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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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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 욕망>
오늘 도서관에 들렀다가 입구에 전시된 신간 중에 <타자와 욕망>이 눈에 들어왔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던 나는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대개 서양 철학의 관심사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집중된다. 존재와 인식에 대한 물음은 결국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서구 철학이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과 달리, 레비나스의 사유는 타자에서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사유를 타자에게로 시선을 돌린 레비나스의 그것은 다른 듯 하지만 실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서구철학의 중심주제인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계는 간단치 않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파악하는 게 인식이라면 그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게 존재다.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정리하는 게 존재론이라면 존재 자체가 앎의 일종이고 그 앎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밝히는 게 인식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존재와 인식은 동전의 양면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바로 타자와의 관계라고 본다.
여기서 묻는다. 타자와의 관계가 성립하려면 내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국 나는 너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며 나의 의식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적 중심주제인 타자에 대한 물음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타자를 통해 내가 누군지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은 내가 타자에게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있기에 그러하다.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자신을 설명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주로 자신의 주변인물을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한다. 이는 결국 내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 누군지를 말해줌을 의미한다.
나는 매일 아침 알람에 의해 일정시간 눈을 뜨고 미사참례 아침묵상 성무일도 그리고 이어지는 공동체 아침 식사 등 수도 공동체에서 함께 정한 일정한 스케줄에 따라 하루를 시작한다. 가끔 아침에 좀 더 자고 싶거나, 몸이 찌뿌둥해도 몸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일정 시간에 일어나 움직인다. 이렇듯 나의 수도여정은 철저히 타자중심적 삶으로 나를 재촉한다. 결국 나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를 향한 삶의 한 형태가 수도생활이 아닌가 싶다. 스승 예수는 말한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여기서 “자기를 버리라‘는 건 일상을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너의 뜻대로‘ 살라는 초대이며 동시에 도전이다. 자신의 뜻을 버리는 매일의 도전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상은 목숨을 내건 거대한 순교는 아닐지라도 타자에게 자신을 맞추는 수행을 통해 자기를 버리는 몸짓이라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욕망은 세상 속의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이끌어준다.”
우리 모두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무엇을 향한, 무엇에 대한 욕망인가? 사람마다 욕망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흔히 욕망은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우리의 욕망들은 대개 결핍-충족구도를 지녔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특히 돈 권력 명예와 같은 세상적 욕망의 특징은 채울수록 더욱 커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욕망과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에 대한 욕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레비나스는 ‘욕망이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한 욕망은 자기중심적 욕망과는 다를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요 타자를 향한 욕망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나는 유한이되 타자는 무한’이 무슨 뜻인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타자의 무한성은 강하거나 높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고 낮은 데서 오는 무한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의 무한성은 지식이나 강함을 넘어서 있으며 결국 우리 자신이 바깥을 향해 열려 있을 때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에 대한 욕망은 바깥의 무한과 맞닿아 있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호소하고 명령하는 타자를 향해 우리 자신을 열어 응답하고 책임을 지는 타자를 향한 욕망은 종래 우리가 익숙한 그런 자기중심적 욕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를 향한 욕망은 욕망의 혁명이랄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