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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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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의 영성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어가고 있다. 이 사태가 길어지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게 되는 계기를 맞고 있다. 종교인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에서 나름의 성찰과 미래의 전망에 대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어떻게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성찰부터 해야 하리라.
코로나 19사태의 주요인
--코로나 19사태의 주요인으로 생태파괴, 인간중심주의적 삶의 방식,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들 수 있다.
생태학자들은 수없이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해왔다. 그래서 생태파괴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지만 많은 이들은 그 심각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 체 종래의 삶의 형태를 그대로 고수하다가 코로나 19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그렇다! 설마 그런 때가 오겠어 했는데 이렇게 우리 앞에 성큼 와 버렸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 중 여기서 좀더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결국 자연을 자원으로 쓰는 인간중심주의적 삶의 방식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생태파괴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 가치관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겨옴으로써 자연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해왔고 그로 인해 결국 자연파괴가 야기된 것이다.
김누리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를 ‘야수(野獸) 자본주의’라 불렀다.
그는 생산통제 불가능한 자본주의를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에 비유했다.
끝없이 생산을 해대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자연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자연 가까이 머물던 바이러스들은 자연에서 인간에게도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오고 말았다. 다시 말해 현대인의 자본주의적 삶이 야기시킨 생태파괴는 자연 속에 살던 바이러스를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단지 코로나 사태를 야기 시키는 근거를 제공한 것뿐 아니라 인간마저도 자본이나 자원으로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저하시켜온 사태를 야기 시켜 오는가 하면, 모든 가치를 인간중심적으로 바라보면서 이제 인간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현대인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점점 인간의 ‘종교적 가치관’을 잃어가게 만들었고 ‘신앙인들의 가치관’을 좀 먹어온 장본인이 되어왔다.
**현대인의 종교는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여기서 신자유주의를 종교로 본다는 것은 그 안에 숨겨진 종교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담스미스 이후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철학자라 불리우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인간질서를 사회적 진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곧 그는 생물학적 진화를 사회에 적용시켜 사회적 불평등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를 부정하며 사회정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원시적 윤리일 뿐이다. 이것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부족사회의 윤리를 열린 사회에 강요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코로나 19위기와 우리의 성찰
우리는 지금 2년에 걸쳐 코로나 위기를 겪고 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 사태는 그저 한번 왔다가 지나가는 전염병이 아니고, 우리에게 일종의 문명사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사태가 일종의 문명사적 전환을 맞이할 만큼 그 임계점 (the critical point)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곧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이할 때가 마침내 왔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가 전환해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코로나 19 사태는 질주해온 우리에게 멈추라고, 그리고 각자의 삶을 성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지금 이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우리의 존재근원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싶다.
1) 자연과의 관계 회복
중국의 농업경제학자인 원톄쥔은 “바이러스는 인간이 이룩한 현대화에 대한 비평문을 작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화는 우리의 머리채를 잡아 대지 밖으로 던졌어요, 인류는 자연과 분리되길 바랬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자연과 분리되어 살아가려다가 자연으로부터 역공격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질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음을 경고받고 있는 것이다. 교황님께서도 <찬미받으소서>에서 자연과 인간,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2)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으면서 우리는 개인주의적 사고가 낳은 한계에 대해 성찰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스크 사용과 관련하여 서구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마라’는 관점에서 시시비비가 있어왔다. 마스크를 쓰라, 말라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합리성에 바탕한 개인중심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동아시아국의 성공적인 코로나 대응에 대해 서구언론은 유교적 전통에서 나온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는 그런 면이 있으나, 한국의 K방역의 경우는 한국인의 시민의식에 기반한 자발적 방역 참여라는 의견이 많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주의와 관련하여 각자의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다시금 성찰케 된다. 다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자유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남의 생명을 염려하고 남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다시 말해 각자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주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삶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나만의 단독자로서 규정지을 수 없고 하느님 인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 지닌 공동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토론주제; 공동체적 사고와 개인주의적 사고
3)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재정립해 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롤 모델로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제시하셨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30)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옷을 벗기고. 얻어맞아 초주검이 되었다. 당대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준다. 여기서 그가 옷을 다 벗기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사제와 레위는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 있어 상대가 ‘옷을 벗기웠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바로 그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이 지닌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의 신음소리에 경청하는 것, 그것이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이 되도록 촉구하고 계신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 교회영성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으로 천명한 바 있다.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동양적 영성과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동양적 영성은 근본적으로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 불교의 연기 "the dependent arising", 유교의 핵심사상인 인(仁)은 인간관계
4)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영성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취약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통찰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연의 모습을 보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상처입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처입기 쉬운 존재란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상처입기 쉽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본연의 존재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취약성을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라 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신이 취약성을 지니셨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취약성은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나는 문앞에 서서 노크한다. 누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시지 않고 밖에서 우리가 문을 열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이 지닌 취약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취약성의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평등하다.
--현대사회에는 많은 집단적 혐오문화가 있다.
예) 한국의 다민족 문화에 대한 편견, 서구의 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증오
인도의 이슬람교인에 대한 편견,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혐오
이러한 혐오문화는 우리를 갈라놓지만, 우리 모두 취약하다는 통찰을 통해 우리는 현대에 만연한 혐오문화를 퇴치하고, 다시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