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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15년도 9월 강의 녹취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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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5-10-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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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대화강좌 최대광 목사님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본 소통과 공감

 

근본주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막연하게만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카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말합니다. 개신교 근본주의가 왜 생겼는지, 어디서부터 생겼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을 얻고 가시면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넓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합니다. 근본주의가 기독교에 있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자기와의 차이점을 통해 집단내의 결속을 강화하고, 대결구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치화하려고 했던 것은 민족적 근본주의도 있을 수 있고 회사같은 경우에는 삼성 근본주의도 있을 수 있고 야구팀 같은 경우는 LG 근본주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대시 하면서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윗 계층을 차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 가운데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적대시 하면서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이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목회자를 데려옵니다. 돌고 도는 형태가 됩니다. 우리 교회 3.1절 기념으로 예배 끝에 찬송을 부르고 끝나는데, 애국가를 부르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로가 애국가는 우상숭배기 때문에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상숭배냐고 하니, 가사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했다고 말을 합니다. 똑같은 건데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번역으로 냈던 성경이 있습니다. 아마 카톨릭에서는 사용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사용을 잘 안합니다. 사용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했다고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 하늘님이고 하느님이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죠. 일본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가미. 영어로는 갓(GOD). 소문자 갓(god)은 귀신 아닙니까. 대문자는 큰귀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아랍어로는 알하(alha)라고 했습니다. 알라와 비슷하죠? 어원이 똑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lha는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과 뜻이 비슷합니다. 일자에요. 근본입니다. 그런데 이 근본이라는게 우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공’을.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앉을 수 있잖아요.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는 것이죠. 있음보다 없음이 선행하죠. ‘공’이라는 개념은 더 큽니다. 텅 비어있는 무엇 속에 시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텅 비어있을 때. 뭐가 있어야 시간이 있는 것이잖아요.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텅 빈 공간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은 시간도 없고, 공간적으로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은 절대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여러분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어요. 젊었습니다. 2, 3분 전까지만 해도 듣고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 3분 후에 못 보고 못 듣게 됩니다. 그럼 여태까지 듣는 자와 보는 자는 어디에 있었던 것입니까?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애초에 텅 빈 공간, 공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다 전체의 ‘공’ 속 안에 들어있습니다. 여긴 구분할 수도 없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 하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나눌 수도 없고 다 품어냅니다. 주기도문 앞부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빈 하늘이 모든 것을 품고 있죠. 산도 품고, 아파트도 품고, 그 안에서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도 품고, 여기서 영성강의를 듣고 계신 여러분도 품습니다. 하늘은 경계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하늘위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알하(alha)는 1을 말하는데, 아라비아 숫자의 1, 2, 3이 아니라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곧 전체라는 뜻이에요. 상징적인 부분들만 들어가서 보면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데 상징성을 이해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적과 나를 나누고 단결력과 적개심과 자기가 품고 있는 신화적인 생각들이 관철되어야 이 땅에 유토피아가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요즘에 불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되고 인도철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마하르쉬라는 분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베단타(vedanta)라고 하는데, 베다철학의 veda에서 끝에 nta를 붙인 것입니다. 베단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 있는데 7-800페이지 전체가 문답형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스승의 발치밑에서 계속 청문합니다. 밑에서 계속 물어보고 대답하고. 이것이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제2장에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죠. 요한복음의 전체구도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을 때 진짜 떡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 식의 청문적인 형태가 있었던 것이죠. 그 이전에 유대인들의 <선조들의 어록>이라는 책을 보면 우파니샤드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스승의 발치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써라’. 지리적으로 건조하니까 스승의 밑에 앉아서 들으려면 먼지가 묻겠죠. 그래서 먼지를 뒤집어 쓸 정도로 끊임없이 집요하게 물어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특별히 율법, 토라에 대한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주변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청문. 서양철학 안에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했던 변증.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 게임을 하면 한쪽에서는 변증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질문하고 한 사람이 답을 합니다. 그때 질문은 청중이 던집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해봐라. 그럼 한 사람이 사랑에 대한 답변을 합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끊임없이 답변을 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을 만큼 명석타당한 대답이 나왔다면, 그것을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질문자의 물음에 답을 못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자의 위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영성적으로 무지를 알라는 것은 겸허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다시 얘기하면 하느님 앞에서 겸허하라는 것이겠지요.

끊임없는 소통이라는 형태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속에서 끊임없이 내려왔어요. 개신교 전통은 한쪽에서만 이야기합니다. 청문에 있어서 소통과정이 없기 때문에 목사에게 질문을 하면,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기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엉터립니다. 개신교에서는 통성기도를 합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기도백과사전 안에 Tongsung player(통성기도) 라고 나옵니다. 이것의 기원은 이러합니다. 하비라는 감리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의사이자 목사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미개한 나라에 근대화된 존재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무시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쁜놈이다, 너를 무시했다고 고백합니다. 국화와칼 이라는 책을 보셨습니까. 동양문화, 특히 일본문화는 자기가 수치심을 느낄 때 죄책감을 느낍니다. 내가 잘못했던 걸 남이 알았을 때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문화는 신 앞에서 잘못을 했을 때 죄의식을 느낍니다. 동양에서는 수치심이라는 것, 체면이라는 것을 많이 고려하니까요. 그런데 남들 앞에서 내가 나쁜놈이다 잘못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에게 충격인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데미지가 생기는거예요. 저 놈 도둑질 한 놈이다, 같이 다니면 안 된다... 신부님 앞에서 몰래 하는게 아니라 사람들한테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죠. 그래서 신에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이 감정도 많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참회를 한 것입니다. 그게 회개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가만히 보니까 리얼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서 보면 교회의 장로이기도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통성기도할 때 불을 끕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에게 외치는 기도의 형태로 바뀝니다. 가장 경계해야할 것을 교회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건축을 위해서 여러분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주여 삼창하면서. 정말로 이렇게 합니다. 순복음 교회가 순전히 그런 것 아닙니까. 삼박자 축복이라고 ‘너의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너의 몸과 너의 건강과 너의 범사가 잘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요한1서의 요한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을 빌어준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혼, 육체, 재산 증식. 이것을 잘 되게 하는게 삼박자 축복입니다. 지금 개신교가 망가진 거예요. 정신상태가 망가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관성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목사들한테 선포되고 있어요. 근본주의자가 근본주의자를 데려오면서 일방적으로 대화도 청문도 없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탈한 지식과 대단히 위험한 이야기를 그냥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남아있겠습니까. 남아있기 힘들죠.

1970년대 박정희시대에 잘살아보세, 그리고 80년대로 넘어오면서 도시화와 함께 잘살아보세의 코드와 아까 말했던 삼박자 축복의 코드와 미국에서 넘어왔었던 근본주의가 결합합니다. 칼뱅주의를 먼저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맑스베버가 후에 칼빈을 재해석하면서, 캐피털리즘은 불안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불안이란 내가 돈을 벌 수 있을까 아닐까의 여부가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있어 프랑스라든지 유럽 귀족들의 종교가 카톨릭 이었습니다. 근대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평민들 중에서 부자가 생깁니다. 장사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귀족들에게 자꾸 뜯기는 거예요. 프랑스혁명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자유의 여신이 프랑스 깃발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뒤에는 사람들이 총을 들고 따르는 그림입니다. 그 따르는 사람들이 상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이죠. 이들을 위한 종교가 필요했던 겁니다. 칼빈은 구원의 증거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노력하면 벌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가 돈을 법니까. 돈이 돈을 벌지 않습니까. 땅이 돈을 벌거나. 추상적인 것이 돈을 법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열심히 일해서 근면한 것은 낭만적인 가능성과 연결되었습니다. 칼빈의 논리은 시대철학과 맞아떨어진 것이죠. 벤자민 플랭클린이라는 미국대통령이 가장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클래식한 입장을 만들어냅니다. 일주일간의 삶을 도표로 그려놓습니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동을 집약하는 체제입니다. 중세시대의 농노는 지금처럼 노동하지 않았습니다. 10시간을 일한다면 강도 높은 노동은 2시간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패턴이 들어오면서 시간제로 노동을 하기 시작했죠. 시간표에 맞춰서 노동을 합니다. 개신교에서 술담배도 이때부터 금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에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을 위해서 술도 규제하고 몸도 성적결합도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의 노동은 시간별로 다 나눠져 있지 않습니까.

이런 형태의 종교성이 대중화된 칼빈주의와 신의 축복, 강복이라고 하죠, 강복과 결합되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와 결합되기 시작하고 여기에 반하는 사람들은 처단 대상입니다. 미국에서의 근본주의 힘이 강합니다. 미국의 부시(아들) 전대통령 역시 전형적인 근본주의자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결합해서 만든 최초의 대통령인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목사들이 나와서 대통령 후보를 검증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기도 합니다.

이슬람주의도 다른 각도로 봐야합니다. 사실 이들은 종교의 탈을 쓴 반미주의입니다. 그런데 자꾸 미국에서 종교전쟁으로 그것을 감추는 것입니다. 반미주의라는 입장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석유입니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사방에서 알라를 섬기면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석유가 발견된 후에 서로 자원을 가져가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석유를 중심으로 지역 내부에서도 부의 분배가 다시 생겨나고 저렇게 된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영적 전쟁이다, 사탄과 싸운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근본의 어원이 똑같다니까요. 이슬람 종교도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가는 해를 해지라 라고 해서, 성스로운 도망이라고 말합니다. 메디나는 유대인의 집단거주지역 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고대 바빌론 지역으로 다신교지역이었습니다. 갑자기 마호메트가 도망간 후에 메디나가 유대인 집단거주지역이었으니까 유대교를 배운 것입니다. 또한 초창기에 있어서 기독교 이단논쟁으로 사막으로 도망가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던 수도자들의 교리를 배웁니다. 이것들이 종합된 것이 이슬람입니다. 종교적 천재들은 종합하잖아요.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문서들을 종합해서 마호메트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성경책과 유사한 이야기가 많잖아요. 이슬람에서 가장 존경하는 여인은 마호메트의 어머니나 부인이 아니고 마리아입니다. 예수도 예언자, 마호메트도 예언자입니다. 무슬림들이 한쪽에는 칼을 들고 한쪽에는 코란을 들고 코란을 모르면 죽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전쟁 중에도 코란의 도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운데서 커뮤니케이션을 왜곡하고 그냥 부딪히게끔 싸움을 부추기는 본질은 석유입니다. 석유에 의존하는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뺏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솔라주의로서의 기독교 근본주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록을 읽으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터가 솔라그라티아, 솔라스크리트라, 솔라피데 라는 말을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서로, 오직 은총으로 이런 말을 써요. 그래서 카톨릭의 교회라는 형태를 거부합니다. 교회를 통과하지 않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솔라주의로 이야기할 때 잘못하면 유일주의로 나타납니다. ‘오직 무엇으로만’으로 배타성을 띄게 됩니다.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솔라주의란 ‘유일주의’ 곧 종교개혁에서 나온 루터의 선언이지만, 그 안에 언제나 배타성을 전제하고 있다. 솔라주의가 기존 부패한 가톨릭에 저항하며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서구 전통의 부정의 길 via-negativa의 발현이라면 환영해야 할 것이지만, 이것이 근세와 오늘날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같이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과 낭만적 복고주의로의 퇴행을 향한 길에 사용된다면,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1)

 

여기서의 낭만적 복고주의는 켄 윌버라는 학자가 쓰는 개념입니다. 신앙은 합리주의에 토대해야 성숙한 신앙인데 합리주의와 신앙을 극단에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생각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야한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것을 전체로 가야한다는 의미로 쓰면 좋겠지만, 이성에서 감정으로 가야한다고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고주의는 합리주의가 일어나기 전의 신화적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성이라는 것은 18세기 합리주의 반대편으로 나왔던 낭만주의, 신화적 신비, 초월을 말하는 풍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낭만적 복고주의 형태가 있습니다. 미국같은 경우는 신이 미국을 사랑해서, 전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복음화는 정복의 다른 말이지요.

 

“미국의 근본주의는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조롱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성립된 한국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기독교회”라고 분류해도 무방할 만큼 근본주의는 압도적이다. 근세 이후 교육의 중심인 관용은 근본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즉, 반현대적 퇴행인 근본주의가 우리나라 기독교의 절대다수인 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1)

 

몸말을 보겠습니다.

 

힐라스와 린다 우드헤드가 편집한 현대의 종교 Religion in the Modern World 에 서는 현대의 종교현상을 커다랗게 세부류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분류방식이 절대적일 수 없지만, ‘근본주의’를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유용한 틀인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종교를 “차이점의 종교” religion of difference와 “인본적 종교” religion of humanity 그리고 “삶의 영성적 종교” spirituality in life로 분류한다.”(1)

 

카톨릭에서도 차이점을 중심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샤르댕 신부도 유일한 교회는 카톨릭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이 형태가 극단적으로 나가면 차이점의 종교로 나가게 됩니다. 인본적 종교는 인권을 중심가치로 놓는 종교입니다. 삶의 영성적 종교는 내면을 내관하는 속성을 갖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서는 절대 다수가 타종교와의 ‘차이점’을 통해 구원과 멸망을 구분하려는 사람들이다. 합리적 근거 안에서 성서와 전통을 재구성하고, 사회참여에 강조점을 두려는 소수의 사람들과 수도사적 내적 체험을 통해서 신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역시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과거의 전통적 종교 분류 방식에 의하면, 이 셋은 하나의 종교 안에 있지만, 폴 힐라스와 린다 우드헤드가 제시한 틀로 볼 때, 이 셋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누구를 ‘고백’하느냐가 종교 분류의 주 관심사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 어떤 형태의 존재/활동방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종교를 분류하는 틀이기 때문이다.”(1)

 

“이들은 근본주의를 “극단적 차이점의 종교” religion of heightened difference로 구분한다. 극단적 차이점의 종교란 단지 ‘다름’을 통해 자신을 정체화하는 영역을 넘어서 있다.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다름은 ‘악’이고 동질은 ‘선’이라고 정의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전통적 종교 안에서의 이들의 제휴관계를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간 대결이란 “극단적 차이점의 종교”인 근본주의를 가진 기독교인과 역시 같은 형태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인들 간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타리크 알리의 책 『근본주의의 충돌』은 ‘무신론자’인 저자가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결과 국제질서를 성찰한 책이다. 종교간 충돌은 전통적 종교적 구분 안에 “차이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간의 갈등인 것이며, 넓게 보면 이들간의 갈등은 신자유주의를 통한 미국의 세계를 강화하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힐라스와 우드헤드는 근본주의 (그들은 이를 “차이점 중심의 종교” religion of difference라고 부른다)적 종교 형태는 20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 형태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2)

 

“스티브 브르워와 다른 저자들이 편집한 책, 미국식 복음의 수출 Exporting American Gospel, 에 의하면, “종교적인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불리워지기 원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이들은 ‘근본주의’ 보다, “복음주의” 혹은 ‘주권주의’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다. 근본주의 Fundamentalism의 원형은 20세기 초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발행된 팜플렛에서, 근본: 진리를 향한증언 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 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성장하고 있었던 합리주의와 현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양보할 수 없는 5가지의 기독교 교리를 제시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2)

한국에서는 칼빈의 5대교리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는 죽어도 양보 못한다고 해서 Five Fundamental입니다. 첫 번째는 성서무오설, 성경책은 전혀 잘못된게 없다는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성경책에서 ‘무지하게 살인하시는 하느님’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가면 무엇이든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누가 진짜입니까? 그리고 레위기에서 비늘이 없는 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 세 번째,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 네 번째, 사탄과 비 기독교인들의 멸망. 다섯 번째, 예수를 믿는 자들의 부활과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영원히 사는 것. 이 다섯가지보다 중요한 것이 현대주의에 대한 반발입니다. 인도에서 외국인에 대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데, 힌두 근본주의에 의한 것입니다.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에 대해 카스트 제도를 지키고자 복고적 낭만주의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현대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성을 띄었을 때 근본주의 라고 칭합니다. 그 전에는 보수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 개신교인들이 합리주의적 시대정신에 반발하여 본인들이 보기에 핵심적인 개신교 진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근본주의의 반 지성주의와 반 합리주의 그리고 복고적 낭만주의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구조주의적 틀로 살펴 본다면, 이들은 신앙을 비합리의 항에 위치시키고, 합리성을 비신앙의 항에 위치시켜, 합리성을 신앙과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합리주의는 비록 전통적인 기독교의 세계관에 때로 위협적이거나 때로 수정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반신앙적이라는 것은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여하튼, 이성을 신앙과 대립하는 영역으로 설정했던 프린스턴의 “5개의 근본”은 이성의 시대 이후에 발생한 반동적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수주의’ 혹은 ‘전통주의’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이를 ‘근본주의’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스티브 브로우워는: “이들이 근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회/정치학적 운동에 관여할 경우 (때때로 아주 강력한 민족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있을때)에 해당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보수주의란 과거 전통과 삶의 방식에 회귀하는 개인적인 삶의 형태라면, 근본주의는 정치적 운동을 통해 합리주의적 삶의 양식을 몰아내고, 전통이라는 체계에 숨어 있는 신화적 가치와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퇴행적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2)

 

한국기독교는 근본주의입니다. 시청앞으로 나오는 등 정치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나왔을까요? 이권도 관련있습니다. 또 북한에 대한 것도 관련되어있습니다. 한국기독교 김대중 정권에서 북한과 화해의 시도를 했습니다. 개신교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교회가 많습니다. 서북청년단의 80%가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 였습니다. 개신교에서 북한은 악인데 김대중때부터 데탕트 무드가 형성되니까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빨갱이는 다른게 아닙니다. 자신과 다르면 빨갱이 입니다.

 

“크리스 헤지스가 쓰고, 정재복이 번역한 『지상의 위험한 천국』은 미국의 근본주의와 이의 전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적 주권주의에 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 글에서, 크리스 헤지스는 근본주의의 발생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3)

수백만 미국인을 그 운동속으로 이끌어온 고통, 혼란, 소외, 고통과 절망은 실재하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붕괴된 것에 책임이있다고 비난하는 문화에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적 전통과 계몽적 가치가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감각 상실, 고통이나 기쁨이나 사랑을 느끼지 못함, 거대한 공허감, 무서운 고독, 통제 상실에 관해 말한다. 개인적 자유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세계는 많은 사람들을 차례 차례 뱀 구동이에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그들의 공동체 가정, 삶이 분열되고 자멸할 때에도 수동적으로 방관했다. 이 절망 속에서 이 신자들은 과학과 법과 합리성의 세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포기했다. 그들은 개인적 선택과 자유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저버린 세계를 예언자와 신비한 표징으로 가득한 새롭고 영광스러운 세계로 대체해왔다.”

 

그리고 사회적 좌절과 불확실한 세계관에 근거하여 신화 안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에코는 파시즘의 특징을 “전통의 숭배에서 출발하여, 현대성 곧 다원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비합리주의를 찬양하게 되고, 다양성에 반대하므로 불일치는 배반이라는 생각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파시즘 역시 개인이나, 사회적 좌절에서 출발하며, 이들은 “적들은 강하며 자신은 약하다"는 패배의식 속에서 서로간에 연대성을 강화하고, 적들과의 ‘최후’의 싸움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에게 평화주의란 비굴한 타협이고 배반일 뿐이다. "(4)

 

"이미 미국의 텔레비전 지상파를 통해 설교자들은 “종말론적 정화를 통해 낡고 죄 많은 세계를 박멸하고 이로 인한 공허함을 시간이 멈추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새로운 세계로 채우겠다”고 약속하고 있다."(4)

 

"그래서 이들은 교육에 침투하여 창조론을 가르치라고 압박하고 있으며, 동성연애를 반대하며 이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거나, 때로 이들을 박해하고, 중동지역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과 다양성에 반대하는 정치가들을 지지하고 있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나선 미국을 ‘십자군’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미국적 가치에 ‘반’한 사회주의적 사상을 증오하고, 복지정책도 반대하고 있다."(4)

 

한국의 기독교 역시 어떤 정당과 뭉치고 있습니다. 제가 야당을 지지한다는 말도 하기 어렵습니다. 신앙 밑에 정치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신앙 위에 정치의식이 있습니다. 5페이지를 보시면 “스티브 브로우워는 바로 이 점, 곧 근본주의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해 ‘신화적’ 환등상으로 결합되는 지점이 바로 미국식 근본주의가 생산된 양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배타주의가 나중에 자본주의적 황금사과와 결합이 됩니다.

 

“1890년에 미국이 현재의 영토를 차지 했을 때, 자신들의 영토를 미국 이상으로 확대하려고 하려는 욕구가 있었다. 미국은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된 나라이며 또한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방향대로 끌고나갈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운명적 교리는 앵글로 섹슨족의 민족적 우수성에 기대고 있으며, 미국은 서쪽으로 향하는 문명의 중심에 서 있고, 미국의 정치구도는 탁월하고, 미국의 개신교는 순수하고, 영어는 모든 인류가 배우기 원하는 언어라는 것이다.(5)”

 

“콜로라도주의 주지사인 윌리암길핀은 1846년에 주지사에게 보내는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한다:

미국 국민의 운명은 이 대륙을 정복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의 사회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 불멸의 임무!

세계의 국가들이 이 문명의 질서에 편입될때 미국은 각 국가들의 주체가 될 것이며, 전 세계를 산업으로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6)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중심주의가 나오고, 이 가치에 반하면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반하는 유럽국가들은 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개신교에서 유행했었던 종말이온다, 이를 유럽연합을 두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 반하는 복지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이 밑에는 새로움에 대한 불안이 사실 깔려있습니다.

근본주의적 설교자인 조시암스트롱은 그의책 “우리나라” 와 “새시대: 다가올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당시 “175000 권이 팔려 나갔다.”는 것은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개신교 안에서 유명한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가 있습니다.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나는 기독교인이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순복음교회에서 설파하는 말과 비슷한 이야기가 이때부터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무디의 노력으로 전국 각지에 신학교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복음적 열정으로 뜨거운 것입니다. 미국에 의한 산업화와 복음주의가 전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뜨겁게 갈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옵니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선교가 시작된 때는 앞서 언급한 무디의 근본주의와 세계선교의 영역이 확장될 당시였다. 배덕만에 의하면, “한국에 상륙한 최초의 두 미국 선교사였던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모두 미국 근본주의 태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디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이 갖고 있었던 세계관이 멋져보이는 겁니다. 의학, 신교육을 들여왔으니, 봉건적인 유교를 탈피하는 새로운 형태의 우리 국가를 끌고갈 수 있는 뭔가가 거기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이런 태도가 없었을까요? 조선시대에 노론벽파라고 있지 않습니까. 노론의 300년 역사라는 책을 보면 친일파들이 다 노론이었습니다. 송시열 이후 이사람들이 지금까지 주류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어서라도 자기당파가 잘 되었으면 되었습니다. 윤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자의 시각으로 공맹을 해석하는 주자학, 양명의 시각으로 해석한 양명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휴는 주자가 해석한 공맹에 대해서만 왜 인정을 하느냐, 자신도 나름의 해석을 제기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주자학은 해석학이니까요. 그러니 송시열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악한 자가 없겠는가. 하지만 윤휴처럼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자는 있지 않았다. 비록 중국의 왕양명이나 이탁오와 같은 양명학자들의 말이 불손하다 해도 윤휴보다는 덜했다…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내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도통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 (一理)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 (一書)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속의 억지를 늘어 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조선시대의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있던 문화는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절대화했기 때문에, 주자를 제외한 해석은 모두 ‘이단’이라고 취급하는 문화가 형성됐던 것이다. 이런 문화는 노론집권 300여년간, 곧 조선의 전 역사를 관통하며 계속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봉건 영주들에 의해 권력이 분점되는 사회가 아니고, 왕에 의해, 더 넓게 보면 왕과 당파에 의해 통제되었던 중앙집권적 사회였다. 이들의 흐름을 막거나 비판할 사람이 극소수인 전체주의 사회였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야자키와 몽테스키외의 말을 빌려 이를 “개별사회” 혹은 “중간세력”이 사라진 사회라고 말 한다.(7)

 

이중석이라는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그 분의 현대사 이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조선이 갑자기 해방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1941년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패망할 당시 여운형 같은 사람은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운형은 중도좌파였고, 김규식은 중도우파였고 그 둘이 연합을 했습니다. 극좌에는 김일성과 김헌영이, 극우에는 이승만이 있었고요. 그리고 여운형과 김규식이 암살당하고 극좌와 극우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전쟁이 났죠. 이런 역사가 우리안에도 있었습니다. 다원성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은 경험이 있습니다. 캔들이라는 사람이 쓴 샤먼, 하우스와이프 글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음양이 있어서 양에 유교가, 음에 무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유교는 종교성이 약하지 않습니까. 절대적으로 의존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공백을 무교가 채워준 것이죠. 한 집안에서 여성들은 무속신에게, 남성들은 제사를 통해 조상숭배를 했습니다. 남성들의 심적인 불안을 부인에게 의존했었습니다. 이런 결합으로 인해 종교전쟁은 없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 토양은 조선초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에도 보입니다.

 

“선교사들은 당시 선교사들의 잡지에서 한국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유교나 불교 그리고 무속을 “한국 선교의 방해물들”이라고 칭하면서, 동양의 종교적 유산을 가난의 원인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유교와 무속을 두고 아예 “한국의 악마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즉 “기독교적 미국-자본주의-국가주의”의 신화적 결합체인 근본주의의 테두리 밖은 ‘개종’과 ‘회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8)

 

그러다 근본주의적으로 정치화가 된 것은 조선 이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한국의 보수주의가 근본주의화 되는 과정, 곧 보수주의가 정치화하여 미국과 같이 “기독교적 한국-자본주의-국가주의”가 결합되어 등장했던 형태는 최근의 일이다. 물론 이것이 등장하기 위한 역사적 원인이 있어야 했는데, 이것은 6.25 전쟁이었다. 성서에 대한 보수적 해석만을 고집했던 이들은, 역시 원론적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써, “해방전 한국 개신교 인구의 70-80%를 차지하던 서북출신 개신교인들이 대거 남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미 전쟁 전 이들은 대거 남하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곧 ‘차이’와 반反 의식을 형성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교인들이 대거 목숨을 잃게 되면서, 눈에 보이는 명확한 ‘적’이 설정된 것이었다”(9)

 

남한에는 신학교가 별로 없었습니다. 북한의 신학교 출신 분들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교직에 많이 서게 됩니다. 종교에 대해 다원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분들은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순교에 관해 카톨릭의 경우는 유교에 의해 죽임를 당했지만, 개신교도들은 공산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순교담론을 통한 신화화된 신앙”과 북에서 남으로 이주해 온 이주민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결합되면서 한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는 타자 곧 ‘공산주의’가 위치하게 되었다.”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가 있었다. 1997년, 반공을 모태로 한 주류집단이 야당이 되었고, 햇빛정책을 통해 북한과의 소통이 활성화 되었다. 한번도 객관화되지 않았던 ‘반공’이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의식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80년대를 기점으로 금서에서 해제된 마르크시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서서히 높아져 가는 합리주의, 동양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 종교의 상대주의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복고적 낭만주의로의 퇴행의식이 생겨나고 이들의 정치화가 시작된 것이다. ”

 

이것이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인 것입니다. 2007년엔 정치진출을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결합하기도 합니다.

 

“기독당은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좌파’에 대한 증오는 우파와 결을 같이 한 미국식 근본주의를 닮아가고 있으며, 이들이 말하는 예수정신 곧 신앙을 좌파 곧 사회개혁과 진보의식과 그리고 합리주의의 이면에 놓았다는 것도 신앙과 합리성을 이항대립적으로 설정한 근본주의 문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본주의 역시 물질적 성공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치부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기름을 붓고 있다.”(11)

 

“미국의 근본주의가 배타성과 자본주의가 결합된 형태를 띠는 것과 같이, 한국의 교회도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이미 순복음 교회가 3박자 축복이라 하여 현세주의적 축복을 강조하며 대 성공을 이루어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가 된 것과 같이, 한국의 대형교회는 세계적 수준이다. 백소영이 쓴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에서는 저자는 우연히 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됐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언사역자이신 000 목사님이 성령에 취해서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통해 많은 사회적 지도자들을 배출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인력자원공급센터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과학과 의학분야에서 기름부음이 증가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 획기적인 의학적 방법으로 수술을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겨 존귀함을 받을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세상 영역에서 높이 들린 우리교회 교인들에 대한 이 예언은 어느 교회에서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호의가 우리 교회에 계속 임할 것입니다… 오직 이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담임자는 계속 “우리교회”를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백소영은 이성을 넘어선 계시와 신앙을 인정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만, 그것도 한 특정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내리는 계시, 더구나 개인이 세속적 성공을 위한 ‘전문적 아이디어’로써의 계시라는 말은 성서나 교리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 없는 인간의 사리사욕, 잘못된 욕망의 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12)

 

한국사회를 살면서 사람들이 늘 듣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이런 이야기들이 자극하게 됩니다. 너희는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한 자가 우리 교회를 통해 배출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개신교가 이용하는 문법입니다.

 

“솔라주의 곧 유일주의는 배타의식의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의식의 현대적 표현을 근본주의라고 했다. 이 종교의식은 이미 모든 종교 안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린다 우드헤드와 폴 힐라스에 의하면, “차이점의 종교”는 가장 성공적인 현대의 종교형태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원인을 이들은 “흔들리는 사회”에서 보았다.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는 자신들의 현실이 불만족스럽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반’ 곧 ‘솔라’라는 유일주의적 세계관에 쉽게 몰입되며, 이를 뒷받침 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한 복판에서 신화적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솔라주의의 대중적 표현형태인 근본주의에 대한 치유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근본주의란 성서에 대한 설익은 해석이나 문자주의가 아니라, 합리주의에 대한 ‘좌절’을 숨기며 신화적 세계로 퇴행하면서 발생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좌절을 ‘인생역전’의 은혜를 통해 성공으로 바꾸는 교회 강대상의 선포가 되던지, 가난과 좌절에서 성공했다는 기업주의 간증이 되던지,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로 신화화 되던지 반 합리주의적 신화는 지금 이순간에도, 사회의 문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적 한국-자유민주주의-국가”라는 결합체라고 했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문제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의식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반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적 의식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본주의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럽의 사회복지국가를 보면, 결국 근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사회복지와 타자를 인정하는 공동체의 문화가 확립됐을 때이다. 삶이 예측 가능하고, 좌절의 확률이 낮고,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 낮을 때, 신화와 비합리로의 퇴행성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위에서 밝혔듯, 미국 내의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국가재산을 민영화 곧 사유화하며, 복지를 줄이면서 합리성 혹은 ‘인본주의’와 반대 항인 신화적 믿음을 곧 신앙이라 생각하게 하는 것과 같이, 근본주의에 대한 치유는 사회복지의 확대에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안에서 취해야 할 것이 있다. 중앙집권적 문화 안에서 다원성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스스로 근대성을 소유해 보지 못한 한국에 미국식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원형’인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은 교회 안에서는 자유주의 (이단의 완곡한 표현)이다.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 문화’란 것이 ‘근본주의 문화’일 뿐이며, 기독교 전체 역사에 있어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카렌 암스트롱이 말했듯이, 상징적 문서인 성서를 과학적 파라다임으로 해석하는 독법이다. 물론 여기서 파생한 창조과학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은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신화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잠에서 꿈을 합리적으로 꾸는 사람은 없으니까.”

 

합리성을 품어안고 가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합리성을 받아들이고 사회복지의 확대, 건전한 신앙이 확립될 때 이들의 입장이 약화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나는 하느님께 하느님을 없애달라고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를 이야기 하기 전에 엑카르트가 한 말입니다. 앞의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하느님입니다. 뒤의 하느님은, 우리가 규정하는 하느님입니다. 규정하는 하느님을 끊임없이 없애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하는 돌파는 이런 것입니다. 자신을 덜어내고, 자신의 인식도 덜어내고, 우상숭배를 덜어내면서 하느님의 품안에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잘못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입니다. 내가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결국 내가 하느님 보다 더 좋은 자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더 좋게 될 수 있고, 더 좋은 것은 가장 좋게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좋은 분이 아니기에 더 좋은 분이 될 수 없고, 더 좋은 분이 아니기에 가장 좋은 분이 될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없애달라, 곧 드러난 이미지와 형상을 거부하고, 영혼 안의 신을 추구하는 것을 통한 심층으로의 ‘돌파’ breakthrough는 집착을 벗어나 내려놓는 끊임없는 비움이다. 토머스 머튼은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을 설명하면서 그의 책 『새 관상의 씨』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궁극적 관심을 통해 당신의 궁극적 관심과 만나는 것이다.”(14)

 

소통이라는 것들은 정치학자가 남의 입장을 들어주고, 하나로 갈 수 있고. 헤겔이 이야기하는 변증법이 내가 이야기한 것이 여러분이 내면화해서 이야기하고, 그걸 듣고 제가 또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반복되면 절대정신이 나오겠죠. 소통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절대정신이 나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대화의 있어서 문법적 구조라고 생각하고 더 근원적으로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방언이라는 것도 이심전심입니다.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유일하게 바울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도 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비슷한 형태의 신비체험을 유대교에서는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영화 <300>을 보면 델피의 신탁을 무녀가 받고 옆에서 예언을 해석합니다. 그걸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형태의 이교도적인 형태를 왜 받았을까요? 고린도서 13장에 보면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유일하게 사랑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