룸>-계시개념의 확장
그에게 계시란 신성한 진리를 역동적이고 다양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즉 그는 기독교를 특별한 계시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그는 기퍼드강연에서 인류의 종교적 이해가 발전한 전반적인 과정과 기독교적 의미의 계시 진리 사이에 근본적인 상보적 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그는 신의계시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신의 손에 들어있다. 그리고 역사는 나름의 목표가 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인간의 인지능력 밖의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교회의 근본적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다. 즉 하느님은 늘 살아있는 신이며 지금도 살아있고 결코 늙지 않고 활동이 감소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임종시 다음과같이 말했다. “살아있는 신이 한 분계신다. 나는 그것을 종교의 역사를 갖고 증명할 수 있다.”
이 고백은 두가지 확신을 한데 응축하고 있다. 인류의 종교적 이해가 발전하는 긴 과정은 끊임없이 신을 찾는 과정이라는 확신이 그 하나이다. 그리고 그 탐색은 바로 그 신이 인간에게 요청한 것에 대한 반응이라는 확신이 또 하나이다.
<카알 라너>-자연종교의 파괴가 아닌 완성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완성시킨다고 라너는 주장한다.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은 세계의 종착점과 관련된 것이라 주장한다. 태초부터 기독교가 절대적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한 것과 다른 얘기이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의 섭리에 어긋하는 일은 안라는 뜻일뿐이다.다양한 종교적 관점이 허용되면서도 오직 하나만이 가치가 있다는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모든 종교를 다 알 때 더 잘 이해할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기독교이외의 종교에 대해 취할 태도는 만인은 예외없이 신의 은총을 입었다는 신념이다. (은총은 인간이 체험으로 인지할수 있는 범위 밖이라는 라너의 신념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익명이다. 인지의 범위밖이란 곧 의식의 범위 밖이라 할수 있다. 라너는 나아가 익명의 기독교인들이 객관적 성찰을 통해 또 교회가 마련해 놓은 사회적 형식에 따라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은총으로 충만했음을 깊이 믿는 기독교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넷째 지금 이 시점에서부터 인류역사가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인간의 인지먼위 밖의 요소를 강조하면서 지금부터 종말까지 종교인식의 개발에 더욱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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