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글도겐의 정법안장과 불성권 10.10.25
- 다음글도겐의 실유불성론 10.10.25
도겐의 입송당시 중국선종사상
페이지 정보

본문
1) (3) 도겐의 入宋 당시 中國禪宗사상
2)
3) ① 黙照禪
4)
慧能의 南宗禪은 신회가 북방에서 조사선 정통을 다투면서 六祖革命을 표방한 南宗의 形成時期를 거쳐 唐, 五代시대에 와서는 혜능의 제자인 南嶽懷讓과 靑原行思를 중심으로 南嶽系와 靑原系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兩系는 다시 五家禪門으로 가지를 뻗어나가 五家分燈을 형성했으니 이는 達摩가 일찍이 예견한 一花開五葉이다.
五家分燈이란 潙仰宗, 臨濟宗, 曹洞宗, 雲門宗, 法眼宗을 말한다. 각 宗風은 다르지만 中峰明本이 말하듯이 五家는 사람이 다섯이지 道가 다섯인 것은 아니다. 다섯 宗風의 차이는 주로 “禪師의 死活의 機用이 같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兩宋 時期에 와서도 여전히 五家分燈禪의 連續이었지만 그 宗風은 크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不立文字를 표방하던 종전과는 달리, 文字로부터 禪意를 추구하는 경향이 생기면서 文字禪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갔다. 文字禪은 古人의 語句를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禪의 意味를 추구해 온 禪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臨濟宗 楊岐派의 園悟克勤(1063-1138)이 편찬한 『碧巖錄』을 들 수 있다. 문자선은 宋代에 들어서면서 많은 어록과 燈錄이 편찬됨으로 인해 생겨났다. 그 본래 목적은 學人들이 보다 쉽게 公案의 禪意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지성적 사유와 의리(義理)의 해석에 의해 禪意를 證悟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같은 문자선의 폐단이 드러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선풍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宏智正覺(1091-1157)의 黙照禪과 大慧宗杲의 看話禪이다.
圓悟克勤의 제자인 大慧宗杲는 文字禪을 선종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고 보고, 소장하던 『碧巖錄』의 板刻을 태워 버리고, 문자선의 폐단을 없애고자 看話禪을 제창하고 나섰다. 宏智 역시 문자선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묵조선을 내세웠다. 宏智는 “道理를 만들지 말지어다. 言詞에 삐걱거리며 쓸데없는 棒과 어지러이 喝을 하는 것은 모두 業識이 流轉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문자선이 언어문자로써 禪을 해석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럼 굉지는 어떤 수증론을 펼쳤는가?
묵묵히 말을 잊고 밝고 밝게 앞에 나타난다.
확연하되 신령스러워서 본래빛이 스스로 비추며, 고요하되 응하니 大用이 앞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굉지는 본래부터 누구나 지닌 本覺이 그대로 드러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본각과 수행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가? 그에게 있어 좌선이 곧 本證의 顯現인 것이다. 이와 같이 本證의 顯現이 좌선이라 할 때 좌선은 깨침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좌선 자체가 깨침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묵조선법은 일체의 분별과 번뇌를 여읜 非思量의 좌선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좌선과 本證이 不二인 좌선, 이것이 묵조선이 말하는 非思量의 좌선인 것이다. 굉지는 묵조선법을 禪理를 깨닫는 유일한 경로로 삼아 학인들에게 이를 배워 익힐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굉지가 말한 수증관은 중생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깨친 자의 수증관이므로, 중생의 측면에서 볼 때 悟와 修의 問題는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더 이상 깨침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앉아있음’ 자체를 本證이라 보는 묵조선의 주장은 중생에게는 자칫 無事禪에 빠질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사선은 남종선의 수증관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남종선은 자성청정불을 근거로 하여 行住坐臥의 모든 행위를 깨침의 현현으로 본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서면서 즉심시.불을 왜곡되이 해석하여 중생 그대로를 부처로 보는 무사선이 등장한 것이다. 무사선이 성행함으로써 당대인들은 미혹한 중생의 행위 그대로를 깨침이라고 보는 병통에 빠졌다. 대혜는 당대의 묵조선에도 깨침을 공겁 이전의 일로 보고, 관조적 깨침을 중시하는 묵조선 내에 무사선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묵조선을 黙照邪禪이라 비판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묵조선의 수증관은 대혜가 비판한 것처럼 무사선으로 전락할 위험을 다분히 갖고 있었다. 비단 이는 묵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전의 즉심즉불사상에도 이미 존재하던 문제가 아니던가?
다시 말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사상은 본래부처라는 본래성과 중생이라는 현재 모습 간에 혼란을 야기시킬 요소를 품고 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부처와 중생 간의 경계가 소실될 위험성이다. 본래 혜능이 말한 즉심즉불의 의미는 분별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무분별지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즉 즉심즉불은 悟를 전제하고 있기에 중생 자체가 부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를 간과하여 중생 자체를 부처로 본다면 무사선같은 결과가 생긴다. 대혜는 당시 묵조선이 자신의 앉음새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 수행하는 경향은 바로 무사선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대혜는 당대의 무사선과 眞歇淸了(1088-1151)의 黙照禪法에 대한 비판하에 간화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5) ② 看話禪
6)
도겐이 入宋할 당시 宋은 孝宗을 계승한 寧宗(1194-1224)과 理宗(1224-1264)시대였다. 孝宗은 大慧의 法嗣인 佛照德光의 弟子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禪에 지대한 관심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孝宗은 즉위 전부터 대혜와 친분이 있어 그에게 禪要를 묻기도 하고, 즉위한 뒤에는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宋代에는 大慧를 중심으로 한 臨濟宗의 一派인 楊岐派가 국가권력과 밀접한 연관 속에 발전해 갔다. 도겐이 入宋할 당시 중국에 臨濟宗 楊岐派가 압도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음은 도겐의 저술에도 드러난다. 「辨道話」에 나오는 “大宋에 있을 때 臨濟宗만이 천하에 있었다”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대혜가 사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도 大慧의 看話禪이 성행한 데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大慧는 사대부들과 많은 서신왕래를 통해 그들을 가르쳤다. 그가 특별히 사대부들과 깊은 친분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대혜가 활동하던 때가 오랑캐침략, 서울함락, 왕실이사, 비상시 경제악화 등 송대에 가장 혼란한 국면에 이르게 된 시기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大慧는 국가권력의 집행자이자 사회 문화의 보호책임자인 사대부 계층의 생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사대부 계급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송대 문화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선 지도자들의 정신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사대부들을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그들의 질문에 편지로 답해 주면서 가르침을 펼쳤던 것이다. 대혜가 여러 사대부들에게 쓴 서신들을 모은 것이 그 유명한 바로 『서장』이다. 그 대부분은 그 전에 黙照禪의 지도를 받던 사대부들이 대혜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대혜는 거기서 묵조선의 수증관을 맹렬히 비난했다.
요즘 黙照邪禪輩들은 오직 無言과 無說을 極則으로 삼아 그것을 威音那畔의 일로 간주하고 空劫 이전의 일로 간주하며 깨침이 있음을 믿지 않아 깨침을 잘못된 것이요 第二義的인 것이며, 방편의 말이고 교화하는 言詞라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사람을 속이고 자기자신을 속이며, 남을 잘못되게 하고 스스로도 그릇치게 합니다.
깨침을 강조하는 대혜의 입장에서 볼 때 깨침을 무시하고 그저 앉아만 있는 좌선 자체를 깨침으로 보는 묵조선은 큰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대혜는 묵조선을 수행자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그저 침묵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판을 한 대혜는 어떤 좌선관을 말하고 있는가? 대혜가 曾侍郞에게 답한 세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그의 좌선관을 엿볼 수 있다.
나도 평소에 사람들에게 좌선하되 고요한 곳에서 공부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바로 병에 응하여 약을 준 것이지, 실지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지 않는다.”
대혜는 여기서 좌선을 권하긴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권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근기에 따른 공부법을 제시하다보니 좌선을 권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혜에게 있어 좌선행은 看話의 방법 중 근기가 낮은 사람이 행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와 같이 좌선을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 본 점은 좌선은 다만 깨침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혜의 좌선관은 묵조선에서 말하는 좌선의 의미와 명백히 다르다. 묵조선에서의 좌선 그 자체가 修證不二로서의 좌선이고 證 위에서의 수행인 本證妙修로서의 좌선이다. 證을 얻기 위해 수단으로 행하는 수행이 아니라, 證 위에서 행하는 수행이며 證과 修가 둘이 아닌 것이다. 대혜는 『大慧普說』卷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始覺과 本覺이 일치됨이 佛이다. 그것은 지금의 始覺으로 本覺과 일치함을 말한다. 종종 黙照의 무리는 無言黙然을 始覺이라고 하고 威音王那畔을 本覺이라고 한다. (그러나) 옛부터 이런 도리는 없다. 무엇이 始覺인가. 만일 이 모두가 覺이라면 어찌 미궁함이 있겠는가? 만일 미궁이 없다고 말한다면 석가, 노자의 明星이 나타났을 때 자기의 本命元辰이 본래 그 안에 있음을 홀연히 깨달았다고 했겠는가? 따라서 始覺으로 인해서 本覺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혜가 不覺의 狀態에서 覺의 狀態로 나아가는 始覺的 立場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본각〕은 사람들마다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다”라고 하여 모든 사람이 본각을 구족하고 있지만,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不覺에서 覺에로 나아가는 시각문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는 모든 이가 본각의 도리를 갖추고는 있지만, 묵조선처럼 깨침의 경험없이 본각에 안주하게 되면 本覺的인 深信에서 일탈된 自然外道로 빠질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혜가 看話禪을 제창한 이유이다. 간화선은 공안을 사용하는 점에서는 文字禪과 같으나, 공안 전체를 화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公案 중에서 答語를 화두로 삼아 참구하는 참선방법이므로 문자선과는 차이가 있다. 대혜는 문자선의 화두를 死句라 하고, 간화선의 화두를 活句라고 주장한다. 활구는 의미가 없으므로 학인을 원래의 화제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며 다시 질문과 대답 간에 논리상의 관련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유방식을 바꾸고 자신으로 돌아오게 해야 비로소 학인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혜는 학인에게 疑情을 일으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그것이 활구참구를 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즈음 도를 닦는 수행자들은 모두 스스로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의심이 커야 깨침도 크다.
대혜는 疑團의 形成을 위해 無字公案을 강조했다. 그것은 무자공안을 듬으로써 생겨난 疑情이 의식집중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의식을 사려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집중시켜 마음을 어느 곳으로도 달아날 수 없도록 하라. 마치 늙은 쥐가 소의 뿔 가운데로 들어가서 막다른 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처럼. 그러고도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곧 狗子無佛性의 화두를 들어야 한다. 佛祖의 말이나 諸方의 老宿들의 말이 비록 천차만별이라도 만약 無字話頭를 알게 되면 그 모두를 단번에 알 수 있어 달리 묻지 않아도 된다.
간화선은 大疑團 뿐 아니라 大信根, 大憤志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간화선 또한 祖信(본래부처)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대혜선도 묵조선과 마찬가지로 本證을 근저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묵조선에서는 본래 自性淸淨佛이기 때문에 모든 行住坐臥의 행위를 본래부터 깨침의 顯現이라고 말하는데 반해, 간화선에서는 이치적으로는 본래 自性淸淨佛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혹하기 때문에 그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깨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혜가 本證을 근거로 하면서도 始覺이 필요함을 부각시킨 것은 理로서는 “사람마다 모두 본래 구족되어 있다”고 하지만, 중생의 입장에서는 始覺에서의 修證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대혜는 좌선보다 공안을, 본각에 대한 믿음보다 의심(대의단)을, 본증묘수로서의 수행보다 悟를 강조함으로써 당시 묵조선이 지닌 폐단의 위험성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간화선과 묵조선은 양자 모두 自性淸淨佛을 전제로 하면서도 수행관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자의 차이는 둘다 祖信을 근거로 하면서도 修와 證의 관계를 달리 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묵조선의 경우는 본각 자체가 닦음으로 좌선을 불성의 顯現으로 본데 반해, 간화선에서는 묵조선이 悟를 간과했다고 보고 무자공안을 중심으로 한 始覺的 수증관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같이 묵조선과 간화선이 공존하면서도 간화선이 보다 더 성행했던 시기에 도겐은 수증의 문제를 품고 입송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