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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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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하느님2016.4.22.hwp (50.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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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하느님
최 현 민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은 창조주 유일신 전지전능하신 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절대적 타자 ...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에 반해 불교의 붓다는 창조주도 유일한 존재도 절대 타자도 아니다. 물론 대승에 와서 삼신불 사상이 나와 부처를 신격화하기도 했지만 원시불교에서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1) 삼신불사상
삼신불(三身佛)이란 부처님의 세 가지 몸, 즉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을 가리킨다.
법신은 삼신 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신 부처님의 몸을 말한다. 『화엄경』에는 법신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부른다.
보신이란 보이지 않는 법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몸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보살로서 어려운 수행을 견디고 정전한 결과로써 얻어진 부처님이다. 과거 수행시에 발원한 48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이룩하신 아미타불은 대표적인 보신이다.
끝으로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법신의 무궁한 능력으로 중생들의 마음가짐에 맞추어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몸이다. 석가모니불이 그 대표적 화신이다.
2. 육도윤회((六道輪迴) Samsara)하는 신
불교에도 신이 없는 건 아니나 신 곧 데바(Deva)도 육도 윤회의 한 존재이다. '데바'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빛나는 존재'다.
불교적 관점에서 6도(六道)는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이다.
지옥도(地獄道) · 아귀도(餓鬼道) · 축생도(畜生道) · 아수라도(阿修羅道) · 인간도(人間道) · 천상도(天上道)라는 6도 전체는 미계(迷界), 즉 미혹된 상태의 세계, 즉 염오(번뇌)에 물들어 있으므로 아직 완전한 깨달음(열반)을 증득한 상태가 아니다.
데바는 천상도에 머무는 존재이므로 아직 윤회가 끝나지 않은 존재이다. 그럼 어떻게 윤회로부터 해방 자유로와질 수 있나.
3. 불교의 존재이해인 四聖諦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로 구성되어 있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苦諦)이다. 고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 생기는 고통, 一切法에 대한 자기중심적 집착이 모두 고이다.
둘째 집제(集諦)이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은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에 있다. 즉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을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에 있다. 자기에게 맞으므로 탐욕을 일으키고(貪), 맞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며(瞋)· 그것이 다시 갖가지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癡),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셋째 멸제(滅諦)이다.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의 근원인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넷째 도제(道諦)이다.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이러한 사성제 팔정도 속에 담긴 불교의 진리는 삼법인 안에 함축되어 있다.
4. 삼법인(三法印)
삼법인이란 법의 도장 곧 진리의 도장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涅槃)를 말한다.
1) 제행무상(無常)
무상은 annica=a(부정어)+nnica(常)로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즉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찰나생 찰나멸한다는 것이 불교의 존재의 실상이다.
2)제법무아(無我)
힌두교 우파니샤드에서는 진정한 자아를 뜻하는 개별적 · 인격적 원리로서 아트만을 말하고, 브라만(Brahman)은 힌두교에서 우주의 근본적 실재 또는 원리를 가리킨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과 개인의 본체인 아(我)가 같다는 것이 바로 梵我一如사상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것을 비판한다. 梵도 我도 없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존재나 개별적인 자아는 없다.
3) 열반(涅槃 Nirvana)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라 하는데 이를 중국의 역경자들은 열반이라 의역했다. 그 의미는 滅度, 寂滅 즉 불이 꺼진 상태, 연소의 소멸을 뜻한다.
욕망이 고조된 상태를 渴愛라 한다. 이는 목마른 자가 물을 갈망하는 상태를 뜻한다. 붓다는 욕망의 격정을 말하면서 연소 즉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했고 도의 궁극적 목표는 번뇌의 불꽃을 끄는 것이라 본다. 무상과 무아가 존재의 현상계를 설명했다면, 열반은 무상과 무아라는 현상계의 근거라 할 수 있다. 무상 무아 열반이라는 삼법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에 근거하고 있다.
5. 연기(緣起)-interbeing
연기는 모든 것이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함.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중아함경>
곧 연기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이다. 연기사상은 2세기 나가르주나에 와서 공사상으로 표현된다.
6. 空
용수는 석가모니의 중도(中道) 사상을 팔불중도(八不中道)론으로 확대한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라는 게송이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출(不來不出)은 모든 대립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원적 대립을 넘어섬으로써 中道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팔불중도에 대해 《금강경》은 즉비(卽非)의 논리로 설명한다.
즉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는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이것은 동일률이라는 일상적 언어 습관을 벗어난 표현이다. 이처럼 일상적 언어 습관을 벗어난 세계 곧 언어도단의 세계가 공의 세계 이다.
이와 같이 不二를 깨닫게 된 상태가 바로 열반(涅槃)라 할 수 있다. 즉 열반은 원래 생(生)하는 것도 멸(滅)하는 것도 아니므로 연기하여 생한 일체의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空)임을 표명한 것이다.
공(空: śūnya, śūnyatā)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無)도 아니다.
용수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말한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세계는 주체가 없고 세계의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없고 공(空)한 것이다. 이 空은 無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非有)이고 비무(非無)이며 중도(中道)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공(空)을 열반이며 중도라고 하였다.
4-5세기경 인도에서 온 구라마집(Kuramajiva)에 의해 번역된 <般若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반야심경>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반야’는 우주의 본질이 공(空)함을 밝히고, 그 뜻을 설명한 지혜를 의미한다.
바라밀다란 Paramita의 음역으로 완성을 뜻한다. ‘저 언덕에(parami) 이르는(ita), 피안에 도달한, 또는 지혜를 완성한’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여 色이 즉 空이고, 空이 즉 色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한 면이 있다. 신과 인간 간의 간격이 그것이다. 불교는 대상적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이 깨달으면 된다.
<불가역성과 가역성의 문제>
-아베마사오는 히사마쯔 신이찌의 제자로서 불자 중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님.
-그는 선과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차이는 궁극적 실재를 지칭하는 이름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 실재와의 만남 곧 구원의 상태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그 상태에서 인간과 실재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가역성과 가역성의 문제>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지 않으며 양자 간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 신학자 다끼자와는 임마누엘 원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불가역성을 말한다.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불성과 불성의 자각은 완전히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진여나 불성이라는 <궁극적 실재>와 <불성의 자각>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의 입장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邪見이며 비유비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正見이라고 주장한다.
2. 하느님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다른 분인가? >
(1) 구약성경의 하느님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화 잘 내고 질투하고 때론 잔인한 특징을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하와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노아와 그 가족 제외하곤 모든 사람을 물속에 빠뜨리신 분, 바벨탑 무너뜨려 인류를 온 땅에 흩으시고 성조의 역사에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 요구하시고 야곱의 온갖 속임수와 책략을 인정하신 분, 이집트 탈출 통해 폭군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해주시지만 다른 한편 당신의 분노로-맏아들과 맡배를 죽이시고 탈출과정에서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하는 백성을 무자비하게 없애시는 분.
이런 분이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자비롭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라 할 수 있나?
혹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사랑 연민 용서의 신)은 다른 하느님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는 구약을 경전으로 받아들였을까?
<역사와 문화상황의 이해 부재에 따른 구약성경의 선입견> -스위스 로잔대 구약성경 교수인 토마스 뢰머의 <모호하신 하느님>, 성서와 함께 참조
신명기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신명 6 4)의 고백은 구약의 유일신 신앙을 잘 요약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계시종교라 함은 하느님이 먼저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유일신 신앙에선 (경청)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너희는 들어라”
1. 왕정시대에 국가의 신이었던 야훼
야훼는 아브라함 가문의 수호신에서 몇 몇 지파의 하느님이 되셨고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 왕정이 세워지면서 국가의 신이 되었다. 이 때 임금은 신과 인간의 중재자이며 하느님의 대리인이셨다, 자신을 중재자 역할을 넘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과 동일한 인물로 내세웠다. 국가의 신은 임금 통해 구원, 안녕, 보장해주었다.
기원전 9-6세기 이스라엘 왕정시대의 공식종교는 다신교였다. 이처럼 다신적 신앙을 지닌 이스라엘 백성을 예언자들은 비판한 것이다
“유다야 너의 신들이 네 성읍 수만큼 많지 않냐” (예레 2. 28)
<오직 야훼를 경배하게 된 기원>
다신교에서 오직 야훼의 유일신으로 건너간 건 바빌론 유배체험 이후다. 하느님이 보증하신다던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하느님 현존을 상징하던 성전이 파괴되고 그분의 백성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국가의 신도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야훼가 누군지 말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명기계 하느님담론
신명기계 학자들은 이스라엘 몰락이 야훼를 올바로 경배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진 것에 대한 징벌로 유배온 것이라 해석했다.
그러므로 바빌로니아를 이용해 당신 백성의 죄를 징벌하신 야훼는 다른 신보다 우월하신 분이라고 주장하면서 유일신 신앙을 강조했다.
-제 2이사야는 모든 신은 허상이고 야훼만이 유일하신 하느님이라 주장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다신론적이고 미숙한 신앙에서 유일신론이 형성되기까지 오랜 시간 수많은 사건을 거쳤다.
그럼 왜 구약성경은 복수의 하느님을 그리고 있나?
-응징하시는 하느님(시편 99.8)
주 저희 하느님,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용서하시는 하느님.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응징하셨습니다.
-보복하시는 하느님(시 94. 1-7)
주님 보복하시는 하느님, 나타나소서.2.세상의 심판자시여,일어나소서. 거만한 자들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소서.
“하느님 그들 입안의 이를 부수소서 사자들의 이빨을 부러 뜨리소서 (시편58.7-9)
“의인은 복수를 보며 기뻐하고 악인의 피에 자기 발을 씻으리라. 과연 의인에게는 결실이 있구나. 과연 세상에는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는구나(시 58 7-12)
--시편 137은 바빌론에 유배된 사람들의 절망을 그린 시이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그러나 .마지막엔“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네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너에게 되갚는이! 라고 하여 무시무시하고 폭력적 저주가 담겨 있다.
이와 같이 기도를 통해 복수하고픈 자신의 욕망을 하느님께 넘기게 되면 일종의 정화작용을 거치게 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복수는 내가 할 일이다. 내가 보복하리라 (신명 32 35)
바오로 역시 이 정화작용 구조를 바오로가 잘 이해했음을 우린 로마 12 1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스로 복수할 생각 말고 하느님 진노에 맡기십시오.”
**하느님은 보시기 좋은 세상을 만드셨는데 이 세상에는 부당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전쟁과 기근, 천재지변은 왜 일어나는가. 하느님은 불행과 고통은 왜 만드셨을까?
<응보개념의 위기>
욥은 응보개념을 보장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주님-너는 나의 종 욥을 보았냐 그같이 흠없고 올곧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다시 없다.
사탄-당신이 모든 소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없애면 당신을 저주할 것이다.
주님-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대지 마라.
-옵의 친구 -욥의 시련은 그의 숨겨진 죄에 대한 하느님 벌(인과응보)이다.
친구-욥의 불행은 죄의 결과이고 하느님은 공의로운 분이다.
욥 “누가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이젠 전능하신 분이 대답할 차례. 욥은 자기 결백 주장한다.
<욥38.4-12 (하느님의 대답)>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8.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10.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2.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하느님의 물음에 욥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욥 -“당신에 대해 귀로만 듣던 이몸 이제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제 자신을 부끄리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 2-6)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
<구약과 신약의 근원은 신앙고백이 자리함>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노예 상태로부터 우릴 구원해주신 분이 바로 야훼 하느님이시다고 생각. 구약은 하느님께서 우릴 이집트에서 끌어내셨다. 모세를 통해 출애급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의 중심에 자리한다.
이에 대해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살이하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셨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 신앙고백의 중심이다.
<복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그분은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가 23. 24)
예수는 거짓과 폭력 앞에서도 복수의 원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 원수들의 멸망을 기도하기보다 자신이 전한 메시지(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따라 행동하셨다.
즉 예수는 거짓과 폭력에 대항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써 악과 죽음이 그분 안에서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두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요약한 것이다.
하느님은 우릴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시고 속박에서 풀어주신 분이시며 죽음과 죄에서 해방하신 해방의 하느님이시다.
<공관은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어떤 점을 시사해주는가? 공이 신관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 피조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
그리스도교 역시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덧없고 무상하다고 본다.
불교의 공관은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정화시켜줌. 모든 존재는 허무하며 그 핵심에 공이 자리함을 자각할 때 하느님을 만나게 됨.
193 공관은 하느님을 하나의 존재자로 파악함을 방지해줌. 길희성 공과 하느님 191-193
194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
하느님을 존재자로 파악해선 안됨을 주장.
엑카르트는 하느님 하느님됨. 하느님의 본성을 구분.
하느님 -일상적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는 인격적 하느님God 하느님됨. Godheit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다석유영모
없이 계신 분.
인간은 있이 없는 존재
그럼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불교의 공관에 어떤 점을 시사해주는가?
인격적 관계-예수가 지닌 성부와의 관계
그리고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온 점.
자칫 깨달음이 역사를 떠난 (역사를 초월한다고 생각하나) 것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