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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방송. 평화신문 인터뷰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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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녀님께선 가톨릭 수도자가 그리스도교도 아니고, 한국의 종교도 아닌 일본 종교 연구를 30년 가까이 해오고 계신데요, 어떻게 일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제가 30여년간 해온 연구는 동아시아 종교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 불교를 박사논문으로 일본의 도겐선사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일본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연구와 관련해서 서강대에서 일본종교를 맡아 강의를 해왔고 그것이 이번에 「일본종교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라는 책을 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수녀님의 최근 저서 <일본 종교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는 제목처럼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일본 종교는 무엇입니까?
일본의 고유종교이면서 토착신앙라고 하면 신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일본 민족의 고유한 가미와 관련된 신념체계인 신도에서 말하는 가미는 자연, 인간이든 사물이든 특별한 힘을 지닌 존재입니다. 보통 800만 가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대략 일본인들이 모시는 가미 수는 2500가미 정도 됩니다. 가미 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있고 군국시대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친 전사들 곧 야스쿠니신사에 모신 전범들도 그들은 가미로 봅니다.
이렇듯 일본신도는 초월적 신보다는 사람에게 친숙하고 현실적 가미을 모시는 범신론적 신앙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자리 잡기 힘든 이유도 이러한 신도적 신앙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3. 신도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일본의 국교였고, 지금은 국교가 아닌데도 일본 전역에 8만 개의 신사가 있을 만큼 일본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데요, 신도의 종교적 특성은 뭔가요? 일본인들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습니까?
신도가 현세중심적 종교라는 사실은 가미의 특성에서 잘 드러난다. 가미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른 절대타자적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친숙하고 현실적 존재이다. 이는 일본인들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신보다는 인간의 현실적 삶과 깊이 관여되어 있으면서 사람과 상호의존적으로 주고 받는 관계에 있는 가미를 섬기는 경향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신도의 종교성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현실 중심주의, 평범지향주의 일상주의적 삶을 추구하도록 했다. 신도가 터부시해온 내세문제는 불교에 의탁함으로써 해결했고 결국 이는 일본불교를 장의불교로 탈바꿈하게 만들었다.
가미능력엔 선한 것만이 아니라 악한 것, 괴이한 것까지 포함한다. 즉 이는 일본의 가미는 선악구분을 넘어서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한 현실을 악신의 탓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선/악은 모든 가미에 의해 이뤄지며 사람은 선악의 신비 다 알 수 없다고 본다.
이처럼 악조차 가미에 의해 이뤄진다는 일본인의 선악관은 종교를 넘어 그들의 현실적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세계 역사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기보다는 가미에 의한 것으로 해석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4. 한국과 중국은 물론 세계가 비판을 하는데도 일본 총리가 2차대전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했는데요, 일본의 토착 신앙이 어떻게 지금까지도 이렇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시나요?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정치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하는 일본 사람의 속내에는 (원령신앙)이라는 신도적 믿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중세 이래로 일본인들은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귀족, 왕족이 사후에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가미로 모시는 신앙이 원령신앙이 발전했다. 그리고 추후에는 원한 뿐 아니라 불행하게 죽은 모든 원령들이 산 자들에게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었기에 일본인들은 원령을 위무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도 원령이 되어 산 자들은 괴롭힌다고 보기에 그들의 원령을 위로해주고자 하는 것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야스쿠니신사참배에는 정치적 역사적 문제 뿐 아니라 원령신앙(민간신앙)이라는 신도적 믿음이 겹쳐진 복합적인 문제이다.
5. 일본의 그리스도교 인구가 1%도 안 되는데요,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일본 그리스도교는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먼저 전개되었지만 일본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범신론적 사유에 절대유일신 신앙인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도막부 시대인 1612년에 일본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스도교는 (사악한 가르침인 사교로 선포되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러한 사교관이 일본 사회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메이지유신 때에는 천황제 하에서 신앙의 자유는 인정했으나 모든 종교는 국가 신도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국가 통제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현재 일본 그리스도교인은 105만정도다. 1억2천명인 일본 인구로 보면 (1% 안되는 숫자이다) 그것은 전도하지 않은 결과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는 일본인 , 종교문화와 융화력 친화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다
6. 일본의 신사참배나, 과거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일본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데요, 어떻게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그에 따른 해법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과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만 접근해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평화는 상대를 먼저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나 생각한다.
한중일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다. 동아시아의 평화는 곧 세계평화와 직결, 그런 점에서 얽히고 설킨 한일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그 첫 단추가 일본인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일본인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해온 일본 종교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일본종교를 공부해 이유를 찾게 된다.
7. 일본의 종교로 일본을 아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는 다종교가 공존하고 있는데요, 과거엔 유교와 불교가 국교이기도 했고요. 이같은 종교가 한국의 문화, 국민성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습니까?
삼국, 고려 시대는 불교가 관학으로 자리매김해오다가 조선 500년간은 주자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구축해왔다. 그 결과 불교는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로 자리를 차지해왔고 성리학의 가치관은 한국인의 심성저변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 도덕 지향성, 理 지향성이 그것이다. 주자학(성리학)이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아온 조선시대에는 理가 중시되어왔다. 理의 지향성은 곧 도덕 지향성을 낳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덕지향성은 인간의 모든 언행을 도덕으로 환원해서 평가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도덕 지향성은 도덕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여기서 理라 하면 진리 윤리의 理로서 보편적인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리의 지나친 경향성은 한국사회를 심하게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리를 축으로 한 인간관계의 수직적 구조였던 신분제도는 오늘날 한국사회로 하여금 상승지향 사회로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상승하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심하게 지쳐가고 있다. 곧 우리는 경쟁에서 떨어져 나가 인생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문화적 사회 포스트모던적 사회로 변모되어가고 있다. 거기에 발맞추어 우리 자신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수직적 상승지향으로부터 더불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수평적 평등지향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8. 씨튼연구원에서도 그간 종교간 대화를 이끌고 연구를 해오고 있는데요, 종교간 대화의 성과는 뭐라고 보시나요?
한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종교문화를 구축해왔지만 종교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역사는 갖고 있지는 않다. 물론 작은 종교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인이고, 한국의 전통 종교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음을 의미한다.
종교라 하면 한 인간의 가치관의 가장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는 그 종교문화와 그리스도교인으로써 만남은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을 우린 토착화로 부른다. 제가 지향하는 종교대화는 바로 우리 내면의 한국종교문화와 그리스도교신앙이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저는 종교대화 강좌를 통해 동아시아의 종교를 소개하고 배움의 장을 열어왔다. 교육이 지닌 특징이라면 씨를 뿌리는 작업이다. 저는 늘 제 자신을 씨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의 마음에서 그 씨앗이 언제가는 싹을 틔우리라 희망한다.
9. 코로나 19사태를 겪으면서 종교의 역할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고 있는데요, 종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로나 19사태는 우리의 삶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도록 우리를 촉구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덮힌 잿빛 하늘이 파란하늘로 변한 것을 보며 성장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지를 본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파괴시켜놓은 자연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우린 자신이 자연에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 성찰케 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의 이름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우리는 지금 잘못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속에서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해왔다. 남과의 비교하면서 우리는 늘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데에서 만족하지 못했고 따라서 행복하지 않았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더 많이 생산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에서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이 가치관을 바꿀 수 있을까. 종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욕지족할 줄 아는 지혜를 가르쳤다.
이제 신앙인들은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예수님 가르침대로 소욕지족함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가. 우리가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소욕지족하는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