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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의 생태적 삼대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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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사도직을 하시는 수도자들을 위한 강의 2020 6.30(용문청소년수련원)
생태적 삼대서원
최 현민 수녀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질병시대의 그리스도교>라는 글에서 이 세상은 지금 병들어 있으며 이 병든 세계가 바로 우리 시대의 징표라고 말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코로나19사태에 대한 나름의 처방책을 내놓고 있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화학백신보다 더 좋은 것은 행동백신이고 생태백신이라고 말한다. 행동백신이 바이러스 성행시 어느 정도 사회적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라면, 생태백신은 각 생물종들이 각자의 서식처에서 살아가도록 인간이 생태적 규칙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한다.
농촌사도직에 임하는 분들은 모두 생태백신에 무장되어 살아가는 분들이다. 여러분처럼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행동백신과 생태백신을 함께 맞았다면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결코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본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요청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을 예측하기 힘든 상태라고들 말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과연 지금 여기를 사는 나에게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는 무엇일까? 오늘 강의는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에게 새 부대는 무엇인가.” 이 물음을 던지면서 나는 그 답을 생태적 삼대서원 안에서 찾고자 한다.
생태적 삼대서원이란 수도서원을 생태적으로 재해석하고 생태 안에서 수도서원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자연에게서 수도서원의 의미를 배우자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1-31)고 하셨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감탄하신 바로 그 자연 안에서 우리는 삼대서원의 의미를 다시금 성찰해보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보고 “참 좋다”라며 감탄하셨다. 하느님이 자연을 바라보셨던 그 시선으로 우리가 자연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생태 회복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은 흙 물 산을 통해 우리를 어루만지신다”(찬미받으소서 68쪽)고 말씀하신다. 곧 우리가 하느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건 ‘자연을 통해서’라는 의미겠다.
우리는 각자 하느님을 체험한 역사를 갖고 있다. 시골에서 자란 이들에게 자연은 도시에게 자란 사람과 상당히 다를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장관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이다. 자연은 하느님의 끊임없는 계시다.”(찬미받으소서 69쪽)
자연을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깊이 자각한다면,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바이올린을 다루듯 그렇게 자연을 다루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 분이 바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찬미받으소서>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노래를 인용한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대지를 누이이며 어머니라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가 대지에 대해 어떤 감수성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다. 자연의 신음을 자신의 누이의 신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 나는 과연 자연파괴를 가족이 아플 때 느껴지는 고통으로 아파한 적이 있는가.
<찬미받으소서>1항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교황께서는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보신 견해는 동양적 사유에 가깝다.
예) 주역- 음양관계( 하늘과 땅, 남녀, 천지) 불교-연기
서양적 사유가 각 개인을 중시한다면, 동양적 사유는 관계론적 사유가 기반이 되고 있다.
예)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
1)‘모든 건 연결되어 있다’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자신이 ‘대지의 먼지’라는 사실(창 2 7)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연으로부터 왔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 중 산소, 탄소, 수소, 질소가 약 96% 이다. 나머지 4%는 무기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4% 중에서 3,7% 는 칼슘(Ca) 칼륨(K) 나트륨(Na) 마그네슘(Mg) 황(S) 인(P) 염소(Cl)등 무기질은 일정한 비율로 질서 정연하게 얽히고 설켜 우리몸을 구성 하는 사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물질들은 우리의 몸 밖에서 식품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사실은 우리의 호흡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한시도 자연이 내품는 산소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산소를 주고, 우린 자연에게 이산화탄소를 준다.
2) 자연파괴와 사회파괴는 연결되어있다.
자연파괴로 인해 가장 많이 피해를 받는 이들은 바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다. 그것은 자연파괴가 인간파괴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 물고기의 개체수 감소는 영세 어민에게 어려움을 주고, 수질 오염은 생수를 사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해수면 상승은 해안주변에 사는 달리 갈 곳 없는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찬미받으소서> 41쪽). 이처럼 자연파괴가 가난한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지만 이에 대해 국제정치는 얼마나 미약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찬미받으소서> 46쪽)
우리는 세계 정상회담이 면면이 이 점에서 실패함을 보면서 정치가 기술 금융에 얼마나 지배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제적 이익집단은 공동선을 내쳐 버리고 정보를 조작하여 그들이 세운 계획이 아무 영향도 받지 못하게 한다. 경제와 기술동맹은 자신과 직결된 즉각적인 이익과 무관한 모든 걸 결국 배제시켜 버리고 만다.
이처럼 생태위기의 문제는 복합적이기에 그 해결책 역시 한가지일 수 없다. 거대한 생태위기 문제 앞에 우리 자신이 미소해 보이지만 우리의 작은 노력이 분명 나비효과를 불러 올 수 있으리라 희망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자로서 약속한 삼대서원을 생태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1. 생태적 정결서원
1) 정결서원은 독신서원인가?
많은 이들은 정결서원을 독신서원으로 본다. 그러나 정결서원은 독신이라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택한 독신은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결서원은 독신과는 정반대로 ‘함께 더불어 공동체로 살겠다’는 서약인 것이다.
우린 한 순간도 혼자 살 수 없다. 아침에 눈뜨고부터 잠잘 시간까지 아니 잠자는 때에도 공기의 도움을 비롯하여 다른 존재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로부터 에너지원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데 우리의 먹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바로 그 먹거리와 직결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다. 그 먹거리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가 결정된다. 왜냐하면 그 먹거리는 우리가 쓸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좋은 먹거리를 먹으면 좋은 에너지가 나오고 나쁜 먹거리를 먹으면 나쁜 에너지가 나온다.
엄마는 아이를 낳은 후 아이에게 젖을 주면 옥시토신이라는 행복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모유를 촉진하는 호르몬이자 사랑의 호르몬이다. 이것이 분비되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분노와 불안이 감소하고 마음이 안정된다고 한다.
예) 반려견을 쓰다듬고 눈을 마주치면 혈액 속 옥시토신 농도가 300% 상승한다고 한다.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나 누군가에게 혜택받은 것을 생각해도 옥시토신이 증가하며 타인을 배려하거나 친절한 행동을 해도 이 행복호르몬이 증가한다고 한다. 이는 결혼하지 않은 수도자들이 행복호르몬인 옥시토신을 분비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자기 것만을 챙기고 이기적으로 살아갈 때에는 옥시토신은 나오지 않지만 사랑을 나눌 때에는 행복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사실이다. 수도자 중에는 몸은 공동체로 살지만 마음은 공동체를 떠나 홀로 사는 경우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생태적 정결은 수도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동체 생활을 성찰하도록 촉구할 뿐 아니라 나의 에너지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바라보도록 한다. 나는 과연 행복호르몬인 옥시토신을 분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2) 연대성으로서의 정결
생태적 정결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앞서 살펴본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찬가다. 성인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누이요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의 강한 연대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그러한 강한 연대의식은 깊은 기도를 통해 다른 존재들과 영적 교류를 이룬 데에서 나온 것이리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역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연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예)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서로간의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이를 만나면 기분이 좋고, 어떤 이를 만나면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 지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 지니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 떄문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받고 또 그 에너지는 상대에게 전염된다. 어쩌면 코로나보다 더 빨리 전달될지 모르겠다.
3) 성 힐데가르트의 비리디타스(viriditas)
빙엔의 성 힐데가르트는 우리가 지닌 생명의 에너지를 비리디타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리디타스는 단지 생명력뿐 아니라 덕의 발현이기도 하다. “몸은 영(마음)을 통해 움직이며 영을 통하여 생기를 갖게 된다. 바로 그 영의 본질이 생명이고 그 생명이 바로 비리디타스다.”
이와 같이 비리디타스를 덕의 발현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덕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짐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 덕을 쌓는게 아니라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덕이 쌓인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힐데가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물질로 보지 않고 자연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본다. 다시 말해 자연을 물질로 보지 않고 인간과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기에 자연은 인간이 덕을 쌓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가 결국 우리의 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외부적 자연과 내부적 자연이 있는데 내부적 자연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내부적 자연인 몸을 경외하고 긍정했다. 이는 중세의 신학계에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플라톤 이래로 서양에서는 몸은 영혼보다 하위의 것이라 생각해왔기 떄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몸의 신학을 비롯하여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영성이 얼마나 당시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