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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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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0-09-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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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

 

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스님은 1990년에 <깨달음과 역사>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책을 출간한지 25돌을 맞아 개최된 세미나에서 깨달음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현응스님은 한국불교가 <이루려는 깨달음>을 지향한다고 비판하면서 깨달음은 이해(understanding)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을 서술한 <마하박가>를 보면 삶의 괴로움을 연기적으로 즉 원인, 조건, 결과, 생성, 소멸의 관점으로 파악해 통찰로 이해로 해결하는 것이라며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않고,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현응스님의 의견은 그와 견해를 달리한 불교계의 많은 학자들 사이에 깨달음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중 박태원 교수는 깨달음을 지적 이해로 규정하고 붓다는 선정 삼매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특히 현응스님이 선정부분을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어떻게 부처님의 삼학 중 하나인 定學을 무시할 수 있는가 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렇다! 정학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특별히 도드라진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만으로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는 붓다의 각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곧 붓다는 언어와 이해를 넘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길로서 정학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을 닦는 정학을 통해 우리는 이해를 넘어 새로운 인지적 사유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불교전통에서 정학을 강조해온 이유이며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세계를 불교에선 깨달음이라고 말해온 것이다.

불교를 관통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깨달아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에 대해 박태원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해탈 · 열반의 삶/세계를 정점으로 하는 향상적 변화과정에서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들을 확보한 국면이라 가설한다.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들에는 지적 이해, 논리적 판단, 마음 국면의 변화, 정서, 의지, 욕구의 변화, 행위의 결단 등 오온(五蘊)의 모든 현상들이 포함된다. 오온 현상의 어느 것()에서 해탈 · 열반의 삶/세계를 지향해 가는 변화의 전환적 계기가 되는 조건을 확보한 국면들이 깨달음이라고 정의한다.

곧 깨달음이란 삶의 오염과 상처들을 불교적 해법으로 치유해가는 길이라는 의미겠다. 박교수는 부처님의 법설은, ‘지금 여기에서’ ‘삶의 불안과 상처에 관련된 문제들, ‘경험 가능하고 선택 가능한 범주에서, ‘근원적으로 풀어주는 해법이라고 풀이한다.

붓다의 가르침의 생명력은 존재가 지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데 있지 않나 싶다.

현응스님의 주장에 허점도 많지만 그가 말했듯이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깨달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찰해볼 여지가 있는게 사실이다. 한국불교의 깨달음이 개인적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측면과 이것이 중생의 고통문제를 해결해주는 것과 무관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깨달음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보다 어떤 신비체험에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분명 깨달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이리라.

현응스님이 주장한 것처럼 삶 속에서 자비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 곧 자비행없는 지혜는 붓다가 지향한 세계와는 무관하다. 분명 불교는 自利利他이며 지혜와 자비가 不二임을 그 중심에 둔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붓다의 가르침을 배워 익히려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잣대가 아닌가 싶다. 원효는 이를 부주열반(不住涅槃)이라 표현한 바 있다.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 곧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중생구제를 위해 다시 저잣거리로 나선 원효는 붓다가 지향한 세계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준 한 표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