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영성생활』 기고문

영성생활2009가을 38호 (지금 여기를 사는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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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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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은...

                                                                      최 현 민


들어가면서


톡톡톡.... 세상을 향해 가냘픈 부리로 쪼아대는 병아리 소리, 바로 그 순간 어미닭은 새끼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정확히 그 자리를 감지하고 밖에서 쪼아준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 어미와 새끼가 안팎에서 서로 쪼는 것을 불가에선 줄탁동시(줄啄同時)라 한다. '줄'은 병아리가 알껍질을 쪼는 것을 가리키며 '탁'은 어미닭이 쪼는 것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송(宋)나라 때의 선어록인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한다. 제자가 부화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순간, 마음의 껍질을 자신의 가냘픈 부리로 쫓고 있는 그 순간, 스승의 큰 부리가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쫓아줌으로써 제자는 마음의 껍질을 깨고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스승이 제자가 무르익어감을 알아보고 일격을 가함으로써 제자가 의심을 타파하고 깨침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줌을 의미한다. 깨침은 이렇듯이 ‘지금 여기’라는 시공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의 ‘지금 여기’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십니까? 우리는 앉고 걷고 먹는다. 그렇지만 부처님, 누구나 앉고 걷고 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앉을 때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걸을 때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먹을 때 우리는 먹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걸을 때 걷고, 먹을 때 먹는 것이 수행이라니 그게 어떻게 수행이냐 라고 반문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부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수많은 망상 속에서 걷고 먹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몸은 ‘지금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과거에 매여 있거나 미래의 근심 걱정에 쌓여 살아가기가 태반사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는 인간이 만든 개념의 시간일 따름이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뿐.... 그러나 우리는 늘 과거나 미래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지 않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나 미래 속으로 줄랭랑쳐 버리는 마음을 어떻게 ‘현재’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 곧 누구나 앉고 걷고 먹는 일상 행위를 하나의 명상으로 삼으셨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이를 통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숨겨져 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八正道) 중 하나인 정념(正念)의 ‘念’이라는 한자를 보면 위는 今으로 ‘지금’이며 아래는 心으로 ‘마음’을 의미한다. 곧 念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 되겠다. 이와 같이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수행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정념수행의 핵심인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정념수행을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곧 ‘깨어있는 마음’으로 해석한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책을 읽을 때는 책에, 먹을 때는 먹는 것에, 차를 마실 때는 차에,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해 사는 것을 말한다. 플럼빌리지에 가면 다음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다. “나는 이미 도착했네(I have arrived).” 그 곳에 사는 스님들은 다음 노래를 즐겨 부른다.


나는 이미 도착했네(I have arrived)

나 고향에 있네 (I am home)

나 지금 여기 있네 (In the here In the now)

나는 든든하고 자유롭네 (I am solid I am free)

나 궁극의 진리에 머무르리 (In the ultimate I dwell)


재작년에 플럼빌리지에서 일주일간 피정한 적이 있다. 그 때 거기에 온 수행자들과 그 곳 스님들과 함께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그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나의 집이요 고향이 아닌가? 그저 질주하며 살아온 지나온 삶, 어디를 향해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또 달려왔는가? 플럼빌리지에서 틱낫한 스님은 설법하신 후 늘 그 곳에 온 수행자들과 걷기명상 곧 행선(行禪)을 함께 하신다.


넓은 벌판과 자두나무가 심어진 과수원 사이를 1시간 정도 함께 천천히 거닌다. 조금 느리게, 그리고 숨쉬기와 발걸음을 조화시켜가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 또한 느긋해짐을 느끼게 된다. 발이 땅에 맞닿는 느낌 곧 발바닥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걷노라면 세상 어느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걷는다는 것 이외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걷다보면 진정 걸음을 즐기게 된다. 어디를 가기 위한 걸음이 아니라 걷기 위한 걸음.... 언제 그렇게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내 걸음은 늘 목적 지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 않았던가? 학교를 향해, 직장을 향해 그리고 무엇을 하기 위해 바삐 걸어오지 않았던가?


내가 걸어온 걸음들, 내가 남긴 삶의 발자국들.... 나의 성급함과 조급함을, 걱정과 근심을, 슬픔과 절망을, 지침과 피곤함을 걸음과 몸짓에, 목소리에 담아 세상에 퍼트리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 쉴 새 없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는 원숭이마냥  이리저리 춤추는 마음의 흔들림 속에 살아온 삶의 흔적들... 갈라진 생각과 망념들, 그 미망의 세계 안에서 뜀박질하며 살아온 나를 본다. 자두나무로 가득찬 플럼빌리지 언덕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며 아, 이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다짐 또 다짐해본다.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을 과거나 미래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마음을 두고 걸어보자. 누군가 이런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라면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인가?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둔다는 건 과거를 되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나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지난 일을 후회하고 미래의 걱정이나 두려움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을 때 과거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걷기명상은 걷는 것 이외 다른 어떤 목적도 다 내려놓고 오직 걷는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걷는다. 수단으로서의 걸음이 아니라 걸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걷는다. 이 걸음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 안에 녹아있는 ‘지금 여기’의 영성을 살펴보았다. 그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2. <코헬렛> 속에서의 ‘지금 여기’


종전에 ‘전도서’로 불리웠던 코헬렛은 정경성 논란과 내용상 오해의 여지가 많은 구약성경 지혜문학 중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이 책이 한 사람에 의해서라기보다 어느 편집자에 의해 코헬렛의 어록이 모아져 완성된 것으로 본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 2) 온통 인생과 세상의 허무만을 말하는 듯한 이 책이 어떻게 정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코헬렛의 저자는 과연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전해주고자 했을까?

 

코헬렛 저자가 말한 인생의 허무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허무라면, 이 책이 정경으로 채택되었을지 만무하다. 코헬렛에 나오는 ‘헛되다’(히브리어 ‘헤벨’)라는 단어는 원래 ‘입김’ 또는 ‘숨’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적인 것,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코헬렛은 이 단어를 반복해 씀으로써 인간이 인생에 대해 품은 온갖 집착들의 ‘무상함’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한다. 코헬렛은 누구보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향락과 술에 빠져보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막강한 권한을 누려보기도 하고(1-9절)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린(2,10) 행운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절)라는 고백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다. 절망한 코헬렛은 급기야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2,17.18.20.23절 참조)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4-25절에 와서 그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2,24 참조)는 반전의 발언을 한다.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인간의 한계와 무상함을 깊이 체득한 코헬렛은 세상의 것이 다 허무임을 자각했다. 삶의 한계를 체험한 그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충실히 사는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터득한 것이다. 인간존재의 한계를 깊이 인식한 그는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비결은 ‘현재’를 사는 지혜를 터득함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만큼 현재에 올인하는 것, 그것만큼 지혜로운 삶은 없음을 깊이 자각한 것이다. 바로 이 지혜가 담겨 있기에 코헬렛은 성경의 지혜문학의 일부로 전해져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바치는 기도 속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영원무궁세....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마치 ‘영원만을 지향하는 종교’인양 생각하기도 한다. 세상 것은 다 헛되니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원은 ‘지금 여기’를 떠난 시간개념이 아니다. 지금 여기 곧 현재가 배제된 영원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 지금 여기에서 죽어도 될 만큼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삶을 사는 것이다. ‘현재가 바로 선물인 것이다(Present is present).’


어느 한 카드 광고에서 카드 이용액을 늘리기 위해 인용한 말 중 ‘카리페디엠(Carpe Diem)’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문구는 현란한 조명아래 춤추는 한 젊은 남자가 인생과 청춘을 즐기라고 하면서 외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본래 의미는 흥청망청 인생을 즐기란 뜻이 아니다.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키팅(John Keating) 선생도 이 말을 자주 썼다. 그는 첫 시간부터 파격적인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카리페디엠’을 말한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현재를 잡아라’ 혹은 ‘오늘을 살라(seize the day)’ ‘이 순간에 충실하다’라는 의미이다. 그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자신과 학교측의 교육방침의 차이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난다.


영화 속의 학부모와 교장들의 카르페디엠과 키팅의 카르페디엠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전자가 사용한 카르페디엠에는 미래 시제가 포함되어 있다. 즉, 미래의 현실을 즐기기 위해 ‘지금의 현실을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이 처한 현실적 억압을 정당화시키려는 슬로건이었다. 이에 반해 키팅이 말한 카르페디엠은 문자 그대로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을 말한다.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함이 교육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 전자의 주장은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현재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 그런 ‘현재’가 축적되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가?

 

3. 예수의 가르침 안에 녹아든 ‘지금 여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상 가치 속에 길들여져 왔다. 그 안에서 각자 행복을 찾고자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추구해온 것들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체험하곤 한다. 코헬렛 저자가 말하듯이 세상 가치를 추구할 때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뿐임을 느끼곤 한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신다.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개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 회개의 방향성에 대해 제시한 것들이 많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25-37)는 그 중 하나이다. 이 비유 중 조연급에 해당되는 두 인물 제사장과 레위사람에 주목해 보자. 추측컨대 사제는 아마도 성전 봉사의 기간을 마치고, 그의 동네인 예리고로 돌아가는 길이었을지 모르겠다. 사제나 레위인 모두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고 성경을 전한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 시체를 만지지 않는다(레위21,1).


그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죽어가는 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쓰러져 있는 사람보다 자신들의 일이나 관습 이 더 중요했다.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관습’이나 그들이 행해야 할 어떤 ‘일’에 있었기에 ‘지금 여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했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과 사마리아인의 차이이다.


루가복음서에는 나병에서 치유 받은 열사람 이야기가 나온다.(17, 11-19). 열 사람 모두 나았지만 그 중 한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7-19절)


아홉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추측컨대 그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구, 친지에게 병이 나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니면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갔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에 의한 것임을 잊어버린 것이다. 무엇이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지를..... 자기 안에 발생한 하느님의 일을 알아본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만이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앞서 살펴본 두 비유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있다. 결국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연관성 속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인 것이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영적 성장에서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는 숨은 동기를 지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무의식적 동기가 정서 프로그램화되어 우리의 행동동기의 원천으로 자라나고 사회화 과정으로 점점 복잡화되고 강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거짓자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 안에 형성되어온 무의식적 동기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자아로 인해 만들어진 정서프로그램은 점점 업그레이드되어 복잡하게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사람도 ‘길들여진 습관’에 의해 행동했을 것이다. “습(習)이란 사물을 접하면서 생긴 일정한 방향성을 명령하는 몸의 기억이다.” 이와 같이 습관의 힘에 의해 빨리 작동해버리는 거짓자아, 정서프로그램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키팅은 향심기도를 통해 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행복의 정서프로그램이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함을 자각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다. 코헬렛이 그랬듯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느님, 당신 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이 얼마나 방황했나이까?”하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하느님만이 우리 행복의 참된 근원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깊이 동의하는 것이 바로 향심기도이다. 행복의 정서프로그램이 작동하려 할 때 그것을 떠나보내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대한 동의와 지향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동의와 지향의 상징으로 향심기도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다만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활동하심을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일 뿐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가볍게 떠올림으로써 부상하는 정서들을 떠나보내고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현존에 깊이 동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향심기도도 불교명상이 중시해온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음에 대해 불평했을 때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은 많은 생각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한 가지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주관으로 남을 판단할 때 우리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쉽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동생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촉구하신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를 사는 길이요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이번 7월에 영주 선비문화촌에서 종교대화를 위한 종교전문인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석사를 방문했다. 입구에서 내려 극락을 의미하는 안양루를 통과해 조금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수백년을 지켜 온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우뚝 서 있었다. 무량수전 안에서 밖을 향해 바라다 보이는 소백산의 능선,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곳마다 곱게 겹쳐진 능선들과 아름다운 정경은 그야말로 “여기가 바로 서방정토 극락세계, 영원의 세계로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정한 정토, 하느님 나라는 저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가 실현해 가야 할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왔다.


요즘 부쩍 도보여행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나 제주도 올레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는 스페인 북부에서 시작하여 성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성지 '까미노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세계적인 도보여행길이다. 산티아고 교회에 가기 위해 800킬로미터를 걷지만 순례자들은 두 발로 걸어온 길 그 자체가 예배이고, 기도였다고 말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그들이 ‘순례의 과정이 곧 목적’임을 자각한 것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쓴 한 저자는 말한다. “카미노는 과정이 곧 목적이다. 첫 한 발짝이 이미 충족이다.....카미노는 제 안으로 길을 내는 영원한 진행형이다. 그러니까 그냥 걸어라. 몸에 맡기고 마음에 맡기고 곧은 길 곧게, 굽은 길 굽게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 수백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고, 뜨거운 태양 볕에 살을 태우면서 산티아고를 찾은 순례자들은 그 길을 걸으며 결국 자신들의 순례는 산티아고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를 향해가던 그 걸음, 걸음에 있음을 깨닫는다. 순례의 걸음처럼 그렇게 삶의 하나하나에 일념으로 투신해서 산다면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지 않겠는가? 다만 오로지 찰나 찰나에 오체투지하는 삶, 다른 여타의 것들을 탈락시키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을 오체투지하는, 그런 진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