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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영성생활39호 편집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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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05-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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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최 현 민

이번 학기에 ‘일본종교의 이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일본인의 종교성을 잘 드러내주는 일본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를 다시 보았다. 생태적 문제의식을 갖고 보아서인지 전과 다른 면들이 마음에 남는다. 다신교인 일본신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숲에 사는 많은 신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재앙신 곧 다타리가미이다. 그 거대한 맷돼지신은 인간 문명이 만든 총탄에 맞은 후 저주스런 재앙신이 된다. 그 신은 자신을 재앙신이 되게 한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을에 쳐들어 오지만 결국 주인공 소년 아시타카에 의해 죽는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남긴 채...이렇게 해서 결국 인간과 신 사이에 저주와 증오의 악순환이 남게 된다.
한편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시시가미(사슴신)도 인간문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제철소 성주인 에코시가 쏜 총에 목이 잘려 나간다. 인간문명에 의해 머리를 잃은 신, 그 시시가미의 선연한 얼굴과 슬픈 눈빛이 눈에 선하다. 머리없는 시시가미의 몸은 시꺼먼 액체로 변하여 세상을 죽음의 세계로 변화시켜 버린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시시가미의 목을 찾아 그 신을 다시 살린다. 시시가미의 재생으로 죽어가던 숲이 되살아나고 아시타카도 신의 저주에서 벗어난다.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시시가미조차 인간에 의해 죽고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자연의 생사가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 감독은 자연과 인간문명을 대립구도로 보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살리기 위해 인간에게 문명을 멈추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하면 문명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지를 말하려 한다. 원령공주는 숲에서 살고 아시타카는 마을에 남는다는 결말을 통해 우리는 미야자키 감독이 문명과 자연이 상생(相生)하는 희망을 말하려 함을 엿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놓은 채..
 인류는 문명사적으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마다 나름의 꿈을 지녀왔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산업혁명의 꿈을 꾸어왔다. 그러나 그 꿈은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공존해온 지난 삶의 패턴을 던져 버린 체 지구, 아니 우주의 주인으로 군림하려는 꿈이었다. 그 꿈의 허상이 현실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상 기후변화, 멸종위기에 놓인 수많은 종 등 생태위기의 증후군들이 그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산업혁명의 꿈은 우주 안에 함께 살아가는 자연과 수많은 다른 종에 대한 배려를 간과한 체 인간의 복지만을 위한 꿈이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인간중심의 단일문화(mono-cultures)의 방향으로 항해해 온 현대문명사에 대해 깊이 성찰하길 촉구한다. 그는 우리가 지향해온 꿈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건넨다. 그의 우주이야기, 그 안에는 현대과학을 비롯한 종교(그리스도교 신학뿐 아니라 동아시아 종교전통까지를 포함한) 이야기, 그리고 인류의 문명사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인류는 지금  신생대의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그는 말한다. 신생대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라고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생태대의 꿈을 싣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자신의 꿈에 동참하길 희망한다.
베리는 인간의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일이다. <6도의 악몽>에서 마크 라이너스가 말하듯 아직은 우리에게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의 열쇄는 ‘인간’인 우리가 갖고 있다. 우리의 삶의 방식 바로 거기에 지구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 3월13일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있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평생 자연과 영적으로 교류하시며 사신 스님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우리 마음에 연꽃으로 피어나신 듯 하다.  그분은 당신 삶을 통해 생태를 살리는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감수성 곧 자연과 영적으로 교류하는 법을 배워 익힘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스님은 ‘마음닦음’보다 ‘마음씀’을 더 즐겨 설법하셨다고 한다. 마음닦음이 자기수행이라면, 마음씀은 자비행이겠다. 삼라만상에게 마음을 쓰고 손을 건네기 위해선 자기닦음이 필요하리라. 그것이 무소유의 가르침이 아닌가 싶다. 무소유의 정신은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이다. 적게 먹고 적게 갖고 적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慾知足)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예수가 가르치신 진복팔단 곧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신과 상통하지 않는가?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신이 무소유요, 소욕지족의 마음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미야자키 감독이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준 자연과 인간의 공생의 법이 아닌가 싶다.
    이번 영성생활도 여러 분이 꿈이야기를 실었다. 개발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복음적 선택을 감행하는 수정리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들의 이야기, 덕산이야기를 통해 자연 안에서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수녀들의 이야기, 사대강과 관련한 생명의 강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향함이 그것이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다른 짐승마냥 바로 먹이를 먹지 않고 울음을 토해낸다고 한다.  녹명(鹿鳴)은 다른 사슴을 불러 모아 함께 먹기 위해서란다. 참으로 공동체성이 강한 동물이 아닌가 싶다. 그런 사슴 울음소리가 참으로 그립다. 저 멀리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에제37, 1-2)
마른 뼈들이 야훼의 숨결로 서로 이어지듯 흩어진 우리들의 이야기도 사람들 마음에서 공명을 불러 일으키면 참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한데 모여 같은 꿈이야기를 할 날이 오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