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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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 연구

도겐의_불성이해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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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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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元의 佛性理解 序說


        -悉有佛性을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belief’와 ‘faith’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여기서는 faith는 신앙으로, belief는 믿음으로 일단 번역하여 쓰기로 한다. 스미스는 믿음을 각 종교의 축적된 전통, 교리 등으로 보고, 신앙을 인간이 초월을 지향하는 고유한 자질(faith as human quality)이라고 말하면서 세계 종교 전통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증거된 초월적 신앙을 밝히고 있다. 스미스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은 우리가 어떤 종교집단에 속한다는 의미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집단에 속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가 속한 종교의 축적된 전통에서 나온 초월의 세계를 신앙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의 존재를 초월에로 열어두는 것, 즉 초월에로의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세계 종교 전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서구 문화 특히 근대 서구 문화가 이 고유한 신앙의 자질을 잃어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 서구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일방적 관심이 신앙을 교리적, 명제적, 사변적 믿음으로 변질시켜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로 종교적 믿음의 정당성 문제를 다루어 왔던 근 현대 종교철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의 측면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근대 서구 문화에 국한된 종교현상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종교전통이 겪어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본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가마꾸라(鎌倉)시대를 살았던 永平道元(1200-125


3)의 종교적 세계이다. 필자가 도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스미스가 지적했던 믿음과 신앙의 문제를 그의 문제의식 안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겐은 당시 일본의 불교계가 고착화된 ‘믿음체계’-그 대표적인 것이 天台本覺思想이다-에 빠져 신앙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그가 入宋하였을 당시 중국의 불교계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도겐은 이를 大疑團으로 삼고 상실된 신앙의 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전 일생을 바친 禪師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이러한 도겐의 신앙세계를 조금이나마 소개하기 위해서 택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正法眼藏』 중 「佛性」권이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으로 「佛性」권 전체를 본다는 것은 무리이기에 본 논문에서는 「佛性」권 중에서 첫 부분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중심으로 그의 신앙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1.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


「佛性」권은 道元이 南宋으로부터 귀국한 후 京都 부근의 興聖寺에 있을 때(1241, 42세) 示衆한 것으로 도겐의 『正法眼藏』 중 「現成公案」과 함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佛性’이라는 주제는 불교사 안에서 특히 중국불교사 안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었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涅槃經』의 ‘一切衆生悉有佛性’에 기반을 두고 발전되어 왔다. 도겐의『正法眼藏』「佛性」도 ‘一切衆生悉有佛性’으로부터 시작된다. 보통 이것은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혹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로 해석해 왔다.


이같은 전통적 견해에서는 불성은 佛이 될 수 있는 힘, 佛이 될 수 있는 능력,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佛性의 佛은 覺과 같은 의미로 보아 “깨닫는 힘이 중생 안에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일체중생은 佛의 활동 혹은 깨달음의 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佛이 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의 해석에서 불성과 如來藏 사상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如來藏의 ‘藏’에 해당하는 인도의 原語는 胎 즉 ‘모친의 배 속’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如來藏은 중생이 佛을 안에 품고 있는 것과 같이, 佛이 될 수 있는 가능성, 佛이 될 수 있는 능력, 佛이 될 수 있는 원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중생에게 如來藏이 있다”거나 “一切衆生이 如來藏이다”라는 如來藏사상은 앞서 살펴본 佛이 될 가능성으로서의 불성해석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종래의 해석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一切衆生은 悉有이며 佛性이다’라고 해석한다. 도겐은 불성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해석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가?


 道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해석함에 있어 먼저 중국선종의 六祖인 慧能이 南嶽懷讓(677-744)에게 물었던 ‘是什麽物恁麽來’을 언급한다.


“世尊이 말한 一切衆生悉有佛性 그 宗旨는 무엇인가? 그것은 是什麽物恁麽來이라 할 수 있는 轉法輪이다.”


 도겐은 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是什麽物恁麽來’라는 禪問答을 서두에 꺼낸 것일까? 『涅槃經』의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이라는 祖語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是什麽物恁麽來는 스승이 제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인가? 어떻게 왔는가?”라고 묻는 일종의 화두라 할 수 있다. 즉 是什麽物恁麽來는 깨달은 六祖가 아직 깨닫지 못한 衆生인 南嶽에게 던진 화두로, 南嶽은 혜능으로부터 이 화두를 받고 8년간 이것과 씨름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는 “참된 너는 누구냐? 살아서 내게 온 너는 누구냐?”를 묻는 것으로써 바로 인생의 決着을 내리는 결정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是什麽物恁麽來가 이런 의미를 지녔다면 도겐이 이를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는 서두에 둔 것은 불성에 관해 무언가 새로운 해석을 해 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 도겐이 ‘一切衆生悉有佛性’을 해석하면서 六祖와 南嶽의 문답인 是什麽物恁麽來를 들고 나온 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로 보는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라 是什麽物恁麽來와 같은 맥락에서 불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도겐에게 있어 悉有佛性의 의미는 전통적 불성해석과 같은 佛이 될 가능성으로 내재된 그 무엇이 아니라 是什麽物恁麽來와 같이 실존적인 물음으로 우리에게 던져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기존의 불성이해를 둘러싼 종교철학적인 해석이나 교의적 해석을 뒤로 하고, 불성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직시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겐이 이해하기에 이 문제는 고타마 붓다이래 불교사에 나오는 모든 祖師들이 지녔던 실존적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를 是什麽物恁麽來의 ‘祖語’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는 도겐의 해석에서 읽어낼 수 있다. 佛語와 祖語를 같은 線上에서 이해한다는 사실은 佛法이 佛에서 佛에로, 佛에서 祖師에게로 전해졌다는 佛法의 正傳에 대한 도겐의 믿음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와같이 그의 불성이해는 佛法의 正傳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 안에서 佛이 法輪을 돌리는 ‘轉法輪’을 분명히 들은 것이다.


2. 悉有의 문제


(1) 실체론 비판과 悉有의 의미


도겐의 불성을 이해하는데 悉有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도겐이 ‘佛性은 반드시 悉有’이며 悉有는 佛性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悉有의 의미란 무엇인가?


“佛과 性은 達彼達此이다. 佛性은 반드시 悉有이다. 왜냐하면 悉有가 佛性이기 때문이다. 悉有는 百雜碎에 있지 않으며 一條鐵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주먹을 쥐는 것같은 拈拳頭이기 때문이다.”            『正法眼藏』 「佛性」


도겐은 悉有를 “무엇무엇에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도겐은 悉有가 百雜碎, 一條鐵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百雜碎는 일체의 존재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一條鐵은 존재의 근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悉有는 百雜碎나 一條鐵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悉有인 佛性은 결코 百雜碎같은 실체적 존재나 一條鐵같은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겐은 계속해서 悉有를 부정적 표현을 통해 설명한다.

 

“지금 佛性이 悉有라고 하는 有는 有無의 有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悉有는 佛語이며 佛舌이며 佛祖眼晴이며 衲僧鼻孔이다. 悉有는 始有나 本有, 妙有, 緣有, 妄有에 드러나지 않으며, 心境性相과도 관계없다.                『正法眼藏』 「佛性」


즉 悉有는 有無의 有나, 妙有 그리고 수행이 배제된 本有나 始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悉有는 불교사 내에서 드러난 개념적 정의들 즉 始有, 本有, 妙有, 緣有, 妄有를 초월한 세계라는 것이다. 또한 悉有는 心境性相과도 상관없고 業增上力이나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도겐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悉有가 불교의 어떤 논리로서도, 인간의 分別智에 의해서도 결코 표상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도겐은 불교사 안에서 해석해온 것같이 불성을 理로서 표상된 어떤 언어적 표현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도겐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緣起나 業力으로서도 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도겐은 ‘悉有는 法爾로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불교의 근저에 면면히 흘러온 法爾-존재 그 자체의 상태-라는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즉 우리가 어떠한 관념에 집착하는 그 자리에서 悉有는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가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비로소 우리는 悉有로서의 불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悉有를 拈拳頭에 비유하면서, 누군가가 주먹을 불끈 쥔 것과 같은 약동하는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진정한 悉有로서의 佛性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이 불교의 근본교리나 중심개념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본 것은 우리가 그 개념들에 집착하고 고착화됨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해방될 때 비로서 불성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것은 불성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방식에 관련된 실존적 사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겐은 이를 구체적인 표현을 빌려서 ‘衲僧의 코구멍’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佛性은 우리자신의 주체적인 활동을 통해 顯現하는 나의 코구멍이고 나의 面目이며 생명활동의 本源인 것이다. 이와같이 불성이 살아있는 주체의 역동적 활동 -臨濟는 이를 活潑潑地라고 한다-을 통해서 드러남을 역설한 것이다.


(2) 佛性內在論 비판


도겐은 불성에 대한 실체론적 해석을 부정할 뿐 아니라, 불성이 실체적인 중생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佛性內在論도 비판한다. 佛性內在論은 山內舜雄이 命名한 것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佛性이 하나의 종자로서 있어 이것이 씨가 자라나듯이 성장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단지 가려져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것으로 여기서는 번뇌(무명)를 제거하면, 그대로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는 佛性을 가능성으로, 다른 하나는 이미 완성된 상태이나 번뇌로 가리워 있을 뿐이라고 보는 차이는 있으나, 둘다 불성을 內在하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일치하므로 佛性內在論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불성이해를 비판한다. 


그럼 우선 前者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마치 종자가 싹이 트고 자라서 枝葉花果가 되듯이 불성을 佛이 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漸修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은 佛이 아니고 수행을 닦아서 점차적으로 佛이 된다는 점진적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종자가 자라서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와 잎이 생기듯이 이같은 과정으로 우리가 佛이 된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도겐은 뿌리, 가지, 잎을 하나의 성장과정으로 보지 않고 이미 그 자체를 각각 佛性의 顯現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면은 뒤에서 좀더 언급하기도 하겠다. 後者의 경우는 心性常住說과 관련해서 깊이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겐의 사상과 이를 구별짓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心性常住論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正法眼藏』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도겐은 『正法眼藏』「卽心是佛」에서 南陽慧忠( -775)의 예를 들어 心性常住論을 비판하고 있다. 南陽慧忠은 당시 중국선사들의 가르침 중에 先尼外道의 가르침과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비판하는데 그것은 바로 心意識에 관한 교리 안에 我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도겐은 이러한 慧忠의 비판을 예로 들면서 我的인 측면이 있는 心性常住說이야말로 禪宗의 최대의 오해라고 보고 이 문제를 『正法眼藏』「卽心是佛」, 「說心說性」에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普勸坐禪儀」에서도 “心意識의 운전을 그만 두고”라고 하여 心意識을 비판하고 있다. 南陽慧忠은 ‘무엇이 古佛心이냐’는 물음에 대해 ‘牆壁瓦礫’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牆壁瓦礫이 古佛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慧忠의 답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佛을 參究한다는 것은 인간의 生의 진실을 묻는 것이며 무엇보다 존재의 근본을 묻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결국 여기서 마음을 실체화하고 신비화해서 이를 崇敬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慧忠이 牆壁瓦礫이라고 답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古佛心이 바로 牆壁瓦礫”이라는 것은 古佛心은 인간의 마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같이 도겐은 慧忠의 말을 인용하여 불교의 唯心主義的 해석의 경향 즉 卽心是佛을 心性常住論的으로 해석함을 비판하면서 卽心是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卽心是佛을 參究해도 좋고 心卽佛是를 參究해도 좋고, 佛卽是心, 卽佛心卽을 參究해도 좋다.”                      『正法眼藏』 「卽心是佛」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겐이 卽心是佛의 卽, 心, 是, 佛 각각을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봄을 의미한다. 卽을 參究하건, 心를 參究하건, 是를 參究하건, 佛을 參究하건 그 모든 參究가 바로 佛性의 顯現이기에 卽心是佛을 參究해도 좋고, 心卽佛是를 參究해도 좋고, 佛卽是心, 卽佛心卽을 參究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卽心是佛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釋尊이래 諸佛에게 正傳되어오고 지켜온 佛道의 생명, 진리의 現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의 現成 곧 佛性의 現成은 諸佛에 의해 正傳되어온 佛法인 發心, 修行, 菩提, 涅槃의 行持道環을 통해서만 그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는 자는 그 참된 의미를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卽心是佛을 수행하고 깨닫는 것 안에서 不生不滅을 깨닫는 것이다. 수행하고 깨닫는 것이외의 것은 卽心是佛이 아니다”(『正法眼藏』「卽心是佛」)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發心, 修行, 菩提, 涅槃 각각을 단계로 보아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도겐은 “종자와 꽃과 과실은 모두 각각 赤心임을 參究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赤心은 존재의 現成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종자와 꽃, 과실은 각각 존재의 現成 그 자체이지 아직 미완성인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겐은 “根莖과 枝葉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根莖枝葉이 각각 그 존재의 現成 자체라고 할 때 자칫 잘못하면 분별심있는 상태를 그대로 불성이라고 보는 ‘佛性顯在論’으로 해석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佛性顯在論이 지닌 위험성은 수행의 필요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도겐의 불성이해에서 수행을 빼어버리면 불성 그 자체의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즉 도겐이 말하려는 ‘불성’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분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그 존재성 즉 佛로서의 존재의 現成이지, 분별의식을 지닌 그 자체를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점을 구별치 않으면 도겐의 종교적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와같이 도겐의 종교적 세계에서 중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수행론’이다. 心性常住論에서는 이미 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보므로 수행이 필요치 않게 된다. 있는 그대로가 이미 佛性이며 本來佛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겐이 의심을 품었던 天台 本覺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고자 하는 불성은 마음 뿐만이 아니라 몸도 함께 닦는 ‘身心學道’의 수행을 빼고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3) 佛性의 顯現


앞서 우리는 佛性顯在論이 지닌 위험성은 수행론의 배제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 佛性顯在論과 구별되는 도겐의 불성이해는 바로 도겐이 수행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겐은 불성이 顯現하는 때를 正當恁麽時라고 표현한다.  (“正當恁麽時는 衆生의 內外 곧 佛性의 悉有이다.”『正法眼藏』「佛性」) 여기서 우리는 正當恁麽時의 ‘恁麽’의 의미를 좀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도겐은 『正法眼藏』「恁麽」권에서 “恁麽는 우주보다 커서 우리가 어떤 수를 써도 알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역사 안에서 恁麽를 규정하고 측량하려고 애써왔고 지금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恁麽를 측량하는 일이 아니라 다만 그 恁麽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임을 도겐은 역설하고 있다. 恁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가? 도겐에 의하면 그것은 身心脫落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身心脫落은 자기의 身心을 脫落시켜 모든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佛性이 顯現하는 正當恁麽時는 身心脫落의 때를 의미하며 바로 그러한 신심탈락은 도겐이 天童如淨(1162-1227)으로부터 배운 지관타좌의 때이며 佛이 現成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불성이 顯現함은 身心脫落의 자리에서 드러나며 身心脫落은 바로 只管打坐의 자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佛性의 顯現과 只管打坐는 불가분의 관계라 볼 수 있다. 도겐은 「辨道話」에서 자신이 말하는 좌선은 修證一等이며 證 위에서의 修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只管打坐는 佛性인 證 위에서의 좌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와같이 도겐이 말하는 불성의 顯現에 대한 자각은 佛性顯在論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수행론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身心脫落의 상태에서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도겐이 깨달은 身心脫落에서 드러나는 佛性이며 只管打坐를 통해 顯現하는 佛性인 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참된 신앙이란 고착화된 믿음체계나 교리로부터 벗어나 초월의 세계에 우리 존재를 열어두는데 있다고 했다. 도겐은 우리가 그러한 신앙의 세계에 눈뜨기 위해서 벗겨내야 할 작업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불교적 교리나 관념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알게 모르게 개념화나 관념적 구축 안으로 숨어버리거나, 言說의 物象化를 통해 존재의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등, 존재의 초월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종교를 云云하고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에게 도겐은 『正法眼藏』「佛性」을 통해서 자칫 빠지기 쉬운 종교의 物象化로부터 자유로와지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겐은 「불성」을 통해 관념의 집착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존재론적 실체론과 내재론적 불성이해로부터도 벗어나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도겐은 불성이 결코 힌두교에서 말한 梵我一如와 같은 실체론적 존재와 그 존재적 근거와의 관계에서 드러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靈知, 眞我, 覺元, 本性 本體라고 불리는 신비화되고 절대시된 실재들 속에 안주할 위험성을 지닌 우리들의 의식에 자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우리가 불성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서 불성이 마치 우리 안에 어떤 실재로 숨어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불성이 佛이 될 가능성으로 종자와 같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것으로 불성을 이해하는 불성내재론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도겐은 이 모든 것들-실체론적 해석이나 내재론적 불성이해-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와질 때 비로소 불성의 참된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길, 그것은 바로 身心脫落의 길이요, 只管打坐의 길인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의 불성이해는 그의 수행관을 떠나서는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수행관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수행관은 곧 깨달음(證)과 不二인 修證不二의 관계에 있는 修證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도겐의 修證觀이 그의 「佛性」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다음 논문을 통해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