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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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연구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종래의 자연과 인간 이해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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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09-02-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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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위기의 관점에서 종래의 자연과 인간 이해에 대한 성찰


 


                                                    최  현  민 (서강대 대우교수)





0. 문제제기





생태위기 문제는 현대사회 안에서 종교, 철학, 사회학, 경제학,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연구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환경운동가들뿐 아니라 철학자나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확산되어가는 것은 모든 분야가 이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분야에서 생태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미 생태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으며 자연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방안과 실천이 쉽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그 이유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본성과의 깊은 연관성이다. 자기중심적 본성을 지닌 인간들 간에 가치관이 상충될 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이들과 파괴되어 가는 환경을 보존하려는 이들 간의 상반된 가치관의 충돌이 그것이다. 전자가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지녔다면, 후자는 생태중심적 가치관을 우선시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보존은 자연을 끊임없이 이용하여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지향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심각한 갈등요인으로 부상되고 있다. 이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 속에서 생태 보존이 가능하려면, 경제 발전을 지향하는 이들의 가치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치관의 전환은 곧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뎀보프스키(Hermann Dembowski, 1928-)는 생태위기를 ‘자연에 대한 인식의 위기’로서 규정한 바 있다.1) 이런 점에서 생태위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태위기 문제의 근저에는 이원론에 근거한 자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이원론의 사유체계는 자연이해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한 이해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존재가 상호연결된 관계망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생태위기는 자연에 대한 인식의 위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한 인식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 또한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생태위기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종래의 자연과 인간 이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취해야 할 인식적 전환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객체로서의 자연 이해





1) 인간중심주의와 그 문제점


 


흔히 자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주객이원론적 관점에서 대상화된 사물이나 객체를 말한다. 자연을 객체로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주체적 행위자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고 착취함을 의미한다. 이는 곧 자연이 인간복지를 위해 이용될 대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관점에서는 자연을 보존한다는 것 역시 인간복지를 위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객체로서의 자연이해는 이원론적 사유구조 안에서 자연을 주체인 인간과 대립시킨 체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도구로서 보아옴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의 자연이해는 서구 실재관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탈레스의 시기까지는 실재를 하나의 통일체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고대 BC 6세기초에 우주를 조각나게 하는 지적인 출발이 이루어졌다. 탈레스는 모든 것이 물이 응축된 것과 희박함(rarefaction)의 여러 상태로 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리얼리티와 자연과 신성을 더 이상 하나로 보지 않았다. 이로부터 자연은 인간과 분리된 영역이 되어 갔다. 탈레스의 실재관은 서구철학의 사유 안에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근대의 데카르트에 와서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실재론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데카르트는 정신적 인간(res cogitas)과 연장적 물질(res extensa)이라는 이원론적 사유 안에서 자연을 정신적인 특성이 없는 순수한 ‘물질’이라고 규정했고, 단순히 반복운동만 하는 ‘기계’와 같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중심적이며 기계론적 자연이해가 바로 근대 과학문명의 철학적 근간이 되어온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문명을 위하여 마음대로 이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해 왔고 생태위기를 초래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삶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이원론적 사유의 근원이 서구철학 안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 1907-1987)는 1967년에 『사이언스』를 통해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현대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은 유대교-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오만으로부터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 즉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자연은 인간의 사용목적 외에 다른 어떤 존재이유도 없다’는 극단적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자연착취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로 그리고 급속도로 파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 역시 서양의 진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진보 사상은 유대교-그리스도교적인 종교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내에 영지주의 이단이 번성하면서 이원론적 사유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영육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영적인 것은 중시하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지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거부해 왔지만, 이런 운동 하에서 반영된 이원론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다시 표면화되었다.2)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3세기 프랑스의 카타리파(알비파) 사상이다.3) 론강 서쪽 남프랑스에 많았던 카타리파는 마니교의 교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따라서 그들은 이 세상, 물질계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한 신은 선신이 아니라 악신이라고 주장했고, 인간은 이 악한 세계에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를 가진 이원론적인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계를 벗어나 '선신'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육체를 부정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고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물질계를 벗어나 선신이 지배하는 비물질계, 천국으로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왔다. 이와 같이 카타리파는 육체적 삶을 경멸하고 영혼에 집착함으로써 영지주의적 관점 곧 영육 간의 영지적 분리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그 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안에도 영육이원론적인 애매함이 있음을 볼 수 있다.4)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몸은 본질적인 악은 아니지만 영혼과 비교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영육이원론적 잔재를 남겼다. 서구 그리스도교에는 이원론적 사유뿐 아니라 인간중심적 사유로 인해 인간 외의 다른 피조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음이 사실이다. 화이트의 지적처럼 그리스도교는 자연파괴적인 근대기술 과학문명 창출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로 말미암은 자연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를 소극적으로 방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이해함은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 전락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도구화된 자연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관을 내세우는 이들이 바로 생태중심주의자들이다.





2) 생태중심주의와 그 문제점





인간중심주의적 자연이해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에 이런 관점에서의 자연 보존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으로서의 자연 보존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생태중심주의자들은 도구화된 자연관을 거부하고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자연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자연은 완전한 것이고 완벽하며, 생태계는 스스로 자신을 기르고 자신을 보존한다고 본다. 즉 자연은 스스로 자신을 돌볼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보존하기 위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자기조직적이며 자기충족적인 자연을 방해만 하는 불필요한 존재, 즉 ‘남아도는 존재’라는 것이다.5) 이와 같이 자연을 순수하며 이상적인 실재로 그리고 자율성을 지닌 실재로 보는 생태중심론자들의 자연관은 플라톤사상의 실재론적 사유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생태중심주의 안에는 본래 자연은 이데아와 같이 이상적인 것이며 우리는 그 이데아인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발상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연은 절대성과 순수성, 영원성, 선함을 지니고 있다고 본 그들은 인간이 자연을 방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이는 생태중심주의자들에게 자연성이란 인간과 독립된 즉 인간으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생태계에서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자연을 인간에 대한 비교개념(gradual concept)으로 보았다.6) 즉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은 비자연적인 것이며,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연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인간의 직간접적인 활동을 통해 자연이 점점 비자연적으로 되어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자연적인 것이 되고, 인간의 활동이 작용되면 될수록 더 비자연적으로 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생태보존은 자연을 인간통제로부터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연이 잔존해 있는가?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자연을 영구보존할 수 있는가?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되어 왔고 변화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공 안에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변화해 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음이 현대 과학과 철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지구상의 전생태계가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왔다면 생태중심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연은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생태중심론자들이 말하는 순수한 자연을 보존하고 회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순수한 자연뿐만 아니라 완전히 인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활동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호모사피엔스도 다른 종들과 더불어 자연의 한 종이기에,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종들처럼 자연의 행위라 할 수 있다.7) 이런 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각에서 자연을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이 나오게 된 것이다.





2. 문화로서의 자연 이해





1) 문화로서의 자연이해의 배경과 의의





앞서 우리는 주객이원론적 관점에서의 자연이해가 인간중심주의나 생태중심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생태중심주의자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를 대립적 개념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태중심론에 반하여 나온 것이 자연을 문화로서 이해하려는 사유이다. 자연을 문화적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이들은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순수자연이라고 주장해온 야생지(wilderness)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자연은 문화의 창조물이며 역사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8)


주객이원론적 관점에서의 자연이해가 실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자연을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유는 실재론에 반기하여 나온 유명론(唯名論, 명목론이라고도 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문화적 관점에서의 자연이해는 보편자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경험주의와 동맹한 유명론에 입각한 자연이해라 할 수 있다. 유명론에서는 인간의 개념과 분리된 순수한 실재를 부정한다. 즉 인간의 경험과 무관한 세계는 의미가 없으므로 자연이 의미를 지니려면 인간문화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9) 이와 같이 자연을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은 사회구성주의자(social constructionist)들이다. 구성주의(constuctionism)에서는 객관적인 실체나 절대적 진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들은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문화를 인간이 이성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으로 보았고, 자연은 문화의 변증법적 파트너로서 문화 속에서 인식되고 사용되어진다고 주장한다.10) 인간의 문화와 동떨어져 있는 자연은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기에 순수자연을 진리 혹은 객관적 실체로 보아온 생태중심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런 관점에서 윌리암 크로넌은 인간 문화와 동떨어진 자연만이 우리가 지켜야 할 진정한 의미의 자연이라는 생각이나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숲만을 우리가 지켜야 할 야생지로 보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문화적 관점에서의 자연 연구는 생태중심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활성화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이 축적되어 갔다. 이러한 연구는 인공환경에 대해서 오랫동안 무관심해 왔다는 성찰을 하게 했다. 자연림으로 여겨온 인도의 삼림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온 인도인들의 화전(火田)의 결과였다는 파인(Stephen J Pyne)의 연구도 이러한 성찰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12) 리차드 화이트(Richard White)는 1985년까지의 중요한 미국 환경사를 종합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로 그리기 시작한 이유와 환경론이 자연물과 인공물 사이의 선택의 문제로 다루어진 이유를 서술했다.13) 그는 그 이유를 현대의 인간이 자연 속에서 신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직접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인간이 자연 안에서 자연을 통해서 생산활동을 할 때에는 자연과 소원한 관계가 아니었으나, 인간의 활동이 자연과 멀어지면서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존재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인간과 유리된 자연 개념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밀러(Char Miller) 역시 역사 속에서 자연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이 달라짐에 따라 자연의 개념도 지속적으로 변해왔다고 봄으로써 자연의 개념을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았다.14)


이런 점에서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생태중심론자들이 말한 ‘야생지와 같은 순수한 자연을 회복하자’는 주장은 비현실적인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실제적으로 생태보존은 일상 안에서 매일 우리가 접하는 야생지를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즉 우리가 주변에서 매일 접하는 자연 안에서 의미를 찾고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자연 보존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문화로서의 자연 이해를 통해 자연이 인간 문화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재인식하도록 촉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연을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팀 인골드(Tim Ingold)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실재의 세계-자연-를 ‘감각’에 의해서 직접 인식된 세계가 아니라 감각의 중재를 통해서 ‘마음’에 의해 인식되어진 세계로 보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15) 그는 실재에 대한 인식은 마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배운 것을 그 세계 안에서 체험하고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종전의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자연을 문화의 한 구축으로 본데 반해, 인골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처럼 상호 통교하는 관계로 본다.16) 사냥과 채집은 환경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 숲 즉 자연 간에 이루어지는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경제체제라 할 수 있다. 사냥하고 채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 안에서 자연은 인간과 소외된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융합된 세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사냥과 채집과 같은 실제적 활동을 통해서 자연은 인간 속으로 들어오며, 사람들은 그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 안에서 자연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견해처럼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인간 삶을 통해서 구축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제체제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과 숲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과의 상호관계와 유사하다고 인골드는 말한다.17)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절대적인 분리가 없으며 하나의 세계만이 있다. 즉 (식 동물을 포함한) 자연과 인간은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원화된 존재가 아니라 비인간의 세계 -자연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들-와 인격 간의 상호관계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인골드의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머무는 곳 즉, 우리의 삶이 녹아있는 집으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자연을 집으로 여길 때, 자연과 인간을 이원화시키는 사유를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세계 속에서 살아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집’으로서의 자연이해는 자연과 인간 간의 이원화를 극복하는 측면 외에도 자연과 인간 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자각을 하도록 도와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속적 경제 발전을 지향하는 현대사회 안에서 인골드가 말한 사냥이나 채집과 같은 경제체계가 얼마나 현실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2) 문화로서의 자연이해의 한계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자연을 문화적 측면에서 봄으로써 자연과 문화를 대립적으로 본 생태중심론자들의 사유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들 역시 한계점을 드러냈다. 문화로서 자연을 통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사유가 지닌 한계점 중 하나는 인간에 편중된 관점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적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만이 자신과 세계에 의미를 가져다주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 왔고, 인간을 자연의 창조물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도록 창조된 특권을 지닌 특별한 창조물로 여겨왔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특수한 존재로 부각시킴으로써 결국 인간 문화와 자연 간의 구분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구성주의자들도 결국 인간중심주의 사유 안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에도 사회구성주의 관점은 자연의 실재를 부정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연의 실재를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개념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야생지에 대한 이해에서도 생태론자들과 차이를 보여준다.


생태론자들은 야생지를 순수한 자연이라고 보았으나,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야생지 개념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자연의 실재를 문화의 한 과정으로 담론화함으로써 본래 자연의 실재를 부정해 온 것이다.18)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자연의 실재를 마음 안에 있는 개념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오존층의 파괴와 같은 실제로 발생하는 자연훼손에 대해서 걱정할 수 있을까? 케이트 소퍼(Kate Soper)와 홀메스 롤스톤(Holmes Rolston)는 이런 점에서 실재는 결코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개념으로 전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19)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실재를 부정함이 윤리적 차원에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상대주의적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지식이 나의 주관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지식을 구성하는 나의 주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자연도 주관에 의해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은 그것이 처한 상황성과 역사성에 의해 항상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주관에 의한 실재이해는 결국 상대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자연을 인간 해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볼 때 우리는 어디에 근거하여 환경을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가 야기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윤리의 상대화뿐 아니라 실천의 상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것이다.20) 또한 문화적으로 자연을 이해함은 가치론적 관점에서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만 봄으로써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 사슴이 가치있음은 우리가 사슴을 사냥할 수 있고 먹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이러한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사회정의를 윤리와 가치의 중심으로 삼는 막스주의자들은 자연 안에 인간의 복지를 위해 공헌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도구적 관점에서만 자연의 가치를 인정하는 막스주의자들은 심층생태학이 말하는 자연은 자율적이고 비역사적인 개념이 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생태중심론자들은 오히려 막스주의자들이 자연의 도구적 가치만을 인정할 뿐, 자연의 내재적 가치는 부정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상에서 우리는 문화로서의 자연 이해의 한계점을 살펴보았다. 자연을 인간문화와 대립된 개념으로 보아온 생태중심론자들의 주장에 반하여 나온 문화적 자연이해 또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관점 또한 인간중심적이며 자연의 실재를 부정해 왔다는 점과 함께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한다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 왔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객체로서의 자연과 문화로서의 자연이라는 양 측면 모두 인간과 자연의 온전한 관계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에 바탕한 생태문제의 해결방안 또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객이원론적 자연이해는 실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문화적 자연 이해는 실재론에 반기하여 나온 유명론에 근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서구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둔 자연이해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명해 줄 대안을 다른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중심적이고 이원론적 사유을 지녔다는 점에서 생태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린 화이트의 비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생태계 위기의 뿌리가 종교에 있다고 본 화이트는 그 치료 역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막스 욀슐래거(Max Oelschlaeger)도 근대사회가 지배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지구의 모든 생명의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종교와 교회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야말로 교육, 기업, 정부와 함께 세계 변화의 중요한 사회적 원동력 중의 하나’라고 본 문화사학자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21) 또한 안나피터슨도 “어떻게 윤리적 실천이 가능한지에 대해 우리는 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종교윤리는 다른 세속윤리보다 훨씬 살아있는 윤리이다”22)라고 말하면서 종교 안에는 살아있는 윤리가 되는데 필요한 잠재적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이들과 같은 관점에서 종교 안에서 생태위기 문제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3. 불교사상을 통한 생태위기의 해결방안





1) 연기(緣起)에 기초한 불교의 자아이해





생태위기의 원인으로서 비판의 초점이 되어온 그리스도교 사상이나 주객이원론적 자연이해, 문화로서의 자연이해, 모두 문제의 핵심이 이원론과 인간중심적 사유에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환경문제를 다루는 제반 학계에선 이 사유가 극복되지 않는 한, 환경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고 본다. 불교가 환경학자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문제의 핵심인 이원론과 인간중심적 사유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불교학자이자 시인인 스나이더는 현대의 생태위기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즉 자연이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걷어내라 정신의 안개를, 독수리 날개 깃털로”라는 그의 싯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불교를 통해 인간중심주의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인간과 만물의 상호의존적 연기의 지혜를 발견하도록 촉구한다.23) 


인간중심적 사유의 근저에는 이원론이 자리하고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고타마 붓다가 힌두교로부터 나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된 것은 힌두교 내에 있는 아트만과 브라만 간의 이원론적 사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출가한 후 힌두교의 명상을 통해 그 최고경지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것은 바로 힌두교의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붓다는 궁극적으로 연기의 깨달음을 통해 이원론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연기의 깨달음은 바로 이원론적 사유의 극복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불교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서구사회에 던져주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기사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기적 관점은 제행무상(諸法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깊은 연관이 있다. 즉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고 보므로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과 ‘영원한 자아는 없다’는 제법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아사상은 단순히 자아를 부정한다는 관점보다는 더 근원적인 존재이해인 연기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이 산이 아닌 것은 산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해석을 넘어서, ‘산은 태양 물 대지 바람 등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산에 대한 연기적 해석이다. 이는 산이 다른 모든 것들과 존재론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시 불교의 연기사상은 대승불교경전인 『화엄경』에 와서 법계연기(法界緣起)로 해석된다. 이는 세계가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중첩되는 연기에 의해 그물망처럼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의 구슬이야기’를 통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인드라 제석천이라는 신의 궁전에는 끝없이 넓은 그물이 있고 그 그물코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이 보석들이 서로 반사하여 한 보석 안에 모든 보석이 있고 모든 보석에 한 보석이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엄에서는 “하나 안에 일체요 일체 안에 하나이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 一切中一 一卽一切 一切卽一)”라고 말한다. 이와같이 삼라만상을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로 바라보는 화엄의 세계관이 바로 ‘법계연기’이다.


이러한 연기사상에 입각하여 불교에서는 자아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지구의 모든 것들과 상호 연결되어 그 존재를 공유하고 있는 상호존재(interbeing)로 본다. 이러한 존재적 관계망 속에서 자아를 이해하는 불교사상은 자아중심적 서구사상과 주객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현대에 주목을 받고 있다. 심층생태학을 창시한 아르네 네스(Arne Naess)는 불교에서 데카르트적인 자아를 뛰어넘어 자연의 만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보다 넓고, 포괄적이며, 우주적인 자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24)


이상에서 우리는 연기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자아이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불교의 무아적 자아관은 자아가 없다는 소극적 해석을 넘어, 연기적 관점에서 삼라만상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이러한 관계적 존재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 자신이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케 하며, 이를 통해 결국 자연의 죽음은 곧 우리 자신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생태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은 생태위기를 인간의 생존의 위기로 인식케 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자연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불교의 연기사상에 기초한 인간이해는 불성사상을 통한 불교의 자연이해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





2) 불성사상을 통한 불교의 자연 이해





불성사상은 일체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서의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종래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에서 불성을 부처가 될 수 있는 힘이나 능력, 가능성으로 보아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로 해석해 왔다.25) 그러나 도겐(道元, 1200-1253)은 종전과 달리 ‘실유불성’ 부분을 ‘실유는 불성이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실유로서의 불성론을 펼쳤다. 도겐의 새로운 독해방식에 대해 김희진은 도겐이 불성에 대한 심리적인 개념을 우주적인 개념으로 변형시켜 이를 眞如(tathatā)나 法性(dharmatā)과 동일시했다고 해석한다.26) 도겐은 이러한 독특한 해석을 통해 일체중생실유불성을 ‘모든 존재 내에 불성이 내재한다’는 불성내재론적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성에 내재한다’는 불성현현론적(佛性顯現論的) 의미로 전환시켰다.27) 이로써 도겐은 삼라만상이 ‘불성’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관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보다 깊은 인식의 장을 열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을 불성이라고 볼 때 자연 역시 불성의 존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불도(佛道)에서 말한 모든 중생은, 마음을 지닌 자는 모두 중생이다. (그것은) 마음이 곧 중생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無心의) 것도 중생이다. 그것은 중생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두 중생이고 중생은 모두 유불성이다. 초목국토(草木國土)는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다.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28)


도겐은 초목국토와 일월성신을 포함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마음을 지닌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불성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도겐은 유정중심적인 종래의 불성론을 넘어서 무정불성(無情佛性), 무불성(無佛性)을 말하고자 한다. 도겐은 무정에까지 불성을 확대해석함으로써 대지를 우주 전체와 긴밀한 관계성으로 직조된 하나의 법계(法界)로 바라보게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무정들이나 산하대지도 진리를 설법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했다.29) 이런 점은 도겐의 『정법안장(正法眼臟)』중 하나인「산수경(山水經)」곧 ‘산과 물에 대한 경전'이라는 이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산과 물에도 방대한 진리의 말씀이 함축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산과 물도 항상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경전 그 자체로 이해한다. 이와 같이 산과 물을 죽어 있는 자연현상이거나 무정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들이며, 동시에 진리를 설하는 법신의 존재로 본 도겐의 인식은 『정법안장』「계성산색(溪聲山色)」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소동파(蘇東坡)가 시냇물 소리를 듣고 이를 불법의 진리를 설하는 장광설(長廣舌)로 이해했던 것처럼 도겐도 시냇물 소리와 산빛을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법신(法身)의 설법으로 이해한다.30) 그래서 도겐은 “올바르게 수행을 할 때에는 시냇물 소리와 계곡의 모습, 그리고 산의 모습과 산의 소리가 모두 팔만 사천의 게송을 아낌없이 설하고 있음을 안다”고 말한다.31) 이런 점에서 도겐은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은 살아 있고, 그 자체로서 언제나 진리를 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겐은 「산수경」에서 선사들의 사상 속에서 막연한 선문답으로 이해되어 온 ‘청산이 움직인다’든가, ‘산이 살아 있다’와 같은 것을 사실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산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길고도 천천히 움직여 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을 살아 활동하는 존재로 본 도겐 사상 안에 산을 시간적 존재로 보는 사유가 숨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만이 시간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도 바로 시간적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자연의 시간대가 인간의 시간대와 차이가 있어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산은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영겁의 시간에서 보면 산과 강은 활발하게 살아 있고 활동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도겐이 산수를 옛 부처(古佛)의 현현이라고 본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32) 자연 역시 시간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미 결정된 체계가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개방된 체계라는 관점은 자연을 단지 물질이나 기계론적으로 보는 관점이나 자연이 완성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 그리고 자연을 닫힌 존재로 보는 이해로부터 자유로와지도록 도와준다. 이상의 관점을 통해 산과 강과 같은 자연이 죽어 있다고 보는 것은 인간중심적 삶의 속도와 생명관에 갇혀 있는 데에서 생긴 인식임을 알 수 있다. 생명과 활동성에 대한 기준을 인간중심적으로 국한시킬 때 산하대지는 죽은 존재가 되며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이지만 참다운 인식에 눈뜨게 된다면 살아 있는 자연을 보게 됨을 우리는 도겐의 직관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도겐의 자연이해를 통해 우리는 자연 역시 인간처럼 살아 활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바로 우리가 자연과 맺고 살아가야 할 관계성에 대한 전환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즉 자연과 인간 모두 살아 활동하는 존재라는 동질성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규명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연기사상에 기초한 무아 무상사상을 통해서, 그리고 불성을 무정에까지 확대해석한 도겐사상을 통해서, 삼라만상이 존재론적으로 깊은 상호연관성 속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기사상은 단순히 지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불교전통 안에서 동체대비사상(同體大悲思想)을 통해 드러난다.





3) 동체대비사상을 통해 본 불교적 지혜와 자비의 상관관계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상호 연관된 하나임을 말하는 연기의 실상은 나의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와 동체임을 자각케 한다. 이와 같은 자아의 확장을 통해 나의 생명이 삼라만상의 생명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은 곧 삼라만상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을 의미함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불교는 초기부터 자신을 이롭게 하면서도 타인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자비인 동체대비를 말해 온 것이다.33) 이러한 동체대비사상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동체자비와 관련된 유명한 구절로 『유마경(維摩經)』「문수사리문질품품(文殊師利問疾品」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일체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이 들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있는 한, 내 아픔도 역시 계속될 것이다”34)라고 말한 유마거사는 자기 몸과 중생의 몸이 한 몸임을 통찰한 것이다. 중생이 병이 다 나아야 나의 병도 낫는다는 유마거사의 표현은 중생의 아픔을 몸으로 함께 하는 동체대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자비행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무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정보(正報)로 자연을 의보(依報)로 보며, 양자 간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정불이(依正不二), 신토불이(身土不二)로 표현한다. 우리 몸이 자연의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의정불이 사상은 연기적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몇년 전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지율스님의 단식투쟁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스님은 “굴삭기가 천성산 꼭대기에서 산을 무너뜨릴 때 마치 산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 때 스님은 산에게 자신이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하며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단식했다. 이러한 지율스님의 단식투쟁은 “자연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라는,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의정불이(依正不二)라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동체대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병이 다 나아야 보살의 병도 낫는다는 동체대비사상은 불교적 지혜인 연기와 자비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삼라만상의 존재가 하나의 관계망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존재론에 입각한 동체대비사상은 생태위기의 해결을 위한 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이상에서 우리는 불교의 연기와 동체대비사상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구사상계가 지닌 이원론적 사고와 인간중심적 사유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생태위기의 근원적 문제를 보게 해 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상은 환경윤리로서 자리매김하기에 몇 가지 취약점을 지니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4) 환경윤리로서의 불교가 지닌 취약점





불교가 환경윤리로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한 취약점 중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사회적 실천 문제이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 실천의 조화를 지닌 논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회적 실천면에 있어 부족함을 드러내 온 것이 사실이다. 불교학자 스나이더(Snyder Gary)는 불교가 자아의 본성에 관한 놀라운 통찰을 지니고 있으나, 그러한 인식을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전통 불교 혹은 제도화된 불교는 개개인의 구원에 치중한 나머지 역사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 왔고 이런 현실도피적인 태도가 사회적 실천면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했다는 것이다.35) 이와 같이 불교가 개인 구제를 위한 수행과 깨달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소홀히 해왔다는 점은 불교가 환경윤리로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불자들이 지향하는 깨달음의 목표는 영적, 윤리적 실천 간에 통합적 관계를 이룸에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는 세상과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감에 있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은 윤리적 관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에고이즘과 갈망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적 상호연관성을 깊이 깨달아 삼라만상에 대한 자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개인의 성화를 사회적 실천으로 승화시킴에 있어 미비한 점이 드러나고 있음이 불교적 현실이다. 스나이더는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승가라는 공동체 개념을 승려들의 수행공동체의 범주를 넘어서 생태의 모든 구성원을 포함하는 생명공동체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승불교의 위대한 지적 업적을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으로 복원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불교의 전통이 상실한 ‘완전히 통합된 삶의 양식’을 되살리도록 불교 안에 변혁을 촉구하는 충언이라 할 수 있다.36)


둘째 선불교 전통에서 강조해온 깨달음은 선악의 판단마저도 초월하는 초도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깨달은 선사의 경우는 윤리적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윤리적 행위를 하게 될지 모르나 자칫 깨닫지 못한 범부의 입장에서 이를 곡해하여 윤리적 차원을 소홀히 할 위험성이 불교 안에 내재되어 있음도 사실이다.37) 이런 점에서 초도덕성이 강조되는 불교는 환경윤리로서 지침이 되기 어려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이해관심과 비인간의 이해관심이 상충할 때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동일한 가치선상에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필요들(vital needs)에 따른 명확한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외에도 무아를 말하는 불교는 윤리의 주체 역시 문제시된다. 불교는 모든 존재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적 논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설명해 왔다. 이러한 상호연관적 존재이해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어떠한 목적론적 가치의식도, 주체의식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전체주의적 관점을 지닌 불교는 각 개체가 전체 속에 함몰되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환경윤리와 관련지어 볼 때 과연 윤리적 책임을 질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될 수 밖에 없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이 잘 작동하도록 인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논리로는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생태위기를 풀어가려면 우리는 책임의식과 관련하여 도덕적 주체자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문제의 대상이 되어왔던 인간에게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 인간은 지배와 파괴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이를 인식할 능력과 함께 이를 치유해갈 능력 또한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성을 지녔다는 본래의 의미이다. 즉 우월성은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인간 안에 치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으로 남는 존재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안나 피터슨은 불교적 관점이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생태위기와 관련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환경철학이나 환경윤리는 행동을 결정짓는 예견할 수 없는 방식들이나 복잡성, 변화무쌍함에 열려져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화 속에서 발생될 수많은 위험한 가능성에 대해서 불교는 과연 대처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안나 피터슨은 의심한다.38) 이는 불교전통은 시대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해석학적 응답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환경윤리로서 불교가 지닌 취약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회적 실천문제, 초도덕성의 문제, 평등주의의 문제, 책임성과 관련된 윤리적 주체문제가 그것이다. 그럼 과연 불교가 지닌 이러한 한계점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필자는 그리스도교의 ‘청지기 윤리’에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고자 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인간 우월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책임을 이양받았다는, 책임성과 관련된 측면에서이다. 책임을 질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청지기 윤리를 말하고자 하나 여전히 그 안에 인간중심적인 측면이 잔재해 있다는 점에서 제약된 측면을 지니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청지기 윤리는 ‘제약된 약한 인간중심주의(Chasten Weak Anthropocentrism)’라 할 수 있다.39)





4. 약한 인간중심주의로서의 청지기 윤리





1) 경작하고 보존하는 자로서의 청지기





안나 피터슨은 인간의 우월성에 기초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청지기 윤리를 환경윤리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녀는 인간을 신의 창조 협력자로 본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와 지구를 신의 몸으로 모든 사물 안에 육화된 신으로 본 살리 맥패그(Sallie Mcfague)의 견해를 따른다. 특히 살리 맥패그는 인간을 신의 몸인 우리의 작은 일부가 잘 자라도록 창조를 돕는 신의 파트너 곧 창조의 협력자로 보았는데, 안나 피터슨은 이것이야말로 청지기로서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40) 우리는 여기서 종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청지기 윤리가 인간중심이라는 점을 하나의 약점으로 여겨왔던 것에 대해 다시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 청지기 모델은 인간중심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 관점 때문에 생태중심주의나 불교의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앞서 보았듯이 윤리적 관점에서는 도덕적 주체성을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터슨은 청지기 모델이 지닌 인간중심주의적 측면은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제약된 면이 있음을 인식하도록 촉구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청지기 모델은 ‘제약된 약한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생태위기의 원인을 제공해 왔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창조신학과 자연신학적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41) 그리스도교는 환경파괴의 책임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연구를 통해 위에서 말한 비판이 창조에 관한 성서 본문의 몰이해 또는 왜곡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어온 것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오는 ‘다스리고 정복하라’의 의미이다.


‘kabash’(정복하다)는 ‘radah(다스리다)’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힘으로 다른 이를 종속시키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구약성서 안에서 영토를 정복하고 파괴하는 군사적 정복과 같은  행위를 내포하는가 하면,  백성에 대한 왕의 권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42) 그러나 창세기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지배권은 인간이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43)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모상을 주었다는 성서적 표현은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왕정사상에서 그 역사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44) 거기서 왕은 신의 이미지로 간주되었으나 왕과 신의 유사성은 성격이나 외모에서라기 보다 그 기능에서 찾아야 한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한다.45) 다시 말해 성서에서 말하는 ‘신의 모상’은 본질적 측면에서 신과 왕의 유사성을 말한 것이라기보다 창조물에 대한 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기능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은 지구상에 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존재로서 인간의 역할 곧 인간의 소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다스리고 정복하라’의 의미가 자연 지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구절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아득한 옛날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자연을 인간의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 취급하도록 작용해 온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인간중심적 사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환경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생태문제와 관련한 도덕적 주체의 문제를 상기해볼 때 바로 그 도덕적 주체가 될 인간의 책임성이 중요하게 부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의 정체성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이어 2장 15절 ‘경작하고 보존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Āḏām)을 처음 창조하실 때 ‘땅(adamah)’에서 창조하셨다. 여기서의 땅은 경작지(abarable land)를 말한다. 이와 같이 땅에서 창조된 인간에게 인간 본연의 원천인 땅(adamah)을 경작하고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인간이 자연과 원천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땅(adamah)에서 창조된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은 땅을 경작하고 가꾸는 농부로서의 소명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소명을 시사해주는 창세기 2장의 ‘경작하고 보존하라’의 명령은 창세기 1장의 ‘다스림과 정복’의 명령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2장 15절을 통해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의미가 땅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지배권을 뜻하기보다 공생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땅을 경작하며 살아가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노동이 하느님의 축복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느님의 축복은 생명의 보존과 유지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청지기 윤리는 창세기 2장 15절을 그 전거점으로 삼고 경작하고 보존하는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봉사하려는 윤리라 할 수 있다. 이는 청지기 윤리란 창조세계에 대한 우위성보다는 책임성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윤리임을 의미한다. 신학자 프리만(D.N.Freeman)은 청지기로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지만, 그것이 자연을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착취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님을 지적한다.46)


청지기(steward)와 생태학(ecology) 간에는 집(house)이나 집안살림(household)을 뜻하는 그리이스어 오이코스(oikos)와 어원학적 연관성이 있다.47) 이는 청지기란 주인대신 집을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48) 칼빈이 말한 “모든 사람은 신의 관리자이다”이나, 소워(E. Sauer)가 말한 “지구의 운명과 치유는 인류의 생존과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지구적 창조의 치유를 위한 도구이다”라는 표현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49) 이와 같이 볼 때 인간은 ‘창조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창조의 안에 그리고 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세상이 인간에 앞서 존재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세상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인 하느님께 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이 창조에서 독특한 자리를 갖는데, 그것은 동산으로서 주어진 세계를 가꾸고 돌보는 책임성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 곧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피조물 공동체에 내재하는 갈등을 규율하면서 공생의 질서를 형성하도록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창조와 갖는 관계는 기본적으로 책임성의 문제이고 윤리의 관계인 것이다."50) 그러나 레오나르도 보프(1938- )에 따르면 이 책임성은 "세상에 대한 인간적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이전의 것이고 피조물적 존재로서 인간 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51) 다시 말해 책임성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때부터 부여받은 인간 본래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보프의 표현대로 책임성이 본래 창조때 부여된 것이라는 사실은 책임성을 부여받은 존재로서의 청지기야말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임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청지기로서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는 사실에서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2)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청지기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서술에 대해서 전통 그리스도교 교리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특권자임을 천명해 왔다. 즉 인간을 다른 피조물의 지배자로 보아왔던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설명한다. 야훼가 불어넣은 숨으로 인간이 산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이 숨은 바로 신의 생명 자체인 것이다.52) 이와 같이 인간은 신의 숨 곧 신의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신과 관계맺을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 형상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인간의 우위권에 대한 의미라기보다 인간이 하느님과 밀접하고도 역동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을 삼위일체 안의 역동적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해할 때 가능하다. 즉 존재론적 관점에서 삼위의 관계성으로 하느님의 존재성을 이해할 때 그 모상을 지닌 인간 역시 관계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독자로서의 존재성을 지닌 창조물이 아니라 하느님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비로소 그 정체성이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서에서 부여된 청지기라는 직분은 인간의 정체성이 자연과의 관계성 속에서 드러남을 시사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모상의 본래 의미가 인간이 특권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청지기로서의 정체성은 자연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은 책임성이 부가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또한 하느님의 모상의 의미는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관계적 존재성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 때부터 일해 오셨듯이, 그 대리자인 인간 역시 하느님 창조의 협력자로서 책임감을 지닌 존재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도 하느님처럼 자기와 다른 존재에 참여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한 몸을 이루고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세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드러낼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의 눈을 통해 다른 피조물을 보고 그들과 관계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신의 모상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이 하신 일을 대신할 권리를 지녔다고 할 때,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되, 그 통치와 다스림은 군림에 있지 않고 ‘섬김과 봉사’에 있음을 예수의 삶과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세상을 가꾸어 나가고 관리할 의무를 지닌 주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은 존재이지만, 이는 군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를 위한 위탁으로서의 특권이며,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세상을 잘 관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 존재가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청지기상인 것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에게 존귀와 영예의 관을 씌워 주셨지만 이는 지배자로서의 특권이 아니라 만물을 돌보라는 ‘위탁’(commitment)의 의미 곧 봉사자의 책임성으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서에 나온 ‘청지기’라는 인간상을 통해 환경윤리와 관련하여 현대생태위기의 제반문제를 풀어갈 주체로서의 존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이 표상은 성서적 표현에서 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