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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의 구도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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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2. 도겐의 求道旅程
1) (1) 도겐의 出家行
建久3年(1192) 미나모또 요리또모(源賴朝)가 鎌倉에 막부를 염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도겐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200年 1月2日 최상급의 귀족이었던 부친 久我通親과 모친 松殿基房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1202년 3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5년 뒤인 1207년에 어머니마저 잃는 어려움을 겪었다. 케이잔죠오낀(瑩山紹瑾)은 『傳光錄』에서 “도겐이 8세때 모친상을 당해 애탄함이 깊어졌으며 高尾寺에서 향연이 올라감을 보고 생멸무상을 깨닫고 그로부터 發心하게 되었다”라고 서술하어 있다. 이와 같이 부모를 잃은 도겐에 체험한 무상함은 후에 그가 출가를 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느낀 그의 무상관은 삼라만상의 변화나 소멸에서 느끼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것일지 모르나, 그 후에 그것은 그의 사상적 근거가 되어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도겐의 무상체험이 그의 출가동기가 되었다고 기술한 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도겐의 傳記集인 『建撕記』에 보면 “도겐은 無常에 의해 道心을 일으키고 ...諸方을 방문하여 道를 배우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한 제자 懷奘이 도겐에게 들은 바를 기록한 『隨聞記』5장에서도 “나는 無常에 의해 道心을 발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무상관이 도겐에게 출가의 동기뿐 아니라 菩提心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無常과 菩提心의 關係는 『學道用心集』에 잘 묘사되어 있다.
龍樹祖師는 말하기를 世間의 生滅無常을 觀하는 마음이 菩提心이다. 본래 無常을 觀할 때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고 名利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렇듯이 도겐에게 있어 보리심은 무상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도겐의 무상관은 단순히 보리심을 일으키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수증관을 이해하는데 열쇄가 된다. 무상과 修證의 문제는 앞으로 ‘무상불성’ 부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도겐은 어떻게 출가하게 되었을까?
도겐이 구도의 길을 나선 것은 建曆 2年(1222) 13세 때의 일이다. 그는 노모를 떠나 히에이산에 올라 천태승려인 良顯을 참하여 출가를 허락받았다. 히에이산은 당시 일본불교의 본산지로 天台, 密敎, 戒律, 禪의 四宗이 합쳐져서 總合佛敎로서 발전한 상태였다. 도겐이 거기에 머물 때에는 天台와 密敎가 융합된 태밀사상이 성행했다.
도겐은 히에이산에서 천태교학을 배우고 14세때인 建曆3年(1213) 延曆寺 戒壇에서 大乘律에 의한 보살계를 받아서 天台僧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큰 기대와 구도심을 품고 히에이산에 들어온 그는 1년동안 大藏經을 2회 通讀하고 불교철학, 밀교 등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러한 학문세계는 도겐이 지녔던 의문을 풀기에 충분치 못했다.
당시 천태종은 本覺法門 곧 천태본각사상이 성행했는데 그것은 일본천태종이 현저한 밀교화가 진행된 중에 토착적인 習俗과의 유착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불교적 이데올로기였다. 우리는『建撕記』을 통해 도겐이 천태본각사상과 관련한 修證 問題에 깊은 의문을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本來本法性 天然自性身이라면....如來는 본래 法身 法性이라면 諸佛은 왜 다시 발심하여 菩提의 도를 닦는가?라는 본각과 수행의 상관관계가 그것이다. 그는 13세부터 18세까지 6년간 이같은 의문을 지니면서 실존적 갈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도겐은 히에이산에서 자신이 품은 의문을 해결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하자 결국 거기를 떠나게 되었다.
『建撕記』에 의하면 도겐은 建保4年(1216)에 이러한 의문을 품고 學德이 높았던 三井 園城寺의 주지인 공윤승정公胤僧正(1141―1225)를 찾아갔다고 전한다. 거기서 그는 공윤에게 “佛性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왜 三世諸佛은 세속을 떠나서 菩提를 추구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公胤은 도겐에게 입송해서 法을 구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겐은 곧바로 중국으로 가지 않고 建保5年(1217) 8월 먼저 京都 東山 建仁寺로 갔다. 建仁寺는 에이사이가 연 사원이었다. 도겐은 거기서 에이사이가 전한 臨濟禪을 배울 수 있었다. 도겐이 에이사이를 직접 親見했는지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鏡島元隆의 연구에 의하면 에이사이는 建保3年(1215) 7월에 입적했고, 도겐은 建保5年(1217)에 에이사이의 제자인 묘오젠(明全, 1184-1225) 밑으로 들어가 건인사(建仁寺)에서 선수행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도겐은 1223년 明全의 필사적 결의에 의해 그와 함께 宋으로 향하는 여정길에 올랐다. 묘오젠은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주변에서 출발을 연기하도록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한 채 宋으로 향했고 결국 송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2) (2) 典座와의 만남
3)
도겐은 오랜 여행끝에 묘오젠(明全)과 함께 嘉定16年(1223) 2월22일 宋의 명주(明州)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그에게 입국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도겐이 지닌 계첩(戒牒)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히에이산에서 받은 계(戒)는 상좌계가 아니라 대승계였다. 이것은 사이쵸오에 의해 일본에 세워진 것이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출가하면 우선 우바새계(五戒)를 받고 그 후에 사미계(十戒)를 받은 후 비구계 즉 구족계(비구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받았다. 즉 중국에서는 구족계를 거치지 않고는 직접 보살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이쵸오에 의해 원돈계단(圓頓戒亶)을 히에이산에 세움으로써 상좌계없이 보살계를 받아왔던 것이다. 도겐도 히에이잔에서 계를 받았으므로 그가 받은 계 역시 보살계였다. 이는 일본에만 통용되었지 중국은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만든 계첩을 갖고 입송한 도겐은 중국 당국의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겐은 14세때 보살계를 받았으므로 入宋시 이미 法臘 11年이었지만 중국총림에서는 구족계를 받은 때부터 법랍(法臘)을 세었기 때문에 그의 보살계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명주(明州)에 도착한 후 7월까지 3개월간 배 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도겐에게 깨침의 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거기서 무명의 전좌(典座)를 만났다. 물론 도겐의 깨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사는 如淨이었지만 그 이외에도 도겐에게 영향을 끼친 선승들이 있었다. 중국문헌에서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는 무명의 선승들이 있었는데, 도겐이 입송 직후 배에 머물던 당시 만난 전좌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도겐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선승들과의 만남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선풍과 인격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도겐이 머물던 배에서 만난 전좌승은 명주에서 19킬로미터 떨어진 아육왕산(阿育王山) 廣利寺에서 온 61세의 전좌였다. 그는 당시 이미 여러 총림을 편력하면서 40년간 수행생활을 해온 선승이었다. 도겐을 만났을 당시에도 그는 하안거를 끝내고 자신이 머물던 사찰의 전좌일을 맡게 된 상태였으므로 버섯(椎茸)을 구하러 도겐이 머물던 배에 왔던 것이다. 당시에 그가 도겐과 나눈 대화는 이러하다.
山僧; 育王山은 여기서 멉니까?
典座; 34-5里 (20km)쯤 되는 곳이지요.
山僧; 언제쯤 돌아가십니까?
典座; 椎茸을 사면 곧 돌아갈겁니다. …
山僧; 育王山같이 큰 절에는 典座스님 혼자도 아닐텐데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典座; 내가 맡은 典座職이 바로 나의 수행이지요. 어떻게 자신의 수행을 다른 사 람에게 맡기겠습니까? …
山僧; 그래도 이제 노년이 되셨는데 坐禪弁道나 公案參究를 하시지 않고 왜 이런 作務를 하십니까?
典座; 당신은 아직 辨道가 무언지, 文字가 무언지 모르시는구려.
입송 당시 젊었던 도겐은 아직 지해(知解)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변도(弁道)의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러한 자신을 꿰뚫어본 듯한 전좌의 말에 도겐은 놀랐다. 전좌는 도겐에게 아직 이를 깨닫지 못했다면, 후일 아육왕산(阿育王山)을 방문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 곳을 떠나갔다. 2개월 후 도겐은 천동산(天童山)에 머물면서 그 노전좌가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도겐은 감격하여 전에 배 안에서 나누었던 문자변도(文字弁道)의 문답을 이어서 했다. 그 때 나눈 대화도 『典座敎訓』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典座; 문자를 배우고자 하면 문자가 무언지 알아야 하고, 弁道를 배우고자 하는 자 는 弁道가 뭔지 이해할 필요가 있소.
山僧; 무엇이 문자입니까?
典座; 1, 2, 3, 4, 5.
山僧; 그럼 무엇이 弁道입니까?
典座; 徧界不曾藏―본래 徧界(우주전체)는 감추인 것이 없으며 있는 그대로가 진리 그 자체―이라오.
도겐은 ‘무엇이 문자인지’를 전좌에게 물었고 이에 전좌는 1, 2, 3, 4, 5라고 말했다. 즉 문자는 1, 2, 3, 4, 5와 같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다시 弁道에 대해 물었다. 이 때 전좌는 ‘변계불증장(徧界不曾藏)’이라 답해주었다. 곧 제법실상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있다는 의미이다. 전좌승은 자신의 작무를 변도하는 것이 곧 편계불증장의 진리를 사는 것임을 도겐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작무를 수행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존 자체를 보여준 전좌를 통해 도겐은 편계불증장의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도겐은 노전좌를 통해 깨닫게 된 편계불증장의 진리를 『정법안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편계불증장에 대한 자각이 도겐의 깨침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아육왕산(阿育王山)의 노전좌(老典座)와의 만남뿐 아니라 도겐은 입송 유학시기동안 이와 유사한 무명의 선사들을 만났다. 그들 역시 도겐의 깨침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도겐은 귀국 후 宇治 흥성사(興聖寺)에 머물 당시 『전좌교훈(典座敎訓)』6권을 저술했는데, 거기에 그 때 만난 무명선사들과의 체험을 싣고 있다. 흥성사 교단이 본격적인 수행도장으로서 출발한 시기에 『전좌교훈』을 저술했다는 것은 도겐이 전좌선사들의 가르침을 얼마만큼 중시했음을 시사해 준다.
4) (3) 천동여정(天童 如淨)과의 만남
5) ① 여정을 만나기 전의 유산시기(遊山時期)
도겐은 嘉定16年(1223) 5월4일 배 안에서 아육왕산 전좌를 만난 뒤 그 해 7월이 되어서야 天童山 景德寺에 갈 수 있었다. 당시 그 곳의 주지는 임제종 대혜계(大慧系)에 속하는 佛照德光의 法嗣인 無際了派(1149-1224)였다.
송대 선종은 운문종雲門宗이 융성하다가 그 후에는 임제종이 지배했다. 임제종은 종조宗祖 임제의현臨濟義玄( ?-866)후 5대에 걸쳐 계속되다가 11세기에 분파分派되어 석상石霜의 제자인 황용혜남黃龍慧南(1002-1069)에 의해서 황용종黃龍宗이 형성되었고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에 의해 양기종楊岐宗이 열렸다. 양기종楊岐宗은 2대를 지나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에 의한 禪風이 불어 그 문하에 대혜종고大慧宗杲와 호구소융虎丘紹隆이 나타났다. 대혜와 호구는 두 파로 나누어져 대혜파는 졸암덕광拙庵德光을 거쳐 무제요파無際了派에 이르게 되었다. 무제는 도겐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다.
도겐은 1년간 그의 지도하에 있으면서 중국선림의 수행을 본격적으로 배웠던 것이다. 그는 무제에게 선을 배우면서 석존으로부터 조사를 통해 전수된 사자전승師資傳承의 계보인 사서嗣書를 보고 싶은 열망을 품었다. 도겐이 일찍부터 사서에 대한 열망을 지닌 것은 입송초에 직면한 당시 송조선림이 지닌 계율의 受具問題나 新到者의 序列問題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그보다 師資相承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첩戒牒과 계맥戒脈이 사제 간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법의 授受와 認證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사서嗣書는 불조佛祖의 명맥을 전수받은 것 즉 법문의 역사적 생명과 相嗣 繼承을 증명하는 것이다. 도겐이 사자전승師資傳承의 계보인 사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그만큼 정전불법이 깊은 관심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마침내 도겐은 嘉定17年(1224) 정월21일 無際了派의 사서를 보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無際了派의 가르침에 만족치 못하고 정사正師를 찾기 위해 그 해 2월에 제산편력諸山遍歷을 떠났다. 먼저 도겐은 보경원년寶慶元年(1225) 봄 명주明州로부터 항주杭州에 가서 오산五山 중 제1명찰名刹인 경산徑山의 흥성만수사興聖萬壽寺를 방문했다. 도겐이 만수사에 간 것은 그 곳 주지가 불조덕광佛照德光(1144-1203)의 법계승자이고 무제의 법형제인 절옹여염浙翁如琰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다시 임제선승을 찾아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겐이 무제를 떠난 이유가 임제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지녔다면 임제종 선사에게 다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겐이 무제를 떠난 것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라기보다 진정한 正法을 소지한 스승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즉 도겐은 중국선종의 특정한 종파적 가르침보다 正法 자체에 관심을 지녔던 것이다.
흥성만수사는 도겐이 기대한 것과 같은 순수한 선사가 아니라 송조의 관료사회와 밀착된 관계를 지닌 채 왕후귀족에게 영합한 기도불사祈禱佛事를 행하던 사찰이었다. 도겐은 거기서도 정사正師를 만나지 못하자 天台山 平田의 萬年寺로 향했다. 그 곳은 에이사이가 머물렀던 장소였다. 만년사의 주지는 福州 출신의 元鼎이었는데 그는 도겐에게 자신이 소지한 사서를 선뜻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가 4, 5일전에 꾼 꿈 때문이었다.
元鼎은 꿈에 당대의 大梅法常(752-839)이 나타나 매화 한 가지를 들고는 “만일 배를 타고 온 자가 오거든 그에게 꽃을 주라”고 하며 그에게 매화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나 元鼎은 도겐을 만났기 때문에 도겐에게 嗣書를 보여준 것이다. 도겐은 자신이 존경해오던 大梅法常의 가호로 嗣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격했다.
大梅法常은 산에 들어가 혼자서 30여년간 좌선변도한 선사로 유명하고, 趙州는 61세에 발심하여 百歲聞法의 순수한 구도심으로 40년간 수행생활을 통해 馬祖의 法系를 이어온 선사로 이름이 나 있다.
도겐은 오랜 세월 좌선변도한 大梅法常과 趙州從念을 흠모해온 것이다. 이는 도겐이 좌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도겐은 元鼎에게서도 귀족화된 선풍을 느꼈기에 다시 천동산의 無際에게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無際의 입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겐은 일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겐은 귀국 전에 입송시 함께 왔던 묘오젠을 만나고 가려고 천동산으로 갔다.
그 도중에 그는 明州의 대매산大梅山 호성사護聖寺를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거기서 깨침의 지평을 열어주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元鼎이 꾸었던 꿈과 유사한 것으로, 大梅山 주지인 大梅法常이 도겐에게 일척되는 매화가지를 주는 꿈이었다. 그 후 도겐은 일본으로 돌아가 『정법안장』「사서嗣書」에 이에 대해 쓰기 전까지는 그 꿈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사서」는 1243년에 씌여진 것이므로 도겐은 20년전의 꿈을 그 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때 받은 영감이 도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케 한다.
도겐은 후에 이 꿈을 여정과 연관지어 해석했다. 『정법안장』「매화」에서 도겐은 달마가 2조인 神光慧可에게 법을 전한 傳法偈 중 ‘一華開五葉’을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五葉이 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꽃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 하나의 꽃이 핌으로써 셋, 넷, 다섯 개의 꽃이 필 수 있고 수천만 아니 무한한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겐은 모든 꽃이 필 수 있음은 불법의 현성을 드러내준 스승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참 스승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말하고 있다.
도겐은 이러한 개화가 가능한 것이 모두 노매화의 무한한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노매화는 如淨뿐 아니라 제불제조(諸佛諸祖)를 말한다. 도겐은 하나의 매화 속에서 모든 부처와 조사를 통해 면면히 전해내려온 불법을 본 것이다.
도겐은 「매화」에서 “눈 속의 매화야말로 釋尊이 가섭에게 깨침의 現成으로서 전해준 優曇華”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매화를 釋尊이 마하가섭에게 건네준 ‘優曇華’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존이 마하가섭에게 우담화를 건네준 것이 正法傳受의 의미였듯이, 도겐은 매화 안에서 正法傳受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다.
도겐은 大梅山에서 매화꿈을 꾼 뒤 遊山行脚을 마치고 天童山으로 가서 마침내 천동산 주지가 된 天童如淨(1163-1228)를 만났다. 이 사건은 도겐의 구도여정에 있어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도겐은 如淨과의 만남을 ‘一生參學의 大事’라고 고백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그만큼 如淨과의 만남은 도겐의 종교세계를 여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6) ② 如淨과의 相見
7)
嗣書를 통해 도겐은 불법을 전수받을 스승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느끼고 있었다. 도겐은 正師를 구하는 것이 佛法을 전수받는데 가장 중요한 일임을 『정법안장』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學道用心集』에서도 “參禪學道는 正師를 구하는 것”이라 하여 佛道에 있어 正師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도겐은 正師를 만나고자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실제로 入宋한지 3년이 지나도 正師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던 차에 천동산에서 如淨을 만난 것이다.
如淨은 중국선종사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연구 또한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如淨은 趙州의 사람으로 臨濟宗 大慧派가 세력을 떨치던 당시 曹洞宗 眞歇淸了의 법맥인 雪竇知鑑(1105-1192)에게서 法을 계승한 선사였다. 여정은 建康府(南京)의 淸凉寺, 台州 浙江省의 瑞嚴寺, 杭州 臨安府 淨慈寺의 住持를 거쳐 寶慶元年에 天童山의 제31대 주지가 된 것이다.
도겐은 언제 如淨을 처음 만났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법안장』「面授」에 따르면 “大宋 寶慶元年 5월1일 도겐은 처음 先師 天童古佛을 妙高台에서 뵙고 현향예배를 올린다”라고 한다. 그러면 도겐이 如淨을 처음 만난 때는 大宋 寶慶元年(1225) 5월1일이 된다. 그러나 鏡島元隆은 『天童如淨禪師の硏究』에서 『如淨語錄』을 근거로 하여 如淨이 天童山에 들어간 때는 嘉定17年(1224)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鏡島의 見解는 伊藤秀憲에 의해 뒷받침된다.
즉 伊藤은 『三祖行業記』, 『傳光錄』, 古寫本『建撕記』 등 오랜 傳記史料를 재검토함으로써 如淨의 天童山 入院은 嘉定17年(1224) 7월 후반에서 8월 사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도겐은 嘉定17年(1224) 2월에 天童山을 출발하여 3월까지 諸山徧歷을 마치고 天童山에 돌아갔다고 본다. 도겐이 천동산으로 간 3월에 천동산 주지였던 無際는 죽고 4개월 후인 7-8월에 如淨이 천동산 주지로 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嘉定17年(1224) 8월에 도겐과 여정이 처음 만났다면, 寶慶元年(1225) 5월1일까지는 10개월 가까운 기간이 있다. 따라서 도겐이 如淨 아래서 이미 10개월간 수행을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도겐은 『정법안장』「面授」에서 寶慶元年에 如淨을 만났다고 한 것일까?
伊藤은 도겐이 기억 착오로 嘉定17年을 寶慶元年이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사를 보면 嘉定17年 閏8월3일에 寧宗이 죽고 理宗이 제위를 받아 11월20일에, 다음 해를 寶慶 元年으로 고치라는 명을 내렸다. 따라서 寶慶元年으로 改元한 것은 嘉定17年 이듬해였다. 일본에서는 그 해 도중에도 개원改元을 하지만 중국 南宋代에는 신년에만 개원했다. 도겐은 이 차이를 착각하고 嘉定17年을 寶慶元年으로 기억했다는 것이 伊藤의 주장이다. 그래서 伊藤은 『정법안장』「面授」에 언급된 것을 단순히 도겐이 如淨을 처음 상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럼 무엇인가?
伊藤은 『정법안장』「面授」에 나오는 如淨과 도겐의 상봉장면은 永平 2世인 懷奘이 義介에게 法을 전한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그것은 義介가 기록한 『御遺言記錄』과 그 표현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御遺言記錄』에 보면 義介가 懷奘에게 분향하고 예배한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정법안장』「面授」에서 도겐이 如淨을 面授한 장면과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御遺言記錄』에 보면 “建長7年(1255) 正月2日 義介는 처음으로 제2세 堂頭和尙(懷奘)을 예배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面授」에 나오는 “寶慶元年(1225) 5월1일 도겐은 처음으로 禪師 天童古佛을 妙高台에서 분향예배한다”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御遺言記錄』는 建長7年 義介가 처음 懷奘을 예배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義介는 懷奘으로부터 嗣書, 傳法, 授戒 등에 관해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양자는 이미 만난 사이이다. 이를 종합하여 『御遺言記錄』에서 말한 ‘처음’의 의미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처음’은 懷奘이 義介에게 이미 傳法을 전제로 한 다음 입실을 허락하여 ‘처음’ 행해진 스승과 제자 간의 예의라는 것이다. 즉 懷奘은 義介에게 법을 계승하고자 미리 정한 뒤, 建長7年에 그 예를 행했다는 것이다.
伊藤은 이러한 상황과 『정법안장』「面授」에 나오는 도겐과 如淨의 相見에서 그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즉 「面授」에서의 상면도 양자가 처음 만난 의미보다는 傳法을 전제로 한 入室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傳法을 전제로 如淨에게 入室한 도겐은 ‘佛祖에서 佛祖에게 面授의 法門은 現成한다’(『정법안장』「面授」)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如淨은 “이것이야말로 靈鷲山의 염화미소이며 달마가 嵩山에서 혜가에게 髓를 준 것이고 黃梅의 홍인이 혜능에게 傳衣한 것이며 洞山良价와 曹山本寂의 面授”라고 응답함으로써 도겐에게 법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도겐이 『정법안장』「面授」에서 자신이 如淨으로부터 받은 것이 ‘정법안장’임을 강조한 대목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도겐은 정법안장이 붓다로부터 달마, 혜능을 거쳐 如淨에게 전수되었고 자신에게로 이어져 계승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도겐이 1241년 이후에 如淨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도겐이 如淨을 통해 무엇을 배웠고 어떤 점 때문에 如淨을 正師라고 확신하게 되었는지 고찰해 보자.
앞서 말한대로 도겐이 入宋했을 당시, 중국사찰은 세속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고 귀족화된 禪院生活이 만연했다. 당시 중국에는 간화선이 유행했으나 도겐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도겐이 중국에서 처음 사사받았던 無際를 비롯하여 浙翁如琰, 元鼎 모두 臨濟禪師였으나, 그들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럼 如淨은 도겐이 중국에서 만났던 다른 선사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우리는 『정법안장』「行持」에서 도겐이 如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禪師 天童和尙은 越(浙江省) 사람이다. 19세때 經論의 학문을 버리고 參禪學道에 들어서 70세에 이를 때까지 물어서지 않았다. 嘉定(1208-24)의 寧宗皇帝(南宋)에게 紫衣나 禪師號를 받았지만 이를 사양했다. 天下의 수행승은 和尙을 존경하고 遠近의 有識者는 이 사람의 덕을 칭찬했다. 황제도 크게 기뻐해 차를 보냈다. 그에게서 들은 자들은 모두 그의 훌륭함을 찬탄했다. 그야말로 〔수행자의〕 진실한 行持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戒를 범하는 악이다. 戒를 범함은 일시적인 잘못이지만, 명예를 좋아함은 일생의 실수인 것이다. 명예를 받지 않는 것이 行持이며 이를 버리는 것이 行持이다.
〔달마 이후〕 6대조사에 師號가 있었던 것은 모두 죽은 후 〔天子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세상에서 명예를 받아선 안된다. 때문에 우리도 迷宮의 세계에 있는 명예를 버리고, 佛祖의 行持를 원해야 한다. 명예를 좋아함은 禽獸와 같은 것이다. 名利를 버리는 것은 인간계, 천상계에서도 희귀한 것이지만 佛祖는 이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正法眼藏』「行持」下
도겐이 중국에 머물렀을 당시 중국 사찰에서는 종파적 차이가 그리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만일 종파적 구별이 뚜렷했다면 天童山의 임제종 사찰에서 如淨같은 묵조선계 선사를 주지로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도겐이 여정을 만난 것이 임제종에 대한 조동종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도겐에게 있어 여정이 스승으로서 지닌 권위는 그가 속한 종파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수행자로서 여정이 지닌 인품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겐이 기억하는 여정은 당시 불교계가 권력의 지배와 타협하면서 수행의 순수성을 잃은 데 대해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불법의 大道를 구하고자 좌선변도에 정진한 선사였다. 여정은 명리를 좋아함이 곧 계를 범하는 것이며 名利를 떠남이 참된 수행자의 행지行持임을 굳게 믿고 살아온 선사였다.
도겐은 여정의 수행과 가르침에서 다른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준엄함을 느꼈다. 여정은 二更三點(밤 11시경)까지 좌선하고 새벽 四更二點(새벽2시반―3시경)에 다시 일어나서 제자들과 함께 좌선하는 엄한 수행을 강행했다. 총림의 기강이 흩어진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불법의 대도를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여정에게서 도겐은 자신이 추구해온 세계를 만났다.
여정은 宋代의 禪弊와 僧風의 쇠퇴를 痛憤하면서 佛祖의 古道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坐禪弁道의 길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그는 스스로 좌선수행에 정진하면서 제자양성에 평생을 보낸 것이다. 도겐은 如淨을 만나 배우면서 그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正師임을 확신했다. 도겐은 如淨 아래서 좌선의 본래 의미가 무언지 깨닫게 되었다.
도겐이 正師를 만나 해결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본래부처라면 왜 수행이 필요한가’하는 수증의 문제였다. ‘본래부처인데 왜 제불들은 수행을 왜 왔는가?라는 것이 도겐이 품은 문제의식이었음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대승교의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문제라 할 수 있다. 본래부처라는 祖信에 기초한 대승교의에서는 좌선수행을 본각(혹은 불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해석해 왔다. 이는 ‘좌선이 구체적으로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도겐은 如淨에게서 바로 이 문제를 풀어갈 빛을 발견한 것이다.
8) (4) 도겐의 깨침
도겐의 깨달음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建撕記』와 『永平寺三祖行業記』(15세기초)뿐이다. 도겐은 자신의 깨침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은 그 역사적 정황은 확인할 길이 없으나, 도겐의 깨침에 대해 전해져 오는 얘기는 그가 如淨 아래 있을 때 일어난 일화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寶慶元年(1225) 하안거가 끝날 무렵, 이른 새벽 좌선 중에 한 승려가 조는 것을 보고 如淨은 “參禪은 身心脫落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졸기만 해서 무엇 하겠느냐?”라고 꾸짖었다. 이 소리에 도겐이 大悟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叱咤時脫落’이라 부른다. 이 얘기는 『如淨禪師續語錄』중 도겐禪師의 跋에 나오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僞撰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叱咤時脫落 일화가 도겐의 大悟에 대한 서술인지는 아직 논의거리가 남아있다. 그러나 질타시탈락 이야기는 진복사眞福寺에 소장된 草案本 『정법안장』「大悟」―草案本이 流布本으로 되면서 비록 삭제되기는 했지만―에도 나온다. 이렇게 볼 때 叱咤時脫落 얘기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겐이 如淨을 만난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과 如淨이 도겐에게 법을 전수했다는 사실이다. 도겐이 如淨에게 법의 전수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如淨이 도겐의 깨침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질타시탈락의 일화가 도겐의 깨침을 표현한 것인지 역사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그의 깨침을 표현하는 상징어는 ‘身心脫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법안장』, 『永平廣錄』, 『寶慶記』에 나오는 ‘身心脫落’은 모두 如淨이 한 말에서 나온 것이지, 도겐이 직접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한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한편 『如淨語錄』에는 신심탈락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대신 ‘心塵脫落’이 나온다. 이에 근거하여 高崎直道는 신심탈락을 心塵脫落으로 잘못 들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說은 도겐이 중국어의 心塵과 身心의 발음이 유사하여 心塵脫落을 身心脫落으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만일 高崎直道의 주장대로라면 도겐이 4년동안 중국에서 머물면서 양자를 구별하지 못했다면 그는 언어의 둔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법안장』 등에서 드러난 도겐의 천재적 언어재능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을 희박해 보인다. 오히려 반대로 중국에서 身心을 거꾸로 心身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身心脫落을 心身脫落으로 표현한 것을 心塵脫落으로 잘못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국어로 shen xin인 身心을 xin chen인 心塵과 혼동하여 身心脫落을 心塵脫落으로 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 비추어볼 때 如淨이 제자 도겐에게 가르친 것은 신심탈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도겐이 如淨으로부터 전수받은 신심탈락은 어떤 의미인가? 如淨은 말한다. “參禪은 身心脫落이다. 焚香, 禮拜, 念佛, 修懺, 看經은 필요없다. 다만 只管打坐 뿐이다.” 도겐은 이 가르침에 대해 도겐은 여정에게 물었다.
도겐; 身心脫落이란 무엇입니까?
如淨; 身心이 脫落하는 것은 坐禪을 하는 것이다. 오로지 좌선할 때 五慾과 五蓋가 제거된다.
도겐; 五慾과 五蓋가 제거된다는 것은 敎家(천태종의 止觀)에서 설한 것과 같습니 다. 또한 그것은 大小兩乘의 修行者가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如淨; 祖師의 제자라면 대승, 상좌의 가르침을 싫어해선 안된다. 수행자가 성스런 佛의 가르침을 배신하면 어떻게 佛祖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느냐?
도겐; 요즈음 의심하는 자들은 三毒이 곧 佛法이요, 五慾이 곧 祖道라고 주장하면 서 三毒과 五慾을 없애고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입장은 상좌와 같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如淨; 오히려 三毒과 五慾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外道와 같다. 오로지 좌선정 진해서 신심탈락하는 것, 그것이 바로 五蓋五慾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외 다른 방법은 없다.
‘參禪은 身心脫落’이라는 가르침에 대해 도겐이 묻자 如淨은 ‘身心脫落은 參禪’이라고 답한다. 무슨 말인가? “參禪은 身心脫落이요 身心脫落은 곧 參禪”이라 함은 證의 世界인 身心脫落이 修의 世界인 參禪을 떠나 성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證을 떠나 修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如淨의 가르침은 ‘지관타좌’라는 그의 표현 속에서 잘 드러난다.『如淨語錄』에 의하면 只管打坐의 ‘只管’은 “專一, 一途(다만, 오로지)”라는 부사이며, ‘打’는 동사 ‘坐’ 앞에 붙은 접두어로서 강조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지관타좌는 일체의 餘行도, 餘念도 없이 ‘다만 오로지 좌선함’을 뜻한다. 즉 지관타좌란 무엇보다도 앉음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앉음이 없는 깨달음은 形而上學의 哲理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관타좌는 다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양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現成’임을 뜻한다. 이와 같이 如淨은 修證一等을 말하면서 동시에 “신심탈락은 五慾을 떠나고 五蓋를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五欲과 五蓋를 버림’은 천태종에서 말하는 25方便 敎義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如淨이 말한 신심탈락은 修의 결과로 얻어지는 세계가 아닌가? 그래서 도겐은 “그것은 천태종과 같은 敎家의 가르침이 아니냐”고 되물은 것이다.
이 때 如淨은 三毒과 五慾을 제거하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外道라고 비판하면서 오로지 坐禪正傳만이 五蓋, 五慾을 제거하는 길이며 그 외 신심탈락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대답한다. 즉 如淨은 “身心脫落은 參禪이요, 參禪은 곧 身心脫落”이라는 修證一等을 말하면서 동시에 五蓋와 五欲을 버리는 漸修的 側面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如淨이 黙照禪의 法系를 이으면서도 始覺的 側面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始覺的 수증관이란 『기신론』에 나오는 것으로 미혹한 중생이 不覺에서 覺에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如淨이 시각적 측면을 도입한 것은 당시 묵조선이 無事禪으로 빠질 위험성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도겐이 如淨의 身心脫落을 그대로 전수했는지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도겐이 귀국 후에 身心脫落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분명 如淨으로부터 배운 신심탈락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도겐이『정법안장』「面授」에서 “身心脫落 때문에 나는 얼굴을 맞대고, 正法을 전수받아 일본으로 왔다”라고 한 대목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道元和尙廣錄』에서도 “나는 如淨에게서 身心脫落을 들었을 때 佛道를 완성했다”고 한 점에서 분명 신심탈락의 가르침은 도겐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신심탈락을 도겐의 깨침에 대한 표현으로 단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설사 신심탈락이 도겐의 깨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如淨의 가르침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도겐의 독자적 체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如淨이 도겐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도겐이 如淨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도겐은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여정의 가르침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如淨은 도겐에게 당시 보기 드물게 坐禪弁道에 정진했던 스승으로 비추어졌음이 분명하다.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좌선에 전념했던 如淨을 통해 도겐은 ‘修와 證의 역동성을 깊이 자각할 수 있었다. 佛法은 신심탈락한 자가 같은 경지에 이른 자에게 전수된다. 도겐은 如淨을 통해 정전불법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겐에게 있어 如淨은 정전불법의 계승자로 비추어진 것이다. 도겐은 如淨의 가르침을 통해 ‘좌선의 세계’야말로 붓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법안장이며 이것이야말로 佛道를 통해 正傳되어 왔다는 확신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은 귀국후 일본에서의 그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났다.
나. 3. 귀국 후 도겐의 활동
다.
1) (1) 建仁寺, 安養院時節(1228-1232)
도겐은 安貞元年(중국의 紹定元年, 1227) 28세때 如淨으로부터 嗣書를 받고 天童山을 떠나 오년만에 귀국했다. 그가 가나(仮名)文으로 쓴 최초의 저술인 『舍利相傳記』를 보면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어느덧 우리 일본국은 불법이 전래된지 600여년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참으로 그 闍維 뒤에 사리를 남겼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에 佛法이 전래된지 600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전해지지 않은 正法을 전하고자 한 도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귀국한 후 도겐은 入宋 전에 지냈던 京都 建仁寺에 머물렀다. 당시 建仁寺는 도겐이 入宋하기 전과 달리 승단의 부패와 타락이 심해진 상태였다. 당시 사찰의 상황을 본 도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佛法이 점차 쇠퇴해 가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내가 처음 建仁寺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수행자는 각자 개인방에 두껍게 칠을 한 벽장을 만들어 도구를 지니고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하며 재물을 축적하고 언어를 제멋대로 구사하며 예절을 게을리하는 것을 보면 다른 곳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建仁寺는 천태종의 사찰이 되었으므로 도겐의 비난은 천태종을 향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도겐의 비난에 격분한 천태종 승려들은 도겐의 주거를 부수고 그를 교또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 압박 때문에 도겐은 더 이상 建仁寺에 머물 수 없게 되자, 寬喜2年(1230) 山城 深草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도겐이 천태종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은 그가 叡山僧團의 부패상을 비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도겐이 전하고자 한 것이 그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당대의 천태종과 도겐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달마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이미 그 곳에 좌선수행이 있었듯이, 도겐 당시 일본에도 이미 좌선행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전해진 좌선은 天台宗의 止觀이나 에이사이가 宋에서 배워온 臨濟宗 黃龍派의 禪이었다. 또한 에이사이는 密敎와 天台思想이 융합된 台密思想을 수용한 兼修禪的인 면을 지님으로써 천태종과 타협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겐은 「辯道話」 12問에서 말한 것과 같이 眞言密敎와 天台止觀의 행법을 겸하여 수행함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다. 그 이유로 도겐은 佛法을 正傳한 諸祖들이 이같은 行을 겸해서 수행하지 않았음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은 密敎의 行法이나 天台의 止觀을 거부함으로써 당대의 천태종과 갈등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도겐은 당시 성행하던 천태본각사상에 의문을 품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수증관을 주장했으므로 천태종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도겐은 히에이잔의 天台宗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서 天台宗 末寺였던建仁寺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도겐은 寬喜2年(1230) 深草의 極樂寺라는 당시 閉寺가 되어버린 절 근처의 別院인 安養院로 거처를 옮겼다. 도겐은 1231년 安養院에 머물면서 「辨道話」을 썼는데 이는 그 스스로 좌선에 관해 불교교의학적으로나 수행론적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 19개를 한 후, 거기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도겐은 「변도화」에서 불법으로 들어가는 방법 중 좌선을 正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도겐은 좌선이야말로 석존을 비롯한 삼세의 여래가 행한 불법의 正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좌선이 석존에게서 전수되어온 정전불법이라는 도겐의 확신은 그의 저술 안에 면면히 흐르는 핵심주제이다. 도겐은 「변도화」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좌선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戒定慧의 三學 중에 하나로서 定學이 있고 六波羅密중 하나로서 禪定波羅密이 있다. 이 모두-三學과 六波羅密-는 일체의 보살이 初心때부터 배우는 것이며 利鈍의 구별없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좌선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 중 좌선만 如來의 正法이 있다는 것인가?
도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금 이 如來의 一大事인 정법안장 곧 無上의 大法을 禪宗이라고 이름 붙히기 때문에 이같은 의문이 일어난 것이다. 잘 알아야 한다. 禪宗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생겨난 것이다. 인도에선 들어본 일이 없다. 처음 달마대사가 嵩山의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했을 때에는 출가자도, 재속자도 아직 佛의 正法을 모르고 坐禪을 宗旨로 하는 婆羅門이라고 이름붙혔다. 그 후 대대로 諸祖가 좌선에 전념하고 있다. 이를 본 재속자들도 實情도 모르고 坐禪宗이라고 칭했다. 지금에 와서는 坐를 생략하고 다만 禪宗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좌선의 참 의의는 조사들이 설한 것 중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다. 6바라밀과 三學 중의 禪定과 병행해서 말해선 안된다. 佛佛祖祖로 전해져온 이 좌선이 석가여래로부터 正傳된 佛法인 것은 석존 자신의 一代에서 숨져진 것이 아니다. 석존여래가 靈鷲山의 法會에서 정법안장涅槃妙心이라는 無上의 大法을 다만 가섭존자에게 전한 儀式은 현재 天上界에 있는 天人으로서 이를 눈앞에 본 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므로 의심할 수 없다. 불법은 天人들이 영구히 護持하고 있으며 그 功業은 지금도 쇠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도겐은 좌선이 三學 중 하나인 定學에 해당되거나 6바라밀 중 하나인 좌선이 아니라고 말한다. 좌선은 여러 수행방법 중 하나이기보다, 그것이야말로 釋尊으로부터 正傳된 佛法이라는 것이다. 좌선을 正傳佛法으로 본 도겐은 좌선이야말로 안락의 법문이라고 말한다. 安樂의 法門이란 지금 여기가 깨침의 세계이기에 더 이상 깨침을 추구하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도겐은 이를 自受用三昧라 한다. 곧 自受用三昧는 ‘只管打坐’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이다.
도겐은 「辨道話」를 통해 지관타좌야말로 붓다로부터 正傳되어온 불법의 기준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는 自受用三昧를 정전불법의 기준으로 삼아 그 무엇보다도 수행에 불법의 권위를 주었다. 이는 도겐에게 있어 불교를 해석하는 기준이 추상적인 교의나 이론이 아니라, 석존 이래 諸佛이 행한 只管打坐 바로 그것임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붓다와 마하가섭, 보리달마와 혜능도 證上의 修로서 살아갔다. 그 외 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러한 도겐의 가르침을 듣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 도겐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深草의 極樂寺跡에 있는 佛殿과 寺坊을 修理改築하여 그곳에 참선도량인 觀音導利院 興聖寶林寺(興聖寺라고도 함)를 열었다.
2) (2) 興聖寺時節(1233-1243)
도겐은 天福元年 봄(1233)에 觀音導利院 興聖寶林寺를 열고, 嘉禎2年(1236) 10월15일에는 專門 僧堂을 세워 中國禪林과 유사한 본격적인 禪寺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興聖寺로 사찰을 옮긴 그 해 도겐은 「普勸坐禪儀」를 저술했다. 도겐은 「普勸坐禪儀撰述由來」를 통해「普勸坐禪儀」를 저술하고자 하는 포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敎外別傳의 정법안장, 나는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하물며 「坐禪儀」는 지금까지 (일본땅에) 전해지지 않았다. 내가 嘉錄 중에 송나라에서 본국에 돌아올 때 어느 參學(者)의 청에 따라 「坐禪儀」를 撰述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普勸坐禪儀」를 서술하게 된 동기가 일본땅에 아직 좌선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普勸坐禪儀」는 도겐이 長蘆宗賾의 『禪苑淸規』에 수록된 「坐禪儀」에 의거하여 저술한 것이다. 宗賾의「坐禪儀」는 1102년에서 1105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도겐의 「普勸坐禪儀」보다 100년쯤 앞서 있으나 좌선하는 行法에 있어서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도겐은 宋에서 귀국한 해인 嘉錄3年(1227)에 「普勸坐禪儀」를 처음 저술했으나 불행하게도 嘉錄本은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永平寺 寶庫에 秘藏되어 있는 天福本이다. 이는 天福元年(1233)에 도겐이 직접 쓴 自筆本이다. 天福本이 嘉錄本 그대로인지 수정본인지 알 수 없으나 거의 같은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 후 도겐은 天福本「普勸坐禪儀」이외에도 流布本「普勸坐禪儀」를 썼는데 이것은 『永平廣錄』8권, 『도겐禪師語錄』에 수록되어 있다. 유포본이 저술된 연대는 불확실하나, 仁治3年(1242) 봄부터 寬元元年(1243) 겨울에 걸쳐 나온『정법안장』「坐禪箴」이나 「坐禪儀」와 내용이 유사하므로 그 때쯤 저술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예를 들자면 「坐禪箴」내에 나오는 非思量이나 不圖作佛이 유포본에도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普勸坐禪儀」는 1227년에 처음 저술된 이래로 1243년에 개정판인 유포본이 나왔다는 것은 도겐이 그만큼 중시해온 저술임을 알 수 있다. 「普勸坐禪儀」이라는 제목이 말하듯, 도겐은 좌선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 썼다. 여기서 우리는 坐禪에 대한 行法뿐 아니라 도겐의 수증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도겐은 왜 천복본을 저술한지 10년후 새로운 내용을 첨삭하여 유포본을 다시 썼을까? 전통종학에서는 천복본 내에 宋朝禪의 餘薰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 잔재를 없애기 위해 유포본「普勸坐禪儀」를 저술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잔존해 있던 宋朝禪의 수증관적 측면을 없애고 修證一等의 수증관으로 유포본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복본 이전에 서술한「辯道話」에도 도겐은 이미 修證一等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도겐이 천복본을 수정하여 유포본을 쓴 것은 당대 중국선종인 임제종과 자신의 수증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도겐이 「普勸坐禪儀」에서 좌선행법만을 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증관을 좌선행법과 결부시켜 논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이 경우는 일본에 선례가 없었던 일이다. 종전에 일본에 있던 명상방법은 사이쵸오가 가르친 天台智顗의 止觀 冥想이었다. 도겐도 히에이산의 天台僧으로서 止觀수행을 배웠다. 그러나 천태종의 수행방법은 후에 밀교 등을 융합시키면서 본래의 좌선 수행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도겐의 제자 중 興聖寺 교단이 자리를 잡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로 孤雲懷奘(1198-1280)을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달마종 覺晏의 門人이었는데 文曆元年(1234) 겨울 도겐의 門下에 들어왔다. 懷奘은 도겐보다 2세 연장자였지만, 20년동안 도겐 곁에서 그에게 師事받으면서 興聖寺와 永平寺교단 발전에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그는 도겐의 가르침을 筆錄하여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를 남겼다. 이와 같이 懷奘의 入門은 도겐의 교단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겐은 1236년 12월에 懷奘을 首座로 임명하고 처음으로 宋朝의 禪林과 같은 형태를 지닌 定規 禪林生活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興聖寺에 모든 가람이 갖추어지자 도겐의 입문자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겐은 교단을 확립할 필요를 절감하고 그 제1보로 嘉禎3년(1236년) 봄 『典座敎訓』을 저술했다. 이는 도겐이 入宋시 만난 典座들로부터 배운 가르침들을 수록한 것이다. 도겐은 여기에서 식생활 일체를 다루는 전좌직 자체가 弁道임을 역설하고자 했다. 그 후 도겐은 출가의 제1보인 出家와 授戒에 관해서 규정한 『出家授戒作法』를 썼다. 그리고 延應元年(1239) 4월25일에는 제자들에게 줄 수행지침서로 堂內의 규율을 21조로 한『重雲堂式』을 집필하였다.
이와 같이 도겐교단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도겐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가 대거 入門했다. 그 중 특히 달마종 출신인 懷鑑, 義介, 義尹, 義演은 仁治2年(1241) 봄에 들어와서 도겐敎壇 確立에 큰 역할을 했다. 懷奘을 비롯하여 도겐敎壇에 들어온 달마종 사람들은 興聖寺 僧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도겐은 이 때부터 승단을 확립하고 이상적 수행생활을 실현시키기 위한 교단 운영에 전력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도겐은 왕성한 집필작업에도 힘써 天福元年(1233) 8월에 『정법안장』「現成公案」을 저술하고 이듬해인 文曆元年(1234)에 『정법안장隨聞記』의 자매서인 『學道用心集』을 저술하여 참선자의 바른 마음가짐을 설하였다.
또한 도겐은 이 때를 전후해서 『정법안장』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延應元年(1239)부터 寬元元年(1243)까지 5년동안 『정법안장』 전체의 과반수에 해당하는 42권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 이같은 도겐의 저작활동은 다른 선사들과는 대조되는 측면이다. 도겐은 평생 佛道를 전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不立文字라는 선종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정법안장』을 집필한 것도 이러한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다. 즉 도겐은 佛法正傳을 위해서 자신의 종교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법안장』은 非思量의 세계를 思量으로 표현한 ‘非思量의 思量’이며 ‘打坐의 思惟’라 할 수 있다.
도겐의 敎壇이 발전하자 히에이산의 천태계 사람들은 다시 그의 활동에 압박과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천태교단의 압박에 맞서 도겐은 조정에 『護國正法義』를 써서 올렸다. 그는 『護國正法義』에서 자신이 전한 佛法이야말로 佛祖正傳의 것이며 국가를 보호, 유지하기 위함임을 표명하고자 했다. 그러자 天台衆徒도 이에 대한 反論을 조정에 제출하였다. 이에 조정은 “도겐이 설한 사상은 자기 본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구한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이념뿐 아니라 호국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도겐을 비난하는 쪽으로 판정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겐교단과 東福寺를 중심으로 한 천태교단 간에 극렬한 대립이 생겨 興聖寺는 파괴되고 도겐은 추방당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도겐은 興聖寺를 처음 세울 때 중국 五山 중 제일인 興聖萬壽寺 이름을 본따 興聖寺라 이름붙혔다. 이는 그가 중국 사찰과 같은 큰 도량을 만들고자 하는 포부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포부를 접고 그 해 7월16일쯤 深山幽谷인 越前(福井縣) 志比壓으로 교단을 옮겼다.
3) (3) 永平寺 時節(1244-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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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은 귀국한 후 10여년간 운영해온 興聖寺를 해산하고 寬元元年(1244) 7월 돌연 越前으로 하향하였다. 그는 거기서 그의 최대 外護者인 波多野義重과 재속제자인 覺念의 도움을 받아 越前에 寺堂 건립을 계획했다. 波多野義重은 도겐에게 자신의 소유지인 越前의 토지를 기증했기 때문에 그 땅에 寬元2年(1244) 大佛寺를 지을 수 있었다. 도겐은 寬元3年(1245) 4월에 北越入山 후 처음으로 하안거를 엄격히 실행하는가 하면, 『百丈淸規』에서 설해진 것같은 철저한 禪林生活을 실천해 나갔다. 또한 그해 8월에 도겐은 「示庫院文」을 내어 僧院生活을 정비하고, 그 일년간 『정법안장』 25권을 짓는 왕성한 저술활동도 했다. 『정법안장』저술이 그 전후시기에 집중된 것은 이 시기야말로 도겐사상의 절정기였음을 보여준다.
도겐은 寬元4年(1246) 6월15일 大佛寺를 永平寺로 改名했다. 그 후 그는 永平寺 寺院을 정비하여 수행승을 교화하는 일에 한층 전념했다. 이와 같이 도겐에게 있어 永平寺는 그의 혼신을 담은 수행처로 자리매김해 갔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도겐의 越前 移轉 동기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도겐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그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은 이 점이 도겐의 전기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설이 나왔는데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深草가 교또에서 가까워서 선수행에 적합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 국왕이나 대신을 가깝게 하지 말고 심산유곡에서 제자의 교화에 힘쓰면서 도장을 펼치도록 한 여정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여정이 越出身이므로 그와 같은 이름인 越前을 택했다는 설, 志比壓이 天童山과 훨씬 유사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또한 수도에 禪 중심지를 세우려는 희망이 꺾이자, 자신의 제자를 모아 산에 임제종과 다른 독립된 조동 종단을 세우고자 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도겐은 如淨과 그의 계보인 洞山을 강조했고 임제전통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다. 이는 도겐이 越前에 도착한 후에 쓴 그의 저술들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가설들과 도겐의 행적을 종합해 볼 때 그가 永平寺로 자리를 옮긴 데에는 如淨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빌레펠트는 도겐이 임제와 자신의 다른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如淨을 부각시키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즉 도겐은 자신의 법맥이 如淨에게서 이어져 온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임제와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신의 법맥의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빌레펠트는 그 증거로 도겐이 1241년 이후 75권『정법안장』에서 如淨에 관해 많이 언급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선불교의 역사를 볼 때 자기의 법맥을 강조하기 위해 스승을 추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점에서 빌레펠트는 도겐이 如淨을 강조함도 자신의 종교세계를 정전되어온 법맥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如淨의 가르침대로 深山에 들어가 坐禪弁道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런데 도겐은 48세 때인 寶治元年(1247) 8월3일부터 寶治2년(1248) 2월13일까지 8개월간 가마꾸라에 가서 머문 적이 있다. 도겐은 왜 越前의 산을 떠나 당시 정치 중심지였던 가마꾸라에 간 것일까?
5) (4) 가마꾸라行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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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은 仁治3年(1242) 4월 興聖寺에서 쓴 『정법안장』「行持」에서 如淨이 寧宗으로부터 받은 紫衣와 師号를 거절한 태도를 칭송한다. 즉 여정은 “愛名은 犯禁에 있으며 犯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생의 누적 ...”이라고 제자에게 시중하고, 명리와 權勢를 가까이 하는 자들을 魔黨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如淨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정치와 결별하고자 했던 도겐이 당시 鎌倉幕府의 세력가였던 호오죠오 도끼요리(北條時賴, 1227-1263)가 있던 鎌倉에 가서 8개월간 머무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적으로 時賴의 간청에 따라 도겐은 弘法救生을 결심하고, 가마꾸라로 향한 것이 아닌가 해석하고 있다. 時賴는 도겐의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겐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면서 그를 초대했다. 時賴 이외에도 도겐이 가마꾸라에 오도록 간절히 원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도겐의 俗弟子인 武士 波多野義重로, 당시 幕府의 連署가 되어 가마꾸라에 가 있었으며 또 정토종 승려이면서도 도겐에게 참선을 배운 然阿良忠도 가마꾸라 光明寺의 住職을 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時賴에게 도겐을 가마꾸라로 초대하여 佛法을 설하도록 간청하여 時賴가 도겐을 초대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가설은 壽福寺 住持인 大歇了心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에이사이의 孫弟子로 송에 가서 중국 禪風을 직접 배운 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도겐이 宋에 있을 때나 建仁寺 시절에 그와 교섭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도겐에게 특별한 관심을 지닌 大歇了心이 時賴에게 권유하여 時賴가 도겐의 禪風에 관심을 갖고 그를 가마꾸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빌레펠트는 도겐의 가마꾸라行化를 京都에서 실패했던 교화활동을 가마꾸라에서 다시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