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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5-11-0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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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종교대화강좌 <유교적 관점에서 본 소통과 공감>

오픈스페이스연구소 홍정우 이사

 

10년째 오픈스페이스연구소 이사를 하고 있는데, 원탁토론 유행하잖아요 그런 것 중에 하나입니다. 소통의 부재를 지적하고 촉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방법이 원탁토론이지 않습니까. 그런 취지는 같지만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아젠다로 만들어서 보급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보급해야겠다는 취지로 3년전부터 시작한 것이죠. 천주교 같은 경우 한마음 한몸 센터에서 요청이 있어서 작년에 명동성당과 구파발성당에서 실제로 해봤었구요. 다른 종교보다 천주교가 상당히 강하시더라고요. 결속력 가족같은 분위기, 성공회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최근에는 학교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교사들의 과반수이상이 학교 가기 싫어합니다. 왜냐면 학교가면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쌍욕을 해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우울증에 걸리고. 교사들도 자살율이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후우울증 겹치는 선생니들이 상당수가 됩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정이 풍비박산된 곳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보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뉴스에만 안 나올 뿐이지 어떻게 할 수 있는 지경이 넘어선 것 같습니다. 세월호같은 경우 제가 몇 번 갔었죠. 곳곳에서 심각한데 그런 것치고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게 오픈스페이스가 됐든 뭐가됐든 소통을 촉진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분들 자체가 생계형입니다. 먹고살기 위한 컨설턴트. 그런데 그것마저도 유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상황 속에서 하나의 갈 길이 소통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하는 일과 유학이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이것이 저의 화두입니다. 제 나름대로 삶의 현장에서 저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니까 유학이 필요할 때가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한국오픈스페이스 연구소는 헤지슨 웨이라는 분이 1985년에 제안한 오픈스페이스라는 토론형태에 기반합니다. 헤지슨 웨이는 미국인 종교학자입니다. 오픈스페이스 토론을 시작할 때는 크게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무슨 주제로 모일 것인지만 정해오면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안건으로 제출합니다. 대화를 하고 나면 회의록을 작성하고 투표도 하고 행동계획도 만들어봅니다. 이렇게 진행하는 게 저희의 대화방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먼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유학에서 제가 찾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자살율이 1, 2년 사이에 바뀐 것이 있다면 청년자살율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20대-30대의 자살율이 2페이지 인용문을 보시면, 우리가 1년에 만4천4백명 정도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이어진 아프간 전쟁이 1만 6천명의 사망자를 냈으니, 전쟁이 해마다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한편 독서량이 매우 낮습니다. 미국은 6.6권, 일본도 6권 정도, 중국이 2.6권인 것에 비하면 우리는 0.8권입니다. 다시나온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문맹률이 높다고 합니다. 실질 문맹률이 25%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맹률은 가나다 모르는게 아니라 읽어도 해독이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55세 이상 분들 중에 많은데 이런 분들은 정보를 접해도 해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이 교육열이 높다고 하지만 허수가 많은 것이죠. 한편으로 보면 노동시간이 멕시코에 이어서 2163시간으로 세계 2위입니다. 6시까지 근무이지만 합법적인 추가야근수당을 못받지 않습니까, 이 시간 빼고 통계가 나왔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1위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 결과로 성장률은 2.5%입니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져서 이게 서민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88학번 이예요. 88년도, 92년도에 노가다를 해본 적이 있는데 한 5만5천원, 6만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수당이 두 배정도 올랐다고 합니다. 물가는 얼마나 올랐을까요? 등록금을 예로 들면, 막노동을 한 달하면 2주만에 등록금이 모이고 나머지 2주 모은 돈으로 국내여행을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하루 노가다 일로 일주일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일하고 수업을 못듣게 되고 장학금을 놓치고, 대출을 받아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면 빚을 지고 취업은 안되고 비정규직이고.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점점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또는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헬조선을 이야기합니다. 유일한 탈출구는 여기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계모임을 하는 모임을 만듭니다. 계모임을 해서 이민을 가는 것입니다. 5천만원 정도 모아서 탈출을 하기 위해 장난 반으로 시작한게 진짜가 되었습니다. 계속 시험준비나 취업준비를 할 수 있지 않는 여력이 있지 않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는 끝난 것입니다. 젊은 세대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직이 돌아가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소통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새누리당, 정부 보면 하고 싶은 말도 못하잖아요. 저는 이것이 조선의 조정만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구조였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아프다 보니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소통은 합의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화를 하거나 교류를 하거나 모였거나 하면 통칭해서 쓰는 말 같습니다. 알라딘 인터넷 서점을 가보면 개인의 소통을 이야기 하는 책이 나오고, 어느 국회의원이 주민들이 산행대회를 해도 소통이고 시진핑과 김정일이 통화해도 소통. 사람들이 모이거나 대화하면 소통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마케팅도 소통으로 쓰이고요. 그런데 지자체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시가 기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생활에 가까운 곳부터 지자체의 변화가. 소통의 범람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뭔가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남발이 되었든 오용이 되었든 우리 문제를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소통의 정의는- 정보와 감정의 공유를 통해서 협업으로 나아가는 것, 행동을 전체로 하는 일련의 과정을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의를 하나의 가설로 보고 진행하다가 사용이 되면 검증을 받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협업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유적존재라는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하지 않고 살수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통은 필수적인 것이고 그 누구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감정의 공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정의 공유가 없으면 열정이 발생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순수한 이성적인 공유만 가지고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면 하는 분이 있지만. 이때 열정의 에너지- 정서적인 교감을 통한 공감, 이해관계 이 두 가지가 병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통의 조건에 대해 말씀드리면 첫째 수평적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지만 사회적 조건은 다릅니다. 그럼에도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의 핵심은 아젠다를 설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그 아젠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냐. 커뮤니케이션 전공하신 분들 이론을 봤는데 이걸 정리한 분들은 많이 없더라구요. 아젠다 앞에서의 평등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조직의 의사결정구조가 있지 않습니까. 평등한 소통이 의사결정구조를 바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관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두 번째는 관심과 이해가 같아야합니다. 이게 다르면 이야기가 잘 되지 않습니다. 아젠다를 설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제안된 아젠다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동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의 프로세스입니다.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지식과 감정의 공유가 일어나면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여기서 열정이 발생하고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통이 하나도 안 되고 공동체가 붕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유지되지만 붕괴된 공동체성 가운데 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역감정이나 세대간 갈등에서 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지는 않지만 공동체성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성은 협업을 향한 소통이 활성화되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서민들, 종교단체, 시민단체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성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존의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의 공동체성을 활성화하려는 것보다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공동체는 늘 있습니다.

2차대전 전후로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했습니다. 그 나라들 중에서 경제적인 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가 없습니다. 가장 경제적으로 성장한 나라가 싱가폴, 홍콩입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민주화를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민주화운동이 격렬하고 체계적이었던 곳은 프랑스나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왕년의 제국들은 여전히 잘살고 있는데 식민지국이었던 나라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두 가지를 같이 달성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안타까운 게 모든 역경을 뚫고 넘는가 싶었는데 지금 양태로 보았을 때잘 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회상을 해보니 외세가 밀려올 때 동양의 정신, 유교의 정신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유학을 검토하게 된 이유는 개발도상국들이 중간에 미끄러지지 않고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 전통속에서 핵심가치를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핵심가치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서양인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에 중국과 한국에서는 관료제를 실행했지 않습니까. 부정부패도 있었지만 그것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이것저것을 찾아보고 붙여보고 할 수 있는 자산인 것입니다.

공자 자체가 위대한 유산입니다. 공자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일련의 노력들을 제시하였습니다. 공자는 새로운 질서를 ‘예’로 규정하고 인간의 자각적인 기준을 새로운 질서의 근거로 보았습니다. 이때의 새로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의 총합을 이야기 말합니다.

성선은 오래된 논쟁인데, 대개 성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좋은 조건이 주어지면 좋은 반응을 할 것이다. 이것이 성선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데요. ‘나’밖에 절대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학의 구조는 성현이 되는 단서는 사람 자신 안의 본성안에 있다고, 본성은 선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성현을 절대적인 화신으로 보지만 그 성현은 스스로 되는 것이거든요. 자기혼자 수양을 해서 되거나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본성 안에는 선한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소통이론에서는 이해관계를 부정하지 않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도 공감과 열정이 발생하는 상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이익이나 의로운 것에 대한 결정이 개인적인 이익을 향한 것보다 작지도 않고,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의 어떤 측면이 개인보다 공동체를 앞세울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이를 활성화시킬 방법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고 있습니다. 도덕적 자각과 이에 따른 실행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일정 조건이 제시되면 공공선을 향할 수 있다는 믿음체계에 답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주자같은 경우엔 자신을 미루는 것(서)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강의록 9페이지 보시면, “부자의 한 理가 渾然하여 널리 응하고 곡진히 마땅함은 비유하면 천지가 至誠無息하여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음과 같은 것이다. 이밖에는 진실로 남은 방법이 없고 또한 미룸(推)을 기다릴 것이 없다.” 또한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면 그 베풂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를 통해서 인간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는데, 공자가 사람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의 첫 출발로 ‘서’를 말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나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를 혼돈해서 쓰지만, 여기 ‘서’의 개념에서 ‘나’와 ‘남’은 개별적인 존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도덕률의 기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미루어서 ‘남’을 이해한다, 배려한다,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인정, 상대방과의 평등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당시 신분제가 있긴 했지만 소통에서의 평등의 가치를 ‘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도덕의 효용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한테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하기 쉬운데,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살았을 때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도덕의 효용성이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지 않으면 도덕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독일같은 나라는 도덕을 어기는 사람에게 강한 처벌을 줌으로써 규범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어떤 효용을 가져다 주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서 또 나오고 있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화’를 송백규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맹목적으로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기의견이 분명한 상태에서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면 ‘화’고 남의 의견에 끌려다니면 부화뇌동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의 입장에서 보면, 타인과 어우러지되 자신의 의견이 분명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집단영성.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집단적으로 몰입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집단몰입현상이 나오는 가운데 집단영성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오픈스페이스라는 토론방식은 천주교 신학과 연관이 많습니다. 동그란 원은 원시적인 토의방법을 말하고 기타 부속 장치들은 천주교에서 많이 가져왔습니다.

유교적 전통에서도 아름다운 방식의 소통이 있었습니다. 퇴계와 기대승의 논쟁이 그것입니다. 운동권 NL-PD 논쟁보다 더 센세이셔널한 논쟁이었습니다. 둘이 주고 받은 서간이 전달하는 과정에서 공개되면서 누구나 다 아는 논쟁이 된 것입니다. 이슈도 뜨거웠지만 두 분의 관계도 독특했습니다. 서로 정적이면서 1세대 차이였지만 퇴계선생이 늘 기대승 선생을 깍듯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퇴계선생은 거유로서 자신의 이론을 접어야할 때 접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왕이 한명을 추천하라고 했더니 기대승을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다 그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문화 안에서 하나의 모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화들이 조선 말, 근현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남자들이 이상한 폼을 잡기 시작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하는 문화가 발전한 것 같습니다. 이런 계기를 통해서 유학을 세상을 살아가는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