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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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연구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본 수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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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4-05-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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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본 수도서원

                                                              -베네딕도회의 삼대서원을 중심으로-


                                                                                                                        최현민 (씨튼연구원장)

 


앞서 우린 생태위기 상황 속에 놓인 현대사회의 기계론적 가치관에 대해 그리고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생물권적 의식상태가 필요함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직 국무부 관료인 그랜트(Lindsey Grant)는 말한다. “지금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에 대한 정합적인 전망과 기술적 변화의 귀결들을 숙고하는 방법이다.” 수도생활은 이 현대사회의 가치관에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을까?이에 바탕하여 우리의 수도생활을 생태적 관점에서 성찰해보려 한다.


1.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본 정주서원


스님들은 출가를 통해 자리리타自利利他의 삶을 지향한다. 십우도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소로 상징되는 자기본래성을 찾는데서 시작하여 자비행을 배푸는 데에서 완성됨이 그것이다. 곧 불교의 출가행은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자비행(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지향한다.이러한 자리리타적 삶이야말로 수도자가 지향해야 할 생태적 삶의 표양이 아닌가 싶다. 이런 관점에서 베네딕트회의 정주서원의 의미를 살펴보자.

 베네딕트 성인은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감에 있어 공동체 안에서의 정주생활을 강조한다. 공동체 아래에서의 정주서약은 하나의 규칙, 한 아빠스, 한 형재애를 통해 수도자의 영적여정을 더 효과적으로 돕는 베네딕트회의 생태시스템을 잘 말해주고 있다.

출가승들은 구족계를 받은 후 한 공동체에 머무르기 보단 유행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베네딕트회 회원은 정주서원을 통해 공동체에 머무른다. 물론 오늘날 활동사도직으로 정주의 의미가 장소적 의미보다는 마음의 정주로 해석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회회의 정주서원은 남다르다.

정주서원은 일과 활동의 이원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생활의 문제점은 이 양자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데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싶다. 기도와 활동이 잘될 때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기도가 안되거나 사도직에서 실패감을 맛볼 때 우린 좌절케 된다. 사실 정주서원 안에 담긴 의미는 바로 이 양자의 이원성을 극복함으로써 자유로운 수도자, 행복한 수도자가 되는데 있다.

우리가 실패에서 패배감 좌절감에 빠진다면 우린 자신이 혹 사도직을 나의 성공 수단 도구로 생각하진 않았나 반성. 과학자들은 수없이 실험에 실패하지만 이를 단지 실패로만 여기지 않는다. 그건 진리를 알아가는 한 중요한 단계로 여긴다. 기도가 잘 안된ㄴ 건 우리에게 그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있으리라 믿는 것.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환상에서 깨어나 실상을 보도록 초대한다. 그러한 환상을 깨는 장이 바로 공동체 생활이고 그 생활을 통해 삶의 온정성을 회복해감이 정주서원이 아닌가 싶다.

베네딕트회가 정주서원을 통해 지향하는 바는 ‘기도하며 일하라’는 모토 속에 잘 드러난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고 노동을 통해 자기가 속한 삶의 자리인 수도공동체에 뿌리내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주서원은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의 관계 속에 뿌리내림을 통해 하느님께 더 깊이 뿌리내리려는 삶의 형태이다. 몸의 뿌리내림을 통해 마음의 뿌리내림을 더해가고, 마음의 뿌리내림을 통해 몸의 뿌리내림이  더 깊어지는 역동적 관계성이야말로 정주서원이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곧 정주서원은 기도를 통해 마음을 하느님께 뿌리내리고, 노동을 통해 몸으로 공동체에 뿌리내리는 역동적 관계성을 잘 말해준다. 이를 불교 출가자들의 자리리타 영성과 비교한다면, 自利는 하느님과의 일치요, 利他는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의 응답이라 볼 수 있겠다.

정주서원은 자리와 이타 간의 역동적 관계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건 하느님과의 일치인 自利는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의 삶을 통해 완성되며 공동체를 통한 이타적 삶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와 노동의 역동을 통한 수도생활에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만 관심을 갖고 자연과의 관계성을 소홀히 여겨오진 않았는지 성찰해본다.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자각과 함께, 노동(활동 사도직)의 장에서도 자연(생태)과의 관계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베네딕토회의 정주서원은 생태적 서원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싶다. 


2. 수도자다운 생활


1) 개인의 자기완성과 공동체


근대 개인주의적 사유에선 마치 우리가 철저히 자율적 개별존재이고 다른 존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인 양 말해왔다.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존재라는 근대 인간이해는 자기 안에 잠재능력을 개발하도록 촉구해왔다. 오늘날은 과학적으로도 자아형성은 오직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혀졌다.

양자이론에서는 분리된 입자 혹은 물질적 사물 사이에는 빈공간이 있다고 보는가 하면 다른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결속되어 있다고 본다. 물질의 가장 기본요소인 양자의 단계가 이럴진데 인간 존재야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자기완성도 개인의 능력향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선명하게 구분되는 개인은 없다. 그래서 나의 생각이 내가 만들어내고 소유한 나만의 생각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지속적인 반작용이며 그러기에 누구도 어떤 생각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개인을 새로 정의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개인의 자기완성은 공동체와의 결속관계를 통해 완성되지 결코 홀로 완성될 수 없다. 이 안에 개별화의 역설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자연 속의 생명체들을 보면 그 전체가 호혜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벌, 나방, 벌새, 박쥐는 꽃에서 식욕을 채우는 동안 꽃들에게는 교차 수정을 해준다. 동물은 과일을 먹고 난후 풍부한 거름으로 소화되지 않은 씨를 배설한다. 이로서 씨는 자유롭게 다른 곳으로 수송된다. 새 한 마리가 열매를 쪼개 식사를 즐긴 다음 날아가 버리면 먹다 남은 것을 좋아하는 다른 종류의 새가 와서 그것을 깨끗하게 치운다. 심지어 동물의 배설물도 그렇다.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은 번개같이 와서 동물의 배설물을 처리한다. 이렇듯 생명체들은 상호 협력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자연에서 호혜적 관계를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수도생활은 공동체에 자신을 투신함으로써 회원들 간의 상호호혜적 관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아완성을 이루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된다. 우리 공동체는 과연 회원 간에 상호 호혜적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지를...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안에 개인주의적 사유가 자리하고 있어 자기계발 역시 개인적으로 이루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자연의 일부인 우리 역시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함께 공동의 춤을 추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연의 호혜적 관계로부터 더 깊이 자각할 필요는 없는지?

사람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영화로 만들어보면 그들이 계속 서로를 조율하고 조정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를 사람들 간의 싱크로나이즈 현상이라 한다. 일종의 춤이다. 서로 조정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이런 상호호혜적 관계가 잘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2) 소유함과 소욕지족(少欲知足)


세계 영성가들은 한 목소리로 “비울수록 충만해지고 적게 가질수록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영적으로) “더 많이 가진 자 일수록  더 적게 소유한다. 소욕지족(少欲知足)할 줄 아는 지혜, 거기에 행복의 비결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소욕지족이란 아무 것도 지닌 바 없는 무소유 상태가 아니라 최소한의 것을 갖고도 거기에 만족할 줄 아는 상태를 말한다.

성 베네딕토는 성규 33장에서 “개인 사유를 악습으로 규정하면서 수도원에서 뿌리채 뽑아야 한다”(33.1)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가 어떤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사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아니면 법적 기부행위로 그것을 수도원에 양도하게 하여 아무 것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게 할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자기 몸에 대해서조차도 더 이상 아무 재량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성규 58, 17)

성 베네딕토는 철저하게 개인 소유를 금지한 건 탐욕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리라. 그건 베네딕트 성인께서 탐욕이 다른 악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불교에선 탐진치(貪瞋痴)라 하여 탐욕은 삼독(三毒) 중 하나로 본다.)

이렇게 개인소유를 강하게 금하면서도 다른 한편 사람에 따라 필요함이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성규 34장에 보면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상심하지 말 것이다. 반대로 많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겸손해야 하며 자기가 받은 자비로 인해 교만해져선 안된다”고 한다. 이렇듯 각자의 필요에 따라 소유의 정도에 차이를 인정하는 분별심이 돋보인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소욕지족이 바로 그것이다. 무소유의 의미는 적게 소유해도 만족할 줄 아는데 있다. 적게 소유함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깊이 나아간 사람이 아니겠는가.


 "영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된다.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야만 만족한다. 아니,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인간에게 '만족함'이 중요한데, 이는 소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영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작은 것으로도 크게 살 수 있는 길, 그것이 바로 영성의 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밥을 얻어먹고 맨발로 돌아다니면서도 불만이나 공허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 작은 것들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깨달은 지혜가 깊었기 때문이다."

              (2009년도 씨튼 연구원 종교대화 11월 강좌에서 하신 서종범 스님의 말씀)


신자유주의 종교 세력에 대항하려면 그만큼 영적 대응력을 길러야 한다. 다시 말해 영성이 필요하다. 그 영성은 공동체에서 비롯되며 개별적으로 고립되어선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적 영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3. 생태적 삶으로서의 상호순명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은 상호 호혜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앞서 살펴보았다. 수도공동체 안에서 상호호혜적 관계가 보다 잘 유지되기 위해선 순명을 통한 질서가 필요하다. 보통 순명하면 원장에게 하는 상하적 순명을 떠올린다. 베네딕도 성인도 규칙서 5장에서 수직적 차원에서의 순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수평적 차원에서의 순명도 말씀하신다. “모든 이는 순종의 미덕을 아빠스에게 드러낼 뿐 아니라 형제들끼리도 서로 순종해야 한다”(성규71, 1) 상호순명을 강조한 건 성 베네딕트께서 공동체 안에서 불순종이 가져온 해악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지체없이 그 자리에서 보속하라’고 하셨다. 불순명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 균열과 상처가 더 커지기 전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서로 간의 순명이라는 도전 속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 중 서로간의 순명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서로 간의 순명이 쉽지 않은 건 경청하기를 힘들어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 베네딕토께서는 규칙서의 머리말에서 말씀하신다. “들어라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들어라 마음의 귀를 기울려 경청하여라”(머리말1).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여 들을 것이니(머리말 9). 만일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머리말 10)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머리말 11), 내 말을 듣거라(머리말 12) 이렇듯 경청은 머리말의 열쇠이며 규칙서 전체의 열쇠라 할 수 있다.

왜 경청하기가 어려운가? 그건 자신의 생각과 아집, 자기집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를 비워내지 않는다면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없다. 하느님 말씀과 장상, 동료들에게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려면 자신을 비워야 한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운다는 것이요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도겐선사(1200-1253)의 정법안장에서)


현대에는 자기표현은 잘 하지만 남을 경청하는 데에는 서툴다고들 한다. 듣는게 어려운 건 자기 생각을 내려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청함으로써 많은 것을 ‘정화’할 수 있다. 즉 내 마음 속에 불복종 지배욕 아집 등이 경청을 통한 순종으로 인해 정화될 수 있다. 또한 순명은 나의 아집 뿐 아니라 나의 순명을 통해 타인의 마음까지도 정화시켜준다. 그것은 순명이 호혜적 관계성이라는 인간 본연의 존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순명을 통한 정화와 관련하여 자연계의 한 예를 들어보겠다.

많은 물고기들이 체외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데 이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 기생충들은 물고기의 눈과 코, 비늘 밑, 혈액이 많은 아가미와 입속 피막 등에서 산다. 그럼 물고기들은 어떻게 기생충을 박멸할 수 있나?

물고기들(숙주 물고기)이 기생충을 통제하는 방법은 클리닝 스테이션(cleaning station)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클리닝 스테이션에서는 기생충을 잡아먹어 주는 청소물고기나 청소새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바다 공동체의 중요한 관계성 중의 하나이다. 청소받는 물고기들은 청소하는 물고기가 아가미 심지어 입에 들어가 먹이를 찾도록 놔둔다. 청소하는 동물은 기생하는 것을 잡아 먹고 그 주인이 되는 물고기는 기생충을 방지하게 되고 더 환해지고 깨끗해진다. 어떤 관찰자는 하루에 300마리의 물고기에 이런 방식의 서비스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예) 악어와 악어새라는 물새의 공생--악어가 주동이를 벌리면 악어새가 입속으로 들어가 입안청소를 하고 기생충을 제거해준다.

 이와 같이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청소공생은 서로 생존하려고 싸우는 현상과는 반대로 상호협력하는 행위이다.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청소 공생”의 예는 우리 내면을 정화시키는 영적인 정화 과정과 비교해볼 수 있다. 우리가 남의 말을 경청하고 순명함은 다름 아닌 내적인 정화과정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경쟁의 논리를 부축여 왔다. 피터파커는 경쟁이란 경쟁은 개인의 이득위해 개인들이 벌이는 제로섬게임이며 관계의 그물망을 용해시키는 산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쟁의 논리는 인간을 개인으로 바라보는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이런 경쟁의 분위기가 있다면 그건 공동체를 와해시켜버리는 요인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원들에 대한 불쳥 시기 질투 혹은 자신의 왕국을 이루려는 유혹 등이 그것이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수도공동체 안에도 영향을 주어 각자가 공동체 안에 자기왕국을 만들고픈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경향이 없지 않다. 상호 순명의 어려움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회풍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결론>

북경에서 날개짓한 나비의 날개짓이 한달 후 뉴욕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나비효과라 한다. 나비효과는 이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말해준다. 다시 말해 우린 세상 그리고 자연과 삼라만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내가 하는 행동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늘 불안과 불확실성이 잠재되어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거기에는 늘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를 통해 변화를 거듭해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이 사회 전체가 지금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 그 총체적 위기는 생태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생태란 자연과 인간의 관계만을 말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 안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의 관계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생태위기를 단지 자연파괴라고만 보는 건 좁은 의미이다. 즉 생태위기는 이 사회의 총체적 위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위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나는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위기는 근원적으로 우리의 인식이 잘못되어 왔다는 걸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인식의 잘못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말하려 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위치로 돌아감이 바로 생태영성의 기본이다. 인간이 인간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건 하느님을 하느님의 자리에, 자연을 자연의 자리로 되돌림을 의미한다. 이 되돌릴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바로 생태영성이다. 영성으로 돌아가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욕망의 실체를 알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절제한 파괴나 개발이나 소비는 자제할 것이다.

 영성을 통해 욕망을 순화하는 것 그게 바로 생태위기의 해법이요 이 사회의 해법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가장 시급한 것은 영성의 회복이다. 이것이 현대문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라고 생각한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고 했다. 지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태영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깊이 알아야’ 삶이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의 삶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세상이 바뀌기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바뀌어야 할 세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깊이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깊이 드려다 보면 욕망의 실체가 뭔지 알게 된다. 그 욕망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자각한다. 우린 바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다. 학력 재능 능력이 아님을 깨닫는 것 그래서 생태영성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생태를 사는 길이다.  지역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실천부분이다. 겨자씨처럼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


1) 대중교통이용-자동차보다 기차나 버스가 승객 일인당 에너지 효율성이 더 높다.

2) 먹거리-육식을 줄이는 것, 생태적 먹거리를 만들기

3) 쓰레기를 줄이고 물품 재활용하기, 생태적 물품 만들어 쓰기


우리의 작은 실천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우리가 사는 지역을, 그리고 한국 사회를, 더 나아가 전 지구인들을 생태적 삶에로 초대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토론 주제>


1) 만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상호호혜적 관계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지금 이 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착취나 억압의 현상이 아니라 ‘배척’의 문제라고 보셨다. 혹 우리공동체 안에는 이런 배척의 분위기는 없는지? 있다면 이 분위기를 어떻게 다시 공감의 분위기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2) 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극복하려면 연대와 협동할 수 있는 호혜경제 구조를 만들어야한다. 구체적으로 호혜경제 시스템을  활성화할 수 있는 예로 상호부조나 두레같은 지역사회 활용하는 협동조합, 생태공동체를 들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공동체 간에 호혜경제 시스템을 운영할 가능성이 있는가?


3) 생태위기의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영성의 회복’이다. 생태영성으로 세상 속에 확산시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