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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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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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4-01-2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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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9강 ‘그리스도교의 기도명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자력 수행의 길로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하는 타력 신앙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틱낫한 스님은 몇 년 전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책에서 1996년에 자두 마을(Plum village)에 사는 비구니 제자 두 분을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낸 경험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고 합니다.
“태이(스승이라는 뜻),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사는 것이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참선해야 하고, 호흡을 관찰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 그것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또 틱낫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분들과 함께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과연 있나요? 기도의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러한 질문과 앞서 언급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녔던 ‘불자들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스님은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인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기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을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시키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 위대한 힘이 우리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우리는 그 위대한 힘에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믿음을 보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혼자서 자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힘(부처님이나 하느님)과 연결되려는 열망이라고 하신 스님 말씀이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결정해버린 상태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전환시켜 나가면, 그 전환된 에너지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듯 틱낫한 스님은 기도는 그 어떤 위대한 힘,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묶어주고 깊게 해줄 뿐 아니라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틱낫한 스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면 기도에 대한 스님의 해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차이도 없다’는 스님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부처와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可逆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지요. 종범 스님께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하느님을 여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 “그냥 떠나면 되지, 왜 떠나려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서 달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히사마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기에 어떤 존재와도 비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일’의 의미는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은 ‘신’에 해당되며, 이는 존재 자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신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히사마츠가 비판했듯이 대상화된 신관神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츠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가 히사마츠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도 타키자와는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는 동일시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양자 간에는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간에 불가역성을 말한 타키자와의 주장과 양자 간의 가역성을 말한 히사마츠의 주장은 분명 양 종교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9강 ‘그리스도교의 기도명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자력 수행의 길로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하는 타력 신앙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틱낫한 스님은 몇 년 전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책에서 1996년에 자두 마을(Plum village)에 사는 비구니 제자 두 분을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낸 경험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고 합니다.
“태이(스승이라는 뜻),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사는 것이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참선해야 하고, 호흡을 관찰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 그것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또 틱낫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분들과 함께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과연 있나요? 기도의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러한 질문과 앞서 언급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녔던 ‘불자들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스님은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인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기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을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시키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 위대한 힘이 우리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우리는 그 위대한 힘에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믿음을 보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혼자서 자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힘(부처님이나 하느님)과 연결되려는 열망이라고 하신 스님 말씀이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결정해버린 상태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전환시켜 나가면, 그 전환된 에너지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듯 틱낫한 스님은 기도는 그 어떤 위대한 힘,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묶어주고 깊게 해줄 뿐 아니라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틱낫한 스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면 기도에 대한 스님의 해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차이도 없다’는 스님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부처와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可逆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지요. 종범 스님께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하느님을 여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 “그냥 떠나면 되지, 왜 떠나려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서 달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히사마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기에 어떤 존재와도 비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일’의 의미는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은 ‘신’에 해당되며, 이는 존재 자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신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히사마츠가 비판했듯이 대상화된 신관神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츠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가 히사마츠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도 타키자와는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는 동일시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양자 간에는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간에 불가역성을 말한 타키자와의 주장과 양자 간의 가역성을 말한 히사마츠의 주장은 분명 양 종교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9강 ‘그리스도교의 기도명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자력 수행의 길로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하는 타력 신앙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틱낫한 스님은 몇 년 전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책에서 1996년에 자두 마을(Plum village)에 사는 비구니 제자 두 분을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낸 경험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고 합니다.
“태이(스승이라는 뜻),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사는 것이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참선해야 하고, 호흡을 관찰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 그것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또 틱낫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분들과 함께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과연 있나요? 기도의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러한 질문과 앞서 언급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녔던 ‘불자들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스님은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인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기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을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시키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 위대한 힘이 우리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우리는 그 위대한 힘에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믿음을 보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혼자서 자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힘(부처님이나 하느님)과 연결되려는 열망이라고 하신 스님 말씀이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결정해버린 상태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전환시켜 나가면, 그 전환된 에너지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듯 틱낫한 스님은 기도는 그 어떤 위대한 힘,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묶어주고 깊게 해줄 뿐 아니라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틱낫한 스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면 기도에 대한 스님의 해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차이도 없다’는 스님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부처와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可逆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지요. 종범 스님께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하느님을 여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 “그냥 떠나면 되지, 왜 떠나려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서 달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히사마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기에 어떤 존재와도 비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일’의 의미는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은 ‘신’에 해당되며, 이는 존재 자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신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히사마츠가 비판했듯이 대상화된 신관神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츠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가 히사마츠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도 타키자와는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는 동일시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양자 간에는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간에 불가역성을 말한 타키자와의 주장과 양자 간의 가역성을 말한 히사마츠의 주장은 분명 양 종교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9강 ‘그리스도교의 기도명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자력 수행의 길로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하는 타력 신앙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틱낫한 스님은 몇 년 전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책에서 1996년에 자두 마을(Plum village)에 사는 비구니 제자 두 분을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낸 경험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고 합니다.
“태이(스승이라는 뜻),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사는 것이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참선해야 하고, 호흡을 관찰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 그것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또 틱낫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분들과 함께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과연 있나요? 기도의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러한 질문과 앞서 언급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녔던 ‘불자들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스님은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인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기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을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시키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 위대한 힘이 우리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우리는 그 위대한 힘에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믿음을 보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혼자서 자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힘(부처님이나 하느님)과 연결되려는 열망이라고 하신 스님 말씀이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결정해버린 상태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전환시켜 나가면, 그 전환된 에너지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듯 틱낫한 스님은 기도는 그 어떤 위대한 힘,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묶어주고 깊게 해줄 뿐 아니라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틱낫한 스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면 기도에 대한 스님의 해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차이도 없다’는 스님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부처와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可逆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지요. 종범 스님께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하느님을 여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 “그냥 떠나면 되지, 왜 떠나려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서 달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히사마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기에 어떤 존재와도 비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일’의 의미는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은 ‘신’에 해당되며, 이는 존재 자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신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히사마츠가 비판했듯이 대상화된 신관神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츠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가 히사마츠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도 타키자와는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는 동일시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양자 간에는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간에 불가역성을 말한 타키자와의 주장과 양자 간의 가역성을 말한 히사마츠의 주장은 분명 양 종교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