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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의 무상불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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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無常佛性論
2)
3) ① 無常의 의미
4)
무상불성은 무불성과 함께 도겐의 불성이해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다. 김희진은 무상이야말로 도겐의 종교에 있어 알파요 오메가라 칭한다. 따라서 도겐의 무상불성을 살피기 전에 먼저 그의 무상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諸行無常은 원시 불교 이래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 전수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성사상의 발전과 함께 常的인 측면이 불교교리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心性常住論的 불성이해이다. 이러한 불성이해를 바탕으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의 의미를 지닌 ‘불성’이 결합한 것일까? 사실 도겐의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을 초월한 絶對無의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도겐의 불성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도겐은 『정법안장』「山水經」의 서두에서 芙蓉道楷의 말을 인용하여 무상을 설명한다. “푸른 산은 언제나 걷고 있네.” 겉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산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들의 흐름 안에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전우주가 역동성 안에서 도겐이 말한 ‘全機’라는 표현은 이를 잘 보여준다. 全機를 배에 탄 것에 비유하자면, 배밖에 내가 없고 나밖에 배가 없고 하늘, 물, 해안을 비롯한 세계 전체가 배와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배가 곧 生이며 세계 전체가 배의 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一法究盡으로도 표현된다. 一法究盡은 하나의 법 안에 우주 전체가 드러남을 의미한다. ‘꽃 한송이에 온 세계가 피어난다’는 도겐의 표현처럼 하나의 법에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화엄사상과도 일맥상통하나 도겐의 경우는 그보다 더욱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諸惡莫作」에서 “一塵을 아는 것은 전세계를 아는 것이며 一法에 통하는 것은 萬法을 통하는 것이다. 萬法에 통하지 않는 것은 一法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도리에 통철할 때 萬法도 볼 수 있고 一法도 볼 수 있다. 一塵을 배우는 것은 세계 전체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一法究盡의 의미이다. 하나의 달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는 一法究盡은 十方世界 전체를 하나의 眞實人體로 參學하는 것이므로 수행을 떠나선 있을 수 없는 세계이다.
앞서 우리는 도겐의 무상관이 그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 동기였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도의 龍樹 또한 ‘무상을 觀함이 곧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도겐은 이를 『學道用心集』 초두에 언급하고 있다. “보리심의 명칭은 많지만 다만 하나이다. 용수는 다만 세간의 생멸무상을 觀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이름한다. 참으로 무상을 觀하는 것이야말로 보리심이다.” 이와 같이 무상을 관함이 곧 보리심을 관함이라고 본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무상을 觀함이 第一의 用心이다.”
그러나 도겐에게 있어 무상의 의미는 단지 보리심을 일으키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의 수증관 전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修證의 문제는 ‘無常을 觀함’과 직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無常을 觀한다’는 것은 무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깨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성불하기 위해서 좌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좌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무상을 觀함은 곧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無我를 觀하는 것이다.
도겐의 표현을 빌리자면 無我를 觀하는 것은 자신의 身心을 放下하는 것이며 身心을 放下하는 것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집착을 버리는 길이 곧 무상의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집착은 我執과 我慢을 내려놓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身心放下이며 身心脫落이라는 것이다. 도겐은 우리가 身心을 放下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學道해도 깨침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身心을 放下할 때 비로소 우리는 佛의 大海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심탈락은 如淨 아래서 도겐이 깨친 세계이다. 도겐은 이를 無我를 觀하는 것이며 無常을 觀하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이렇게 볼 때 무상을 관함은 단순히 보리심을 발하는 차원을 넘어 깨침의 세계와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무상불성은 도겐의 무상관과 수증관을 관통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5) ② 도겐의 無常佛性
6)
7) ㉠ 도겐의 時間觀
8)
무상불성은 도겐의 시간관 속에 잘 드러난다. 그의 시간관을 잘 보여주는 것은『정법안장』「有時」이다. 도겐은 여기서 “하나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有(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法位에 머문다’라고 표현한다. “알아야 한다. 땔감은 땔감의 法位에 머물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 여기에 前後際斷이 있다.” 前後際斷이란 「現成公案」에 나오는 말로, 도겐의 시간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땔감이 타면 재가 된다. 재는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땔감이 앞이고 재는 뒤라고 해선 안된다. ...전후가 있지만 전후의 흔적은 끊어진 것이다.... 땔감이 재가 된 후에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도 죽은 후 生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生이 死가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은 佛法이 정한 것이다. 그 때문에 不生이라고 한다. 또한 죽음이 生이 될 수 없는 것도 佛說의 규정이다. 그 때문에 이를 不滅이라고 한다. 生도 일시적인 것이며 死도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인과관계로 보기 때문에 “땔감이 변해 재가 된다”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도겐은 땔감이 변해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땔감은 땔감의 때가 있고, 재는 재의 때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땔감은 땔감의 法位가 있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하나의 法位에 존재가 全機現한다는 의미이다. 도겐은 이를 前後際斷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마치 “生은 生의 全機現이고, 死는 死의 全機現”라고 표현한 圜悟克勤(1063-1138)의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도겐은 이러한 前後際斷의 시간을 ‘經歷’이라고 말한다. 有時의 經歷은 삼라만상이 生死 流轉하는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봄은 여름 가을 겨울을 전제로 한 봄이 아니라 ‘봄’ 자체로서 ‘現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봄은 봄의 全機現이고 여름은 여름의 全機現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有時의 도리는 直下當處, 正當恁麽時 또 而今을 떠나선 결코 자각될 수 없다. 이것은 도겐에게 있어 佛道는 결코 정지되어 있는 무엇도, 도착해야 할 무엇도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참된 佛道는 깨침이라는 하나의 정착지가 있어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목적지로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有時現成, 今現成, 有時而今의 의미이다.
이러한 도겐의 시간관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무상은 단순한 시간관이 아니라, 불성의 근거이다. 무상불성설은 초기선종 자료에서는 볼 수 없으나 『景德傳燈錄』5卷, 「江西志徹章」에는 나오고 있다. 『景德傳燈錄』에서 제자 志徹(行娼)이 혜능에게 『涅槃經』에 나오는 佛性常住에 대해 묻는다. 즉 모든 현상은 無常인데, 生滅常無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자 慧能은 “無常이 곧 佛性이다. 有常은 곧 一切善惡諸法의 分別心이다”라고 응한다. 이 때 志徹(行娼)이 “『涅槃經』에서는 佛性이 常이라고 하는데 (6조)和尙께서는 無常이라 하니 이는 경전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즉 行娼은 『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를 들어 ‘如來가 常住하여 變易가 없으므로’ 불성은 常住하지 無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行娼은 常으로서의 불성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行娼에게 6조는 常으로서의 불성관이야말로 禪을 배우려는 자들이 부수어야 할 과제임을 가르친 것이다. 行娼은 자신이 지닌 불성관과 달리 ‘무상이 불성’이라고 설하는 혜능에게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불성은 『열반경』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에 대해 혜능은 ‘무상불성’이라고 답한다. 도겐이 혜능을 古佛이라고 칭송한 것은 혜능의 무상불성론에 있다. 그래서 도겐은 종전에 사람들이 이해해 온 것과 다른 시각에서 혜능을 보고자 한 것이다.
9) ㉡ 도겐이 바라본 慧能
10)
『壇經』이 혜능의 저술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경덕전등록』 이후의 송대 불교계(선종)에서는 『壇經』이 육조혜능의 설법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즉 송대에 들어서면서 혜능은 선불교의 이상화된 조사상으로 정착되어간 것이다. 일본 승려 圓仁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수집한 경전 목록(『入唐求法目錄』)에 보면, 장안에서 『曹溪山 第六祖 慧能大師說 見性頓敎 直了成佛 決定無礙 法寶記壇經』(沙門 法海集)을 입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圓珍(814-891)도 福州, 溫州, 臺州에서 『壇經』을 입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慧能 求法이야기」도 소중한 선문헌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당대에 혜능을 얼마나 중시된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겐은 『정법안장』「四禪比丘」에서 『壇經』이 見性사상을 설하고 있다고 하여 비판하고 있다.
『壇經』에 見性이라는 말이 있어 그 책은 僞書가 되며 佛祖正傳되어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6조의 언어가 아니며 佛祖의 法孫이 이용하지 않는 책이다.
당시 송대불교나 일본불교에서의 『壇經』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이것이 僞書라는
도겐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종래에는 『정법안장』 중에 『壇經』에서 인용한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壇經』과 見性에 관한 비판이 과연 도겐이 한 말인지 의심해 왔다. 그러나 도겐의 저술 속에 나오는 引用語錄을 연구해온 鏡島元隆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법안장』안에는 『壇經』으로부터 인용된 것은 한 문장도 없다. 그러므로 도겐이 한편으로는 『壇經』을 僞書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는 종래의 통설은 (도겐)禪師에 대한 오해이다. 이 통설에 따라 도겐과 『壇經』을 연결시켜 설한 논자는 『정법안장』의 어느 권이 『壇經』의 어느 本과 일치하는지 명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도겐이 六祖에 대해 설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법안장』이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壇經』을 인용했다는 종래의 설을 부정한 鏡島의 연구발표 후 도겐이 『壇經』과 거리를 두고 혜능을 보았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부르거나, 古佛의 古佛이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도겐이 『壇經』을 혜능의 저서로 보았다면 그가 『壇經』의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과 혜능을 古佛로 칭송한 도겐은 서로 상충될 것이다. 즉 그가『壇經』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六祖에게 古佛이라고 한 것은 도겐이『壇經』과는 거리를 둔 혜능상을 설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도겐과 『壇經』 그리고 혜능과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제에 대해 石井修道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도겐은 『壇經』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壇經』을 六祖의 설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壇經』과는 다른 六祖의 像을 만들었다고 본다.
石井의 말처럼 도겐이 혜능像을 새롭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에 대해 石井는 도겐이 『壇經』을 이용하여 혜능像을 만들기는 했으나, 『壇經』에 나오는 견성설과 육조혜능의 연관성을 완전히 없앴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견성사상과는 무관한 혜능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石井는 도겐이 禪을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그 중 하나가 6조의 行狀을 확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혜능의 行狀 속에서 見性說과 거리를 둔 채 새로운 혜능의 모습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壇經』을 보면 見性의 性을 自性淸淨한 性品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곧 불성을 말하며, 그것은 상주불변하는 常의 측면을 갖고 있다.
모든 가르침(萬法)은 모두 자기의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의 마음에서 단번에 진여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가? 『菩薩戒經』에 말씀하기를 ‘우리들의 本願은 원래부터 본성이 청정하다’ 라고. 자신의 마음을 알고 본성을 깨달으면 스스로 佛道를 이룬다. 『淨名經』에 말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달아 본심으로 되돌아간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은 見性의 性을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본 심성상주론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 見性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常으로서의 佛性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혜능을 古佛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혜능이 견성사상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견성은 자성청정심, 본래성불에 대한 자각이다. 다시 말해 대승교의가 지닌 근본적인 믿음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성청정심을 ‘常으로서의 불성’으로 보는 데 있다. 도겐이 비판한 것은 이러한 왜곡된 불성이해에 근거한 견성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정법안장』에서 그린 혜능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도겐은 『정법안장』「行持」권에서 “六祖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老母에게서 성장하여 벌목꾼으로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金剛般若經』의 한 구절을 듣고 老母를 떠나 大法을 구하고자 했다”고 설한 뒤 “이같이 老母의 애정을 끊는 것은 慧可가 팔을 자르고 달마의 제자가 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도겐은 혜능이 老母를 떠난 것은 세속의 恩愛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恩愛의 情을 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도겐은 이어서 “혜능이 弘忍의 會下에 들어가 쉬지 않고 弘忍의 命에 의해 밤낮으로 곡식을 빻는 일을 했고 그 후 홍인에게서 衣鉢을 전수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법을 얻은 후에도 밀을 빻는 일을 계속했고, 스승이 되어 중생제도를 위해 설법할 때에도 돌절구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行持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혜능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혜능의 佛心과 行持임을 알 수 있다.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져준 혜능의 가르침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도겐이 그린 혜능은 제자인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직면하도록 촉구하는 조사의 모습이다. 바로 그러한 혜능의 가르침은 도겐이 말한 無常佛性의 가르침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1) ㉢ 無常佛性
12)
도겐은 6조가 말한 무상불성에 기초하여, 자신의 무상불성관을 펼쳤다.
六祖가 제자인 行娼에게 말한다. “無常이 곧 불성이다. 有常은 곧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다. 소위 六祖가 말한 無常은 外道二乘에게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二乘外道의 鼻祖鼻末(祖先에서 末流에 이르기까지)이 무상을 말한다고 해도 그들(二乘外道)이 무상을 究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상은 스스로 무상을 說하며,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며, 무상이 무상을 證하기에 모두 무상인 것이다.” 지금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得道하는 자는 곧 자신을 드러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성이다. 또한 긴 法身을 드러내거나 혹은 짧은 法身을 드러내서 스스로 자신과 남을 위해서 佛法을 설한 것이다. 늘 聖인 것도 無常이고 늘 凡인 것도 無常이다. 늘 凡이거나, 늘 聖인 것은 불성의 드러남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어리석은 생각과 좁은 사고방식을 지닌 자이다.... 이런 견지에서 6조는 “무상이 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도겐은 “無常은 佛性이며 有常은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라고 한 혜능의 말을 언급하면서 다른 종교사상이나 聲聞, 緣覺 등 二乘外道의 祖先부터 末流에 이르기까지 모두 常으로서의 불성을 지녔기에 6조의 무상불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불성을 영원한 것으로 아는 이들은 無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二乘外道들도 무상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六祖의 무상과 外道의 무상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6조는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說하고 行하고 證한다”고 한다.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은 無常이며 無我인 우리가 無常을 행하고 證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無常이고 無我이므로 우리에 의해 설해지는 것 또한 무상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무상이 무상을 설한다는 것은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설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無常인 우리가 無常을 行하고 깨달아가기에 무상이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이다.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행하고 증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상을 살 때 가능하다. 지금 여기를 무상을 깨치기 위한 수단의 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生의 전기현, 死의 전기현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불성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무상은 불성’이라는 것에 이어 나오는 ‘常은 未轉’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석존께서 법륜을 돌려 법을 전하듯 正法은 佛祖에 의해 轉해지는 것인데, 常으로서의 불성은 轉해진 佛法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佛法正傳을 중시한 도겐 입장에서 볼 때 佛祖에게 전해지지 않은 常으로서의 불성은 진정한 佛法이라 할 수 없다.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佛祖를 통해 轉해진 것이며 無常佛性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轉法輪으로서의 불성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도겐이 무상불성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불성은 고정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佛에서 佛에로, 祖師에서 祖師에로 전해져 正傳佛法이라는 것이다.
도겐의 수증관을 이루는 두 축 중 하나는 正法인 좌선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겐은 무상불성 역시 이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무상불성은 불성의 현성뿐 아니라 正傳불법의 의미까지 보여줌으로써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