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비교 영성

연기와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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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4-01-2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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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자비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3강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최 현 민1) 자비의 의미자비의 ‘자(慈, maitrī. 빨리어는 Mettā)’는 ‘친구(mitra)’에서 파생된 것으로, 중생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비(悲, Karuṇā)’는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의 뜻이고 연민의 마음으로 중생의 고통과 불이익을 보고 이를 덜어주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1) 초기불교 경전인 숫다니파타에는 자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언제나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2)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자비를 어머니가 자신을 잊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성적 자비를 베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닦음의 수행을 하려면 우선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명상 수행뿐 아니라 자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육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을 첫째로 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보리심을 발하는 데 있어 그 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와 세상을 위해 무상정등각을 얻고자 한다면 그 뿌리는 이타심의 발현이다. 이타심은 산처럼 흔들림 없고 굳세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자비가 있고 이원성에서 자유로운 초월적 지혜이다.”3) 마음을 닦고자 하면 불법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앎과 실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앎이 구체적으로 삶 안에 1) 길희성, 자비와 아가페-불교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사랑한국 전통 사상과 천주교 제1집, 탐구당, 1995, 218쪽. 2) 숫타니파타 149-151.(http://www.moktaksori.org.) 3) 달라이라마, 이종복 역, 수행의 단계, 들녘, 17쪽 각주 3 참조.구현되지 못한다면 그 수행은 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앎과 실천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오, 부처님이시여! 보살은 많은 수행법을 닦지 않습니다. 만일 보살이 올바르게 하나의 다르마를 잡고 그것을 완벽하게 배운다면 그는 부처님의 모든 자질을 그의 손바닥에 쥐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께서 그 하나의 법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위대한 ‘연민’입니다.”4) 여기서 연민이 강조되는 건 연민이야말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살행을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기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계율이라기보다 선정을 닦는 출가승의 수행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慈와 비悲는 남의 행복을 따라 기뻐하는 희(喜, muditā)나, 희비고락이나 애증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평정을 뜻하는 사(捨, upekkhā)와 함께 사범주四梵住에 속하기 때문입니다.5) 이와 같이 자비심을,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의 일부로 보는 초기불교의 자비관은 대승불교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자비를 다음 세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중생연衆生緣’으로 범부의 상태에서 베푸는 자비입니다. 이는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에게 베푸는 자비행으로, ‘내가’ 베푼다는 나의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법연法緣’ 자비입니다. 이는 법을 연緣으로 삼아 베푸는 자비행으로, 사람이나 다른 모든 사물이 독립된 실체가 아님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고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법실상 안에서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나오는 자비입니다. 관무량수경에서는 “불심佛心이란 대자비이고, 무연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포섭한다”고 하여 무연자비를 대자비(大慈悲, mahaKaruṇā)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금강경에 보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순수보시, 순수증여로 이때는 내가 사라져서 내가 베푸는 것도 아니요 본래 내 것도 아니니 물질에 대한 소유의식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비행이 가능하려면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져야 합니다. 이렇듯이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자비행은 연기에 대한 깨달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연기와 자비의 관계진정한 자비행이 되려면 삼라만상의 연기적 실재성을 자각함이 필요한데, 연기의 깨달음과 자비 간의 상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 사상입니다. 보살은 깨쳤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부처됨을 보류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보살은 중생 곁에서 중생을 거두는 존재입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중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비행인 보시(布施, dana)바라밀을 닦으려면 반야바라밀을 병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통해 베푸는 주체, 베풂의 대상, 베푼다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진정한 보시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6) 유마힐소설경의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은 보시바라밀과 반야바4) 달라이라마, 이종복 역, 수행의 단계, 들녘, 54~55쪽. 5) 길희성, 포스트모던사회와 열린 종교, 민음사, 1994, 128쪽. 6) 길희성, 자비와 아가페-불교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사랑한국 전통 사상과 천주교 제1집, 탐구당, 1995, 222쪽.라밀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마거사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붓다는 문수보살에게 문병할 것을 권합니다. 문수보살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그에게 문병 가서 무엇 때문에 병이 생겼는지 묻자 유마거사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일체 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저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의 병이 낫는다면 그때 저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었고,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의 병은 광대한 자비로부터 생긴 것입니다.7) 모든 중생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자신도 아픔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 유마거사의 표현은 자신의 몸과 중생의 몸이 한 몸임을 자각한 통찰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몸이 중생의 몸과 둘이 아님을 자각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생에게 생긴 병은 무지와 생존에 대한 갈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이 병이 생기는 것은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는 집착에 기인한다. 때문에 자아에 대해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미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면 자아라는 생각도, 살아 있는 것(중생)이라는 생각도 없어진다.8) 여기서 말하는 무지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인 무아를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영원한 자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이 생기고 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존재의 실상이 무아임을 깨닫게 되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여기서 동체대비행同體大悲行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지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행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에까지 열려져 있습니다.불교에서는 인간을 정보正報, 자연을 의보依報로 보고 정보인 인간이 환경인 의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의정불이依正不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몇 년 전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단식투쟁한 지율 스님이 쓴 글 중에 “굴삭기가 천성산 꼭대기에서 산을 무너뜨릴 때 산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스님은 그때 “내가 구해줄께”라고 산에게 약속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단식했다고 합니다. “자연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그의 자각에서 그러한 동체대비적 행위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병이 다 나아야 보살의 병도 낫는다는 동체대비적 자비행은 연기에 대한 깊은 자각 없이는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자비는 연기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자비가 연기에 근거한다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7) 박경훈, 유마경(현대불교신서16), 동국대불전간행위원회, 1994, 120~121쪽. 8) 같은 책,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