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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인 가난한 사람..............최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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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경제가 사람잡네> (갈레이저 최우혁 역, 갈라파고스 2016)를 읽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비의 경제학’을 다룬 책이다. 여기서 교황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임을 강조한다.
보통 가난한 사람은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할 존재, 곧 자선의 수혜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교황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선행을 실천하는 차원을 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표현의 근저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와 가장 고귀한 존재가 결코 둘이 아니라는 존재의 평등성이 깔려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존재의 不二性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 갖는 건 사회적 정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평등하다는 존재의 진리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은
자신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편 가르고 자기가 만든 울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부자유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존재의 자유를 누리라는 그분의 초대에 응하는 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가난한 이가 바로 그리스도다’라는 교황의 가르침은
존재의 실상을 직시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자기중심적 메시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같은 형제자매로 구원받았다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선은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베푸는 차원이라기보다 그
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께 사랑을 드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하는 자선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베푼다’는 자기 중심적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 사랑을 드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행위로 탈바꿈 하게 된다.
이렇듯 자선행위의 의미가 변형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여명 속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겠다.
오늘날 자본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지닌 자발성에 근거하여 경제성장의 낙수효과에 대해 말한다.
이는 시장 경제를 그대로 두면 스스로 균형과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줄 수 있다는 데에 근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컵에 물이 차면 아래로 떨어지듯이, 경제가 좋아지면 가난한 이들도 자연히 그 덕을 볼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탁상공론일 뿐임을 현실 속에서 체험한다. 그
건 물이 컵에 가득 차면 마술처럼 컵도 커짐을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가 올라가면 물이 넘쳐나는 게 아니라 그 여분의 물을 담아내기 위해
컵도 점점 커져서 결국 가난한 이들에겐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갈수록 점점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그 이기적인 면을 부추기면 결국 윈윈(win win)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단순한 발상인가? 그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기 밥그릇을 더 큰 것으로 교체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초점을 맞춘 현대 자본주의는 결국 빈익빈 부익부를 점점 더 심화시켜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우린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지닌 한계를 뚜렷이 보게 된다.
자본주의적 인간이해를 극복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을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 성찰해봐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