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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39호 <다윗의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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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05-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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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누룩               
                                                                        최현민 
               
1. 계룡산이 걷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씨튼영성의 집에서 피정할 때면 신원사를 낀 계룡산 산책로를 자주 올라가곤 한다. 종전에는 주변에 그저 소나무, 대나무 정도 있으려니 생각하며 오르곤 했는데 어느 날 산책하다가 나무에 붙어있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껍질(코르크)이 두터워 옛날에는 굴뚝 만들 때 사용했다는 굴참나무, 열매가 팥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붙혀진 팥벼나무, 가지를 물에 비벼 넣으면 물색깔이 푸르게 된다는 물푸레나무, 가지에 있는 에코사포닌이 있어 물고기잡이에 쓰인다는 때죽나무 등.... 참으로 다양한 종들이 그 곳에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그간 내가 참 무심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무심함 저변에는 인간중심적 사유가 숨어있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올라왔다. 그간 나는 산은 그저 사람들의 산책로나 등산로 정도로 생각해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유를 하며 지금껏 산을 오가곤 했다. 그러나 산의 입장에서 보면 난 한낱 지나가는 ‘객’에 불과하지 않는가.
마치 용이 누워있는 자태인 양 굽이굽이 펼쳐진 계룡산의 능선을 바라본다. 이 산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계룡산은 지질학상 중생대 쥐라기·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니 어름잡아 나이가 2억년600만-1억4400만년쯤 될 듯 싶다. 이렇듯 무구한 세월을 꿋꿋히 한 자리를 지켜온 산, 그 시간의 무게 앞에 잠시 산책나온 내가 작게만 느껴졌다.
한참 전에 읽었던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체험담이 떠오른다. 그는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글에서 자신이 미국 삼림청의 신참직원일 때 늑대를 사냥한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총에 맞고 죽어가는 늑대의 눈에서 사그라드는 푸른 불꽃을 보았고, 그 뒤 그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 파란 불꽃에서 그는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 늑대와 저 산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당시 늑대로부터 사슴 떼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책 때문에 늑대사냥을 했지만 그 후 늑대가 사라진 산은 사슴들로 뒤덮혀, 결국 사슴 먹이가 될만한 모든 덤불과 어린 나무들이 사슴에게 뜯어 먹힌 채죽어간 것이다. 늑대가 쓰러뜨린 사슴은 2, 3년이면 다시 채워질 수 있지만, 지나치게 많은 사슴이 휩쓸어 버린 산기슭은 20, 30년이 지나도 제 모습을 되찾기 어려움을 레오폴드는 깨달았다. 그는 인간이 자연의 순리 곧 먹이사슬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탱되어온 것을 인위적으로 바꾸어놓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를 경험케 된다.
레오폴드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새로운 페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는 "대지윤리"를 말한다. 대지공동체의 범주를 토양, 물, 식물, 동물에까지 확장한 대지윤리에서 그는 인간은 더 이상 대지공동체의 정복자가 아니라 대지의 일원이고 시민임을 주장한다. 이렇듯 자연에 대한 인식전환을 우리에게 가르친 레오폴드는 다음과 같은 금언을 남긴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발전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하는 도로건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름답지 못한 자신의 마음 속에 인식과 사랑을 심는데 있다."
일본 선사인 도겐(道元, 1200-1253)은 중국선사 푸롱(芙蓉道楷 1043-1118)의 말을 빌어 “푸른 산(靑山)은 끊임없이 걷고 있다”고 말한다.  "산이 항상 걷고 있다니...” 산에 갈 때 산이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보통 산은 가만히 있고 사람이 그 위를 걸어간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도겐은 산의 걸음을 의심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걸음을 모르는 자라고 말한다.
“산의 걸음이 사람의 걸음과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산의 걸음을 의심해선 안된다. 청산(靑山)의 걸음은 그 빠르기가 바람보다도 빠르지만 山中人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정법안장 산수경(正法眼藏 山水經)>
 산이 걷는다는 것은 산이 살아있다는 말이 아닌가. 살아있는 건 모두 끊임없이 생명활동을 하며 변화해 간다. 산은 산 아닌 것으로 되어있다고 하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산이 산이게 하는 건 대지 구름 공기 햇빛 나무 물이라고..... 이 모두를 빼곤 산은 더 이상 산일 수 없다고.... 그래,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무상(無常)이다. 바로 이러한 존재의 무상함을 도겐은 ‘산의 걸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올 때 계룡산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지는가? 눈부시도록 푸르름을 드러낸 여름산은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을 떨쳐내고 꿋꿋히 서서 추위와 시련을 이겨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변화무쌍함 안에서 우리는 산이 걷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산에 사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산도 걷고 나도 그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지나가는 한 ‘객’으로 계룡산에 들어와 무구한 세월 속에서 묵묵히 닦아온 산의 지혜를 배운다. 많은 현자들과 선지식들은 산에서 지혜를 배워 제자들을 가르쳐왔다지 않는가? 겸허한 통치자들 또한 산에 들어가 현자들에서 배움을 청하고 했다. 바로 산의 걸음 속에 그들이 배운 산의 지혜가 들어있다.

2. 영성을 다시 묻다

현대에 들어 부쩍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이렇듯 영성이 현대 유행어가 되어가지만 정작 그 의미는 더 모호해지고 퇴색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작년 씨튼연구원에서 열린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 강좌 때 (송광사 선덕이신) 종범스님이 하신 말씀은 내게 영성에 대해 다시금 성찰케 한다.
 “제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뭘 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한 것에 감사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감사하는 것으로 족하면 될 것 같다. 인간이 할 일은 창조가 아니라 감사이다. 죽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고 작은 것도 감사하고 큰 것도 감사하고.....”
그리스도인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을 더 정확히 집어내신 말씀이 아닌가 싶다. 매사에 감사할 수 있는 건 하느님 현존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드러내신 당신의 정체성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 14)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절대자(Absolute Being)로 제시하시기보다 ‘존재(Be)’ 자체임을 밝히신다. 존재 자체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being)’는 없다. 바로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신앙, 우리가 ‘하느님 현존’을 떠나 존재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 나와 너가 있음이 바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임을 자각함, 거기서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무한한 발전’을 지상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인간 본연의 자리를 떠나 방황하고 있다. 뭔가 모르게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느끼지만 정작 그 상실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자리를 상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던 종전과 달리 인간은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연 위에 군림하여 굴삭기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파헤치고 있다. 아마존강이, 낙동강이 눈물 흘리고 무차별하게 파괴되어 가는 열대우림들이 울부짖고 있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이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생명 창조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더 많고, 더 좋은 것을 창조해내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 그러나 어설픈 인간의 창조작업은 하느님의 창조세계와 조화를 깨트려가고 있다. 인간 본연의 자세를 망각한 체 창조주 노릇을 하려는 인간의 행태가 지구를, 그리고 우리 자신마저 소멸의 길을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사유는 영성을 말할 때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인간뿐인 양, 영성을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인간과 자연, 자연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간과해버린 영성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영성과는 거리가 멀다. 생태위기의 현실은 자연과의 관계를 간과해온 종전의 인간중심적 영성으로부터 자연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회복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촉구하고 있다. 생태위기는 달리 ‘영성의 위기’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현대 영성의 나침반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절박한 ‘생태위기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위기 극복과 연관지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영성,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성의 방향은 곧 관계를 회복해감에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연과의 화해이고 더 나아가 자기자신과의 화해이다. 자연과 한시도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바로 나 자신의 일부인 자연을 돌보지 않고 소홀해 왔음에 대한 성찰이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함부로 대하며 살아온 것에 대해, 그리고 창조주에게서 받은 ‘청지기’로서의 인간본연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성찰도 요청되고 있다. 돌이켜 보건데 생태문제의 진원지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 마음을 자기중심에서 하느님중심에로 돌리는 일, 결국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헤쳐 나아가야 할 영성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가 싶다.

3. 다윗에게서 영성을 배우다

하느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우린 이미 수없이 체험하고 있다. 기도 중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느낄 때가 있더라도 우리는 그 체험을 쉽게 잊고 살아간다. 피정을 할 때에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뜻 안에 일치하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하느님을 잊고 쉽게 종전의 자기로 돌아가곤 한다. 피정 다녀온 뒤 오래가야 1주일, 그 후 나도 모르게 종전의 자기중심적 생활로 돌아가버린 자신을 만난다. 또 타인에 대해서도 “그럼 그렇지. 너가 변하면 얼마나 변해...”라며 판단해 버린다. 이렇듯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음을 절절히 체험한다.
피정이나 기도를 통해 하느님 현존을 깊이 체험하거나, 하안거나 동안거에 들어가 깊은 깨침을 얻을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일상에서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깨침이 오더라도 일상 안으로 깨침이 녹아드는 것이 쉽지 않음은 영성의 문에 들어선 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지눌은 깨침 후에도 번뇌는 곧 멎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는구나(風停波尙湧)”<수심결(修心訣)>.
그럼 어떻게 현실에서 만나는 시련과 도전을 극복할 수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쉽게 ‘퇴굴심(退屈心)’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퇴굴심이란 뒤로 후퇴해 버리는 마음이다. 다시 종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려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에 빠지면 곧 의심이 올라온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시련이 오게 되면 의심하여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닷물결과 같이 된다고... (야고보 1, 6)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을 비워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화엄경> 10지품에서 엿볼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심심력(深心力)과 승심력(勝心力)에 대해 말한다. 심심력이란 깊게 믿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승심력은 우리가 어떤 도전을 받을 때, 예를 들어 욕망이 침입하거나 비지혜적이고 세속적인 행위가 다가올 때 이를 견고하게 막아낼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나는 이러한 심심력과 승심력을 다윗에게서 엿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소년으로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40년간 통치한 다윗, 무엇이 그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사생활을 들쳐보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지 않나 싶다.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탐냈고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이 한 일이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하며 일을 꾸며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격전지에 보내어 죽게 만든 장본인이 그가 아니던가?(사무엘 하 11장) 또 왕이 된 후에도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과 신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구조사를 명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사무엘 하 24장) "어떤 이는 병거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시20편)라고 고백하던 그였지만 이렇듯 권력욕과 자만심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이렇게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그가 어떻게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하느님을 향한 신실한 신앙 곧 심심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심심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늘 하느님께 묻고 하느님에게서 얻은 지혜로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가 노래한 시편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네 파란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니....” 어릴 적부터 목동이었던 그는 파란 하늘, 푸르른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수금을 타며 하느님을 노래했고 이러한 기도 습관을 통해 하느님 현존 안에 사는 법을 익혀갔다. ‘지금 여기’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바로 그 ‘하느님 현존’에 대한 신앙이 위대한 다윗을 있게 한 것이다. 그러한 신앙이 있었기에 예언자 나단이 자신의 죄를 책망했을 때 하느님 앞에 자기 죄를 인정하고 밤새도록 침상을 적시며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사무엘 하 12:1∼7).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머물러 있게 되면 그것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게 됨을 체험하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남에게 탓을 돌리거나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다. 모든 상황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고 돌려놓으려 하면서도 마치 자신이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 양 무장해 버리곤 한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마음을 알리오?” (예레미야 17.10) 참으로 교활한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싶다. 내 안에서 그리고 이웃 안에서 이런 면을 볼 때 슬퍼진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거늘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치부에 손대시기도 전에 스스로 상처를 덧내곤 한다. 그렇게 해야 자기상처가 나을 것이라 착각하면서...
나는 이러한 자신을 다윗과 비교해 본다. 나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자기 죄를 고백한 다윗, 자신이 지닌 권력으로 나탄을 없애고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하느님께 돌아선다. 자기 죄를 은닉하려 하지 않고 곧장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그분께 돌아선 다윗. 그리고 그는 “하느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자신 안에 훈습(薰習)되어 버린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전에 재빨리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이 지닌 신앙의 비법이다. 그 심심력과 승심력이 다윗을 위대한 왕이 되게 한 것이다.
여기서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비교해보자.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사뭇 다르다. 역사는 그를 지혜의 임금이라 부를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 않았다. 그는 이방인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렸다.(열왕기 상 11, 4-13) 그는 여러 우상을 위한 신당을 짓고 아내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친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다른 신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는 지키지 않았다. 하느님께 한결같은 믿음을 지니지 못했던 솔로몬, 결국 이러한 그의 행태는 이스라엘에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시킨 장본인이 되고 만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한들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두텁지 못할 때, 그 지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우린 솔로몬을 통해 배우게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신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율법지상주의적 영성이다. 율법은 사회공동체나 교회공동체가 규정해 놓은 틀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만들어놓은 틀도 해당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자기중심적 영성, 이것이 곧 바리사이들의 누룩이요, 영성이다. 또한 헤로데의 누룩은 현대인에게 가장 큰 유혹인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의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나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수도자들도 얼마나 쉽게 이러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곤 하는가?
 우리 안에는 어떤 누룩이 커져가고 있을까? 바리사이들의 누룩인가, 아니면 헤로데의 누룩인가?  다윗은 어떤 누룩을 지니고 살아갔을까?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바로는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누룩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안에도 다윗이 지닌 신앙의 누룩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바람을 타고 우리 안에 들어온 바리사이들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도 있다. 다윗의 누룩이 내 안에서 잘 부풀기 위해선 세상에서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그것에 달려있다.

나가면서...

다윗의 누룩이 우리 안에서  잘 부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그 해답을 영국의 탐험가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 1540~1596)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는 마젤란(Magellan)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일주를 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탐험가이다. 그는 하느님께 우리를 귀찮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우리를 귀찮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너무 우리 자신에 만족해 있을 때,
우리가 너무 작은 꿈을 꾸어
우리의 꿈이 쉽게 이루어 졌을 때,
우리가 해변을 끼고 너무 가깝게 항해하여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우리를 귀찮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여
생명수에 대한 갈증을 상실해 버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영원을 꿈꾸는 것을 멈춰버렸다면,
새 땅을 건설하기 위하여 애쓰느라
새 하늘에 대한 비전이 희미해졌다면,

우리를 귀찮게 하소서 주님!
더욱 용감하게 도전하도록, 너무 해변에 가까이 있지
말고 바다 먼 곳으로 가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를 밀어내소서
더 이상 땅이 보이지 않을 때 별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소망의 지평선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밀어내소서
미래를 위한 힘과 용기와 소망과 사랑을 위해.

그의 기도는 “제발 이 잔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하는 우리와 사뭇 다르지 않는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드레이크의 기도처럼 우리도 시련을 통해 신앙의 누룩이 자라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윗이 시련과 도전을 통해 신앙의 누룩을 키워갔듯이..... 그래, 다시금 저 광활한 시련의 바다 앞에 서 보자. 선하신 하느님이 우리 삶에 마련해주신 그 시련들을 통해 신앙의 누룩이 부풀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