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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눈물 (5.24)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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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4일 국제 심포지움 (성프란치스코회관 성당)
아시아 생태위기와 생태영성으로의 회심
최 현 민
1. 아시아의 생태위기의 실상
칼 가스퍼 수사님은 아시아의 생태문제의 실상 및 원인, 그리고 구체적인 해법에 대해 우리에게 제시해주셨다. 생태 파괴의 현실 속에서 가장 타격을 받는 자가 바로 가난한 자들임을 필리핀의 사례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 벌목으로 인한 산림파괴에 의해 고지대에서 추방되어 주거지를 잃고 실직된 토착민 들, 벌목으로 인한 주기적 홍수로 집을 잃고 교량파괴로 인해 농산물 운반이 막히면서 생계유지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 교량복구비로 인해 의료 교육 복지의 정부예산 삭감으로 피해를 보는 이들, 광산 채굴로 인해 광산업체에서 나온 화학물질로 강이 오염되고 강의 어획량 감소됨으로써 피해를 보는 강가에 사는 이들, 수천 헥카르의 농장(바나나, 파인애플 등 상업작물)에 농약 항공 살포로 인해 대규모 농장과 그 주변에서 사는 농촌 빈민들이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이러한 사례들은 생태파괴가 가난한 이들과 얼마나 깊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생태파괴가 가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비단 필리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행되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생태파괴에서 가장 피해를 받는 사람들 또한 강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다. 팔당호 부근 유기농업 단지에서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4대강 사업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와해시킬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얼마전 준공식을 마친 새만금사업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민들이었다. 갯벌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에게 갯벌의 죽음은 곧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생태파괴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는 건 생태 그 자체이다. 속살이 파헤쳐진 강과 갯벌, 쓰레기더미로 오염되어가는 대지와 물 그리고 그 곳을 서식처로 삼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이다. 생태파괴로 인해 멸종의 위기에 놓인 생명체들,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그들만큼 가난한 존재가 있을까? 생태파괴로 인해 종이 사라질 위험에 직면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나? 멸종은 생명체의 한 종자가 지구에서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4대강 사업으로 멸종의 위기에 놓인 생명체들....... ①귀이빨대칭이, ②꾸구리, ③남생이, ④단양쑥부쟁이, ⑤묵납자루, ⑥미호종개, ⑦수달, ⑧얼룩새코미꾸리, ⑨재두루미, ⑩표범장지뱀, ⑪흰목물떼새, ⑫흰수마자가 그것이다.1)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이 생명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난한 존재이다. 가난한 존재의 의미를 사람만이 아니라 생태계 자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태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어렵지 않나 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없이는 생태문제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2. 생태파괴의 원인- 인간중심적 자연이해
오늘날 생태문제는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현대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정치 경제, 산업, 철학, 사회학,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이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어간 것은 그만큼 이것이 모든 분야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만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생태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들어왔고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방안과 실천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태문제가 우리 자신의 이익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문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경제와 밀착되어 있으며 결국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자연을 생산자본의 도구로 본다. 따라서 ‘도구화된 자연’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어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자본경제논리의 뿌리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결국 자본경제시장의 논리 속에서 인간복지를 위해 무작위로 자연을 파괴해오면서 그 결과 인간은 생태위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2) 바로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4대강사업 정책의 저변에는 자본경제의 논리와 인간중심주의적 사유가 짙게 깔려있다.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 자연은 아무렇게나 개발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생태파괴의 현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성찰을 해본다. 나는 동식물이나 자연을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만 생각하며 살아오진 않았는가? 나는 과연 다른 피조물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가? 지금 4대강이 파헤쳐져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신음하고 있건만, 나는 과연 이들의 신음 소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의 무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중심적 사유와 그 안에 젖어 살아온 우리들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3. 생태영성으로의 회심
1) 크리스찬으로서 자기 본래성 회복
앞서 우린 생태위기 원인이 인간중심주의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본래 그리스도교적 사유는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그러한 사유가 잔재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잔재의 요인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정체성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하지 않았음에 기인한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흙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모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흙의 존재(Āḏām) 곧 흙(adamah)으로부터 왔기에 흙은 인간존재의 근원이다.3) 굳이 생명의 근원이 4大(地水火風)으로 되어 있다는 불교나 힌두교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도 이미 인간 존재의 근원지가 땅이고 바다임을 말하고 있다.
에제키겔 예언자는 말한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 9) 강의 유기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바다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의 근원지인 바다가 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강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근원지이며 모태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바다나 강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닌 ‘생태계의 일원’이다. 생태파괴의 현실 앞에서 참으로 깊이 자각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생태계 일원이었던 인간은 언제부턴가 교만해져 자기 존재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한다. ‘인간은 흙의 존재이고 생태계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받은 존재라고.....’ 창세기에 나오는 ‘지배하고 다스려라’(창 1, 28)는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 관리인로서의 소명이다. 생태파괴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2) 청지기로서의 소명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태 파괴의 현실은 우리의 영성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치우쳐 있지 않았는가 하는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영성이 자연과의 관계가 배제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영성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린 ‘통합된 영성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차별하게 파괴되어가는 숲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낙동강의 눈물을 외면한 체 우린 현대영성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 자연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간과해버린 영성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영성과는 거리가 멀다. ‘생태위기의 현실’은 현대 영성의 방향을 자연과의 관계 회복에로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연과의 화해이다. 요즘 신문지상에 실리는 4대강 사업과 관련된 생태칼럼을 읽다보면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존재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이다. ‘강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해 나가는 영성,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가야 할 영성의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심층생태학자들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극복의 일환으로 제시한 생태중심적 사유는 우리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우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과 자연을 동일선상에서 평등하게 보려는 생태중심적 사유는 생태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 할 ‘주체문제’를 다시금 제기하게 한다.4) 자연을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 역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의 소명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다. 그럼 오늘날 청지기로서 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해준 청지기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기성세력으로부터 박해받는 사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나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 실현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로 확산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시선을 끈 가난한 존재들이 이 현실에서는 누구일까? 예수님이라면 오늘날과 같은 이 생태적 상황 속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실천하셨을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면 분명 4대강가에서 가르침을 펼치셨을 것이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하신 것처럼....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존재는 바로 무참히 파헤져지는 강과 그 곳에서 살다가 멸종되어가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인 그 분의 일을 모방하는 자들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허탈함과, 강의 아픔에, 죽어가는 생명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청지기로서 살도록 불리운 그리스도인의 몫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래성과 소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인식의 전환만으로는 사람이 쉽게 변화되지 않음을 체험한다. 생태문제에 대해 많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생태적으로 만들어주지 않음을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4. 구체적인 실천
이상에서 우리는 생태파괴의 원인이 인간중심적 사유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보아온 것에 대한 성찰, 곧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함부로 대하며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과 자연과의 화해가 필요함을 ... 또 그와 관련하여 크리스찬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해 보았다. 인간은 흙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창조주에게서 받은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성찰이 요청되고 있음도...
그러나 나는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생태위기에 대해 많이 들어왔고 그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심각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성찰과 자각이 있어도 ‘행동’이 쉽게 따라오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하곤 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실천을 머뭇거리게 만드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1) 인식과 행동의 괴리, 어디서 오는가?
나는 이 문제를 4대강 사업과 2008년에 일어났던 촛불시위를 비교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4개월이 채 못되어 100일동안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한국사회에 정치사회적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커다란 충격과 과제를 남겼다. 이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다.
무엇이 누가, 시민들을 광장으로 나가게 했는가?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집회가 어느 누구의 선동이나 이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발성의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조사에 따르면 촛불집회 공감자의 51.4%가 정부추진정책이 반서민적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38.2%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즉 그것은 바로 수입쇠고기가 자신의 먹거리, 가족의 식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은 많은 이들에게 ‘한치 건너의 일’로 여겨진다. 나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치건너의 일에 신경쓰고 마음쓰기에는 현대인은 너무 바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먹거리의 문제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관여했을 것이다.5)
또 우리의 발을 묶어두는 또 다른 요인은 “나 하나가 뭘?-헛수고는 안한다.”라는 심리이다.6) 우리는 생태문제는 내가 손대기에는 너무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엄청난 일을 건드리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깨기’나 ‘바다에 돌던지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알지만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그 문제의 크기에 짓눌려 지레 겁먹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함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곤 하지 않나? 지난 5월 10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생명평화미사에서 최덕기 주교님께서는 4대강 사업을 저지하려는 우리의 행동을 골리앗에 대항하는 소년 다윗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우리가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신다는 다윗의 믿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믿음이 아닐까?
또 그 외 우리에게 실천을 주저하게 만드는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굳이 내가 나서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는가” 라는 책임의 불분명성 때문에 방관자로서 대하려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길가다가 강도를 만나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사람을 보면 선뜻 나서서 구해주려 하기보다는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이 하겠지, 굳이 나서서 그 일에 관여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나는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늘어놓곤 한다.
이상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선뜩 행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요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결국 이것들 안에서 인간중심적 사유보다 더 깊은 ‘자기중심적 사유’가 있지 않나 싶다. 우리의 마음과 발목을 잡고 있는 나중심의 사유를 내려놓지 못할 때 이로부터 자유로와지지 못할 때 생태문제는 계속 ‘너의 문제’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로 이 문제를 끌어안으려면 행동해야 한다. 어떤 행동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가?
2) 진실 알기와 알리기
한국은 지금 사상 유례없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공재해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진실이 왜곡되고 언어가 그 본래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국민은 허위를 진실로 알고 생명을 잃어버린 빛바랜 언어, 사탕발린 거짓말을 참말인양 믿고 희망을 갖는다. 이렇듯 허위가 진실로, 죽음의 길이 생명의 길로, 절망이 희망의 탈을 쓰고 국민을 희롱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유린된 우리 말의 본래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실제로 ‘죽임’을 ‘살림’이라고 선전하는 그 거짓 앞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과연 진실이 무언지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4대강 사업으로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강바닥을 파헤치고 준설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고 있는가?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라 무수한 생명들과 그 연결 관계들이 다 끊어진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는가? 먼저 우리 자신부터 진실을 알고 그것을 주위에 알려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지율스님께서 낙동강을 순례하며 찍은 사진들을 통해 우리에게 진실을 전해 주시듯이....)
진실은 진실과 통한다. 그래서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종교인들의 진실이 만나 하나가 되었다! 4대강가에서 생명평화미사로, 단식기도로, 오체투지로.....각자가 믿는 교의의 차이를 넘어 불교는 불교 나름대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나름대로 각자 자신의 신앙 안에서 현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이 종교인들이 오늘날의 생태위기 문제를 풀어갈 책임있는 동반자로서 마음과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종교적 유대와 화합이 아닌가 싶다. 진실을 알리려는 종교인들의 몸짓에 더 많은 이들이 연대해 나가길 희망해본다. 6월2일에 있을 지자체 선거는 지금 우리에게 그 진실을 밝힐 기회로 주어져 있다!
3) 희망갖기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어떻게 이 상황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시점에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라고. 그런 절망어린 마음을 지니면서 다른 한편 누군가로부터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한다. 4대강 지킴이이신 최병성 목사님은 「강은 살아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풍같이 몰아치는 4대강 공사를 바라보며, 어떤 이들은 이제 늦은 것이 아닌지 절망합니다. 그러나 절망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국민이 4대강 사업의 실체를 아는 날, 4대강의 광기는 멈출 것입니다. 4대강의 생명들이 우리가 도와주기를 기다립니다.”7) “막연한 반대는 힘이 없지만, 진실을 알면 거짓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4대강 사업을 막을 수 있다고 그는 확언한다. 정부가 엄청난 속도로 강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 아마 크리스찬에게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돌보신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한 희망이다. 이제 다시금 ‘믿음과 희망’을 갖고 힘차게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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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14일자 한겨레 신문엔 한강 6공구에서 추가로 멸종위기에 놓인 참매와 돌상어가 소개되었다. 이들은 정부발표 환경영향 평가서에는 없는 종이었다.
2) 생태파괴의 원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는데 그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생태위기의 근원지에 ‘인간중심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 1907-1987)이다. 그는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문에서 현대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은 ‘유대교-그리스도교’적인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발표 후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가 과연 인간중심적 사유를 제공하는 근원적 뿌리였는지를 연구해 왔다. 화이트의 생태파괴 원인이론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그가 복잡한 역사적 실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고 본다. 즉 그들은 생태위기는 화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원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생태위기가 하나의 근원에서든 혹은 복합적 요인에서든 간에 생태파괴의 저변에는 인간중심적 사유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창세기 2장7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Āḏām)을 처음 창조하실 때 ‘땅(adamah)’에서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땅과 관련된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경작지(arable land)를 의미한다. 땅에서 창조된 인간에게 인간 본연의 원천인 땅(adamah)을 경작하고 보존하라는 명령이 부여된 것(창세기2:15)은 인간이 자연과 원천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즉 땅(adamah)에서 창조된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은 땅을 경작하고 가꾸며 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농부로서의 소명임을 말해주고 있다. (졸고, 「생태위기 극복의 동반자로서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종교교육학연구 제28권. 서울: 한국종교교육학회 2008. 12, pp.161-191. )
4) 내논문 179-180쪽
5)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것 역시 나의 먹거리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4대강 주변농지는 옥토로 농작물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채소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4대강 사업으로 전국 채소 재배면적의 13.5%에 해당되는 3만 헥타르의 농경지가 감소되었다.(2008 현재) 또한 팔당근처의 유기농 단지는 30여년 정착된 곳으로 35만 가구에 채소를 공급하며 세계 유기농 대회를 유치할 정도로 인정받은 옥토이다. 그 곳 친환경농업, 즉 유기농업을 통해 나오는 농작물은 우리의 먹거리들이다. 이 지역은 더 이상 유기농 농사를 계속 할 수 없다. 이렇듯 4대강사업은 우리의 먹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6) 피터 싱어,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산책자, 2009.
7) 최병성, 「강은 살아있다」, 황소걸음, 2010,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