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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의 신앙을 넘어 차이로 깊어지는 종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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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2-0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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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의 신앙을 넘어 차이로 깊어지는 종교성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랫동안 교회의 제도와 함께 형성되어 왔다. 신앙은 개인의 내적 확신이기 이전에, 교회가 규정한 언어와 형식 속에서 전승된다.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해석인지, 누가 공동체 안에 머물 수 있는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질서는 신앙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되었지만, 동시에 신앙을 하나의 동일성 안에 고정시키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교회는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경계를 설정해 왔다. 정통은 단순한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믿음의 올바른 형태를 규정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신앙의 혼란을 막는 역할을 했지만,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유와 질문은 쉽게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혔다. 이단이라는 이름은 종종 신앙의 오류라기보다, 제도적 동일성을 위협하는 차이에 부여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원죄와 구원, 은총과 심판 역시 교회 제도 안에서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로 굳어졌다. 이 체계는 신앙을 설명하는 데 강력한 틀이 되었지만, 동시에 인간과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시켰다. 그 틀을 벗어나는 언어는 신앙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질서를 흔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교회가 신앙을 관리하는 순간, 차이는 질문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질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서 ‘차이’를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차이는 동일성의 결핍이나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생성하는 힘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 안에서 발생해 온 다양한 신학적 논쟁과 해석의 차이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신앙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수 있다.
교회내에서 정통이라 불리우는 교의들은 신앙이 완성된 틀이라기보다, 특정 시대와 권력이 선택한 하나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는 언제나 차이와의 긴장 속에서 자신을 규정해 왔다. 초기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사유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신학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고, 한때 위험하다고 여겨졌던 질문들은 시대가 바뀌며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반복해서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불안을 관리해 왔다.
가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하나의 정통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차이를 정통속으로 포섭하고 포섭이 안되는 것들은 이단으로 처단하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교회 제도는 여전히 ‘같은 믿음’을 요구한다. 신앙은 교회의 정통적 신앙고백과  교리적 일관성으로 평가되고, 신앙의 깊이는 종종 제도에 대한 순응으로 측정된다. 그러나 같은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각자의 삶은 전혀 다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신앙을 살아낸다. 교회는 이 차이를 얼마나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들뢰즈의 철학은 교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신앙은 동일성을 지키는 데서 생명을 얻는가, 아니면 차이를 견디는 데서 성장하는가. 교회가 차이를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때, 신앙은 제도 안에 머물지만 삶을 잃는다. 반대로 차이를 신앙의 생성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교회는 불안해지지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통성은 신앙을 지켜 주는 울타리일 수 있다. 그러나 울타리가 너무 단단해질 때, 그 안의 신앙은 숨을 쉬기 어려워진다. 동일성의 교회에서 차이의 교회로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이동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교회는 믿음을 보존하는 기관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한 질문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공동체인가.
이 질문 앞에서, 정통이라는 이름의 안정과 차이라는 이름의 불안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는 오늘날 교회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