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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2016년 12월 종교강좌 녹취록입니다.
 WRITER: 관리자 DATE : 17-02-03 16:56 READ : 3697
최현민 수녀님께서 '장자 읽기 (2) - 세상과의 소통'을 주제로 강의하셨습니다.
 
 
 
    지난 시간 장자의 1장 소요유를 다루었는데요, 오늘도 이어서 장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 전체를 두 시간 동안 다룰 수 없기 때문에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장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입니다. 바로 전국시대죠. 강의에서 거듭 전국시대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그 때 중국사상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가들이 나왔죠. 이 축의 시대를 살았던,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나름으로 시대적 해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공자, 맹자, 묵자 등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시대적 해법을 이야기했지만, 장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언어의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언어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더 근원적인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든, 사회의 문제든 말입니다. 제가 오늘 강의하는 중에 장자가 바라본 유가사상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올 것입니다.
 
 장자는 궁극적으로 자유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와 직결되는 사회의 평화, 즉 자유와 해방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소요유 1장의 이야기도 결국은 자유에 대한 이야기였죠. 장자가 소통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살피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 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자>는 많은 우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언이라고도 하는데요, 우언 중에서도 중언이라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언이란 권위 있는 사람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입니다. <장자>에는 중언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주로 공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공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장자>는 내편과 외편으로 나뉘어져 있고, 외편은 장자의 후학들이 편집한 것이고, 장자가 직접 쓴 것은 내편 7편이라는 것이 학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한 바입니다. 오늘 할 이야기 대부분이 내편의 이야기이지만, 장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외편에서도 갖고 왔습니다.
 
1. 바닷새 이야기
 
장자 외편 지락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떤 바닷새 한 마리가 노나라 서울 교외에 날아와 앉았다.(그 새가 몹시 마음에 든) 노나라 제후는 (몸소) 찾아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술을 권했다. 그리고 (그 새를) 즐겁게 해주려고 궁중음악을 연주해주었고, 맛있게 먹게 하기 위해 소와 양과 돼지를 잡아 음식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바닷새는 얼이 빠지고 근심과 슬픔에 잠겨 고기 한 점, 물 한 방울 먹지 못하고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장자 외편 至樂)
 
 이 바닷새 이야기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나요? 어떤 이야기를 바닷새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어 있을 까요? (수강생: 격에 맞지 않는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아니다.) 네, 바닷새에게 어울리지 않는 음식들, 궁중음악을 주었죠. 새를 굉장히 사랑한 것은 사실이죠. 자기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새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랑은 했으되 그것이 자기방식의 사랑이었던 것이죠.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게 아니라, 인간을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른 것입니다. 여기 혹시 애완견 기르는 분 계시나요? 요즘 산책하는 길에 보면 개들이 옷을 입고 있거나 신발도 신고 있는 걸 보게 돼요. 신발을 신고 뒤뚱뒤뚱 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장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새가 결국 죽고 말죠. 장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고착된 자의식, 바로 이것이 타자와의 소통에서 걸림돌이 되고 결국은 상대를 죽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자의식이 계속 반복되어 나올 것입니다. 장자는 이것을 성심(成心)이라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구성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장자에게 있어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풀어내야 할 것은 각자가 갖고 잇는 성심의 문제입니다.
 
 이어서 모자장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물'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장자> 제2편이 제물편입니다. 장자 사상에 있어서 소요유와 제물편이 가장 핵심입니다. 이 1장과 2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장자 사상의 반 이상, 70%를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물편이라 했을 때 제물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는 고르다, 가지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죠. 고르다, 가지런하다는 것의 의미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함을 인정하면서 서로 조화롭게, 일치되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물을 가지런히 한다는 것은, 통합시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함을 그대로 두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죠. 이게 바로 제물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2. 모자장수 이야기
1) 제물(齊物)의 의미
 
 외편 변무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오리 다리가 짧다고 해서 그걸 길게 늘이는 건 오리에게 괴로운 일이고, 학의 다리를 길다고 그걸 잘라주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길게 타고난 걸 잘라서도 안 되고 짧게 타고난 걸 늘여서도 안된다.”
 바로 이해가 되죠. 그런데 장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려고 하는 것에는 유가에 대한 비판도 섞여 있습니다. 유가, 특별히 맹자 사상에 보면 사단(四端)이 있죠. 사단(四端)은 인의예지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 안에 이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단서, 싹이 있다고 보았어요. 이 말은 인간 본성은 본래 선하다는 것이죠. 인의예지라는 단서가 안에 전제하는 것이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물로 걸어 들어가는 갓난아이 이야기를 건네죠.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서 아이를 살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걸 기반으로 성선설이 나오게 된 것이죠. 맹자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공자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이론적으로 확립한 것입니다. 유가 전체에서 인간의 본성을 인의(仁義)로 봅니다. 장자는 그것에 대해 반박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의 본성은 인(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본성은 각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리의 본성이 있고, 학의 본성이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를 살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것이죠. 이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유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입니다. 결국은 제라고 했을 때, 그것은 똑같이 일률적으로 하는 '가지런함'이 아니고 그걸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모자장수 이야기
 자의식인 성심에 대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어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자 장수 이야기입니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소요유)
 
  아주 짧은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좀 알아야 여기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쉬울 텐데요, 송나라와 월나라가 나옵니다. 장보라는 모자는 예식을 할 때 쓰는 관이에요. 송나라에서는 예식을 할 때 늘 장보라는 모자를 썼어요. 여기 나오는 모자 장수는 이 모자를 월나라에 가면 팔면 좋겠다 한 것이에요. 그런데 갖고 가봤더니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짧고 문신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월나라는 오랑캐족이에요. 예식을 차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장보가 필요치 않는 것이죠. '모자 장수가 멍청하네, 미리 알아봐야지.', '장사 수완이 없네' 생각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우리한테 장자가 건네고자 하는 것은 송나라 사람이 갖고 있는 성심의 문제입니다.
 
 월나라에 가기 전에 모자장수가 마음 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월나라에 가서 모자를 팔아 부자가 되어야지.'였죠. 그런데 가서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틀렸구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심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은 이 모자를 어디에 가서 팔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자기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입장이기에 어리석은 것이 보일 뿐, 우리의 삶의 자리 안에서 우리들은 고착된 자의식으로 어떤 상황을 직면하고, 내가 갖고 있는 성심을 주입시키려 하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송나라의 모자 장수는 그 상황을 만나면서 자신의 성심이 깨지는 경험을 합니다. '내 성심은 보편적이지 않구나.'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각자의 성심, 고착된 자의식으로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시시비비를 겪습니다. '내가 맞다, 너가 틀리다.' 늘 항상 내 생각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죠. 그러니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주장을 하는 것이죠. 밖에서 주워들은 것이라도 자기 안에 들어와서 고착화 되면 그게 옳은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제 3자가 봤을 때, 그 사람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판단하고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종합해보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내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죠. 다른 상대와 시시비비를 나눌 때,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고착된 자의식으로 시시비비를 논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시시비비의 굴레 속에서 살다가 끝나는 것이죠. 끊임없이 내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내가, 내 성심이 옳다는 걸 주장하다가 끝나는 것이죠. 심심이 피곤하고 심신이 쇠약해지는 것이죠. '나의 성심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안다고 해도 그걸 내려놓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결심을 해도, 피정을 일주일 해도, 한 달 해도 자기 성심으로 다시 돌아가요.
 
 3. 남곽자기 이야기
 
 이처럼 장자가 말하는 성심의 문제 한 가운데 와 있는데, 그 다음 이야기 또 들어보죠.
 
“어느 날 남곽자기가 탁자에 기대 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멍하여 그 짝을 잃은 것 같았다. 곁에서 그를 모시고 서 있던 안성자유가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자기가 알던 스승은 온데 간 데 없고 생판 다른 사람이 스승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는 듯하다. 놀란 마음에 스승에게 말한다.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형체는 흡사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진실로 꺼진 재와 같습니다. 지금 탁자에 기대어 있는 분은 예전에 탁자에 기대어 있던 분이 아닙니다. 스승은 “언偃아,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너는 그 뜻을 알 수 있겠느냐.”(제물편)
 
 여기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말이 나오죠. 이게 무슨 뜻일까요? 스승으로 등장하는 남곽자기의 모습을 연상을 해보면 어떤 상태로 있는 것 같나요? 혼이 빠진 모습이죠.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은 꺼진 재와 같고. 또 “옛날에 알던 그 분이 아니다”라고 나오죠. 존재의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변화를 경험한 그 스승이 건네는 말은 무엇인가요?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여기서 키워드는 “짝을 잃은 것 같다”, “형체가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은 진실로 꺼진 재와 같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입니다. 이것들만 이해하면 이 이야기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먼저 '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대대관념입니다. 아까 학의 다리와 오리의 다리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그게 바로 대대관념입니다. 길다/짧다, 높다/낮다, 아름답다/아름답지 않다. 이러한 대대관념은 모두 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사람이 아름답지 않고, 키가 작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성심에 따라서 대상이 다르게 판단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성심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를 짝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마치 죽은 사람 같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죽었지만 살아잇는 상태죠. 생사의 관념을 넘어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아집과 법집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법집은 여기서 나오는 대대관념에 대한 집착과 대응됩니다. 대대관념, 즉 법에 대한 집착이죠. 이 법집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끝까지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집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이죠. 여기서 '나는 나를 잃었다'는 것은 아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집이 남아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생사의 관념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그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자가 '마른 나뭇가지와 같고 꺼진 재와 같다'고 한 것은 아집까지도 다 자유로워진 그런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을 '나를 잃어버렸다', 즉 '오상아(吾喪我)'라고 표현합니다. 아(我)는 ego, 오(吾)는 Self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집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상태를 남곽자기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자의 경우 구체적으로 도를 어떻게 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든데, 장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4. 조삼모사 이야기
 
 다음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조삼모사, 평소에도 많이 쓰는 표현이죠.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며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했다. 여러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로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제물편)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건네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주 심오합니다. 바로 인시(因是)와 양행(兩行)입니다. 인시(因是)란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성심에 의해서 '이것'이라고 결정하는 행동이 바로 인시입니다. 원숭이의 입장에서는 아침에 먹이가 많아야 하고 저녁에는 적어야 한다는 것이 인시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었던 그 생각에서 반대가 되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죠. 우리가 원숭이를 보고 어리석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시비의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장자는 이명(以明)이라 했습니다.
   명나라 말의 사상가 왕부지는 명(明)과 대구되는 것으로 지(知)를 들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명은 태양에 해당되고, 지는 등불에 해당됩니다. 왕부지는 "어리석은 자들은 지를 명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명은 태양이고, 지는 등불에 불과합니다. 태양이라는 것은 불을 붙일 필요가 없고 늘 밝은 것이죠. 그러나 등불은 꺼질 수 있는 것이죠. 이명이라고 했을 때 명은 늘 밝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주관적인 성심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양처럼 꺼지지 않는 밝음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도추(道樞)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하나의 중심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물레의 정중앙은 물레가 아무리 돌아가도 그 자리에 가만히 고정되어 있죠. 이와 같은 것을 도추라 합니다. 도추가 바로 장자가 이야기하는 양행(兩行)에 해당됩니다. 양행(兩行)이란 도추에 의해서 시시비비에 흔들림이 없이 양쪽을 다 인정하면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시시비비의 문제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면서 나아가는 방법론이 장자가 이야기하는 양행입니다. 이것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삶 안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양행을 마음에 새기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물레의 정중앙에 물체를 두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죠. 그래서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인물에 보시면 '자유로운 균형을 이룬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럼 이 양행을 마음에 새겨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5. 호접지몽, 장주지몽
 
 다음 이야기 또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나비꿈이야기, 호접지몽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간밤에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영혼이 훨훨 날아오르는 듯 그는 한 마리 나비였고 장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화들짝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주였다. 그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장주인지 장주가 된 꿈을 구고 잇는 나비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물론 구분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변화(物化)가 뜻하는 것이다.” (제물편)
 
 이야기는 아주 간단합니다.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된 꿈이었죠. 당시에는 본인이 장주인 줄을 몰랐다가 꿈에서 깨어나보니 장주였다는 것입니다. 조금 지나 생각해보니 장주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주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무엇이 진짜인가? 여기서 물화(物化)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장주의 입장에서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은 '꿈에서 깨어남'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은유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비'를 이야기했을까요? 나비라는 표현 안에는 변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화라는 것은 모든 존재가 연관되어서 유전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장자가 불교를 공부했나 싶을 정도로 비슷한 존재이해방식이 나오고 있는데요, 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는 하나고 둘은 둘이라고 이해합니다. 불교는 그렇게 존재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연기(緣起)에 의해서 존재를 이해합니다. 이 맥락 속에는 존재의 실상은 연기(緣起), 즉 연하여 일어난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불교에서는 인간이 이것을 탁자로 명명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이것의 존재를 들여다보면 이 존재 안에는 하늘도 있고 구름도 있고, 태양도 있고, 이것을 만든 목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관되어서 탁자가 된 것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존재 이해방식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존재는 다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이 탁자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인식할 뿐이죠. 그러나 이것은 변화합니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호접지몽에서의 장주의 인식이 이런 것과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또 화엄에서는 사사무애(事事無礙)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물과 사물 간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서로 간에 상즉 관계, 상익 관계를 갖는다는 관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바쇼(芭蕉)의 하이쿠를 하나 갖고 왔습니다. “개구리가 연못에 퐁당 뛰어드는 소리” 남은 것은 무엇인가요? 소리뿐입니다. 연못과 개구리가 모두 그 소리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개구리와 연못과 소리 사이에 아무런 장애도 없이 하나가 되었죠. 장주와 나비 간에 장애가 사라진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르는 이유는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존재방식을 넘어서는 것이 장자가 제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인드라망 구슬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화엄에서 이런 예를 많이 쓰는데요. 사방에 거울을 붙여놓고 촛불을 가운데 놓았어요. 그러면 초는 하나이지만 거울 전체에 촛불이 다 있는 것이죠. 혹은 그물코에 보석이 달려있다고 하면, 이 보석들은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여 마치 각 보석이 다른 모든 보석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이것을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一中一切 一切中一 一卽一切 一切卽一)
 
6. 포정해우 이야기 ​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이 닿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이 닿는 대로 삭삭 올리고, 칼이 나가는 대로 쉭쉭 소리를 내는데 음악에 맞지 않음이 없어 '상림(桑林)'의 춤과 '경수(經首)'의 잔치에 알맞은 것 같았다. 문혜군은 감탄했다. "하!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쩌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신이 마음을 쓰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 처음 소를 가르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디를 보든 소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가 온마리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 속에 깃들어 있는 신묘한 힘을 통해 접촉하고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으로 멈춰야 할 곳을 알고 신묘한 힘이 가는대로 따르려고 할 뿐입니다. 天理에 의지하고 큰 틈새를 따라 가르며 큰 구멍이 이끄는 대로 저를 맡기고 본래부터 그러한 바에 따릅니다. 단단한 뼈는 말할 것도 없고 인대나 힘줄도 결코 건드리지 않습니다. 좋은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세게 내려쳐서 가르기 때문이지요. 보통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후려쳐서 부서뜨리기 때문이지요.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소를 수천 마리 잡았으나 칼날은 숫돌에서 막 나온 것과 같습니다. 저 소의 관절에는 틈이 있으나 제 칼날은 두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로 넣으니 텅 빈 듯 넓어서 칼질이 춤을 추듯 충분히 여유가 생깁니다. 이것이 제가 십구 년이 지났으되 칼이 방금 숫돌에서 나온 곳 같은 이유입니다. 문혜군이 말했다."훌륭하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을 터득했도다." 양생주(養生主) '
 
 19년 동안 칼을 갈지 않았다니 엄청난 기술을 갖고 있구나.'라고 했을 때, 포정이 하는 말은 "제가 갖고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좀 더 들여다보죠. 소가 처음에는 덩어리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나니 조각난 소가 보이기 시작했죠. 그 다음에는 뼈와 힘줄이 보이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감각으로 멈춰야 할 곳을 알고, 신묘한 힘이 가는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기(氣)에 따른다는 것이죠. “천리에 의지하고 큰 틈새를 따라 가르며” 자연의 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막힘없이 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다 내려놓고 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연의 도에서는 막힘 없이 가는 거에요. 자기의 의지를 모두 내려놓고 가니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양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터득했습니다. 여기서 장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연의 도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 포정이 칼질을 하는 19년이라는 세월동안 터득한 것은 도의 경지, 자연의 도의 경지입니다. 자연의 도에 따라 칼질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해요. 자기로 차 있으면 절대로 칼질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장자가 건네고자 하는 구체적인 메시지의 정점에 와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어떻게 성심을 비워야 할까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심재(心齋)라는 것입니다.
 
7. 심재(心齋)
 
<인간세>편, 장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에 공자와 안회가 등장합니다. 공자의 입을 빌려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입니다. 안회는 위나라를 가려고 합니다. 위나라는 당시에 위임금이 나라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고 백성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 군사행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어요. 그를 교화시켜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안회가 그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갖고 가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고,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했던 제자에요. 불행하게도 공자보다 먼저 죽었죠. 그래서 자신 있게 안회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가보겠소.' <논어>였다면 '그래, 가서 그를 교화시켜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아서라. 가지 말라.'고 나옵니다. 안회는 왜 가야하는 지 가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말하고 있는데요, 공자 당신에 배운 인의예지를 다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서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유가가 가르치고 있는 인의예지 갖고는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했을 때 공자가 하는 말이 바로 심재입니다.
 
“공자께서 재계하여라. 하자 안회는 저희 집은 가난합니다. 그래서 몇 달동안 술을 마시지도 못했고 양념한 요리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것이면 재계하고 있는 셈이 아닌지요? 하니 공자는 그런 종류의 제계는 제사 지내기 전에 하는 것이지 마음의 재계가 아니다 라고 하자 안회는 마음의 재계에 대해 여쭙습니다. 공자께서 네 주의력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듣는 것은 귀에서 멈추고 마음은 생각과 부합하는 것에 멈춘다. 기운으로 말하자면 그건 허허로운 것으로 다른 사물들이 깨우기를 기다린다. 오로지 도만이 허허로움을 모을 수 있다. 허허로워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재계이다. 이에 안회는 “회(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는 행위가 회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행위의 주체가 되는데 성공하자. 회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허허로움인지요? 완벽하다!” <인간세>
 
 재계하라는 것은 제사 지내기 전에 몸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안회가 볼 때, 자신의 삶의 자리가 가난하니 이미 재계된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재계가 아니라 마음이 재계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장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나옵니다. 하나에 집중시키는 것, 전일(專一)입니다. 전일에 관한 이야기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공자가 초나라 가는 길에 숲을 지나다 노인이 댓가지로 매미 잡는 것이 마치 손으로 물건 집듯이 손쉽게 함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내가 매미 잡을 때는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서 댓가지 잡은 손은 고목가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마음을 오로지 매미에만 집중하는 수련 끝에 이렇게 잡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타자와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있죠? 마음을 비우는 것은 곧 상대에게 완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일이에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기(氣)로 듣는 것’ 그것이 심재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虛灵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비워내는 것, 이것이 바로 기로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氣)는 물질적인 기를 뜻한다기 보다는 정신적인 기를 말합니다. 물질적인 기라는 것은 '기력이 쇠하다', '혈기가 왕성하다'할 때의 기이고요, 정신적인 기는 '심기' 또는 '지기'가 있습니다. 혹은 의기(義氣)라고도 합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기는 후자의 기입니다. 이것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까 포정도 마찬가지죠. 바로 심기를 통해서 소를 갈랐던 것입니다. 안회가 위나라에 가서 임금을 교화시킨다는 것은 어떤가요? 바로 교화를 시키는 '나', 주체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심재라는 과정을 통해서 안회는 “회(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는 행위가 회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행위의 주체가 되는데 성공하자. 회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행의 주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쉽게 거짓으로 꾸미게 됩니다. 하늘이 내 안에 행의 주체가 되도록 할 때, 장자식으로 이야기하면 기가 되겠고, 그리스도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시시비비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일 공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더불어 수일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노자 사상은 나중에 종교화되었죠. 그게 바로 도교에요. 중국의 민중 종교로 활성화된 것이 도교죠. 오늘날을 이것이 불교 사찰 안의 삼천각 같은 것로 습합되었죠. 도교가 우리 나라 안에 살아있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수일입니다. 守其一 혹은 守其本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귀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이죠. 감각기관을 멈춰야 합니다. 마음은 인식의 차원이죠. 이 인식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진정한 타자와의 소통은 기로서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에 중요한 것은 수일,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가요?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하죠. 상대방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저 이야기에 나는 무슨 말로 반박하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듣기만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은 우리 안에 다 이미 있어요. 심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안회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공자가 비로소 위나라에 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신인이 되었다고 본 것이죠. 나도 버리고, 어떤 것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게 되면 나와 대상과의 간격이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물아양망(物我兩忘)이라 합니다. 상대와 나가 양쪽으로 다 잊혀지는 것입니다. 나도 잊고 상대도 잊혀지는 것, 이러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을 장자는 신인(神人) 또는 지인(至人)이라고 합니다. 또는 진인. 이것은 장자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유가에서 성인이라는 표현은 인을 완성한 존재를 칭합니다. 장자는 물아양망된 상태, 도와 일체가 되어서 소요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목적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지향합니다. 그러니까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죠. 그러나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무공(無功)의 경지. 이 경지에 들은 상태가 절대 자유의 상태라고 장자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8. 좌망
 
 마음을 비우는 방법으로 심재를 이야기했고, 좌망이라는 것을 또 이야기합니다. 정좌를 한 상태에서 잃어버리는 정신의 경지를 좌망이라고 합니다. 안회가 말했다. 제게 진전이 있었습니다. (공자왈) 어떤 점에서? 저는 예禮니 악樂이니 하는 것을 다 잊었습니다.” 좋구나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만나 제게 진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인仁이니 의義이니 하는 것을 다 잊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구나,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다른 날 안회가 다시 공자를 만나서 말했다. “저는 뭔가 이룬 것 같습니다.” “저는 좌망坐忘의 경지에 이르른 것 같습니다.” 공자가 깜짝 놀라 안색을 바꾸면서 말했다.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과 몸에 대한 생각을 놓아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하고 육신을 떠나고 일상적인 지식에서도 벗어나서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자연의 대도와 하나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계가 없어지고, 대도의 변화를 따라 함께 가면 집착하는 데가 없게 되니, 자네는 역시 훌륭하네. 나도 자네의 뒤를 따르고 싶네.” (大宗師) 공자가 안회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장자가 쓰고 있어요. 좌망에 이르기 전에 잊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예하고 악이에요. 이것은 유가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공자는 음악을 굉장히 사랑했어요. 그러나 이처럼 유가에서 중시해온 덕목을 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인과 의를 잊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가의 핵심이잖아요. 그것도 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가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면서 장자는 그것을 넘어서야 자연의 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장자가 볼 때, 유가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인위적인 것입니다. 인위적인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좌망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죠. “좌망은 육신에 대한 생각을 잃어버리고, (…) 큰 트임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은 잊어라. 잊어야 통한다. 배우지 않고 잊는 게 아닙니다. 배우고 나서 그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배우고 익힌 것을 잊어야 서로 통할 수 있다. 이 잊는 것, 忘이 아주 중요합니다. 망아, 망물, 망외(忘外) 이 모든 것을 잊고, 장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道行之而成’ 내가 걸어가는 데서 길이 완성된다는 것이죠. 그 길은 타자를 향한 길입니다.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길을 가기 전에 나를 잊고, 나를 비우고 들어가야 합니다. 장자는 자유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고, 그 자유는 장자 1장의 소요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처음 보았던 이야기를 다시 보겠습니다.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昆)이라고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하늘못)다. 재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책)이다. 재해의 말(기록)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바다에 있었던 존재가 하늘을 나는 새로 변화한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죠. 이 존재의 변화 이후, 엄청나게 큰 새이기 때문에, 날기 위해서는 큰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그 바람의 무게를 견뎌내야 날 수 있어요.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바람을 맞이 하듯이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미가 붕을 보면서, '뭘 저렇게 높이 날아?'하고 생각합니다. 힘겹게 높이 날 필요 뭐가 있나…. 그러나 진정한 자유가 맞본 사람은 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바람을 맞을 용기를 갖는 것이죠. 내가 길을 갈 때 길이 완성된다. 그 길은 곤에서 붕으로 존재의 변화를 경험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장자는 우리에게 여러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 나의 성심을 내려놓아야 하겠죠. 여러분들께 그런 생각거리를 던져드렸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