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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2009 봄. 37호 편집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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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최 현 민
나는 지금 여러분 앞에서 고백하려 한다. 이제 50살이 넘었으니 남은 생이 산 날보다 짧을게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껏 한번도 고해소에서 인간과 하느님 외의 관계 곧 내 삶을 지탱해준 여타의 관계에 대해 고해해본 적이 없다. 사실 이번 부활을 앞두고 본 고백성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고 살아왔는지를 고해했다. 내 생명을 지탱케 해주고 내 몸을 씻어주는 물, 어둠을 밝혀주는 (전기)불, 음식물을 얼마나 낭비해 왔는지.....내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동물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왔는지.... 생태문제를 성찰하면서 내가 지금껏 세상을 살면서 맺어온 관계가 얼마나 부조화를 이루어 왔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생태문제는 결코 환경보존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에 대한 총체적 물음이다. 생태적 물음은 우리의 생명줄인 자연과의 관계, 인간, 하느님과의 관계 이 모두가 얼마나 이그러지고 어긋나 있는지를 성찰케 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성생활도 지난 일 년 전부터 '생태영성'을 주제로 편집해 왔다. 어떤 분은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생태문제는 해결되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론을 펼치기도 한다. 그만큼 그 문제 해결이 녹록치 않다는 말이겠다.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을 쓴 샐리 맥페이그가 말했듯이 기후변화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절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위기의 거대함에 압도당해 도저히 감당한 자신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위기현실을 부인하고 싶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자고 싶고, 다시 순진하고 무지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사라지지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 제 4차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는 "온실가스를 대폭적으로 감축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 비용은 만일 지금 당장 전세계적으로 시작한다면 지구적 GNP의 3%정도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구온난화 문제와 관련하여 앞으로 일어날 생태위기문제에 대한 대응책은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모든 차원에서 나온 제안들의 배후에 놓인 난관은 “만일 지금 당장 전 세계적으로 시작한다면”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당면과제는 "지금 당장 행동하기 위해서 어떻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가슴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의식의 전환이 요청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생태영성의 필요성을 절실히 시사해주고 있다. 생태영성은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함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아무리 부가 쌓여도 현대인들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져가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내면이 피폐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어가면서 우리가 맺어온 관계망이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지고 갈라져간다. 사막으로 변해가는 우리의 '집'인 지구의 사막화 현상을 접하면서 그것은 그만큼 우리 내면이 사막화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억측일까? 어떻게 갈라져가는 땅, 사막으로 변해가는 땅을 다시 옥토로 변모시킬 수 있을까?
작년 이스라엘에 갔을 때 사막에 야자수를 심고 물을 대는 관개시설의 개선, 사막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토질을 개선하여 사막을 농토화시킨 이스라엘 농부들의 키브츠(Kibbutz) 생활을 보았다. 그들이 사막을 옥토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의 형태로- 흩어져서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다시 모아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힘을 모은 것에서 비롯했다. 바로 이 체험은 사막화 되어가는 지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성의 회복'임을 일깨워주었다. 생태를 살리는 것은 이렇듯이 우리의 관계성의 소원함을 극복함에서 비롯된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성 회복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호에는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렸다. '성녀 힐데가르트의 영성'과 '사막교부들의 생태영성' 그리고 '성프란치스코의 생태적 이해'는 가톨릭 전통 안에 깃든 성인들의 생태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막교부들의 생태영성'은 '인간존재가 우리 주위의 자연과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추구하고 발견하고자 하는 영성'이 바로 생태영성임이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성녀 힐데가르트의 영성'에서는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을 지탱해주는 힘인 푸르른 힘(veriditas)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다.
단상 '하늘지시 꿈터 아이들의 이야기'나 '흙부대 생태건축이야기'는 자연과의 관계짓기, 관계회복을 소박한 삶의 소리를 통해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다. 영적 기행 '한국천주교회와 생태적 삶'은 1960년에서 오늘날까지 한국천주교회에서 이루어진 생태운동을 시대별로 상세히 소개해주고 있다. 또한 생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태영성'임을 강조하면서 영성을 살기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은 의식만 갖고는 가능치 않다. 확실한 동기와 의미 목표가 없으면 탁상공론이 되기 쉽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오는 '깊은 회심'이고 '참회'이다. 온 몸을 던져 오체투지를 해야 할 것 같다. 세분 성직자들처럼 그렇게 온전히 자기를 던지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비록 그분들처럼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몸을 던지지 못할지라도 우리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가족, 이웃,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사회공동체 안에 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몸을 던지는 자세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게 아닌가 싶다. 생명의 기운으로 천지가 들썩이는 이 봄날, 우리도 추운 겨울 잘 이겨낸 애벌레처럼 각자의 삶의 길목에 가장 낮은 자세로 누워야 할 것 같다. '워낭소리'에 나오는 할아버지와 소처럼 그렇게 천천히 느리게 우보천리(牛步千里) 오체투지 기도의 길을 우리도 함께 떠나야 할 것 같다. <영성생활> 이번 호가 그런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편집서언에 담아본다.
생태문제가 문제시 되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시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코앞의 문제가 되었다.
기후변화를 쓴 션맥도나 신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은 약 20년정도 남았다고 한다.
만일 그 사이에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응책을 쓰지 않는다면 지구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니 지금부터 조금씩 대비해야 한다는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될 사한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은 당면 과제로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이 바로 생태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생태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처한 각자의 소명에 따라 생태살리기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성생활도 지난 일전 전부터 생태영성을 주제로 편집해 왔다.
생태영성은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함에 근거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우리 삶의 자리의 황폐함은 바로 우리 내적인 황폐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지난 1월에 이스라엘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점점 사막화가 되어 가고 있는 우리지구의 사막화의 현상은 우리 내면이 사막화되어가고 있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우리의 관계의 갈라짐과 소원함, 개인주의화의 현실은 점점 우리 내면을 사막화시키고 황폐화시켜 간다. 갈라진 땅 척박한 땅을 어떻게 다시 옥토로 변모시킬 수 있을까? 사막에 야자수를 심고 물을 대는 관개시설의 개선, 사막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토질을 개선하여 사막을 농토화시킨 이스라엘의 키부츠의 생활은 내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성의 회복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들의 공동체성이 사막을 옥토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들이 흩어진 자신들의 삶을 다시 모아 함께 살아가려 힘을 모은 데에서 가능했다. 생태를 살리는 것은 이렇듯이 우리의 관계성의 소원함을 극복함에서 비롯된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성회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 관계의 소원함은 현대의 개인주의를 낳았고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의 영성안에도 그 가지를 치고 있다. 오늘날의 명상의 붐도 결국은 개인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명상도 자기개발을 위한 명상, 장수의 비결, ....
명상을 통해 우리가 근원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 자기완성이라면 그것이 자기만을 위한 자기완성일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명상이 아닐 것이다. 참된 의미의 명상은 삼라만상과의 관계성의 회복 그것이 바로 나의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임을 깊이 자각함에 있다. 우리의 환경이 결국 나와 별개의 객체가 아니라 나의 존재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자각...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본 호의 생태영성도 이러한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각을 모아보았다. 생태영성이 우리 생활 깊이에 뿌리내림을 기원해 보면서 편집서언에 대신한다.
서강대에서 일본종교와 문화를 가르치면서 끝부분에 일본신신종교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강의 내용중 일본신신종교가 성행하게 된 원인으로 개인주의를 들었다. 그 때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다가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갖기 위해 뉴에이지 음악을 듣고 명상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냐? 그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다. 이 면에 대해서는 <영적 동반>에서 다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