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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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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수녀원 창가에서>에 실린 글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최 현 민
어느 날 조카 지수가 자기 아빠에게 물었단다. “아빠, 고모는 왜 수녀가 되었어?”
함께 외식하던 자리에서 동생은 조카가 한 이 질문을 내게 넌지시 건넨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간결하게 웃으며 답했다. “행복해지려고^^ ”
성소와 같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 그 길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그 길을 택할 수 있을까?
1985년 내가 수도원에 들어올 때는 열두 명이 함께 입회했다. 당시 우리 수도원의 역사상 지원자 수가 가장 많았던 때다. 그렇게 수도 성소가 붐을 이루던 전성기를 지나 이젠 1년에 한두 명, 아니 아예 지원자가 없을 때도 있다.
이렇듯 성소자 부재 현상은 현대사회에서 수도 성소는 그만큼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얘기겠다. 흥미로운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이라는 수도서원의 가치는 얼마나 현대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있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수도원에 남아 있고, 무엇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이곳에서 살게 하는가? 수도 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는가?
취약함의 신비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강해져야 하고 많이 가져야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대학가에서는 전에 볼 수 없던 진풍경들이 벌어진다. 바로 대학생들 중 4년 만에 졸업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배우는 것에 심취해서 대학에 오래 몸담고 있으려는 게 아니라, 세상에 나가기 전에 더 많은 자격증과 더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남들보다 더 나은 상품 가치로 만들어야 비로소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현대 젊은이들의 심리는 현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듯 더 강한 권력과 더 많은 소유를 지향하는 문화 속에서 수도 생활이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나 수도자들이 지향하는 순명과 가난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강함과는 너무도 다르다. 사랑은 ‘취약함의 신비’를 안고 있다. 그 신비의 정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취약함의 신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취약함은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택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결코 녹록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이나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밖에서 기다리신다.
수도 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공동체 생활이 아닌가 싶다.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솥밥을 먹고 사니 그 안에서 온갖 부딪힘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관계 안에서 힘을 빼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의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힘을 뺀다는 건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힘을 뺀다는 건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리라.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이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어머니들은 늘 자식들에게 진다. 그건 바로 자식을 향한 사랑 때문이리라.
요한묵시록에 보면 하느님은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묵 3, 20)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스스로 문을 열지 않고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신다. 왜 하느님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실까.
장애인들과 함께 일생을 산 장 바니에는 하느님이 얼마나 취약하신 분이신지에 대해 말한다. 하느님은 결코 힘있게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시지 않고 문밖에 서서 노크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이다.
‘만일 누가 듣고 문을 열면 그때 난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 밖에서 기다리시고 문을 노크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취약성을 발견한다.
사랑할 때 취약해지고
‘사랑은 취약하다.’ 취약하다vulnerable의 의미는 어원상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의 라틴어 ‘vulner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상처를 입기 쉬운‘이나 ’공격이나 피해에 노출돼 있는‘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취약함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불확실하고 그래서 위험이 따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내가 그를 사랑할지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건 취약함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취약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사랑할 때는 목이 뻣뻣해질 수가 없다. 사랑을 경험한 이는 이 말에 공감하리라. 사랑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고 가능한 자신을 낮추고 부드러워지려 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육화의 신비 이상 더 명확히 보여주는 게 있을까?
나는 오늘도 이 수도 성소를 택한다! 그리고 내가 속한 사랑의 씨튼수도회 창설자 엘리자벳 앤 씨튼께서 하신 말씀을 오늘의 양식으로 삼아 힘차게 또 하루를 시작해본다.
“내 일상생활의 목표는 모든 사건을 온유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모든 알력을 부드러움과 쾌활로 대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