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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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기고문

영성생활 2008, 28호 (인간중심적 자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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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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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적 자연이해

                                                                                                                                                                     

                                                                    최 현 민


들어가면서


  현대사회 안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환경운동가들뿐 아니라 철학자나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확산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생태위기문제가 전 영역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생태문제는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관심사로 부상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생태위기가 단순히 자연이 훼손되어 간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가족과 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차원에까지 와 버렸기 때문이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날씨변화, 그로 인한 농작물 생산의 변화, 극지방의 얼음융해, 쓰나미 현상, 태풍 등의 생태적 변화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해오고 있음을 우리는 매스 미디어들을 통해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생태위기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자연의 소중함 또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방안과 실천은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 중 하나로 자기중심적 인간본성을 들 수 있다. 자기중심적 본성을 지닌 인간들 간에 가치관이 상충될 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이들과 파괴되어가는 환경을 보존하려는 이들 간의 상반된 가치관의 충돌이 그것이다.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이들은 환경단체들이 각종 개발사업에 발목을 잡고 있음으로 경제행위에 제약을 받아왔다고 비판한다.


한편 환경보존론자들은 경제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들을 억누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자연 생태계는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공급과 이용대상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요받아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생태계의 순환원리는 깨어지고 무원칙적인 난개발로 인해 각종 환경문제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론자들은 자연생태계를 경제행위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현대사회 구조로는 인류와 지구생태계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환경보존과 경제발전이 상충되는 갈등적 상황은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뎀보프스키(Hermann Dembowski)는 생태위기를 '자연에 대한 인식의 위기'로 규정한 바 있다. 또한 베어드 캘리콧(J. Baird Callicott)도 우리의 사고를 바꾸지 않고는 결코 생태학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적 태도의 전환을 의미한다. 인식의 전환없이 가치관의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생태위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종래의 자연이해에 대한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의 전환이 요구되는가?


생태위기 문제의 근저에는 인간중심적 자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자연을 대상화된 사물이나 객체로 여긴다. 이는 인간이 주체적 행위자가 되어 자연을 객체적 대상으로 여김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중심적 자연이해가 태생된 그 배경과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간중심적 자연이해


1)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으로서의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


  환경보존론자들은 주객이원론적 관점에서의 자연이해가 생태파괴의 주요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객체로 이해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유구조 안에서 자연을 주체인 인간과 대립시킨 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도구로서 봐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을 인간복지를 위해 이용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관점에서는 자연을 보존한다는 것 역시 인간복지를 위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 1907-1987)는 1967년에 『사이언스』라는 잡지를 통해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현대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은 유대-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오만으로부터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이 환경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화이트는 그 근거로 창세기 1, 26-28절을 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창세기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묘사하고 있다. 화이트의 비판은  '이마고 데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해석이 '신의 모상'을 유추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점이 있지만, 실제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다른 창조물과 달리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권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강조해 왔고, 이런 점에서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전통으로 발전해가는 요인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우월성은 창세기 1. 28절에 나오는 히브리 동사인 다스리다(radah)와 정복하다(kabash)의 의미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복하다(kabash)’는 '다스리다(radah)'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힘으로 다른 이를 종속시키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구약성서 안에서 영토를 정복하고 파괴하는 군사적 정복과 같은 행위를 내포하는가 하면, 백성에 대한 왕의 권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 내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을 정복하라'는 인간중심적 사유가 자연을 대규모로 그리고 급속도로 파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다는 것이 화이트의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제임스 내쉬(J. A. Nash)는 신의 이미지나 자연지배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표현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라는 의미라기보다, 땅은 신에 속하고 신의 의지에 따라 경작하고 보호하도록(창2.15)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주어진 권한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도록 인가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임무와 책임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글래컨(C.J. Glacken)도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상은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이지 약탈자(plunderer)가 아니며 이런 점에서 인간이 지닌 우월성은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구약성경의 콘텍스트 안에서 말하는 지배의 의미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이라고 해석한 자코와스카(Sophie Jakowska)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상의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유대 그리스도교를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본 것은 성서에 대한 왜곡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패스모어(John Passmore)는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생태위기의 원인을 찾기보다 그리스철학과 이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에서 생태위기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2)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으로서의 그리스철학-그리스도교 전통


  그리스철학의 중심인물인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신플라톤학자(Neoplatonist)인 플로티누스(Plotinus)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지식과 이성에 주로 관심을 가졌으며, 무상하고 변화하는 자연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을 악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았고 인류의 필요에 응하기 위해 창조된 것으로 간주해 왔다. 즉 그들의 눈에 자연은 도구적인 가치를 지녔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공리주의(실용주의)적 견해를 지닌 그리스철학이 바로 서구세계에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자연관은 근대의 데카르트에 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인간(res cogitu)과 연장적 물질(res extensa)이라는 이원론적 사유 안에서 자연을 정신적인 특성이 없는 순수한 '물질'이라고 규정했고, 단순히 반복운동만 하는 '기계'와 같다고 보았다. 즉 데카르트는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실재론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이며 기계론적 자연이해가 바로 근대 과학문명의 철학적 근간이 되어왔다고 주장한 패스모어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체 교의를 표현하는 과정 안에서 그리스 철학을 도입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적 사유를 그 자체 내에 육성하고 영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그럼 그리스 철학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 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스철학은 그리스도교 내에 영육이원론적 전통이 태생하게 된 요인이 되었고,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이 생겨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영적인 것은 중시하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지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거부해왔지만, 이런 운동 하에서 반영된 이원론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다시 표면화되었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3세기 프랑스의 카타리파(알비파) 사상이다.


  론강 서쪽 남프랑스에 많았던 카타리파는 마니교의 교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따라서 그들은 이 세상, 물질계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신은 선신이 아니라 악신이라고 주장했고, 인간은 이 악한 세계에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를 가진 이원론적인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계를 벗어나 '선신'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고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물질계를 벗어나 선신이 지배하는 비물질계, 천국으로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다. 이와 같이 카타리파는 육체적 삶을 경멸하고 영혼에 집착함으로써 영지주의적 관점, 곧 영육 간의 영지적 분리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그 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안에도 영육이원론적인 애매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몸은 본질적인 악은 아니지만 영혼과 비교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영육이원론적 잔재를 남겼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면면히 이어져온 이러한 사유는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 구도 안에서 바라보는 사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영혼만을 중시해온 영육이원론적 사유는 육체와 더불어 자연의 가치도 도구적으로 전락시키는 요인이 되어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철학의 자연관을 육성하고 영속시킨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자연의 복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그들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하그로브(E. C. Hargrove)가 말한 '종교는 철학으로부터 많은 사고를 빌려왔고 이 과정에서 종교의 교의적 변질을 가져온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은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관련된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와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철학의 자연관의 영향을 받아 생태위기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패스모어의 주장은 경청해 볼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태파괴 원인의 근원적 뿌리를 유대 그리스도교에, 혹은 그리스철학과 그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러나 현대 생태문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생태위기는 화이트나 패스모어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의 원인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3) 생태위기의 다른 원인들


  많은 학자들은 화이트와 패스모어의 환경파괴 원인이론이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복잡한 역사적 실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생태위기의 원인이 하나의 분리된 근원에 있다기보다  복합적이고 다요소적인 측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노스코트(M. Northcott)는 생태위기의 뿌리는 농업혁명, 시장경제,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련된 사회진보와 변화에 있다고 보는가 하면, 에르리히(Ehrlich)는 환경파괴의 주요인은 짧은 시간 내에 인구가 2배로 급증한 과잉인구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구성장으로 인한 더 많은 식품생산의 필요는 더 많은 기술산업 설비를 요구하고, 또한 식품을 생산 보존하고 포장하여 수송하는 과정에서 자연 유기체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데니스 도넬라 미도우(Denis and Donella Meadows)는 "성장의 한계(The Limits of Growth)"에서 "만일 현세계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생산, 공해식품생산, 자원고갈이 지속된다면 전지구적 한계는 몇 십년 내에 온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생태위기가 산업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 드 타비니어(J. De Tavernier)의 견해와도 통한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혁신 곧 기계화, 자동화, 대량생산, 빠른 수송은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소가 된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환경파괴의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과학기술의 진보, 급증한 과잉인구, 산업혁명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사회는 이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태위기의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생태위기의 요인들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생태위기의 요인을 하나의 근원지에서 찾든지, 복합적 요인으로 보든지 간에 그 저변에는 인간중심적 사유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생태위기는 인간과 자연을 주객으로 이원화시켜 보는 주객이원론적 자연이해, 다시 말해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연을 도구적인 가치로만 바라보는 데에서 생태위기의 근본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복지를 위해 자연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온 인간중심적 측면에서의 자연이해가 결국 심각한 생태파괴의 결과를 가져왔음을 의미한다.


나오면서


  사도 바오로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당부하신다.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을 민감하게 읽고 이에 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위기를 맞이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인식의 전환은 바로 인간중심주의, 주객이원론적 사유로부터의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나라는 주체로부터 ‘우리’라는 공동체로, 인간중심으로부터 ‘생태공동체’로의 삶의 방향 전환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다. 내가 중심에 서서 세상과 자연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살아온 삶의 중심축을 나라는 주체로부터 '우리라는 생태공동체'로 전환해야 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위기 문제는 우리 삶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왔는가’라는 물음은 내가 나 이외의 창조물과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총체적 물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저변에 깔려있는 인간중심적 사유를 극복하지 않고는 생태위기 극복은 요원한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의 인식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인간중심적 사유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이해가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나온 것이 생태중심적 사유이다. 우리는 이를 동양사상 특히 불교사상 안에서 그 혜안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가 생태론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생태위기 문제의 핵심인 이원론과 인간중심적 사유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불교학자이자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는 현대의 생태위기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즉 자연이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걷어내라, 정신의 안개를, 독수리 날개 깃털로"라는 그의 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불교를 통해 인간중심주의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인간과 만물의 상호의존적 연기의 지혜를 발견하도록 촉구한다. 불교를 통한 인간중심적 자연이해를 극복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