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선비문화 수련원을 다녀와서
최 현 민
어제까지 내리던 비도 그치고 화창한 날씨 속에 예정했던 9시 출발시각에 맞추어 떠날 수 있도록 선생님들께서 일찍 연구원까지 와 주셨다. 9시에 봉고로 씨튼연구원에서 출발하여 12시30분경 선비문화수련원에 도착했다. 선비촌 수랏간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금성대군 신단을 잠시 둘러본 후 수련원으로 돌아와 명경당(明鏡堂)에서 계획한 세미나를 했다. 전현식 선생님께서 샐리 멕페이그의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5장을, 6-7장은 최복희 선생님, 8-9장은 이정배 선생님께서 각 장을 잘 요약 정리하여 발제문을 준비해 오셔서 발표해 주셨다.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안에서 생태문제의 해법은 없다”라는 비관론을 펼치는 학자도 있을만큼 생태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생태문제 해결이 녹녹치 않음을 토론을 통해 서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멕페이그는 이 책에서 본래 그리스도교 정신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론이 아닌 생태적 경제학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하면서,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생태적 경제학이 추구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미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이 모든 현대 자본주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 논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에게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지구온난화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간은 무관심하고 이제 심각한 기후변화로 인한 대재앙의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는 멕페이그의 견해는 우리를 절망의 늪 속에 더 빠지게 했지만 그녀는 결론에서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make all things well)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처음에는 들었다. 뭔가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제시하기보다 그저 ‘하느님께 희망을 두자’라는 그녀의 메시지는 현실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고 책임감 없는 끝맺음이 아닌가 하는 불만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번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멕페이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새롭게 다가왔다. 곧 30년간 대학에서 가르친 한 신학자가 내린 결론은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절망의 뒤범벅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도 ‘종교적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녀의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본래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르치 줄리안이 말했듯이 우리손 안에 놓인 개암나무열매처럼 지구가 곧 파괴되고 말 위기상황에 놓여있지만 서두르지 말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교정해가고 ‘즐거운 불편’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지구 생태의 심각성과 그 위기를 간과해선 안되지만, 신앙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계속 심어주어야 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저녁식사 전에 잠깐 한국의 전통무예인 택견 체험도 했다. 택견시범과 약간의 실습을 통해 일본이나 중국무술과는 달리 한국무술 속에는 부드러운 선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직선적인 동작을 위주로 하는 태권도와 비교할 때 택견의 몸동작은 언뜻 보기에는 탈춤처럼 경쾌하면서 부드러웠지만 안에서 나오는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일시에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택견 경기의 규칙인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이긴다”는 점은 한국 무예 안에 생명존중 사상이 깃들어 있음도 느끼게 했다. 저녁 9시경에 오늘 일정을 마치고 선비문화 수련원에서 준비해주신 팬션에서 밤을 보냈다.
둘째날-주변문화 탐방
1. 다도예절 체험
다음날 7시30분에 다시 선비촌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수련원에서 생활예도인 다도체험이 있었다. 다도선생님께서 맨 앞에 스님이 앉아 계셔서인지, 우리 모임의 성격을 알아서인지 조금 긴장하시고 상기된 모습이셨지만 푸른색 한복의 단아한 한국여성의 모습이셨다. 선생님의 다도예절 시범을 모두들 열심히 보고 배웠으나 막상 실습해보면서는 조금 서툴고 순서도 뒤바뀌는 것을 체험했다. 한국 다도예절 안에 남을 배려하는 한국의 예 문화가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일본이나 중국의 다도문화와는 다른 자연스러움이 한국 다도예절에 베어 있음을 느꼈다.
2. 선비들의 얼이 깃든 소수서원(紹修書院)
소수서원에 도착하였을 때 500년 이상된 은행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는 소수서원과 얽긴 모든 역사를 다 알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 주세붕(1495-1554)이 풍기 군수로 재임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처음에는 고려시대 문신인 안향(1243-1306)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여 후에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특이하게 여겨진 점은 꽤 큰 당간지주가 한 쪽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미터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당시에 있던 사찰이 꽤 컸음을 짐작케 한다고 미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해설사의 말씀에 의하면 이전에 이곳에 숙수사(宿水寺)란 절이 있었던 자리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불교가 천대되고 유교가 통치원리가 되었던 조선시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나, 우리나라의 시대적 다종교 상황의 또 다른 일면을 보는 듯 했다. 아무튼 서원에 조금은 낯선 숙수사 터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음을 보며 미산스님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라고 하셨다.
소백산의 물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계곡 한 중턱 아래에 붉은 글씨로 ‘敬자’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특이하게 여겨졌다. ‘백운동 경자바위’라는 이름이 붙혀진 이 바위는 주세붕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유교의 근본사상인 敬天愛人의 머리글자를 상징하지만 이 글자는 다음과 같은 전설과 함께 전해져 온다고 한다. 정축지변 세조3년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임금(노산군)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자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이에 반대하여 이곳 순흥에서 단종 복위운동을 펴다 사전에 탄로가 나 많은 이들이 희생된 사건인 정축지변의 참화와 함께 이 때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불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또한 취한대(聚寒臺)나 탁청지 등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한국의 정자와 나무들의 멋이 어우러져 있었고 소백산 줄기, 그 계곡의 물줄기, 호수 등의 정취가 어찌나 멋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런 정취 속에 머문다면 학문이 저절로 닦아질 것 같았다. 곳곳을 지나면서 한국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학문에 정념하는 모습도 뵙는 듯 했다. 소수서원에서 박물관을 지나 선비촌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어 다시 선비촌 수랏간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부석사로 향했다.
3. 극락세계를 보여주는 부석사
미산스님께서 다리가 불편한 나를 위해 부석사 입구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석사에 계신 스님께 부탁해주셨다. 입구에서 내려 극락을 의미하는 안양루를 통과해 조금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듯한 석등이 눈앞에 나타났다. 석등은 단순히 어두움을 밝힌다는 기능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지혜 광명의 상징성을 지녔다는 말처럼 그 너머로 수백년을 지켜 온 무량수전이 우뚝 서 있었다. ‘無量壽殿’이라고 쓴 편액은 이 전각에 아미타불께서 모셔져 있음을 말해주었다.
의문이 든 것은 분명 부석사는 화엄종찰의 본산이건만 비로자나불이 아니고 아미타불을 모셨을까 하는 점이었다. 부석사는 왜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지 않고 정토종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것일까? 돌아와서 궁금증에 찾아보니 화엄종이 서서히 힘을 축적하던 시기에 지어진 부석사는 민중의 안식과 포교를 위해 일부러 아미타불을 모셨다고 한다. 즉 비로자나불보다는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무량수전 안에 진흙으로 빚은 소조여래불상은 협시보살도 없이 홀로 모셔져 있는 점도 특이했지만 더 특별하게 여겨진 것은 이 불상의 위치였다. 보통의 불전(佛殿)은 내부 정면에 불상이 놓여있지만 이 불상은 왼쪽 끝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즉 동쪽을 향해 서쪽에 앉아 있었다. 왜 이처럼 특이하게 불상을 배치한 것일까. 여기에는 두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불상을 정면에 배치하면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공간감각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함으로써 먼 거리의 공간감각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측면으로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방향으로 따지면 결국 비로봉을 향해 절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뒤를 직선으로 그으면 소백산의 정봉인 비로봉에 닿는데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을 의미하는 봉우리이니 화엄 종찰인 부석사로서는 비로자나불을 향해 절하는 형식이 이루어진다는 해석이다.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무량수전 안에서 밖을 향해 바라다 보이는 소백산의 능선,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곳마다 곱게 겹쳐진 능선들과 아름다운 정경은 그야말로 여기가 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로구나 하는 느낌,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그 영원의 세계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구나 하는 감격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정토는 저기라기보다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실현해 나가야 할 바로 그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석사를 떠났다.
4. 서울을 향하여
기사님께서 내비게이션을 일반도로에서 고속도로로 바꾸시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소백산 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울창한 숲의 장관을 보면서 돌아오는 행운을 가졌다. 오늘도 어제처럼 화창한 날씨여서 여행 중 큰 불편없이 다닐 수 있어 감사했다.
1박2일간 영주 선비촌에서의 일정을 무사히 보내고 돌아올 수 있었음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최근덕 관장님의 배려, 선비촌 원장님과 그 곳에서 우리를 도와주신 여러분들 -특히 택견 지도를 해주시고 여러 뒷바라지를 해주신 팀장님과 다도예절을 가르쳐준 선생님, 금성대군 신단과 소수서원을 소개해주신 분들 그리고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함께 해주신 모든 회원님 한분 한분께 깊은 감사를 올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