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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1-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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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융연구원강의 2016. 4.8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실재
1. 그리스도교에서의 궁극적 실재라는 표현과 그 문제점
그리스도교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해 언급한 대표적 종교철학자로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였던 폴 틸리히(1886~1965)를 들 수 있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를 경험하면서 살고 간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였다.1) 그의 생몰년대가 암시하듯이, 그는 19세기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완숙기와 몰락기를 실존적으로 경험했는데 정치경제적 세계 상황과 근대 서구문명을 지탱하던 세계관 자체가 허물어지는 삶의 근본터전의 진동을 보았다.
《흔들리는 터전》이라는 그의 유명한 설교집 제목이 그러한 시대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17세기 이후 계몽주의 시대정신이 주도하던 서구 근현대 문명사 300년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종교 이해가 동트는 시대 전환기에 살았던 사상가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흔들리는 터전’을 경험한 틸리히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등장과 나치 정권의 마성적 정치 광기를 대항하기에는 속수무책인 기독교 교회와 지성인들의 무능력을 보았다.
그러한 체험을 통과하면서,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의 지반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재구성을 시도한 전형적인 변증적 신학자가 폴 틸리히였다. 그의 기독교 사상을 드러내는 이름표로서 틸리히를 철학적 신학자·변증신학자·문화신학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그의 사유하는 자리를 언제나 스스로 ‘경계선상’에 설정하고, 실존적 삶의 문제, 역사사회 문제, 세계관 문제, 철학종교 문제와 씨름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서구의 전통적 종교관 특히 전통 기독교의 초자연주의 인격신관과 자연/초자연이라는 이중 구조의 중세 스콜라신학적 종교관을 극복한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그의 사상을 집약했다.
종교란 인간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공동생활에서 정신적 삶과 활동의 한 특수한 정신기능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삶의 ‘깊이의 차원’이라고 갈파했다.
틸리히는 교수 자격 취득 이후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임당할 때까지 약 10년간(1924~1933) 독일 여러 대학에서 신학·철학·종교학 분야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의 사상적 지향성은 독일 나치당 등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한 정치적 광기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고 문명을 파괴하는 것을 비판하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독일 민주사회당에도 가입했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실존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실존철학이 지닌 죽음의 문제 곧 비존재의 불안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한계상황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내적인 성찰을 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가?"
틸리히는 근본적으로 유한한 존재는 다른 유한한 존재에 의해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유한치 않을 수 있는 그 무엇이여야 하는데 이를 틸리히는 존재 자체이거나 "존재의 토대(ground of being)"이라 했다. 곧 틸리히는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불안 아니 자기존재의 근원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 틸리히는 신앙의 "불확실성"은 그래서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우리는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을 구현할 수 있다. 틸리히는 "신앙"의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한다.
“신을 실재와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자체로 본 틸리히는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인격신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엑카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다. 그는 하느님을 하나라는 개념으로 표현 여기서 하나는 둘셋과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 만물의 존재론적 근원이며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는 절대적 하나이다. (그리슫고ㅛ와 불교수행, 길희성 111
그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궁극적 관심의 상태인 종교적 신앙은 오직 상징적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존휙, <종교철학> 김희수 역, 165쪽.
신이라 부르는 궁극적 실체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비상징적 진술은 ‘신을 존재 그 자체이다. 라는 진술이다. 그 외 모든 신학 진술은 하느님은 영원하고 선하며 인격적이고 창조주이며 피조물을 사랑한다와 같은 진술은 모두 상징적이다. 166
그는 대중들이 믿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상 숭배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은 미신에 상응한다고 보았다.
틸리히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Being-itself)’·존재의 지반(Ground of Being)·존재의 능력(Power of Being)이라고 해서 성서적 인격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엑카르트는 신은 존재의 근거라 보았고 다석 유영모는 없이 계신 분이라고 했다)
그건 성서가 증언 고백하는 하느님 체험은 인격성의 존재론적 근거이고 지반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경험했다는 하느님의 자기 이름 계시(창3:14)는 ‘존재하는 것들을 있게 하는 자’ 혹은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나이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발음이지만, 그것이 전하려는 핵심은 하느님이란 인간의 인격적 개념으로 다 규정하거나 언표할 수 없는 ‘존재 자체’라는 것이다.
야훼(YHWH)는 아도나이라고 바꾸어 대체하여 있는다. 유일신 이름을 직접 입으로발음하여 부르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여호아라는 유일신발음이 생긴건 히브리어 자음인 야훼(YHWH와 아도나이 Adonay라는 히브리 모듬이 혼합하여 손성어 발음이 생긴데 기인.
영어식 으로 예호아(Jehova)이고 한글발음으로 여호와로 된 것이다.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86쪽.
이처럼 대부분 종교적 언어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초월적 인격자이시다”라는 표현들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데 비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은 가장 직접적이고 비매개적 표현이라고 본다. 이 표현은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하느님 물음을 묻기 전에도 하느님이셨음을 의미한다.
궁극적 실재라는 용어는 틸리히가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인격신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하느님은 ‘존재자체’라고 말함으로써 촉발되었다.
틸리히는 ‘하느님’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인간 생명 차원에서 경험하는 ‘인격적 실재성’의 존재론적 근거와 능력이 된다는 점에서, 신은 인격 이하의 실재일 수 없으나 전통적 통속신앙에서 하느님을 ‘만신전(萬神殿)’의 최상 자리에 좌정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초월적 인격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신관은 성서가 증언하는 진정한 하느님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에 대한 모든 표현들이 의인화된 신인동형동성적(anthropomorphic) 묘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종교의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역동적 현실성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인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적 차원을 지닌 불가해한 신비자임을 동시에 고백하고 있다(사55:8-9).
2) 존휙의 신다원주의
존 휙은 틸리히가 쓴 궁극적인 실재(Reality)라고 표현이 유일신사상뿐 아니라 불교까지도 함축할 수 있다고 본다. 궁극적 실재라고 할 때 불교와 ‘공空’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비교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존 휙을 비롯한 신 중심적 다원주의자들은 종교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공통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즉 그들은 인류의 모든 종교가 실재 혹은 신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고 이런 실재를 자신의 문화적 틀에 따라 표현하는 양식만 다를 뿐, 뿌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변선환 아키브 동서신학연구소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