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페이지   영문페이지   로그인 회원가입 이메일

 

작성일 : 20-01-06 09:56
자신의 약함을 노래하라 (노년영성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156  


자신의 약함을 노래하라 (노년영성2)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라는 시가 생각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그늘을 경험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울어보지 않은 자는 없겠으나 자신의 눈물을 사랑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늘진 모습이나 눈물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낸다. 강해져야 살아남을수 있는 세상논리에서 약함을 드려낸다는 건 지는 것이고 뒤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논리와 반대로 약자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것이 구세사 전체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한결같은 원칙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 중 자신의 약함을 정나라하게 보여준 인물로 베드로를 들 수 있다. 그가 자신의 허약함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때는 세 번에 걸쳐 주님을 부인한 바로 그 밤이다. 그는 분명 주님을 안다고, 그것도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안다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그러던 그가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만다. 도대체 어떻게 한 사람의 마음에 이런 간극이 가능한가?

그가 안다고 한 그 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자신이 그토록 따르던 주님을 부정한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약함을 발견한다. 우리 역시 자신이 안다고 하는 그 알량한 지식들이라는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자신의 무지(無知)가 들통난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친다. 루카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 보셨다”(루카 22,61). 예수님은 말없이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많은 경우 우리는 입보다 눈으로 더 속내를 드러내곤 한다. 드멜로 신부는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눈빛으로 전하신 말씀은 , 괜찮아!” 라고 해석한다. 제 아무리 크고 끔찍한 죄라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로막을 정도로 막강한 죄는 없다. “네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그게 너를 향한 나의 사랑과 우정과 신뢰를 파괴하지는 못한단다. 지금 내가 네게 바라는 한 가지는, 네가 그것을 믿어주는 것이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끊임없이 해주시는 놀라운 자비의 한 말씀이 바로 , 괜찮아!”가 아니겠는가. 이 말씀 뒤에 베드로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이렇게 전해준다. 베드로가 그 다음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고 말이다. 그의 울음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에서 나온 반응이 아니리라.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기에 예수님께서 눈빛으로 전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충만하다.”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슬퍼하는 자가 맛볼 수 있는 위로를 받은 베드로는 그래서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약함의 역설을 통해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를 알려준 사도이다. 그는 고린도 전서1 27-28에서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린 1,27-28).

 

여러분은 이것을 실제로 믿고 받아들이는가. 사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이것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적 가치와도 어느 정도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힘세고 강하고 돈많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이와 역행하는 가치들을 선뜻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는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지혜가 정나라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상이다. 필립비 2장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전한다. 과연 인류 역사상 이만큼 센세이션한 사건이 또 있을까. 과연 그 십자가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 것인가?

언제쯤 우리는 그분 가르침 가까이에 다가설 수 있을까. 아마 그 때는 우리가 약해졌을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마저 내려놓을 때가 아닐까 싶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자기 정체성에 몰두하는 우리자신을 비우고 잃을 때...

조금씩 나이가 들어 갈수록 스스로의 한계와 약함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큰 병이나 사고 등을 겪으면 도대체 자기의 힘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지 실감하게 된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기 살 속의 가시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알아듣게 되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렇듯 허약함의 신비는 복음의 핵심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성공의 체험보다 실패의 체험, 빛의 체험보다 어둠의 체험, 정상의 체험보다 바닥의 체험을 해본 자만이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신비가 바로 십자가이다. 이처럼 성서의 지혜, 곧 예수의 지혜는 약한 자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지혜를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이가 바로 장 바니에이다. 그는 1964년 발달 장애인을 위한 라르쉬라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평생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다음과 같은 삶의 보물을 터득했다. “나는 자신이 뭔가를 계획하고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는 장애인들과 함께 전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들은 대개 약한 이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패배감 불행 무능 한계 나약함 추함 고통이 아니던가?

그러나 바니에는 약한 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그들은 나의 자아를 실현하도록 도와주었고 나의 인간성을 조금씩 드러내 보여주었다. 또한 그들은 내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을 일깨우는 우정과 공감의 세계로 날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건 존재이고 관계이며 사랑임을 가르쳐주었다.”

이처럼 바니에는 장애인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상처받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는 오랜 세월 많은 장벽에 갇혀 소외되어 거의 잊혀져온 아이다. 바니에는 장애인들을 통해 자신의 심층적 자아를 둘러싸고 찬찬히 구축되어 있던 방어벽이 서서히 허물어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허문 그 틈 사이로 하느님의 빛이 들어옴을 발견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 25)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죽음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공통점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게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린 지금의 삶을 보다 충실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노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현상을 받아들임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완성된다. 이렇듯 삶에서 생겨나는 변화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곱게 늙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