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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도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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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5-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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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도의 자리
                                                                    2026.5.5.  최현민

기도하려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 앉아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요히 머무르려 한다. 그러나 곧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도 떠오르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들도 마음을 스친다.
하나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생각이 이어진다.
잠시 집중되는 것 같다가, 또 생각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이렇듯 기도하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침묵 안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침묵하지 못할까
사실 이 질문은 많은 이들이  반복해 온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탓한다.
집중하지 못하고 쉽게 흩어지는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기도를 문제로 삼는다.
그래서 더 집중해보려 하고, 더 깊이 들어가보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애를 쓰면 쓸수록 침묵에서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멈출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기도를 잘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를 ‘마음의 일’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하려 애써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은 멈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
생존을 위해 뇌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왜 기도를 못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으로 기도하려 하고 있는가”라고.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고백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신앙고백은,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을 드러낸다.
곧 하느님은 인간을 생각 속에서 만나지 않으셨고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 사실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기도의 본질을 결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바로 기도는 생각의 활동이 아니라, 몸을 포함한 인간 존재 전체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기도는 소리였다. 기도는 낭송되었고, 노래되었으며,
공동체는 하나의 리듬 안에서 하느님께 응답했다.
기도는 몸으로 바쳐졌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움직임이었다.
 이 흐름은 사막으로 이어졌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집중하고자 했던 이들은 도시를 떠나 광야로 들어갔다.
우리는 흔히 이들을 “침묵의 사람들”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생각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짧은 기도를 반복했다. 단순한 한 문장을, 끊임없이, 몸의 리듬과 함께 되풀이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하나로 모으는 리듬이었다. 사막교부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은 스스로 침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호흡과 함께 기도를 반복하고, 몸을 한 자리에 두며, 그 반복 속에 자신을 맡겼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집중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어떤 리듬 안에 두는 것이었다.
기도는 점점 짧아지고, 소리는 점점 단순해지고, 호흡은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침묵에 들어갔다.
그 침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었다.

  사막교부들의 전통은 동방교회 안에서 계속 이어졌다.
특히 “예수기도”는 이 흐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이 기도는 호흡과 함께, 심장의 리듬과 함께,
몸의 깊은 자리까지 내려간다.
입술로 시작한 기도가 마음을 지나 몸 전체로 스며든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길은 점차 눈에 띄지 않게 사라져버렸다. 서방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를 점점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그들의 기도는 점점 더 내면화되고, 의미를 묵상하고, 성찰하는 활동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기도는 점점  생각과 묵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결과 위에 서 있다.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 기도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도가 일어나던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그 자리는 몸이었다.
호흡이었고, 리듬이었으며, 존재 전체가 하나로 모이던 자리였다.

이제 우리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새로운 길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지만 잊혀진 길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기도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생각이 아니라, 존재에서.
머리에서가 아니라, 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