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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회복을 향한 영성
 WRITER: 관리자  (118.♡.108.214) DATE : 09-05-15 11:57 READ : 1530
관계 회복을 향한 영성
최현민


들어가면서

  2006년 건학 100주년을 맞이한 동국대학교는 ‘지식기반사회와 불교생태학’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때 강사로 초청되신 헬레나 노르베리 호리(Helena Norberg Hodge, 1946년)여사의 강연은 내게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노르베리는 1970년 중반에 학위논문을 위해서 인도 북부의 라다크에 가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녀는 현대사회의 진보 물결이 들어가지 않았던 당시 라다크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엄혹한 기후 등 거친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 놀랐다. 노르베리는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행복감을 갖게 했는지 궁금하여 라다크에 머무는 기간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녀는 행복이 결코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종전에 자신이 가졌던 가치관의 전환이 왔음을 고백했다. 그 전에 그녀는 세계의 진보와 발전의 방향은 어쨌든 불가피한 것이고 그 흐름 속에서 삶이 나날이 힘들고 빠르게 느껴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다크의 생활을 통해 자신이 가졌던 수동적 태도가 자연과 문화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 것임을 자각했다. 자신의 가치관이 인간의 본래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산업사회가 가져온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세계의 진보와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하기에 그 흐름 속에서 겪게 되는 나날의 힘겨움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절제 가능한 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르베리가 지적하듯이 현대 산업사회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상을 향해 줄달음쳐가고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허덕거리며 뒤쫓아가기 바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속화되는 발전의 물결 속에서 현대인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상품가치를 지닌 전문인이 되기 위해 자기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자신을 좋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인간도 점점 상품화되고, 인간관계 또한 상품교환의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문화 추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전문화, 중앙집중화,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 생활양식은-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간의-힘의 균형이 깨져가는 현실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족 간의 관계가 와해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은 힘의 균형이 깨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이 뒷면에 총체적인 우리의 관계망이 무너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생명체이건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망 속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관계의 사슬이 끊어질 때 결국 생명체의 존속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운 먹이사슬에서도 잘 드러난다. 먹이사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생명이 파괴되었을 때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받는다.
  모든 생명체의 사활이 걸린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태환경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단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 관계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각 분야의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파괴된 관계성 회복을 위해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영성적 측면에서 ‘관계회복’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현대에 들어서서 많은 이가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계단절로 인한 영혼의 빈곤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현대인은 쫓기는 생활 속에서 영혼의 쉼터를 찾는다. 그들은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를 얻었지만 타자와 연대기반이 점점 와해되면서 마음의 빈곤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일어나는 명상의 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명상을 가르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 방법들 중에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이 물음과 연관지어 현대사회 안에서 성행하는 신영성운동에 대해서 고찰해보고, 이를 불교나 그리스도교 영성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신영성운동

  오늘날 이곳 저곳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명상법은 신영성운동과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 많다. 신영성운동-뉴에이지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 신영성운동은 1970년경부터 주로 선진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개인주의적 종교운동을 말한다. 신영성운동의 출현은 과학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몰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합리주의에 근거한 과학발전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우리 기대와는 달리 과학만능주의는 생태계 파괴와 핵전쟁 위협, 인간성 상실 등 폐해를 낳았다.
  이러한 과학만능주의의 한계가 드러나자, 그 기반이 된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 등장하였다. 신영성운동은 바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하여 등장하는데 기존의 구원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다원화를 통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신영성운동은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적 사상을 용광로 속에 넣고 융합시켜 통합체로 만들고자 한다.
  신영성운동은 초자연적 힘이나 카리스마적 존재에 의존하는 대신, 개인의 자율적 각성에 의한 영성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기성종교가 인간 본래의 영성을 억압해 왔다고 보고, 지금이야말로 자유로운 개인에 의해 영성이 개발되는 시대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신영성운동은 인간의 초월능력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신 중심에서 우주적 인본주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신영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현대인은 종교교단 조직에 구속되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신영성운동은 종교교단조직 대신 네트워크를 통해 각 개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취한다. 신영성운동이 공동체보다 개인에 중점을 두는 것이 따뜻한 인간관계보다는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의 특성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하자고 주장한다.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부의 신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뉴에이지에서는 환생(還生)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인간이 환생을 거듭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을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의식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기완성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 과연 이것을 궁극적인 ‘자기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안에 능력을 무한히 키워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함은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이 과연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자기완성인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함께 살아갈 공동체적 운명을 타고 났다. ‘자기완성’은 결코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개인의 신격화를 목표로 하는 신영성운동은 우리의 문제인 관계성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2. 불교전통 안에서의 관계영성

1) 연기(緣起)

  뉴에이지 명상은 인도사상이나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참선이나 수양, 요가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의 명상을 뉴에이지 명상의 한 부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 명상과 신영성운동의 그것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뉴에이지 명상이 개인주의에 기초했다면, 불교 명상은 삼라만상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연기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사상은 삼라만상이 상호 깊은 연관 속에 있다는 자각에 기초한다. 틱낫한은 연기를 상호존재적(interbeing)이라고 해석한다. 한 장의 종이는 종이가 아닌 요소로 되어 있다. 종이가 아닌 요소란 구름, 비, 나무, 햇빛 등을 말한다. 이 요소를 모두 제거한다면 종이는 더 이상 종이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한 장의 종이와 나무, 태양, 물, 목수 등 종이가 아닌 요소와의 관계는 삼라만상이 상호연관 속에 있다는 연기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통 사람은 ‘장미는 아름답고 쓰레기는 더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금 꺾어서 꽃병에 꽂은 장미는 아름답지만, 며칠이 지나면 장미 역시 쓰레기가 된다. 이런 점에서 장미와 쓰레기는 공존한다. 장미 없이 쓰레기가 있을 수 없고 쓰레기가 되지 않는 장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 관계 속에 있다는 연기(緣起)야말로 불교의 근본 진리인 것이다.
  연기사상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면서 다양하게 설명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중첩되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말하고 있다. 법계연기의 세계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상입이란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는 무실체적인 존재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화엄의 제3조인 법장(法藏)스님의 설법에서 상입은 사면이 거울로 된 방 가운데에 놓여 있는 횃불 모습에 비유한다. 한 거울 속에 다른 거울의 상이 들어오면 무수히 많은 횃불의 상이 거울에 비추어진다. 이때 한 거울에 다른 거울의 상들이 서로 교차하지만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거울에 나타나는 무수한 상이 서로 합쳐지듯이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또한 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듯이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있음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화엄세계에서 말하는 사법계 중 마지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石疑法界)이다. 이것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서로 상즉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범부의 눈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이지만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사람이 산이고, 산이 물이고, 물이 사람이 된다. 서로 장애됨 없이 모든 것이 상통하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바쇼오(芭蕉)가 지은 하이쿠(일본의 짧은 정형시) 중 “개구리가 연못에 퐁당 뛰어드는 소리”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소리가 들렸다’로 이해한다. 즉 연못과 개구리 그리고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들 때 나는 소리가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쇼오의 하이쿠에는 개구리도, 개구리를 바라보는 주체도 사라지고 오직 연못 속으로 뛰어들며 개구리가 내는 소리만이 있다. 개구리라는 객체도, 개구리를 보는 주체도, 연못과 그 속에 뛰어드는 개구리라는 존재 간의 경계도 다 사라지고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우주의 소리만이……. 이와 같이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드는 그 찰라의 순간을 표현한 바쇼오의 하이쿠는 사사무애의 세계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기도나 명상에 깊이 들어갈 때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10여 년 전 일본에 유학했을 때 비구니 스님들과 일주일 동안 참선수행을 함께 한 경험이 있다. 신체적 고통과 잡념으로 무척 힘든 수행이었지만 소중한 체험이었다. 참선 마지막 날, 수행이 끝났음을 알리는 큰 북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 안에 너무도 크게 울려 북소리와 내가 하나가 된 가슴 벅찬 느낌이었다. 그 순간 북소리와 나의 경계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북소리가 내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기까지 품고 있던 삼라만상의 모든 것-북이 있기까지의 모든 존재-이 하나가 되었다. 마치 개구리가 연못 속에 뛰어들며 낸 소리처럼, 북소리는 나와 북과의 경계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존재, 일주일간 수행의 고락을 함께 나눈 모든 스님과의 존재의 벽도 허물어버렸고 법당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진 사사무애의 세계를 현현케 했다.
  이와 같이 연기사상은 존재하는 무엇 하나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불교명상을 통해 우리는 모든 장애가 사라진 사사무애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인 깨달음은 단지 내적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행으로 이어질 때 가능하다. 부처님은 연기를 깨달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이 불교라는 구원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당신의 구체적 삶 속에서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자비행이다.

2) 연기의 깨침을 통한 자비행

  연기에 대한 깨달음의 완성은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우러나는 삼라만상을 향한 자비행에 있다.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제10도는 입전수수(立廛垂手) 곧 마을에 들어가 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궁극적 깨달음이란 공(空)의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비행을 실천함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자신의 깨침을 자비실천을 통해 드러내는 이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 부른다.
  보살은 ‘깨달은 자’이면서도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됨을 보류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보살의 자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화로 「유마힐소설경」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에 나오는 유마거사를 들 수 있다. 병에 걸린 유마거사에게 그 이유를 묻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보살이 앓는다”고 답한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있는 한, 자신의 아픔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유마거사가 자기 몸과 중생의 몸이 한몸임을 통찰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중생의 병이 다 나아야 나의 병도 낫는다”는 유마거사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생의 아픔을 몸으로 함께 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적 사랑을 느낀다.
  대승불교는 연기와 무아의 깨달음을 통해 드러난 동체대비적 실천행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비행은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향해 열려 있다. 동체대비를 실천하신 구체적인 예로 천성산 지킴이신 지율스님을 들 수 있다.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스님의 단식투쟁에서 우리는 “자연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라는,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연기적 깨침은 나와 남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내 존재의 무아성을 깊이 자각할 때 나와 네가 둘이 아님(不二)을 자각하게 되고, 여기서 자비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 즉 연기의 깊은 자각은 자비행을 낳는다. 이것이 불교명상이 지향하는 궁극적 세계이다. 이러한 불교의 관계적 영성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2. 그리스도교의 관계 영성

1) 예수의 깨침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시자 대부분의 방송매체에서 한 주간 동안 그분의 삶을 회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40만의 인파가 명동성당을 찾아가 그분을 추모하였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곳을 찾게 했는가? 이에 대해 한 신문 사설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생전에 김 추기경이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양심의 소리를 내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놓았듯, 그의 죽음은 겸손에 바탕한 사회통합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했다. 정파, 이념, 지역, 빈부, 종교로 나뉘어 분열과 대립,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 저변에는 통합과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 김 추기경이 성(聖)의 세계에서 현실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이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세계일보 2009년 2월 20일).
  또 다른 신문 내용이다. “이 현상을 통해 종교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읽을 수 있다. 그동안 제도권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은 종교의 현실과 우리 사회의 기대 사이에 놓인 괴리 때문이다. … 21세기를 사는 세속사회가 목말라하는 가치가 종교라는 이름에 투영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한겨레신문 2009년 2월21일).
  그분은 생전에는 많은 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돌아가심으로 더욱 빛을 발하시며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새롭게 되살아나신 것이다. 많은 이가 그분을 추모하는 이유에 대해서 각계각층이 내놓은 해석들 중 공통되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셨던 그분의 삶이다. 우리는 모두 김 추기경님을 통해 다시금 사랑의 위대함을 재발견하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사랑의 나눔이라는 이 보편진리의 근원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는 탄생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재는 척도, 최후심판의 척도라고 말씀하셨다. 즉 최후에 우리의 삶을 재는 잣대는 내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사랑을 실천하셨다. 이에 대해 우리는 쉽게 ‘그분은 본래 그런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예수께서 온전한 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핵심은 당신이 깨달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이사 61, 1-2). 
  예수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신 것은 바로 당신을 파견하신 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드러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야말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비심은 그분으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도록 촉구했다.
  하느님의 자비(compassion)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 함께 아파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cum patior’에서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 데에 하느님 자비의 참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넘어서 당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이는 예수 안에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품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달으셨고, 이를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간의 상관관계는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깨침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2) 본래성에 대한 깨침

  우리는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성에 대해서도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상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우리의 본래성을 그저 교리적인 것으로 괄호 속에 넣어버리고 실제로는 죄인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온 것이 사실이다. 보물도 꼭꼭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겨두면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본래성이 빛을 발하기 위해선 덧씌운 포장을 벗겨 내는 수행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하느님의 모상-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으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듯이 말이다.
  왜 예수께 가능했던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타고 났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탓이 아닐까? 우리 또한 하느님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게 될 때 우리 자신도 그 자비의 본성을 지녔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 자신의 신성도 발현케 될 것이다.
  14세기 탁월한 관상가였던 루이즈부로크(John Ruusbroec, 1293-1383)는 인격의 핵심은 내재적이거나 근원적 본성(intrinsic fundamental nature)으로 보기보다, ‘존재(being)’ 혹은 ‘존재함(is)’으로 본다.(Rob Faesen, “John  Ruusbroec as a Major Contemplative Christian Author” Sino Christian Studies No 3, Jun 2007, p.70.) 이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거져 주어진 본래성을 삶을 통해 구현해 나갈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본래성을 이해할 때, 인간은 한번의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계속 창조되어 가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듯이(creatio cintinua), 우리의 존재성도 창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창조의 방향성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모델로 제시한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 함은 그것이 내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정체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존재함이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니셨던 이마고 데이(Imago Dei)는 그분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사이 3장 9-10절에서 예수를 통해 완성된 인간상이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참된 가능성으로 주어졌음을 말한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한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10).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가 지닌 사랑의 의미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예수의 자각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깨달으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그분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자신의 본래성 안에 드리운 인성과 신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신 인성을 통해 자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셨듯이, 우리 또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할 때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자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 실천은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어 남에게 베푸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구현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인 하느님 모상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을 사는 길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총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그러진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것은 단지 김수환 추기경님을 뵙기 위해서만도 아니고, 이 사회에 참된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갈증에서만도 아닐 것이다. 김추기경님 안에서 그동안 잊고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보고, 그 본래 모습을 만나고 싶었던 그리움이 우리의 발길을 명동성당으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닐까? 또한 그분의 삶 안에서 우리가 닦아야 할 수행의 길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본래성을 깊이 자각할 수 있고 그 자각이 우리 삶에서 자비행으로 꽃피워간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관계 영성인 것이다.

나오면서

  지난 1월에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국제세미나에 참석차 이스라엘에 다녀왔다. 세미나 중 예루살렘의 가톨릭 묘지에 묻혀 있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지를 참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 마침 쉰들러 리스트에 있던 두 분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다. 우리에게 나누어준 쉰들러 리스트에 두 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몬더러 나첨(Monderer Nachum)과 그의 아내 월훼일러 유제니아 (Wohlfeiler Eugenia)였다.
  나첨은 오스카 쉰들러 무덤 앞에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다음 회고록을 낭송하셨다. “내 삶을 구해준 분이 여기 쉬고 계신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아내인 유제니아도 … 그는 우리를 구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중매인이기도 했다.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60년 전 그의 공장에서였다. 그가 1,300명의 다른 유대인을 브런리즈 캠프(brunnliz camp)에서 구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년 전에도 우리는 외국 교육자 그룹과 함께 여기에 섰다. 바로 그날은 우리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한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우리 아이들과 열 명의 손자들도 초대해 그들에게 소개했다. 지금 우리는 자유인이다. 우리 두 사람이 지금은 열명이 되었다. 쉰들러 리스트에는 1,30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쉰들러는 1,300명만 살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 아니 유대인의 미래를 살린 것이다.”
  오스카 쉰들러 한 사람의 자비행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고 유대인의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역사를 낳았다.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이들은 죽은 후에도 우리네 가슴 한가운데에 계속 살아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본래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사랑의 씨튼 수녀회·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