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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림] 2017년 4월 종교강좌 녹취록입니다.
 WRITER: 관리자 DATE : 17-06-05 15:36 READ : 3272
 
 
원불교의 마음공부와 사회참여
- 유무념 공부법을 중심으로
 
(이공현 교무, 은덕문화원장)
 
 
원불교에 관한 내용을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유무념’이라는 전문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불교는 어떤 종교인지 큰 틀에서 살펴본 후에, 원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마음공부가 원불교에서 왜 중요한지, 이것이 사회참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원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올해가 원불교 101년 되는 해입니다. 원불교 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했는데요, 많은 인류 역사가 있었지만 원불교는 정보화 시대가 시작되고 나온 종교라는 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인류 역사에서 각 시대마다 각 종교가 담당했던 역할이 있었고, 그 종교가 아니면 안 되는 문화와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원불교는 시작이 1916년인데요, 당시는 사진기술이 있고 한글이 있고, 계몽운동이 시작될 때이기 때문에 교조의 사진이 남아있고, 원불교 전서가 실질적으로 교조가 살아있을 때 다 편수하고 그것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1891년에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아주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람의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던집니다. 예를 들어, 5-6살 때부터 친구들하고 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왜 나는 정해진 저 집으로만 돌아가야 할까?’ 혹은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비는 어디서 올까?’와 같은 질문이었죠. 그 나이에 있을 수 있는 질문이죠. 그러나 보통 답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묻지 않는데, 이와 달리 대종사는 이러한 질문과 고민을 끝없이 심화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1916년 4월 28일, 소태산 대종사가 많은 고민을 압축한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깨달음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때 원불교라는 종교가 시작됩니다.
 
 원불교를 한 종교의 다른 종파가 아닌, 새로운 종교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개교표어에 드러나있습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이 표어는 앞으로의 시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일 것임을 말합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속도, 사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인간의 규제를 넘어서는 규모의 문명이 올 것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상과 제도를 준비하지 않으면 인간이 모두 삶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원불교는 출발합니다. 이런 점에서 원불교는 과학문명을 반대하고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물질은 있을 수밖에 없고 도움을 받죠. 이 물질을 컨트롤하는 건 사람인데,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물질이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는 거죠. 앞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주체적 자립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 정신문명에 대한 통찰, 성찰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원불교라고 하면 불교의 한 종파 아니냐는 질문 많이 받아요. 그렇지 않고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으며 한 처음 했던 말이 이 말씀이었어요.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 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동일한 체성을 갖고 있고, 이 세상 모든 진리의 근원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으면서 한 말인데요. ‘원’이라는 것은 세상을 관통하는, 생멸이 없으면서 모든 생명을 관통하는 진리를 표현한다면 그 상징을 원으로밖에 할 수 없겠다 하면서 일원상이라는 상징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깨달을 불’자를 써서 “원의 진리를 깨닫고 가르치는 종교”가 바로 원불교입니다. ‘생멸이 없고 인과 보응되는 진리’라는 것은 인간과 분리된 차원도 있겠지만, 사실 저 자리는 모든 중생들, 선과 악을 판단하기 이전의 모든 인간의 청정한 마음상태입니다. 때문에 마음공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교리와 실천적 특징
 
원불교의 교리는 굉장히 다양하게 설명되어있지만 핵심적으로 보면 거북이 모양처럼 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북이 모양의 표를 율곡 이이 선생을 더불어 유교에서도 많이 쓴 것 같아요. 일원상이라는 상징은 다음과 같은(그림1) 진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진리 두 개의 체계를 갖고 있다. 종교에는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가 있고, 닦음이라는 수행차원을 강조하는 종교가 있죠. 원불교는 진리를 향해 가기 위해 신앙과 수행이라는 두 가지 문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신앙문이라는 것은 불생불멸하고 영원하고 인과보응으로 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우주의 본원이고, 모든 중생의 본성이고, 이것이 어우러져서 은혜와 위력을 낳게 되는데 여기가 바로 진리의 근원이고, 은혜의 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의 키워드는 ‘불생불멸’, ‘인과보응’이고, 이걸 통해서 신앙문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문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문은 그것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거나 안으로 들어오도록 역할을 하죠. 이러한 문을 통해서 최고의 원불교 신앙의 상징체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믿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인간은 모든 중생의 근본적 본성에 있다고 말해지는 이 진리를 실질적으로 갈고 닦아서 자기 안에서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수행문입니다.
 진공묘유조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공기가 색을 띠고 있다면, 우리 앉아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겠죠. 그러나 공기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에 꽉 차있습니다. 이처럼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의 본성이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그리하여 저 자리에 사람이 합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점입니다. 이 자리에는 인간의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습니다. 그러한 자리를 갈고 닦아서 그 자리를 얻고, 얻은 사람은 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저 문으로 나와서 다시 사람들에게 베풉니다.
 수행하는 이들은 진리를 얻기 위해 저 문을 날마다 노크하면서 매일 수행하고, 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 자리를 아는 사람들, 성자나 성녀들은 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리로 삼습니다. 이 자리는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자리가 아니라 추구해서 믿고 수행해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문입니다. 종교적 진리가 특수한 누군가, 교황이나 달라이라마 등에 의해서 전수되는 게 아닙니다. 기회는 누구나에게, 남자이든 여자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있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개교의 동기를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에 소태산 대종사와 함께 작성된 문구입니다. “1920년 지금, 과학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 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樂園)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제가 원불교 교주로서 이걸 썼다면, ‘진리적 종교의 신앙’ 부분에 원불교의 신앙체계, 일원상이라던가 신앙문에 대한 것을 넣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러지 않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라고 하여 모든 종교에 대한, 보편적 종교의 진리, 신앙 체계를 언급합니다. 종교를 위한 진리가 아니라 사실적인, 실제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도덕의 훈련으로써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원불교가 시작하게 된 동기라는 말씀을 합니다.
 
 불교의 시작에 있어서도 고통의 문제가 중요했듯이, 현실 고통의 원인 및 실체 분석을 어떤 식으로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형적 조건으로 물질문명의 발달에 대한 인식이죠. 1920년은 일제 식민치하에 들어가면서 한국인이 다섯 이상 모여서 대화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조국의 광복이나 해방을 생각했을 거 같은데,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어서 서구 문화와 사상의 흡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나’라는 존재가 어떤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고해의 실체에 대해서 세상이 마음병이 앞으로 심각해지겠다는 진단을 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있어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하는 돈의 병입니다. 두 번째는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자기의 잘못은 살피지 않고 남을 탓하는 원망의 병, 다음으로는 노력 없이 남에게 의지해 놀고먹으려는 의뢰의 병입니다. 또한 사람의 인격과 지식이 배움에서 오는 것인데 게으름과 아만심에 사로잡혀 배울 줄 모르는 병, 이미 얻은 지식에 만족하여 자만자긍하고 또 이를 활용할 줄 모르거나 후진에게 전하여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가르칠 줄 모르는 병, 개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남을 위할 줄 모르거나 공중사를 가볍게 여겨서 공익이 실현되지 못하고 공익기관이 피폐하게 된 원인으로 공익심 없는 병 등이 큰일이다, 라고 진단합니다. 이게 한 개인에 대한 진단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에 대한 진단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지금까지도 계속 진단되고 있는 실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고해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종교의 기능과 역할의 재정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로봇이 수술을 하고, 혹은 로봇이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할지,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이처럼 저희가 성장할 때와는 또 다른 질문들이 도래하는 시대에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은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할까, 고민이 많이 됩니다.
 개인의 마음공부와 사회참여는 앞으로 종교가 함께 해야 할 아주 큰 부분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죽음 이후 피안의 세계를 이야기했지만, 낙원은 죽음 이후나 피안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이 땅에 있고 여기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낙원을 건설하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교’라고 하면 정신세계를 밝히고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 혹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고행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불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습에 있어서 낙원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를 불교에서 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인간으로 태어난 업,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유한적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몸과 마음이 함께 그걸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오존층이나 미세먼지 해결을 위해 시위를 하거나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거나 그렇게 혼자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이 공동운명체로 되어 버린 세상에서는 어떻게 함께 협력체를 만들어갈 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소태산은 내면적인 정화와 정신적 단련을 통해서 보다 근본적인 것을 재건해 나가는 것 뿐 아니라, 외면의 환경적,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현실적 실천운동이 함께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시대는 어렵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원불교 마음공부와 사회참여 - 유무념 공부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는 건 신앙적인 부분보다 수행적인 측면이 강조될 것 같습니다. 일원의 진리란 게 어떤 자리이고, 성자가 되어 그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원불교에서는 ‘삼학’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가 삼학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삼학이 함께 겸비되어야 인격이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하는 것이죠. ‘훈련’이라는 것은 강한 언어잖아요. “원불교가 사람 잡는다” 할 정도로 여러 가지를 훈련시킵니다. 습관이나 오래된 뿌리를 뽑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잘 하게끔 돕는 것이 원불교 유무념 공부입니다. 유무념 공부는 온전(정신수양)한 생각(사리연구)으로 취사(작업취사)하는 공부를 하였는지 체크하는 공부입니다.
 
 1) 정신수양
 
 먼저 정신수양입니다. 원불교에서 정신은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굉장히 순수한 상태죠. 이 정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을 수양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4시 30분에 기상해서 5시부터 좌선을 합니다. 저녁시간에는 염불을 하고 낮에는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왜 정신수양을 하는가에 대해서 “정신수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을 다해 욕심만 채우고 폐가망신하고 번민 망상과 분심 초려로 자포자기 염세증도 나며, 신경쇠약 혹은 실신자도 되고 극도엔 자살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고 말하며 정신수양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정신수양을 온전한 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해야 되는데, 처음에 출가해서 들어왔을 때는 ‘정신이 무엇입니까?’라고 선문답식으로 질문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침에 일어나서 늘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저녁에 잘 때 편하게 자잖아요. 이건 절대적인 믿음이거든요. 저녁에 잘 때, 이 잠으로 인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요. 내일은 분명히 일어날 거고 또다시 시작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이죠. 잠 잘 때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죠. 그런데 잠자다가 4시 30분이 되면 알람소리가 들려요. 죽었다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데 인간의 무엇이 알람을 듣거든요. 그리고 듣는 순간 ‘네시 반이구나’라는 기막힌 생각이 떠올라요. 혹은 빗소리가 들리면 ‘비가 온다. 더 자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죠.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고, 뜻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행동을 결정하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정신은 누구나에게 기막히고 오묘하게 모두가 닮아있는 자리가 있어요.
 그러나 이 정신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집니다. 누구는 네 시 반에 벌떡 일어나지만, 그냥 더 자버리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그럴 땐 또 ‘쟤는 이것도 못해’하는 마음도 일어나고,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미워하게 되고.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묘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기 이전 단계의 순수한 마음을 믿으라는 거죠. 그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고, 모든 사람의 말을 거기에서 듣고, 인정하고, 관계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참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유지하는 게 필요합니다.
 요즘 성형도 하고, 주사도 맞고, 목욕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세수하고 그렇게 몸은 갈고 닦잖아요. 그런데 마음에 때가 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마음도 똑같아요. 선입견이나 오만이나 편견,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의한 것들로 인해 나에게 어떤 때가 되어 누군가를 볼 때 굴절시키고, 선악을 판단하는 내 기준을 만드는 거죠. 그건 내 습관에 의해 내려진 판단입니다. 저의 문화적 환경이나 그런 것의 영향을 받는 것이에요. 이것이 마음의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 씻듯 마음도 씻어서 원래의 청정한 깨끗한 마음상태로 돌리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산 속이나 힐링이 필요한 장소에 가서 조용하게 있으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나와서 가족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하죠. 그런데 결국 인간은 관계 속에 있게 되거든요. 미국에 있는 힐링센터에 오는 사람들에게 왜 오느냐고 물었을 때, 80% 이상이 첫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든 것은 관계이거든요.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관계나 상황에 따라서 마음은 자꾸 움직이거든요. 그런 자기를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거예요. 육체도 밥을 먹듯이 이러한 힘 또한, 정신 또한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믿을 만한 건 수행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기도했는지, 얼마나 수행했는지가 굉장히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수행을 안 했는데 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요즘 저희 은덕문화원에도 외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친구들이 와요. 서양친구들이 위빠사나 명상이니 등이 유명해지면서 명상이 좋다는 걸 알고 미얀마 가서 1년, 중국에서 1년, 인도에서 3년 이렇게 명상한 친구들이 와요. 그리고는 좌선하는 곳에 와서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저 여기에 30분만 앉아있다 가게 해주세요’라고 말해요. 밖에서 보면 똑같은 집처럼 보이는데도 다니면서 기운을 느끼는 거죠. 벌써 사람들이 이런 기운을 느끼고 있어요.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마음을 조절하고, 관계성 안에서 화를 조절하는지를 보면 금방 ‘아, 저 사람은 오래 공부한 사람이구나’라고 아는 시대가 되어버린 거예요. 육신도 밥을 먹듯이 정신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끝없이 자기 자신을 던지고, 상황을 이겨나가는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거죠.
 태양은 똑같은 시간에 떠서 지죠. 하루도 빠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론 힘들어서 일어나기 싫고, 어떤 날은 더 일찍 일어나서 난리를 부리고 합니다. 또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하죠. 하지만 태양은 좋고 나쁨을 판단해서 빛을 덜 비추거나 하는 법이 없이 평등하게 빛을 줍니다. 제가 표준해서 살고자 하는 삶이 이런 삶이거든요. 어떨 땐 겁이 나요. ‘내가 어떻게 이 길을 산다고 나왔을까.’ 그러다가 길게 두고 봐서, ‘이번 생은 조금만 하고 가자’ 그래요. 테레사 수녀님 손을 보면 거칠죠. 저도 제 어머니가 제 손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는데, 저는 이 손이 자랑스러워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는 상징이니까요. 손이 투박하면 종교인으로 잘 살았다는 표시라고 생각해요. 말로 해서 이렇게 간단하지만 이 삶이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양도 사람이 살아가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가 있어요. 일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수행하는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일이 없을 때 인간은 열심히 수행해요. 제 독일 친구가 제가 명상하고 있으면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해요. ‘너 자고 있지.’라고 물어보는 거에요. 그렇지만 명상의 체험이라는 건 너무나 행복한 것이에요. 사람의 마음은 여기에 앉아 있어도 재미가 없으면 마음은 집으로 평창으로, 시간도 초월해서 미래나 과거로 갑니다. 그 마음을 지금 이 자리에 자각시키는 것을 노력하지 않으면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마음속에 사심, 잡념, 정신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연습을 일이 없을 때 해야 합니다. 분별, 주착, 자기 아집이나 선입견, 습관, 욕망을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보세요. 그것을 노트에 한 번 기록해보세요. 그 상황에 여러분의 정신세계가 어느 정도는 보일 겁니다.
 인도에서 부처님 나오셨을 때, 그 시대의 과제는 무지를 깨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인도는 불가촉천민은 사람이 다니는 길로 못 다니잖아요. 여자들이 당하는 폭행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생각 못하죠. 인간의 인권이 같다는 걸 가르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번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큰 역할 했는데, 그 학생들이 정신과 치료를 많이 받고 있다고 해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잘못됐다는 걸 사회에 밝혔는데,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이 친구들에게는 용납이 안 되고 이게 병이 되는 거예요. 이 친구들을 위해서는 해결된 정확한 결과를 보여주는 게 도움이 되겠죠. 이처럼 자기 삶이 억울한 사람도 있고, 왜 누구는 흙수저고 금수저인가 등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죠. 그러나 지금의 인생이, 저희는 윤회를 믿으니까, 다음 생이든 과거에 생이든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조용한 시간에 어떻게 생각이 일어나는 지 바라보고 제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음이 요란해질 때 내가 마음 컨트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현대인들을 잘 쉬어야 합니다. 스님들은 세시에 일어나셔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9시엔 주무셔야 하고 저희도 4시 반에 일어나려면 10시엔 자야해요. 지금 출가한 학생들이 한시, 두시까지 놀던 것이 있기 때문에 싸이클을 조정하는 걸 힘들어 해요. 그렇지만 우주자연의 이치며, 새벽의 기운이 선을 할 때 알파파가 제일 잘 맞고 그런 원리가 있는데, 그런 것조차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돼버렸어요. 사실 잠을 잘 자야 아침에 선을 잘 하게 돼요. 그런데 현대인들이 잘 쉬지를 못하죠. 이렇게 되면 그 다음날까지 지장이 있습니다. 흐리멍텅하고 하루 살아가는 게 힘들어지죠. 이런 부분에 자기 성찰을 잘 해서 자기 관리를 해나가야 합니다. 좌선을 하고 앉아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 전체를 볼 수 있는 정신수양이 중요합니다.
  또한 조용히 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앉아있으면 스마트폰 내내 꺼내서 보고, 놀랄 정도로 스마트폰을 못 놓거든요. 스마트폰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유 있는 시간, 정신을 쉬어줄 수 있는 시간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강의실에 오기까지도 너무 많은 생활과, 너무 많은 경험을 거치고 오신 것이고, 그 경험이 여러분 안에 같이 있어요. 그게 쓰다만 논문일 수도 있고, 상담을 하고 있는 신도일수도 있어요. 그것이 여러분의 정신을 흙탕물처럼 흔들어 놓습니다. 내가 여기 있지만 모든 것이 함께 다니죠. 이렇게 혼탁한 상태로는 나 자체도 문제이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대답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나를 맑은 정신 상태로 돌리는, 그 노력을 인생의 철이 튼 사람은 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안 된다는 거죠.
 더 자고 싶지만 4시 반부터 일어나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처음엔 한 시간 앉아있으면 5분 집중해요. 50분은 다른 곳을 날라다녀요. 어제 읽은 책의 구절도 생각나고, 친구도 생각나고. 그런데 이게 시간이 가면 조금씩 늘어요. 5분에서 10분, 10분에서 15분 이렇게 정말 고요한 상태의 나를 경험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이러한 부분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 누구나 명상을 15분 정도는 견딘다고 해요. 15분하고 조금 움직이다가 또 다시 15분하고, 그러다가 걷기 명상도 하고. 걷기 명상은 걸음 하나하나에, 현재 움직이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인데 아주 몰입도가 높습니다. 이런 단계부터 해서 정차 시간을 늘려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사시(有事時)라는 건 일이 있을 때죠. 그 일에 일심一心으로 전일專一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의 맑은 정신상태로 마음을 빨리 되돌리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브레이크를 걸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마음공부를 알게 된 덕분에 그런 조절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싸우거나 하면 쓸데없이 끼어들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지 않게 되면서 정신을 산란하게 만든 것을 끊어냅니다. 매일매일 걷는 연습하면서, 정신 수련하듯이 그 일을 할 때에는 그 일에만 몰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바느질하면 바느질에만 몰두하고 앉는 것, 두 마음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앉아서 하는 선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 수양은 일이 없을 때나 고요할 때는 진리의 자리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항상 움직이는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또한 일을 하는 중에는 멈춤을 통해 원래 자리로 나를 되돌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명상이나 침묵 수행하시는 분들 평생 그렇게 사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있기 때문에 지구안의 시끄러운 소음들이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는 것이겠죠. 아침저녁으로 묵상하고, 걸은 땐 걸음에만 집중하고, 혹은 휴가를 떠나 올레길 등을 걷는 것 이것들이 모두 다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정화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2) 사리연구(事理硏究)
 
 이렇게 정신수양을 잘 하는 이유가 뭐냐면 다음에 이어지는 ‘사리연구(事理硏究)’를 위해서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잎이 무성한 나무가 되듯이, 온전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정신수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예전에는 배우는 것이 힘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섭리가 엄청난 교과서입니다. ‘대소유무’라는 말이 좀 생소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우주는 큰 본체고 개인은 작은 우주라는 거예요. 큰 우주가 아침저녁의 시간이 돌아가는 것처럼 저도 생로병사라는 것을 겪죠. 예전에는 인간이 지구에 아예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인간이 지구를 점유해 살듯이, 저라는 사람도 태어났을 때와 지금은 아주 다르고 매일 성장해나가는 것이거든요. 그렇기에 지금 이 모습도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이 돌아가듯이 모든 이치가 묘하게, 기가 막히게 연결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해당되겠죠. 혼탁한 정신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바르게 판단할 수 없어요. 하지만 공기처럼 아주 정신이 맑을 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춰서 판단할 수 있는 반야의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은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대소유무의 이치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조급하고 편협해질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성현의 말씀이나 이치들을 보면서 삶의 지혜를 얻고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그랬을 때, 모든 것을 밝게 보고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은 영원하고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를 함께 하면서 돌고 돈다는 걸 알면 삶 자체가 그렇게 두려운 것도 아니고 삶을 진실되게 사는 방법이 뭔지 알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리연구가 중요합니다. 원불교는 한국에서 1916년에 시작해서 가난하게 자급자족한 종교거든요. 저도 겉으로는 원장이지만 하루 종일 쉬는 시간이 없이 밭 매고 밥하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거든요. 어떨 땐 내가 이러려고 출가했나 싶을 때가 있지만, 이걸 견딜 수 있는,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이유는 그 밝은 지혜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마음이 무엇인지,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 자리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제가 진짜 존경해요. 그런데 작년 10월에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제일 쇼크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걸 한 달 넘게 고민했어요. 원불교는 1916년에 시작할 때, 당시 시대 자체가 인권의 평등에 열려 있기도 했지만, 여성이 하는 일을 많이 열어뒀어요. 여자라고 해서 못하는 것 없고 실력이 있으면 누구나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종법사도 될 수 있고.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 자리에 여성이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어요. 정말 훌륭한 여성도 많았지만 자리에 오르지 못했어요. 문화가 안 되더라구요.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에서 일할 수 있게끔 가르쳤어요. 1910년에 여성이 대중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게 불가능한 시대였잖아요. 천막을 쳐놓고 뒤에서 연습을 하게 시켰어요. 이것이 오래 이어져 오다보니 여성들이 설법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죠. 원불교의 성장은 여성성직자들 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2008년에 아시아 태평양 카톨릭 여성지도자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명동성당에서의 오프닝 스피치를 원불교에 부탁해오신 적이 있어요. 원래는 카톨릭 사제들, 남성들이 하는 일은 다른 종단의 여성 성직자가 축사를 하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셔서 참여했었는데요. 이처럼 큰 의미가 있을 때는 내 일이다 네 일이다 하지 말고 기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리연구에 관해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간 스승들이 계시죠. 성자들은 이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걸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풀어내셨는지 우리는 배우죠. 아마 여러분도 그래서 날마나 성경 읽으실 거예요 그분처럼 살고 싶어서. 사색도 하고, 학업도 하고, 대화를 하고, 또 가장 근원적인 자리를 연마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면서 빠르게 분석하고 알아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종교인하면 착하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정확하게 지도해줄 수 있는 종교인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작업취사(作業取捨)
 
 바르게 안다는 것은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잘 풀어쓰기 위해서이죠. ‘옳은 일이라고 하면 죽기로서 하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죽기로서 하지 말라’ 이것이 수행자의 길임을 늘 가르칩니다. 이게 바로 작업취사인데요,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실천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킬 수 있는 것도 굉장한 힘입니다. 실생활에서 정신 수양과 바른 판단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기준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이 될 때 의견을 많이 이야기 하고 교단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거침없이 의견이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고, 말하고, 듣고, 냄새 맡는 이런 것들이 법도에 맞아야 합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계속 보려고 하거나,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더 먹거나,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듣는 등 감각이 하는 것을 따라 가다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육근을 사용할 때 그것이 절도에 맞는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원불교 교전에 따르면 어느 정도 도를 얻었는가는 원상이 눈을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보고 있는가, 귀를 사용할 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듣고 있는가를 체크하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유치원생 같다고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게 기가 막힙니다.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그게 아니거든요.
 원불교라는 이름조차 없었을 때, 저는 여기에 매력을 느꼈는데요. 익산에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에서 원불교 본부를 세우고 시작돼요. 그런데 순찰하는 일본인들이 와서 불법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는데 불상이 어디있냐고 해요. 소태산 대종사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12시 종 치니까 밖에서 일하고 있던 교무님들이 점심 먹으로 들어오니까 “우리집 부처님들은 저기 계십니다.”라고 했어요. 이 개념을 그 순사들이 이해했을지 모르겠어요. 부처님은 금불상이나 목불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저분들이라는 거시 원불교의 메시지인 것 같아요.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노동의 신성함 같은 것이 있잖아요. 원불교에서도 노동을 중요시합니다. 노동하지 않은 사람들, 선만 하려는 제자들은 야단을 많이 맞아요. 함께 더불어서, 아침에는 선을 하고 낮 시간은 일하고 저녁시간은 공부하는 것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종교는 재색문제만 청빈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원칙 아래 철저하게 공동체생활을 이끌어 오셨어요. 또 원불교 처음 시작할 때, 밥 한 숟가락씩 다른 공기에다 모았었어요. 이것을 기부해서 풀뿌리 기부문화로 자립해왔다. 처음부터 기도하고 영적인 힘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어요. 글씨를 가르치고, 계몽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는 교육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영광은 지독하게 가난한 곳이었어요. 나무가 많은 곳이니까 나무를 태워서 숯을 만들어서 팔고, 엿을 만들어 파는 등 저축조합운동 같은 것을 했어요. 그렇게 자금을 모아서 익산에 본부를 만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자립정신을 키워주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 원불교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이치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만들어지기에, 종교인은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 초기 창립정신이기도 합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는 원불교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도 열리듯이 이 세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부분을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어우러지도록 하는 것이 원불교에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유무념이라는 것, 생각하고 사는 것과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다르기에 그것을 잘 챙길 수 있도록 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이죠.
 만약에 영성 함양을 하고자 한다면, 해야 할 것은 티비를 보지 않고 일찍 자고, 자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자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다음날 아침에 몰입도나 행복도가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영성적인 체험을 원하는 사람이 드라마를 보고 막 욕을 하면서 토론을 다 보고 자면, 아침에도 여전히 그 잔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기가 정해놓고, 자기와 싸워서 챙겨야 합니다. 이것을 날마다 일기를 쓰면서 체크를 하게 해요. 하나로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자면, 본인들이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을 정합니다. 4월의 첫날에 이번 달에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죠. 가령 경어를 사용하는 것, 문을 조용히 닫는 것, 신발 제자리 놓는 것 등. 이런 것들은 다 엄청난 배려이거든요. 종교적인 삶이란 사랑과 배려이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잖아요. 이렇게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구체적인 목표로 잡고, 그 이유를 스스로 정하는 거예요. 멀리 갈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다보면 마음에 신경을 안 써도 될 만큼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옛날에는 글씨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흰콩과 검은콩으로 마음을 챙기게 했어요. 잘 했으면 흰콩을, 못했으면 검은콩을 내려놓으면서 얼마나 내가 하루 동안 마음을 챙겼는지 체크할 수 있게 한 것이죠. 인간은 훈련을 계속하지 않으면 바뀌기가 어려워요. 질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노력을 이 사회가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는 혼자 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게 힘이 많이 됩니다. 의도적으로 마음을 챙겨서 좋은 말, 사랑스러운 말을 두 번, 세 번, 더 해주기 등을 하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유무념 공부는 삶의 모든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수준이 낮고 높고의 차원이 아니라고 봐요. 각자가 어떤 부분에서 이것이 필요할지를 여러분들이 가장 잘 아실 거에요.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브레이크를 걸어서 멈추고.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 반추해보고, 그렇게 해서 행동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행동한다면 삶이 질서가 잡히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