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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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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세미나를 마치면서...
2009 새해를 여는 첫날, KAL에 몸을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탑승객 정원이 약 300명정도 되는 비행기였지만, 그 날 탑승객은 겨우 50명 정도였고 한국인은 민아수녀님과 나뿐이었다. 아마 이스라엘을 성지순례객 대부분은 가자지구의 전쟁 상황 때문에 여행을 취소한 듯 싶었다. 가지지구의 분쟁의 현실을 실감하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11시간의 여행 끝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를 초대해주신 젬마수녀님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전체총회에서 만든 선언문에 나오는 '세계시민'으로서 우리가 함께 이 곳에서 지내게 됨을 기뻐하셨다.
우리는 젬마수녀님께서 생활하시는 요셉수녀원에서 머물렀고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다른 분들은 수녀원에서 걸어서 30여분 정도 떨어진 프리마 킹 호텔에 머물고 계셨다. 우리는 매일 아침 7시20분에 수녀원을 출발해서 30분 정도 걸어서 호텔로 가고 거기서 일행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야드바셈연구소로 가면서 우리의 일과는 시작되었다.
세미나 시작 전날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 그 때 참석자 모두 각자 자기소개와 함께 세미나에 오게 된 이유와 세미나에 거는 기대나 목적 등에 대해서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세미나에 오신 분은 30여분 정도였는데 대부분이 교육자들(고등학교 교사이거나 대학교수들)이셨고 교육위원회나 카운슬러나 교육자를 양성하시는 분들도 몇 분 계셨다. 대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그리고 동유럽에서 온 분들이었고, 동양인은 민아수녀님과 저 그리고 히로시마 홀로코스트 연구소에서 오신 일본인 한 분이 있었다.
1. 홀로코스트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강의 주제는 주로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세계역사 안에서 형성되어온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대한 것이었는데 고대 중세 현대의 시대별로 그리고 역사, 정치사회, 철학, 문학, 교육학별로 이루어졌다. 강사는 주로 히브리대학과 텔아비브대학의 교수님들과 야드바셈 연구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강의뿐 아니라 사진과 영화 다큐멘터리 예술작품, 문학의 각 분야별로 상세하게 설명하셨다. 그리고 연구소 내의 역사박물관, 예술박물관과 리플렉션 센터(reflection center), 시청각실 등을 통해서도 교육이 진행되었다. 특히 리플렉션 센터에서는 10여개의 주어진 질문들에 대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의 견해를 DVD로 녹화해서 시청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신앙은 사람들의 심리적 요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믿음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앙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주의, 시온주의나 공산주의 등 여러 형태의 신앙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는 단지 신앙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미나 중 게토(유럽에서 추방된 유다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살다가 수용소에 갔던 한나, 루마니아와 헝가리에 살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간 루트, 엘리저, 엘리쉐바, 야파와 제브의 증언이 그것이다. 모두 지금은 70세가 훌쩍 넘으신 그분들은 당시 13세에서 16세의 청소년이셨다. 엘리저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부모와 헤어지면서 어머니가 건네준 흰컵 (그 안에 꿀이 있었다고 한다)을 갖고 나왔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너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씀이셨다고 한다. 그 말씀을 기억하며 어려웠던 수용소 생활을 견디어 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함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생사의 찰나를 건넌 야파의 증언은 간담을 써늘하게 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간 후 하루는 단체로 목욕탕에 넣은 후 문이 잠기고 불이 꺼져 소리를 치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밖에서 '물이 없다!'는 독일군인의 고함이 들렸고 잠시후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 후에 안 사실은 그 곳은 목욕탕이 아니라 가스실이었고, 고갈된 것은 물이 아니라 '가스'였다.
독일인들은 유다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소유물만이 아니라 이름과 인격마저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번호뿐이었다. 게토에서 생존한 예술가들의 작품 중에는 초상화가 유독히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림을 그릴 도구조차 구할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들이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는 이름도, 인격도 모두 빼앗긴 그들에게 이름을, 인격을 회복시켜 주고자 함에서 였다고 한다.
텔아비브에 있는 디아스포라 박물관에는 2차대전 이후 현 이스라엘이 세우기까지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2000년의 디아스포라 유다인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다음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모든 세계에 퍼져 정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가족으로 하나의 국가로 남아있다. 그들은 파괴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건설했다.
(Alba Kovner)" 박물관에 전시된 디아스포라에서의 유다인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들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앙의 힘임을 느낄 수 있었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은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된 후 유다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음을......
디아스포라박물관 안에는 “유다인들이 나치에 의해 고난당했을 때 교회는 침묵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