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생태 연구

씨튼연구원 2011년 종교대화 강좌-생태영성과 에코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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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3-07-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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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영성과 에코토피아

                                     

                                                                                                            최현민 (씨튼연구원장)


1. 생태위기 원인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2011년도에는 ‘생태영성과 공동체 운동’이라는 주제로 종교강좌를 해왔습니다. 씨튼연구원에서 생태 영성 강좌를 해온 것은 2007년도부터였습니다. 2007년의 종교강좌의 주제는 ‘생태사상과 그리스도교’ 였고 2008년은 ‘생태사상과 도교와 유교’로 동양 사상과 생태문제의 상관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2009년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 그리고 2010년은 ‘생태적 감수성 살리기’라는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5년동안 해오면서 2011년은 마무리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생태문제가 나아갈 방향, 그것을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태영성과 공동체 운동’이라는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007년도부터 2009년도 강좌에서는 이론적인 부분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동서양의 생태영성에 대한 사상들을 쭉 다뤘었어요. 여러분들은 종교대화 강좌로 시리즈로 바오로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지금까지 해온 전 전체 강좌를 출간하지는 못했고 쭉 펴내어 갈 예정인데 이게 작년에 나온 책입니다. ‘현대 생태 사상과 그리스도교’라는 제목으로 2007년도 강좌를 중심으로 보완해서 나온 것입니다. 올해 저희 수도원에서는 이 책으로 영적독서를 해왔습니다. 생태와 관련된 그리스도교적인 안목들을 종합한 책이기 때문에 <현대 생태영성과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이것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도에 했던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도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저는 오늘 강연을 준비하면서 3월부터 11월까지 강의하셨던 모든 강사분들의 강의록을 일독했습니다. 그 분들이 하신 강의 내용과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생각해왔던 생태영성에 대해 오늘 정리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3월부터 11월까지 강좌에서 강사님들 대부분이 하신 말씀은 “생태를 살리는 일은 곧 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생태파괴는 곧 공동체 파괴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붕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시장경제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사회가 갖고 있는 가치관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결국 생태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필립 암스트롱이 쓴 <1945넌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1970년대의 상품 생산량은 1950년대의 2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20년 간 급격하게 대량생산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리고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는 추세입니다. 엄청난 양의 제품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 요인을 살펴보면 ‘테일러 포드 시스템’이라고해서 포드회사가 (미국의) 이 생산방식을 처음 도입해서 생산량의 증가를 엄청나게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사람을 단순노동자로 만들었습니다. 단순 조립을 하게 하면서, 빠른 속도로 많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엄청난 생산량의 증가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 방식이 퍼지게 됩니다. 이런 대량생산되는 차원은 어떤 결과들을 야기했는가를 보는 게 매우 중요한데요, 결국 기계와 인간의 위치가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기계에 인간이 종속되어 버리게 됩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1981년도에 <새로운 사태>라는 사회회칙을 내셨는데 이는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사회회칙을 보면 노동자들이 생산도구로 전락한 것이 바로 ‘새로운 사태’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의 신성성으로 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 생산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 바로 새로운 사태라는 것입니다.

 물건의 대량생산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기업 중심의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업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는가가 목적입니다. 그 기업의 목적에 따라 인간은 더 많은 이득을 갖기 위한 시스템의 부품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더 많은 이득과, 물품의 생산을 추구하고, 그것은 당연히 자연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생태를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취하는 생산 방식이 자연스럽게 생태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가 현대 사회 기업이 내건 모토입니다. 이런 현대사회는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마구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현재  FTA, 자유무역협정입니다. 말은 무역개방을 통해서 경쟁을 심화시키고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이라 말합니다. 2011년도 미국과 FTA를 맺고 있는 많은 나라들- 캐나다 멕시코 이스라엘 요르단 칠레 호주 등등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고  경제 상황이 열악한 약소국들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멕시코입니다. 10년 전에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지금은 완전히 미국의 대기업에게 지배를 받는 실정입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층으로 전락했습니다. 미국식의 의료체제를 도입해서 국민들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6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가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미국의 농산 가격과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농촌에 젊은이들이 하나도 없고 노인과 어린이들 밖에 없습니다. 버스가 5시간 왕복하는데 노동자 한 달 월급의 절반이 든다고 합니다. 이것이 멕시코의 상황입니다.

  스위스와 말레이시아는 미국과의 FTA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농업에 지대한 피해를 줄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중단하였고 말레이시아는 특히 미국의 과도한 내정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어떤 결과가 앞으로 우리 앞에 놓아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쌀 문제입니다. 미국의 관세까지 없어진 매우 값싼 쌀이 들어오게 됩니다. 무분별하게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됩니다.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은 싸니까 구입을 하고 부자들은 좋은 쌀을 먹습니다. 그리고 점점 우리 농토는 파괴됩니다. 우리 쌀은 사라지고 미국의 쌀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미국이 그렇게 되면 값을 올리겠지요. 우리의 주식인데 말입니다. 미국의 대기업들이 우리나라의 공기업을 침식할 것이고 미국에 의존하다 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실업자를 양산해 낼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는 더 심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사회적 불안은 가속화 될 것입니다. 이 상황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입니다.

대량생산의 문제, 이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다가오는 홍수에 무너지는 둑을 어린이 한 손가락으로 막는 격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답답해지기만 합니다. 일단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정보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대량생산의 현실


현대인 중 많은 이들이 아침에 커피를 마십니다. 매년 커피생산량이 700만 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4000억 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커피생산량 이윤의 1퍼센트만이 커피재배농가로 가고 99퍼센트는 미국의 거대한 커피회사와 중간 업자, 커피 판매업자들에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1%를 가져가는 커피생산 종사자들이 50개국의 2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극빈자이고 상당수가 어린이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현실입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거나 차를 마시거나 코코아를 마실 때 우리가 먹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세계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아침을 시작한다고 마틴 루터 킹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햄버거에 관련된 동영상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햄버거 커넥션(동영상)

햄버거 하나를 먹는데 일인분의 고기와 우유를 얻으려면 소에게 22인분의 곡식을 먹여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요? 햄버거 하나에 소가 먹는 곡식의 양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과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숲들이 파괴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필연적으로 전제합니다. 기업은 이윤을 위해 만들고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자극합니다. 그것이 바로 광고의 혁명입니다. 화이트라는 사람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선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상점이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현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결국 소비문화라는 현사회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무엇에 의해 이끌러 가고 있는지 직시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소비문화이고 이것을 박기호 신부님은 보이지 않는 악령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올 해 종교강좌는 공동체 운동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소비문화는 점점 더 우리를 개인주의로 치닫게 만들고 있습니다. 소비문화가 지닌 세 가지 특성으로 편의성, 개별성, 기술성을 드셨습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과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개별성입니다. 요즘 거의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갖고 살아갑니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집에 전화기가 한 대 있었고, 그것이 개인이 갖게 된 시점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보를 내 손에 들어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구요. 현대사회가 우리를 이끌어 나가는 방향은 점점 개별화의 방향입니다. 나도 모르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되고 자연스럽게 와해되는 것입니다. 가족공동체가 와해되고, 크고 작은 공동체들이 사회 안에서 와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를 흔히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의식을 묶어버립니다. 한시도 인터넷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않습니다.

 어떤 정보가 나에게 왔는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보지 않으면 현실에서 뒤떨어지는, 정보에서부터 뒤처지는, 경쟁사회에서 뒤처지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현대소비문화의 특성


 사회학자 짐 멜이라는 사람은 현대 소비문화의 특성으로 과시소비에 대해말합니다. 요즘 상류층들은 경쟁적인 소비를 하면서, 보다 더 좋은 차, 새로운 차로 끊임없이 바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류층은 어떤 소비를 하느냐, 바로 모방소비을 한다고 합니다. 저것을 가져야 내가 상류의 수준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상품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소비문화는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을 이야기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분적인 위계질서가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 된다고 봅니다.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통해서 부의 과시를 하려고 합니다. 마치 과시소비를 통해 자신들이 가진 명예와 권력을 표현합니다. 과시소비는 그리고 현대인들의 정체성이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현대는 메이커에 민감한 시대입니다. 메이커가 붙은 상품은 제대로 된 상품이라는 사고가 만연합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MCM가방 같은 것말입니다.

2009년도에 나온 영화 중에 ‘쇼퍼홀릭’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신 분 있으신가요? 어떤 영화인지 소개하실 수 있으신가요. 주인공은 멋진 남자보다도 쇼핑에 더 흥분하고 설레입니다.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에 말입니다. 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고 쇼핑을 하고 맙니다. 불치병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현대인들의 현대병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삶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나아가서는 머지않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시장경제가 야기시키는 문제들은 생태파괴 뿐만이  아닙니다. 사회 불평등도 거기서 비롯됩니다. 이것과 관련한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쇼퍼홀릭 동영상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는 항상 나이키 모자를 쓰고 나오는데요. 그가 이 모자를 한 번 쓰고 나올 때마다 5500만원을 받는다고 하네요. 그런데 태국의 노동자는 하루 일당이 4000원입니다. 하루에 타이거 우즈가 나이키 모자로 벌은 돈을 태국 나이키 공장 노동자가 모으려면 38년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양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양산해 내는 것들이 생태 파괴, 공동체 파괴, 사회 불평등입니다. 기아 인구를 줄이기 위해 드는 돈이 일 년에 15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기를 생산하는데 드는 1118조라고 합니다. 75배 차이입니다.


4. 인간성 파괴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의 삶에 편리함을  안겨다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우리의 삶과 우리를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깊이 드려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 인간성의 파괴의 문제를 언급하는데요. 다시 한 번 상기해보겠습니다. 젊은이들 청소년들은 소비문화에 어른들보다 취약합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구문화에 눈이 뜨이면서 나도 나이키 신발 신고 싶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싶고,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됩니다. 전에는 갖고 있지 않던 상대적인 빈곤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노르베리 호지여사는 이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길은 라다크인들이 갖고 있는 티벳 불교의 문화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불교영성 안에 현 사태를 극복하는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영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야말로 라다크인들이 젊은이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노르베리 호지여사는 이야기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비단 라다크 젊은이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 선진국의 젊은이들 역시 범죄에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보고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영국 경찰이 집계한 통계를 보면 12년간에 걸쳐서 약 40만 건에서 120만 건으로 범죄가 증가하였다고 말합니다. 주목할 것은 연령층인데, 14세에서 21세가 최고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만 보아도 이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똑똑한 아이들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물었을 때, 그들의 상대적인 박탈감. 경쟁에서 오는 심리적인 충격이 자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 주관지의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국가기구 중에 최고라고 합니다. 그 주간지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이 과도한 경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5. 대안책


 이러한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3월부터 11월 강사님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월 김종철 선생님은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문제는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가치 위에 협동이라는 가치를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문제를 이야기 했지만 환경문제는 그것만 동떨어뜨려서 볼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시스템들이 생태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김종철 선생님의 마지막 결론은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를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 수 있는가를 말하시면서 생활수준을 낮춰야한다고 말합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아픔을 견디는 거시다는 말씀하셨어요.

 4월 강좌에서 윤형근 선생님은 윤리적 소비를 다루시면서 생태영성이란 생명세계가 이루어진 관계를 꿰뚫어 통찰하는 감수성과 지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윤리적인 소비란 내가 쓰는 물건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산과 소비는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소비가 바뀌면, 생산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산률을 줄이는 건 소비자인 우리에게 달렸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걸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떤 물건이 생산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내 손에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윤리적 소비입니다.

그리고 ‘호혜경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사 돌봄, 상호부조, 두레같은 것들이 호혜경제 영역에 속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있기 전의 경제 시스템을 말합니다. 이 시스템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호혜경제 시스템이 활성화 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이고 생태공동체이며, 자급자족 공동체입니다. 이런 호혜경제 시스템들이 확장된다면 시장경제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칼 폴라니라는 쓴 사회학자가 <거대한 변환>이라는 책에 보면 시장경제는 인간의 영혼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언급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락시켜서 교육도, 의료도 상품화 한다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아프면 어머니가 할머니가 돌봐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게 되면 바로 병원에 가지요. 그렇게 우리의 의식구조가 완전히 물질, 상품화되어있는 것입니다. 상품 기능주의인 것입니다.

7월 강좌 변현단 선생님께서는 소비문화를 극복하려면 교류를 줄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국가와 제도의 관계로부터 우리가 벗어나려면, 우리가 모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교류를 최소화하는 것이 자립적인 인간으로 설 수 있는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교류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소비문화라는 쳇바퀴 속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의 최첨단 기술이 인터넷인데, 중앙정보시스템으로 우리를 몰고 가고 결국 우리의 의식세계는 중앙이 이끄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의식이 변해야 몸이 변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일면에는 토론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한번쯤은 귀담아 듣고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9월 강좌 황대권 선생님 말씀 중에 저에게 계속 남아있는 것이 ‘니취(Niche)'라는 표현입니다. 생태적 적소라는 것입니다. 니취의 의미는 ‘자기가 있어야 하는 적소’를 뜻합니다. 황선생님께서는 까치이야기를 하셨는데, 까치가 집을 지을 때 가지를 물어다가 얼기설기해서 집을 짓는데, 딱 놓아서 완성되는 자리를 찾기 위해 까치는 300번의 시도를 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자신이 있어야할 적소를 찾기 위해 무단히 시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희들이 살아내야 하는 영성과 직결되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니취를 상실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각자가 지닌 생태적 적소를 다시 되찾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6. 에코토피아


에코토피아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는 ecological이라는 그리스어와 utopia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의미는 생태주의라는 ecological 과 이상향이라는 utopia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생태적 이상향을 의미하지요. 사실 이 표현은 사실 쓰인 것이 오래되진 않습니다. 1975년에 미국의 과학소설가 칼랭버그라는 사람이 쓴 에코토피아라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이 소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10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1975년에 나왔고 1981년에 에코토피아 비긴스라는 속편을 소설화 하였습니다.

이 소설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은 워싱턴 주, 켈리포니아 주, 오리건 주가 미국연방에서 탈퇴해서 새로운 독립 국가를 만들어 내는데 그 독립 국가가 에코토피아입니다. 새로운 환경 친화적인 제도와 법률을 만들고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공동체로서의 독립 국가를 그린 가상 소설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에코토피아를 향한 실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소설처럼은 아니지만 현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은 최근 상원에 9개주, 200만 에이커를 야생구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에코토피아 운동은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1990년부터 지속되어온 운동입니다. 이 운동에서 젊은이들은 핵 발전 반대운동이라든지, 유전자 조작식품 반대운동 같은 환경 친화적인 주제를 통해 다양한 사회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매년 국가를 바꿔가며 집회를 해왔는데, 함께 집단생활을 하고 토론하고 정보도 나누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겁니다. 2001년도 핀란드에서 이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행사에 참석키 위해 여행하던 젊은이들은 절대 자동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로만 이동을 합니다. 스페인 프랑스 등등에서 온 많은 젊은이들이 함께 토론하고 체험하고 식생활을 같이 하면서 인스턴트 음식을 절대 먹지 않고 화장실도 스스로 만든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이 운동이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지속, 확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굉장히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매년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보름간 집단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2001년도 8월 15일간 강화도 마니산에서 에코토피아 행사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코토피아 운동은 유럽하고는 색깔이 약간 다르긴 합니다. 기성사회의 시간의 개념을 반대하기 위해 시계를 버리고 시간을 되찾자는 것, 유교적 권위주의적인 면을 버리기 위해 반말을 쓰는 운동, 이런 식의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에코토피아 운동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 중에 월이라는 영화 아시나요? 한 청소부 로봇이 나옵니다. 배경은 29세기 지구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로 인해 인간은 지구상에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고요, 우주유람선을 통해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지구에 있는 것은 그래서 청소 로봇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자동 시스템이고 식량도 액체화되어 있어서 심한 골다공증으로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대화도 영상통화를 통해,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들을 그린 것이 월입니다. 결국은 지구를 망치고 자신마저도 망가져 버린 모습, 이것이 영화 월의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에코토피아가 이상향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나 유럽 같은 곳에서 운동들이 벌어지고 있고 움직임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에코토피아의 이상향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자연관의 인식의 전환 말입니다.


7. 생체모방학을 통해 본 생태적 삶


현대 새로운 학문의 체계로 등장한 것 중에 생체모방학이 있습니다. 이를 처음 시작한 분은 제니어 베이어스라는 여성학자입니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의미에서 생체 모방학이라는 이름이 붙혀졌다고 합니다. 베이어스가 생테 모방학을 처음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그녀의 집에 한 10대 소년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언제 저 바깥에 있는 말벌 집을 만드셨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아마 집 근처에 벌집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니어스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답한 뒤 소년과 함께 벌집을 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베니어스는 생각합니다. 왜 10대 소년은 그 벌집을 벌이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우리는 얼마큼 인간중심적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 10대아이가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인간들의 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그러한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임을 자각하면서 베니어스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연에 대해 모르고 있나, 자연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체를 파괴시키지 않으면서도 현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과학문명을 이용하여 자연을 보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접점에서 착안해 낸 것이 바로 생체모방학입니다.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게 생체모방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손가락으로 흙을 집어 올렸을 때 몇 종이나 되는 박테리아가 살고 있을까요? 4000-5000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박테리아 중 인간이 아는 것은 아주 극소수라고 합니다. 아직 명명되지도 않은, 그리고 토양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는 박테리아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고속전철의 앞부분이 왜 뾰족하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공기저항과 바람도 있지만, 터널을 지날 때 터널 안과 밖의 밀도 차이 때문에 굉음이 나는데 이것을 줄이기 위해 앞부분을 뾰족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착안한 것인가 하면 물총새의 뾰족한 앞부리를 모방한 것이라 합니다

물총새는 앞이 뾰족한 부리로 물 속에 순간적으로 들어가 먹이를 낚아채는데, 공기와 물의 밀도차이 때문에 원래는 물이 튀거나 할 텐데, 그 밀도차를 최소화 하도록 만들어진 물총새의 뾰족한 앞부분이 먹이를 쉽게 낚아채게 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에 불과한 것이고,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점은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거미가 만들어진 줄은 어떤 이간이 만들어내는 쇠줄보다도 5배나 강한 견사를 가진다고 합니다. 홍합의 접착력은 일반 상온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전기뱀장어의 팔백볼트의 전기는 체내에서 순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구요, 전복의 껍데기 안쪽의 최첨단 세라믹보다 강한 성질을 지닙니다. 여러분들 혹시 개들이 바깥에서 풀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개들이 풀을 가끔 먹습니다. 왜 먹는가 하면 자기 안에 독성이 있을 때, 풀을 먹음으로서 제거한다고 합니다. 침팬지도 기생충 때문에 복통을 유발할 때는 잎을 삼켜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잎이 들어가서 기생충을 바깥으로 배설되도록 한다고 합니다. 굉장한 지혜이지요. 동식물들이 갖고 있는 지혜를 인간이 배운다면 우리는 생활에 상당부분 개선되리라 봅니다. 예를 들어 상품 재료를 만들 때 나오는 독소가 환경을 파괴시키는 요소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 원재료를 무엇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인데 그 측면에서 생체모방학은 자연으로부터 그 원재료를 축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자연의 지혜를 통해 자연친화적 재료를 만든다면 그만큼 환경파괴를 줄일수 있다는 것이 생체모방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에코토피아의 한 측면에서 이러한 생체모방학이 긍정적으로 이용되고 있고요, 서울대나 이대에도 이러한 생체모방연구 시스템이 갖추어져있다고 합니다. 

저희 씨튼 연구원에서 하고 있는 종교인 (교수들의)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하는 세미나에서 이 책으로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미나를 하면서 한 면으로 제 머릿 속에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생태위기의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는가를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을 위해 자연의 지혜로부터  배우자는 것 역시 인간중심주의의 한 일환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체모방학>도 한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에코토피아 이상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11월 강좌 강사이셨던 한면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에너지 절감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에너지를 절약한다면 굳이 새롭게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 필요도 없게 됩니다 .

 경제성장에 중독된 우리에게 ‘자제해라’라는 말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야하는 것은 그러나 21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지구의 인구가 100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이상 수준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경제가 10배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이 인구가 살아남으려면 현재보다 10배 이상의 자연을 파괴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중반이 되면 원시열대 살림 식물 중에 약 10퍼센트만 남는다고 하고 생명의 다양성은 50퍼센트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량생산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생태위기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슈마허라는 사람이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슈마허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대량생산 기술로부터 인간 얼굴을 한 중간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예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대량생산을 줄이고 인간 얼굴을 한 기술 곧 중간기술을 통해 생산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장경제에는 인간의 영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인간의 영이 들어간,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다시 복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슈마허가 이야기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하고자 한 주제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의 핵심과 연결되는 부분은 앞으로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협동입니다. 경제 학자인 사무엘 볼스( Samuel Bowls)는 고전주의 시장경제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동물로 봅니다. 이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성인 이기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경쟁을 통해 발전을 유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의 핵심입니다. 지금 경제학에서 는 이것을 뒤엎는 이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공존과 정의에 기초한 이타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사무엘 볼스입니다.

왜 인간이 기부를 하고 봉사를 하며 헌혈을 하는지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내가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남이 행복한데 네가 행복해지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건 결국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에게 봉사함을 통해 결국 내가 만족감을 얻습니다. 이 부분을 이기적이라고 바라보기보다는 본성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종교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바라보니까 종교인은 그런 관점을 갖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경제학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현대 경제학에서의 인간학의 큰 전환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경제학은 이제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대안책으로 인간학이 새롭게 나오게 된 것이지요.

사무엘 볼스의 제자인 최정규 교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경쟁이 때문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말합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시장이 돌아가는 이유는 표면 아래에 숨어있는 호혜적 인간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기적인 인간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지요. 이 고리를 연결시켜주고 원동력을 대주는 것입니다.


8. 소욕지족(少慾知足)의 길


경쟁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측면을 가집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엇일까? 무욕이 아닙니다.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만족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결론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했던 강사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종합할 때 우리는 절제해야 하고 간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절제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 소비를 줄이는 것이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면 소비를 줄여나가는 것은 단연코 미래 세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나 충족은 결코 정신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간소한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간소한 삶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간소하게 사는 건 마치 불편하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생태적 삶은 간소하게 사는 것이고 그건 불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보통 사람들은 생태적 삶을 살기 위해선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서도 우리가 생태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생태적으로 사는 것이 다소 삶이 불편한 면이 없진 않지만 불편함만 있는 건 아닙니다. 생태적삶을 통해 우리는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생태적으로 살아감에 있어 ‘윤리적 소비’가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의 소비를 들여다보게 되면 나의 경제적인 이익을 먼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관점으로부터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윤리적인 소비에 대한 정보를 보다 많이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강좌를 함께 하는 것도 윤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에 도움이 되는 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local 소비를 하는 것도 한 방법 중의 하나가 되겠지요.

중국의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행복해지려면 낮잠을 자라 하루 행복해지려면 낚시를 하라. 한 달 행복은 결혼을 하라. 일 년 동안 행복해지려면 재산을 물려받아라. 평생 행복해지려면 누군가를 도와줘라.”

 기부문화 또한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방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뉴욕에 사는 백 명의 자선사업가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왜 기부를 하느냐고 물어봤을 때 ‘의무’라고 답하더랍니다. 사회적 책임감에서 오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기부가들에게 물었더니 2007년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책임감이 27%,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가족문화다고 이야기한 것이 25%, 동정심 때문이 20%, 개인적 행복감 때문이 15%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한 위안부 할머니가 전 재산을 기부한 소식이 있더라고요. 87세 한금자 할머니. 3000만원을 기부하셨는데요,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쓰라고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만큼 있었을까 보니, 국민 기초 생계비 위안부 지원비, 빈 병을 팔아 모은 돈. 이런 돈들을 다 모아서 장학금으로 기부하셨습니다. 2006년에는 1억 원 상당의 기부를 하셔서 국민훈장을 받기도 하셨고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부한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물으면 나 먹고 살기도 힘들다, 기부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답하지만 이 할머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부문화도 에코토피아를 이루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 하나가 하는 작은 행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나비효과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북경의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엔 폭풍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폭풍이라는 것은 작은 바람이 모여 큰 바람을 만들고 구름을 움직여 뉴욕까지 갈 수 있고 폭풍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동영상(사소함의 힘)

변화의 비밀,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중 범죄사건 들이, 연간 육십만 건의 범죄가 지하철에서 일어나는데, 도시의 시장이 바뀌면서 했던 일이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는 것. 무임승차 단속하는 것을 5년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마어마하게 바뀌었지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허점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황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꿔 이야기하면 작은 실천은 엄청나게 큰 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소비는 대량소비 생산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위기는 평범한 다수의 무관심이 무의식이 모여서 생태위기를 가속화 시킵니다. 나 하나 물을 아껴 쓴다고 지구 저편의 가뭄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음식을 아껴 먹는다고 굶주린 이에게 도움이 되나, 쓰레기 버리지 않는다고 지구 오염이 줄어드나. 하지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소함의 힘’입니다. 영성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가 보았을 때,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는 사고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 생태영성의 핵심입니다. 지구는 하나의 생명체이고, 인간은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일부이지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휘할 때 지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태영성은 결국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귀착될 수 있습니다. 탐욕을 줄여나가는 것, 무욕이 아니라 적은 것에 만족하는 것(소욕지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범스님께서 2009년도 11월 강좌 때 하셨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된다.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야만 만족된다. 아니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인간에게 만족함이 중요한데, 그것은 소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영성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작은 것, 적은 곳으로 크게 살 수 있는 길. 그것이 바로 영성의 길이다.”


자, 여러분들 모두 생태영성을 살고자 갈망하며 일 년간, 바쁜 중에도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일 년 동안 저희 연구원에서 준비한 강좌들이 여러분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생태를 사는 길은 결국 우리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