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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 연구

도겐의 불성이해서설(동국대학교 한국불교학 결집대회 2002년 발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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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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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元의 佛性理解 序說


        -悉有佛性을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belief’와 ‘faith’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여기서는 faith는 신앙으로, belief는 믿음으로 일단 번역하여 쓰기로 한다. 스미스는 믿음을 각 종교의 축적된 전통, 교리 등으로 보고, 신앙을 인간이 초월을 지향하는 고유한 자질(faith as human quality)이라고 말하면서 세계 종교 전통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증거된 초월적 신앙을 밝히고 있다. 스미스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은 우리가 어떤 종교집단에 속한다는 의미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집단에 속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가 속한 종교의 축적된 전통에서 나온 초월의 세계를 믿고 신앙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의 존재를 초월에로 열어두는 것, 즉 초월에로의 개방이며 초월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세계 종교 전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서구 문화 특히 근대 서구 문화가 이 고유한 신앙의 자질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근대 서구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일방적 관심이 신앙을 교리적, 명제적, 사변적 믿음으로 변질시켜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 철학적 전통은 언제부터인가 지식의 구원적 효과를 상실해 갔으며, 주로 종교적 신념의 정당성 문제를 다루어 왔던 근 현대 종교철학자들은 종교적 신앙의 측면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근대 서구 문화에 국한된 종교현상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종교전통이 겪어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본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가마꾸라(鎌倉)시대를 살았던 永平道元(1200-1253)의 종교 세계이다. 필자가 도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스미스가 지적했던 믿음과 신앙의 문제를 그의 문제의식 안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겐은 당시 일본의 불교계가 고착화된 ‘믿음체계’-그 대표적인 것이 天台本覺思想이다-에 빠져 신앙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그가 入宋하였을 때 당시 중국의 불교계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도겐은 이를 大疑團으로 삼고 상실된 신앙의 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전 일생을 바친 禪師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이러한 도겐의 신앙세계를 조금이나마 소개하기 위해서 택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正法眼藏』 중 「佛性」권이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으로 「佛性」권 전체를 본다는 것은 무리이기에 본 논문에서는 「佛性」권 중에서 첫 부분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중심으로 그의 신앙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1. 道元의 大疑團


진정한 신앙인은 초월과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숙고하며 살아가는 자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인은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의 세계에서만 살아가거나, 초월을 무시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양축에서 오는 긴장 속에서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자라 할 수 있다. 세계대종교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신앙의 메시지는 바로 초월과 현실의 양축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지를 고심한 발자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사 속에서는 이 긴장이 늦추어지거나 아예 상실되어 버린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지니고 새로운 개혁을 하려는 이들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 종교가 종교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자들은 모두 이 양축의 관계를 당시의 종교가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자들인 것이다. 道元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도겐은 당시 일본불교의 본산지인 比叡山으로 출가했는데 그 당시 比叡山은 天台, 密敎, 戒律, 禪이 종합불교로서 발전한 상태였고 道元이 거기서 머물 때에는 天台와 密敎의 爛熟期였다. 그래서 도겐은 출가한 후 거기서 基礎 佛敎 敎學으로서의 天台敎를 배웠다고 본다. 그는 14세때인 建曆3년(1213) 延曆寺 戒壇에서 大乘律에 의한 보살계를 받고 天台僧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큰 기대와 구도심을 품고 들어온 그는 1년간 大藏經을 2회 通讀하고 불교철학, 밀교 등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比叡山은 학문과 수행의 분위기가 아니었고 名利를 추구하는 場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도겐은 15세때 比叡山을 떠나고자 했는데 그것은 단지 당시 比叡山의 부패상 때문이 아니라, 도겐 자신이 지닌 大疑團을 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天台宗의 기본교리인 ‘本來本法性 天然自性身’인 本覺사상에 관한 것이다. 이와같이 도겐은 본각사상과 관련하여 “인간이 본래 불성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있는 그대로 本覺의 입장에 서 있는데 왜 굳이 우리는 애써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大疑團을 품었던 것이다.

『建撕記』에 의하면 도겐은 建保4년(1216년)에 이 대의단을 품고 學德이 높았던 三井의 園城寺의 주지인 公胤僧正(1141-1225)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고 한다.


“佛性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왜 三世諸佛은 세속을 떠나서 菩提를 추구했습니까.” 그러나 公胤僧正도 대답을 피하고, 대신 大宋國에 가서 찾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 해 6월20일 公胤僧正은 72세에 入寂하고 도겐은 公胤의 권유에 따라 京都 東山의  建仁寺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가 建保5년(1217) 8월이다. 建仁寺는 두 번의 중국 유학 경험을 통해 임제종을 배워온 榮西가 연 사원으로 中國禪寺를 모델로 지어진 사찰이었다. 도겐은 建仁寺에서 禪的 수행과 고귀한 인격과 禪風을 지닌 榮西를 알게 되었고 榮西가 전한 대륙의 禪法인 臨濟禪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도겐은 거기서 榮西의 제자인 明全을 만남으로써 宋朝의 佛法에 대한 동경과 宋朝의 선종을 배우고자 하는 入宋求法의 열망이 커졌다.


2. 도겐의 깨달음의 세계


(1) 도겐의 깨달음


도겐은 嘉定 16년(1223) 5월 4일 宋에 도착하여 여러 禪師들과의 만남을 거쳐 그토록 열망하던 正師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天童如淨(1162-1227)이다. 如淨 당시 宋은 국토가 이분되었으므로 曹洞宗派의 흐름도 北地曹洞과 江南曹洞으로 나뉘고 독자적인 전개가 이루어졌다. 江南曹洞은 다시 眞歇淸了(1088-1151)와 宏智正覺(1091-1157)의 둘로 나뉘었는데 如淨은 眞歇派의 法脈을 이었다.


당시 南宋시대 叢林은 화폐경제, 度牒제도, 叢林내외의 관리기구의 정비 등 官寺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叢林의 기강이 흩어지고 혼란스런 시기였다. 이 때 天童如淨은 오로지 佛法의 大道를 구하기 위해 名利를 떠나 坐禪弁道에 精進한 선사였다. 도겐은 如淨의 철저한 수행지도 하에서 身心脫落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즉 도겐은 如淨으로부터 본래의 불교는 只管打坐임을 배웠고 이것이야말로 正傳의 佛法임을 확신했다.


 道元은 「辨道話」에서 如淨을 만난 것은 “생애에 걸쳐 一生參學의 大事가 아닐 수 없다”고 술회함으로써 如淨과의 만남이 자신의 깨달음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寶慶記』의 15항에 보면 如淨은 “參禪은 身心脫落이다. 焚香, 禮拜, 念佛, 修懺, 看經을 쓰지 않고 只管打坐만 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道元은 如淨 하에서 禪僧으로서의 진실된 修證은 只管打坐, 身心脫落임을 체험하고 귀국후 바로 「普勸坐禪儀」를 써서 자신의 종교적 입장을 선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겐의 종교세계를 只管打坐 즉 坐禪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도겐의 종교세계를 只管打坐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의 只管打坐의 의미이다. 도겐이 如淨의 가르침을 충실히 수용하여 只管打坐를 강조한 것은 좌선이 佛祖의 正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좌선이야말로 釋尊으로부터 如淨에까지 佛佛祖祖로 내려온 單傳의 妙法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도겐은 저술 곳곳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釋迦가 迦葉에게 面授하고 그로부터 28대가 지나 菩提達摩에 전수되고 다시 慧可, 慧能으로 전해져 如淨에 이른 바로 그 正法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도겐은 只管打坐만을 주장하고, 다른 수행은 무시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도겐이 좌선을 다른 모든 수행 위에 둔 것은 다른 수행 즉 看經, 念佛, 修懺을 무시했다기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좌선이야말로 正傳의 佛法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도겐의 只管打坐의 의미는 鏡島元隆의 다음 글에 잘 드러난다.


“坐禪의 역사 중에서 慧能이 지닌 중요한 의의는 좌선을 일상생활 활동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禪을 ‘깨달음의 종교’라 규정함으로써 ‘좌선’을 해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도겐은 六祖와 달리 禪을 ‘좌선의 종교’로 규정함으로써 ‘깨달음’을 해방시킨 것이다. 도겐이 좌선으로부터 깨달음을 해방시킨 것은 禪에 의해 깨달음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수행으로서 좌선에 새로운 의미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도겐은 “좌선은 이 깨달음의 의의이며 깨달음이란 지관타좌일 뿐”(『永平廣錄』)이라 설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도겐의 지관타좌의 종교적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도겐의 종교세계는 그의 스승인 如淨과 曹洞宗의 대표적 선사인 宏智正覺의 그것과 어떤 관계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2) 宏智와 道元


앞서 살펴본대로 도겐이 曹洞宗의 法脈에 선 如淨의 제자라면 그 역시 曹洞宗의 사람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불교사에서는 도겐을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라 보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도겐 자신은 禪宗이니, 曹洞宗이니 하는 宗派의 개념을 초월해 있던 선사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如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寶慶記』 14항에 보면 如淨은 佛道를 하나의 종파의 궤 안에 닫아버린 禪宗이라는 호칭을 부정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末世의 妄談이라고 했다. 如淨으로부터 배운 도겐은 한층 더 강도있게 宗派개념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 점은 도겐사상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관점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그것은 도겐의 사상을 조동종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럼 먼저 도겐 入宋 당시 중국불교계에서 사상적 대립을 지녔던 看話禪과 黙照禪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도겐 당시 宋代는 北宋중기부터 정부 상층부의 귀의를 얻어 楊岐派가 활약하던 시기였다. 楊岐派는 臨濟宗의 一派로 宋의 遷都와 함께 강남지역에서 새로운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인물은 大慧宗杲이다. 大慧는 당시의 黙照禪사람들을 坐禪에만 안주하는 無事禪의 亞流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無字公案을 들고 나왔다.

 

 “요즘은 禪林에 일종의 삿된 禪이 유행하고 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그들은 깨달음을 부차적인 것이라고 하고 枝葉末端의 일이라고 한다. 일찌기 증득한 깨달음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증득한 깨달음을 믿지 않으며 한결같이 空寂하여 어렴풋한 무의식의 상태를 有史 이전의 絶對境이라 굳게 믿으면서, 매일 두 끼의 밥을 먹는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는 일없이 비둘기가 콩알로 쏘는 장난감 총을 만난 것처럼 단지 멍하니 좌선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망령된 생각을 그치게 하는 道라고 생각하고 있다.” (T.47-901c)

 

이와같이 大慧는 黙照禪이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좌선 자체가 깨달음이라 하여 거기에 안주함을 비난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大疑團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방편으로 無字公案을 강조한 것이다.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헤아릴 수 없는 의심을 단지 주체적인 하나의 의심에 집중시켜 공안에 입각해서 의심이 깨뜨려진다면 천가지, 만가지 의심은 즉시 사라진다. 公案이 깨뜨릴수 없는 깊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公案과 대결하는 것이다. 만일 그 공안을 버리고 다른 문자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경전상의 의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다음 公案에 의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세간의 속된 일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은 이미 악마의 무리 속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것이다. 결코 스스로에게 부과된 공안을 안이하게 긍정해선 안된다. 또 제멋대로 사려분별을 자행해서도 안된다. 오직 모든 의식을 사려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집중시켜 마음을 어느 곳으로도 달아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늙은 쥐가 소의 뿔 가운데로 들어가서 막다른 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처럼.”(T 47-930a)


도겐은 대혜의 이러한 묵조선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며 묵조선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宗杲禪師는 生前에 스스로 實證하고 스스로 開悟하는 말을 토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다른 公案을 通徹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宗杲禪師 제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실증하겠는가?”                『正法眼藏』 「自證三昧」


이와같이 도겐은 『正法眼藏』에서 大慧禪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겐은  宏智를 如淨과 함께 古佛으로 칭송한다. 그렇다고 해서 도겐이 宏智와 같은 修證觀을 지닌 것은 아니고 양자 간에는 차이가 있다. 도겐은 宏智禪師의 ‘坐禪箴’을 극찬하여 이를 모방하여 ‘坐禪箴’을 선술했는데 여기서는 도겐의 ‘坐禪箴’과 宏智의 ‘坐禪箴’간의 차이점을 통해 도겐과 宏智의 修證觀을 비교해 보기로 한다.


도겐은 宏智의 ‘坐禪箴’에 나오는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라는 표현을 不思量而現 不回互而成으로 고쳐 쓰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도겐이 宏智의 ‘知와 照’ 부분을 ‘現과 成’으로 고쳐 썼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石井修道는 이를 “宏智는 坐禪箴을 통해 理法으로서의 觀照의 세계를 드러내려고 했다면, 道元은 坐禪이 곧 모든 無所悟의 現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宏智가 말한 知와 照의 의미가 道家的 觀照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면, 도겐의 現과 成은 只管打坐함이 곧 不思量, 不回互라는 깨달음의 세계가 現成하는 자리임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도겐은 宏智의 저술들 속에 나타나는 宏智의 언어들을 자기 나름대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石井修道는 도겐이 宏智의 언어를 改變한 것은 그가 宏智의 선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도겐은 宏智의 선사상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도겐선을 성립했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이에 반해 何燕生은 『道元と中國禪思想』에서 도겐이 宏智의 언어를 바꾸어 표현했다기보다 오히려 도겐이 자신의 언어를 서술하기 위해서 宏智의 ‘坐禪箴’을 빌려쓴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도겐은 자신의 좌선관을 표명하기 위해 스스로의 선체험과 깊은 인식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선사상과 계통이 같은 宏智를 참고하여 자신의 坐禪箴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도겐이 宏智를 古佛이라고 한 점과 조동종의 法脈을 이은 如淨으로부터 배웠다는 점에서도 그가 宏智禪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같은 연관성을 지녔으면서도 도겐은 宏智禪을 넘어서 자신의 종교세계를 펼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표현한 ‘現成’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도겐의 대표적 저술인 『正法眼藏』의 첫 권은 바로 「現成公案」이고 이는 도겐의 저술 중 대표성을 띤 작품이다. 거기서 말하는 現成의 의미는 佛로서의 現成이지 衆生으로서의 現成이 아니다.


이 점은 도겐의 『正法眼藏』을 어떤 관점에 서서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 주는 중요한 측면이다. 도겐은 철저하게 佛의 입장에서 신앙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한 現成의 의미 역시 佛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佛의 입장에서의 現成의 의미는 그가 『宏智錄』의 “皓玉無瑕 彫文喪德”를 “皓玉無瑕 琢磨增輝”으로 바꾸어 쓴 것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양자를 비교해보면 皓玉無瑕의 부분은 같으나 그 뒷부분은 달리 표현하고 있다. 즉 宏智는 彫文喪德이라 하였고, 도겐은 琢磨增輝라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宏智가 말한 彫文喪德은 ‘본래 티가 없는 옥에 대해 세공을 가하면 옥이 지닌 아름다움이 상실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를 불교적 표현으로 바꾸면 우리는 본래 佛이므로 그대로 좋다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道元은 琢磨增輝라 하여 宏智와 같이 본래 티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琢磨함에 의해 점점 옥이 빛을 더하게 된다고 말한다. 本來佛임에도 불구하고 수행이 필요한 것은 빛을 더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도겐의 修證觀이 지닌 의미인 것이다.


이외에도『道元和尙廣錄』卷 4에 나오는 ‘盤裏明珠 自撥自轉’ 또한 도겐과 宏智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은 宏智가 말한 盤裏明珠 不撥自轉을 도겐이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그럼 도겐이 不撥自轉을 自撥自轉으로 고쳐 쓴 의도는 무엇인가? 여기에 숨겨진 도겐의 종교적 자각은 무엇일까? 그것은 不撥이면 大慧가 비판했듯이 宏智禪이 無事禪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도겐이 말한 ‘自撥’의 경우는 本證에 머물지 않고 그 위에서 수행을 강조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겐은 우리가 본래 佛이지만, 佛은 고정화된 하나의 원리나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역동적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즉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黙照禪은 깨달음 그 자체에 머뭄을 강조한데 비해, 도겐은 ‘머뭄’이 아니라 ‘깨달음’의 빛을 더하는 역동성에로 나아가는 妙修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黙照禪은 無爲自然의 상태에 머무는 道家적 입장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면, 도겐은 깨달음에 안주함을 철저히 거부하고 깨달음으로서의 수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黙照禪과 道元禪은 本覺적 입장에 선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黙照禪은 本覺 그 자체의 측면을 강조한데 비해, 道元禪은 本覺을 하나의 고착화된 깨달음의 상태로 보지 않고 本覺妙修라 하여 本覺을 妙修와의 관계 속에서 본다. 이와같이 우리는 도겐의 종교세계인 修와 證 간에 역동적 초월관계에서 宏智와 도겐 간에 차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道元은 종교가 고집하는 그 靜的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부터의 초월을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도겐의 行持道環의 세계이다. 도겐의 『正法眼藏』 중에는 「行持」 권이 있는데 도겐은 거기에서 많은 선사들이 20, 30, 40년간 행한 行持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즉 그 긴 시간동안의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정이라기보다 覺者(佛)로서의 수행인 것이다. 도겐은 그들을 통해 釋尊이래 正傳되어온 佛法의 세계-끊임없는 역동성을 지니고 늘 꿈틀거리며 살아 숨쉬는 佛法의 세계-를 만났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宏智禪과 도겐선을 간략히 비교고찰해 보았다. 도겐은 宏智禪 내에서 無爲自然의 道家的 측면 곧 본래성에 안주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았지만 사실 본래성에 안주할 위험성은 도겐 당시의 천태본각사상에서도 드러난 측면으로, 도겐은 本覺妙修의 修證觀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 도겐과 如淨의 修證觀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3) 如淨과 道元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如淨은 眞歇의 法脈에 속한 선사이지만 그 자신은 五家宗風을 배척했고 오로지 佛法의 大道를 구하려고 坐禪弁道에 정진함으로써 독자적인 禪風을 지녔다.그는 당시 불교계가 권력의 지배와 타협하면서 종교적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수행의 순수성이 상실된 것에 깊은 문제의식을 지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불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수행관을 구축한 것이고 일생동안 名利를 멀리하며 살았던 것이다. 如淨의 문제의식이 도겐의 그것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도겐은 如淨의 인격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겐은 「行持」에서 如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禪師 天童和尙은 鉞(浙江省) 사람이다. 19세때 經論의 학문을 버리고 參禪學道에 들어서 70세에 이를 때까지 물어서지 않았다. 嘉定(1208-24)의 寧宗황제(南宋)보다 紫衣나 禪師號를 받았지만 이를 사양했다. 天下의 수행승은 和尙을 존경하고 遠近의 有識者는 이 사람의 덕을 칭찬했다. 황제도 크게 기뻐해 차를 보냈다. 그에게서 들은 자들은 모두 그의 훌륭함을 찬탄했다. 그야말로 수행자의 진실한 行持이다.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戒를 범하는 악이다. 戒를 범함은 일시적인 잘못이지만, 명예를 좋아함은 일생의 실수인 것이다. 명예를 받지 않는 것이 行持이며 이를 버리는 것이 行持이다. 달마이후 6대조사에 師號가 있었던 것은 죽은 후 天子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세상에서 명예를 받아선 안된다. 때문에 우리도 迷宮의 세계에 있는 명예를 버리고, 佛祖의 行持를 원해야 한다. 명예를 좋아함은 새나 畜生과 같은 마음이다. 名利를 버리는 것은 인간계, 천상계에서도 희귀한 것이지만 佛祖는 이를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正法眼藏』「行持 下」


이와같이 도겐은 如淨으로부터 名利를 좋아함이 곧 戒를 범하는 악이며 名利를 떠남이 수행자의 진실된 行持임을 배워서 귀국 후 이를 생애의 지침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살고자 노력했다. 이와같이 도겐은 如淨으로부터 佛法의 깨달음을 얻었고 이를 正傳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즉 도겐 역시 名利를 좋아하는 것은 戒를 범하는 것보다 나쁘다고 보고 如淨같이 名利를 떠난 것이 수행자의 진실한 行持임을 강조한다. 


도겐은 스승 如淨으로부터 名利를 떠나 只管打坐에 전념함을 배워 익혔으나 그렇다고 해서 如淨과 도겐의 사상이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如淨과 도겐 간에는 위와 같은 師資一體의 연속면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 비연속적인 면도 있다. 鏡島元隆은 『寶慶記』와 『天童如淨禪師語錄』의 비교연구로부터 도겐과 如淨 간에 비연속면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修證觀의 차이라 할 수 있다.『寶慶記』에 의하면 도겐선사가 如淨에게 ”初心으로써 道를 얻습니까, 後心으로써 道를 얻습니까”라고 묻자, 如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佛祖가 正傳한 것은 단지 初心만이 아니나, 初心을 떠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만일 단지 初心으로 道를 얻는다면 그런즉 보살은 初發心함이 佛일 것이다. 이는 不可하다. (그러나) 만일 初心이 없다면 어찌 제2, 3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후에 初로서 本을 삼고 初로서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如淨이 설하고 있는 修證觀은 修證不二이지만 修는 證에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중국선종의 일반적 修證觀에 입각하여 初心의 得道를 부정하고 있다. 이를 『大乘起信論』의 本覺, 始覺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如淨은 視覺的 修證觀으로 初心의 得道를 부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도겐은 「辨道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佛道에는 修證一等이며 證上의 修이므로 初心의 弁道가 곧 本證의 전체이다. 修이외에 證은 없다. ...修가 證이 아니면 證은 없다. 證의 修라야 비로소 修이다. 釋迦, 迦葉도 達摩, 六祖도 모두 證上의 修를 했다.”  「辨道話」


이와같이 도겐은 “佛道에는 修證一等이며 證上의 修이므로 初心의 弁道가 곧 本證의 전체이다”라고 하여 修證은 不二이기 때문에 證은 修를 향하지 않으면 안됨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初心의 得道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如淨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도겐은 『正法眼藏』 「安居」에서 “다만 因地에서 修證하는 것 뿐만 아니라 果位의 修證도 있고, 果上의 佛證도 있다”고 하여 修證의 발족점을 因地로부터 果位로 轉回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如淨의  修證觀은 理 위에서는 本覺門 사상이고, 事 위에는 始覺門이라는 二元的 修證觀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도겐은 本覺門을 理 위에서 뿐 아니라 事 위에까지 진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如淨과 도겐의 修證觀은 修證不二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如淨에게 있어서는 ‘修證은 不二이지만’ 修에서 證으로 향하고 있는데 반해, 도겐은 ‘修證이 不二이므로’ 證에서 修로 향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도겐은 如淨처럼 修證不二를 주장한 점에서는 같으나 如淨처럼 始覺門的 修證觀에 서지 않고, 初心의 得道 또한 인정하는 本覺門的 修證觀에 섬으로써 양자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도겐이 如淨의 佛法을 전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과 동일하지는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宏智와 如淨의 修證觀과 비교하여 도겐의 修證觀에 대해서 간략히 고찰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겐은 宋代禪宗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선종이나 조동종과 같은 종파개념을 뛰어넘어 붓다로부터 내려온 佛法인 좌선을 전수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도겐에게 있어서 ‘本證妙修’라는 修證觀으로 드러난 것이다. 도겐이 추구한 종교적 세계는 佛法세계가 지닌 역동성으로, 이를 벗어난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를 배격한다는 사실이다. 이와같이 도겐의 종교세계는 如淨과 당시 宋朝의 黙照禪 창시자인 宏智正覺의 그것과 연관성을 지녔으면서도 그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점을 도겐의 「佛性」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3. 『正法眼藏』「佛性」의 구조


「佛性」권은 道元이 南宋으로부터 귀국한 후 京都 부근의 興聖寺에 있을 때 示衆한 것으로 도겐의 『正法眼藏』 중 「現成公案」과 함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佛性’이라는 주제는 불교사 안에서 특히 중국불교사 안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었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佛性의 의미는 佛陀의 본성, 깨달음 그 자체의 성질, 미완성으로부터 佛이 될만한 성질, 佛이 될 가능성으로 알려져 왔다. ‘불성’에서 ‘性’은 본래 ‘dhatu’를 말하는데 이는  놓인 장소, 기반, 토대라는 의미이며, 교의상으로는 種族, 種姓(gotra), 因(hetu)와 같은 뜻이라고 본다. 따라서 佛性은 佛種 혹은 佛種性으로 佛이 지닌 속성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불성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틀을 넘어서서 불성을 해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佛性」권을 통해 불성 그 자체-佛法의 근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우리 존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는 「佛性」을 통해 불교사에서 개념의 틀 속으로 화석화되어버린 ‘佛性’에 살아있는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으며 우리 자신이 그 불성의 생명과 만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도겐의 불성이해를 다룸에 있어 여기서는 『正法眼藏』「佛性」의 전체를 언급할 수는 없고 그 중 「佛性」권 첫 부분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도겐의 불성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1)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


‘一切衆生悉有佛性’은 『涅槃經』에 나오는 유명한 어구로써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상식이 되어있는 정도로 잘 알려진 표현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이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해석해 왔다. 이같이 一切衆生悉有佛性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는 전통적 견해에서는 불성은 佛이 될 수 있는 힘, 佛이 될 수 있는 능력,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佛性의 佛은 覺과 같은 의미로 보아 “깨닫는 힘이 중생 안에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일체중생은 佛의 활동 혹은 깨달음의 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佛이 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의 해석에서 불성과 如來藏 사상을 동일시하는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如來藏의 ‘藏’에 해당하는 인도의 原語는 胎 즉 ‘모친의 배 속’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如來藏은 중생이 佛을 안에 품고 있는 것과 같이, 佛이 될 수 있는 가능성, 佛이 될 수 있는 능력, 佛이 될 수 있는 원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중생에게 如來藏이 있다”거나 “一切衆生이 如來藏이다”라는 如來藏사상은 앞서 살펴본 佛이 될 가능성으로서의 불성해석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불성 해석에 대해 최근 일본불교계에서는 ‘불성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비판의 소리가 있어왔다. 이들은 비판불교를 주장하는 이들로서 釋尊의 가르침의 중심을 緣起사상와 無我思想이라 규정하고 그외 것은 불교가 아님을 주장한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本覺사상이며 이와 관련된 불성사상이다. 그들은 기존의 불성해석에는 초기 불교가 부정한 아트만의 사상적 잔재가 남아있다고 봄으로써 불성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구축함에 있어 도겐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다.


즉 그들은 도겐이 후에 『정법안장』12권을 저술한 동기는 도겐이 먼저 저술한 75권의 『正法眼藏』내에 불성사상과 관련된 本覺사상적 잔재가 남아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모두 폐지하고 새롭게 『正法眼藏』을 쓸 목적이었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이러한 그들의 해석은 도겐의 근본적인 종교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살펴볼 불성의 해석과정에서 이러한 측면은 잘 드러나리라 본다. 


1) 是什麽物恁麽來의 문제


『正法眼藏』「佛性」은 ‘一切衆生悉有佛性’으로부터 시작된다. 道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해석함에 있어 먼저 중국선종의 六祖인 慧能이 南嶽에게 물었던 ‘是什麽物恁麽來’을 언급한다.


“世尊이 말한 一切衆生悉有佛性 그 宗旨는 무엇인가? 그것은 是什麽物恁麽來이며 轉法輪이다.”


『涅槃經』의 “一切衆生 悉有佛性 如來常住 無有變易”는 釋尊의 말씀으로, 모든 諸佛과 모든 祖師들이 그 도리를 參學해서 면면히 이어온 佛法의 진리이다. 그런데 도겐은 이를 是什麽物恁麽來 즉 “어떤 물건이 이와같이 왔느냐?”라고 해석하고 있다. 是什麽物恁麽來는『景德傳燈錄』과『天聖廣燈錄』에 의하면 慧能과 懷讓(677-744)의 처음 對面했을 때 나오는 말로, 慧能이 懷讓을 향해서 이 질문을 던졌고 懷讓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8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도겐은 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是什麽物恁麽來’라는 禪問答을 서두에 꺼낸 것일까? 『涅槃經』의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이라는 祖語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是什麽物恁麽來는 스승이 제자를 향해서 “너는 누구인가? 어떻게 왔는가?”라고 묻는 일종의 화두라 할 수 있다. 즉 是什麽物恁麽來는 깨달은 六祖가 아직 깨닫지 못한 衆生인 南嶽에게 준 화두로, 南嶽은 혜능으로부터 이 화두를 받고 8년간 이것과 씨름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는 “참된 너는 누구냐? 살아서 내게 온 너는 누구냐?”를 묻는 것으로써 바로 인생의 決着을 내리는 결정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是什麽物恁麽來가 이런 의미를 지녔다면 도겐이 이를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는 서두에 둔 것은 불성에 관해 무언가 새로운 해석을 해 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是什麽物恁麽來가 南嶽의 화두였듯이, 一切衆生悉有佛性 또한 단순한 객관적 명제이거나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실존적 상황을 묻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도겐이 ‘一切衆生悉有佛性’을 해석하면서 六祖와 南嶽의 문답인 是什麽物恁麽來를 들고 나온 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로 보는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是什麽物恁麽來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도겐에게 있어 ‘一切衆生悉有佛性’은 실존적 화두이지, 기존의 해석과 같은 존재하는 실체와 존재의 근원과의 관계를 문제삼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도겐의 불성해석 전체를 흐르고 있는 축이며 그의 불성이해의 精髓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기존의 불성이해를 둘러싼 종교철학적인 해석이나 교의적 해석을 뒤로 하고, 불성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직시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방식을 통해 그의 문제의식이 결코 존재론과 같은 종교철학이나 교의적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겐이 이해하기에 이 문제는 고타마 붓다이래 불교사에 나오는 모든 祖師들이 지녔던 실존적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를 是什麽物恁麽來의 ‘祖語’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는 도겐의 해석에서 읽어낼 수 있다. 佛語와 祖語를 같은 線上에서 이해한다는 사실은 佛法이 佛에서 佛에로, 佛에서 祖師에게로 전해졌다는 佛法의 正傳에 대한 도겐의 믿음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와같이 그의 불성이해는 佛法의 正傳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 안에서 佛이 法輪을 돌리는 轉法輪을 분명히 들은 것이다.


2) 轉法輪의 문제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是什麽物恁麽來’뿐 아니라 ‘轉法輪’이라고 표현한다. 일체중생실유불성을 轉法輪으로 해석한 도겐의 숨은 의도는 무엇인가? 『涅槃經』은 佛이 중생에게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한 것으로써 도겐은 이를 고타마 붓다가 처음 자신의 깨달음을 다섯 비구에게 설하여 法輪을 돌린 그 깨달음의 세계에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붓다가 첫 법륜을 돌린 이후, 붓다가 설한 것은 개념이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의 문제에 직면하여 좌선을 통해 얻은 깨달음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고타마붓다의 그 깨달음의 세계가 祖師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도겐은 붓다의 ‘일체중생실유불성’과 6조의 ‘是什麽物恁麽來’ 問答을 하나의 轉法輪으로 봄으로써 우리에게 佛法의 전수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도겐의 『正法眼藏』 중에는 「轉法輪」권이 있다. 거기서 도겐은 “한 사람이 眞을 發하여 源에 돌아가면 十方의 虛空이 모두 사라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한 사람이 참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근원에 귀착하면 十方의 허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도겐은 한 사람이 참됨을 발하여 源에 돌아간다는 것을 “눈알을 빼내어서 法輪을 돌리는 것이며 코구멍을 막고 허공을 가리키고 있는 곳에서 法輪을 스스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도겐에게 있어 ‘法輪을 돌린다’는 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눈알을 빼내어 돌릴 정도의 실천적 수행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法輪을 돌림으로써 즉 只管打坐의 수행을 통해 나의 분별의 세계가 부서져 佛과 나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그 상호만남을 통해 佛法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말한 轉法輪은 發心하여 좌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달하는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正法眼藏』「行持」에서 말한 것처럼 發心, 修行, 菩提, 涅槃의 끊임없는 行持道環이다. 즉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하고 열반에 달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속 속에서 行은 지속적으로 행함 즉 行持의 상태를 말한다. 도겐은 「行持」에서 諸佛諸祖들의 行持의 삶을 열거하고 있다.


이와같이 도겐은 말한다. 行持는 원환적인 轉法輪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겐의 ‘轉法輪’ 해석에서 그의 只管打坐와 行持道環의 양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是什麽物恁麽來’뿐 아니라 ‘轉法輪’으로 해석함을 통하여 고타마붓다가 只管打坐를 통해 깨달은 그 달마(법)의 세계가 그의 제자들의 끊임없는 行持道環을 통해 전해졌고, 그 세계가 바로 6조 慧能이 南嶽에게 전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2) 悉有의 문제

1) 실체론 비판과 悉有의 의미


도겐의 불성을 이해하는데 悉有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겐은 ‘佛性은 반드시 悉有’라고 말한다. 즉 悉有는 곧 불성이며 悉有야말로 佛語, 佛說, 佛祖眼晴과 같은 무게를 지녔다는 것이다. 우리가 悉有의 의미를 제대로 자각한다면 도겐이 말하고자 하는 불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悉有는 도겐의 불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표현이다.


“佛과 性은 達彼達此이다. 佛性은 반드시 悉有이다. 왜냐하면 悉有가 그대로 佛性이기 때문이다. 悉有는 百雜碎에 있지 않으며 一條鐵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주먹을 쥐는 것같은 拈拳頭이기 때문이다.”            『正法眼藏』 「佛性」


그럼 여기서 말하는 悉有의 의미란 무엇인가? 도겐은 悉有를 “무엇무엇에 드러나지 않는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도겐은 悉有가 百雜碎, 一條鐵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百雜碎는 일체의 존재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 一條鐵은 존재의 근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겐은 悉有가 百雜碎나 一條鐵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결코 百雜碎같은 실체적 존재나 一條鐵같은 존재의 근거가 아님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도겐은 계속해서 悉有를 부정적 표현을 통해 설명한다.

 

“지금 佛性이 悉有라고 하는 有는 有無의 有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悉有는 佛語이며 佛舌이며 佛祖眼晴이며 衲僧鼻孔이다. 悉有는 始有나 本有, 妙有, 緣有, 妄有에 드러나지 않으며, 心境性相과도 관계없다.

그것은 衆生悉有의 依正, 業增上力,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도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중생의 悉有가 業證上, 緣起法爾라면 諸聖의 證道, 諸佛의 菩提, 佛祖의 眼晴도 業增上力 緣起法爾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盡界는 모두 客塵이 없고 直下에 제2人이 없다..... 徧界不曾藏이기 때문에 妄緣起의 有에는 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徧界不曾藏은 滿界是有라고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徧界我有는 外道의 邪見이다. 本有의 有에 드러나지 않으며, 始起의 有에도, 無始有의 有에도, 始起有의 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正法眼藏』 「佛性」


悉有는 有無의 有에 드러나지 않으며, 有無를 변증법적으로 지향하는 妙有에서도 드러나지 않고, 수행을 배제한 本有에서도 드러나지 않으며, 다만 本證 위에서 顯現하므로 始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悉有는 이상에서 살펴본 불교사 내에서 드러난 개념적 정의들 즉 始有, 本有, 妙有, 緣有, 妄有를 초월한 세계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도 悉有는 心境性相과도 상관없고 業增上力이나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에도 드러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悉有가 불교의 어떤 논리로서도, 인간의 分別智에 의해서도 결코 표상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도겐은 불교사 안에서 해석해온 것같이 불성을 理로서 표상된 어떤 언어적 표현도 부정하고 있다. 또한 도겐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緣起나 業力으로서도 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緣起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있음을 말하며 그 인연의 힘이 業力이다. 그런데 도겐은 悉有가 불교의 근본교리인 緣起나 業力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실존적 화두인 佛性은 緣起나 業力이라는 개념으로는 드러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 도겐은 ‘悉有는 法爾로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불교의 근저에 면면히 흘러온 法爾-존재 그 자체의 상태-라는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즉 우리가 法爾라는 관념에 집착할 때 悉有는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가 관념화된 法爾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비로소 우리는 悉有로서의 불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悉有를 拈拳頭에 비유하면서, 누군가가 주먹을 불끈 쥔 것과 같은 약동하는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진정한 悉有로서의 佛性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이 불교의 근본교리, 중심개념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본 것은 우리가 그 개념들에 집착하고 고착화됨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해방될 때 비로서 불성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것은 불성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방식에 관련된 실존적 사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겐은 이를 구체적인 표현을 빌려서 ‘衲僧의 코구멍’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佛性은 우리자신의 주체적인 활동을 통해 顯現하는 나의 코구멍이고 나의 面目이며 생명활동의 本源인 것이다. 이와같이 불성이 살아있는 주체의 역동적 활동 -臨濟는 이를 活潑潑地라고 한다-을 통해서 드러남을 역설한 것이다.


2) 佛性內在論 비판


도겐은 불성에 대한 실체론적 해석을 부정할 뿐 아니라, 불성이 실체적인 중생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佛性內在論도 비판한다. 


“어떤 부류는 말한다. 佛性은 草木의 종자와 같다고. 法雨가 내려 물기를 머금을 때 눈과 줄기가 자라고 가지와 잎이 나고 과실이 생긴다. 그 과실에 또 종자가 생겨난다. 이러한 사고는 범부의 어리석음이다. 이같이 생각해도 종자와 꽃과 과실이 모두 각각 赤心임을 參究해야 한다.


과실 안에 종자가 있다. 종자는 보이지 않아도 뿌리와 줄기가 생겨나 있다. 모여 있는 것이 아닌데 많은 가지가 나와 큰 나무가 된다. 이것은 內外를 云云하는 議論이 아니다. 古今에 걸쳐서 진실이다. 이렇기 때문에 凡夫의 사고방식(가능성으로서의 佛性)을 인정한다고 해도 根莖과 枝葉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佛性이다.”                  『 正法眼藏』「佛性」 


佛性內在論은 山內舜雄이 命名한 것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佛性이 하나의 종자로서 있어 이것이 씨가 자라나듯이 성장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고(高畸直道), 다른 하나는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단지 가려져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것으로 여기서는 번뇌(무명)를 제거하면, 그대로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하나는 佛性을 가능성으로, 다른 하나는 이미 완성된 상태이나 번뇌로 가리워 있을 뿐이라고 보는 차이는 있으나, 둘다 불성을 內在하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일치한다. 그래서 이를 佛性內在論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불성이해를 비판한다. 


그럼 우선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마치 종자가 싹이 트고 자라서 枝葉花果가 되듯이 불성을 佛이 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漸修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은 佛이 아니고 수행을 닦아서 점차적으로 佛이 된다는 점진적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종자가 자라서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와 잎이 생기듯이 이같은 과정으로 우리가 佛이 된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도겐은 뿌리, 가지, 잎을 하나의 성장과정으로 보지 않고 이미 그 자체를 각각 佛性의 顯現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면은 뒤에서 더 상세히 언급하기도 하겠다. 후자의 경우는 心性常住說과 관련해서 깊이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겐의 사상과 이를 구별짓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佛性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학자들은 先尼外道가 我를 주장하는 것같이 오해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진실한 자기를 만나지 못했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바람과 불의 움직임과 같은 心意識을 佛性의 覺知覺了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말했나? 佛性이 覺知覺了라고. 覺者, 智者는 諸佛이 되어도 佛性은 覺知覺了에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諸佛을 覺者智者라고 하는 覺知는 너희가 말한 邪解를 覺知하는 것과 다르다. 風火의 動靜을 覺知하는 것에는 佛性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一面의 佛面祖面 이것이야말로 覺知인 것이다. 옛 노스승은 인도를 가거나 人天을 가르치거나 後漢에서 宋朝에까지 많은 불교자를 배출했다. 많은 이가 風火의 動著를 불성의 자각이라고 생각해왔다.


 가여운 일이다. 學道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잘못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 佛道를 배우는 初心者는 이렇게 해선 안된다. 覺知를 배워도 覺知는 動著에 있지 않고, 動著를 배워도 動著는 이같은 것(風火의 動著를 佛性으로 생각하는 것)에 있지 않다. 만일 참된 動著를 만나고자 한다면 참된 覺知覺了를 만나야 한다.”        『正法眼藏』「佛性」


여기서 도겐은 당시 心性常住論的 佛性이해를 비판한 것이다. 心性常住論에 대한 도겐의비판은 『正法眼藏』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正法眼藏』「卽心是佛」에서 도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唐의 大證國師 慧忠和尙( -775)이 어느 僧에게 물었다.

國師; 어디서 왔느냐?

  僧; 남쪽에서 왔습니다.

國師; 남쪽에는 어떤 스승이 있더냐?

  僧; 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國師;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더냐?

  僧; 어떤 스승은 卽心是佛을 가르칩니다. “佛은 깨달음의 의미이며 너희는 모두        見聞覺知의 性을 키우고 있다. 그 性을 떠나서 다른 佛은 없다. 이 몸이 生滅        해도 心性은 無始이래 生滅치 않는다.”

國師;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先尼外道와 다를 바가 없다. 外道에서는 말한다. 이        몸중에 하나의 神性이 있다. 죽게 되면 神性은 밖으로 나간다. 집이 타면 집        주인이 나가는 것과 같다. 집은 無常하나 집주인은 常住이다“고.

                                              『正法眼藏』「卽心是佛」


先尼外道는 본래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인정하는 인도의 外道를 말한다. 이와같이 先尼外道는 아트만을 인정하므로 無我를 주장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慧忠은 불교사 안에서 이같은 我의 잔재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바로 心意識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다. 이와같이 南陽慧忠이 남쪽 스승들의 가르침을 先尼外道의 가르침과 같다고 보고 이를 비판한 것은 心意識에 관한 교리에 我的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도겐 역시 慧忠과 같이 『正法眼藏』을 통해 이같은 心性常住論을 비판하고 있다.


도겐은 心意識의 활동을 마치 風火의 움직임과 같다고 보는데 여기서 말하는 風火는 모든 존재의 구성요소인 四大(地水火風)의 風火로 바람은 空氣息을 내며 불은 열이 있으므로 이는 곧 살아가면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心意識의 활동이 바로 이와같은 風火의 動著와 같다고 볼 때 이런 관점에서의 불성 이해는 결국 覺知覺了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겐은 心意識的 불성이해가 불성의 올바른 이해라 보지 않으므로 心意識을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불성이해인 心性常住論을 비판한 것이다. 도겐은 心性常住說이야말로 禪宗의 최대의 오해라고 보고 이 문제를 『正法眼藏』「卽心是佛」, 「說心說性」에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普勸坐禪儀」에서도 “心意識의 운전을 그만 두고”라고 하여 心意識을 비판하고 있다.


南陽慧忠은 ‘무엇이 古佛心이냐’는 물음에 대해 ‘牆壁瓦礫’이라고 답한다. 어떻게 牆壁瓦礫이 古佛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慧忠의 답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佛을 參究한다는 것은 인간의 生의 진실을 묻는 것이며 무엇보다 존재의 근본을 묻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결국 여기서 마음을 실체화하고 신비화해서 이를 崇敬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慧忠이 牆壁瓦礫이라고 답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古佛心이 바로 牆壁瓦礫”이라는 것은 古佛心은 인간의 마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같이 도겐은 慧忠의 말을 인용하여 불교의 唯心主義的  해석의 경향 즉 卽心是佛을 心性常住論的으로 해석함을 비판하면서 卽心是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卽心是佛을 參究해도 좋고 心卽佛是를 參究해도 좋고, 佛卽是心, 卽佛心卽을 參究해도 좋다.”                      『正法眼藏』 「卽心是佛」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겐이 卽心是佛의 卽, 心, 是, 佛 각각을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봄을 의미한다. 卽을 參究하건, 心를 參究하건, 是를 參究하건, 佛을 參究하건 그 모든 參究가 바로 佛性의 顯現이기에 卽心是佛을 參究해도 좋고, 心卽佛是를 參究해도 좋고, 佛卽是心, 卽佛心卽을 參究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卽心是佛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釋尊이래 諸佛에게 正傳되어오고 지켜온 佛道의 생명, 진리의 現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의 現成 곧 佛性의 現成은 諸佛에 의해 正傳되어온 佛法인 發心, 修行, 菩提, 涅槃의 行持道環을 통해서만 그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는 자는 그 참된 의미를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卽心是佛을 수행하고 깨닫는 것 안에서 不生不滅을 깨닫는 것이다. 수행하고 깨닫는 것이외의 것은 卽心是佛이 아니다”(『正法眼藏』「卽心是佛」)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發心, 修行, 菩提, 涅槃 각각을 단계로 보아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도겐은 “종자와 꽃과 과실은 모두 각각 赤心임을 參究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赤心은 존재의 現成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종자와 꽃, 과실은 각각 존재의 現成 그 자체이지 아직 미완성인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겐은 “根莖과 枝葉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根莖枝葉이 각각 그 존재의 現成 자체라고 할 때 자칫 잘못하면 분별심있는 상태를 그대로 불성이라고 보는 ‘佛性顯在論’으로 해석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佛性顯在論이 지닌 위험성은 수행의 필요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도겐의 불성이해에서 수행을 빼어버리면 불성 그 자체의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즉 도겐이 말하려는 ‘불성’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분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그 존재성 즉 佛로서의 존재의 現成이지, 분별의식을 지닌 그 자체를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점을 구별치 않으면 도겐의 종교적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와같이 도겐의 종교적 세계에서 중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수행론’이다. 心性常住論에서는 이미 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보므로 수행이 필요치 않게 된다. 있는 그대로가 이미 佛性이며 本來佛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겐이 의심을 품었던 天台 本覺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고자 하는 불성은 마음 뿐만이 아니라 몸도 함께 닦는 ‘身心學道’의 수행을 빼고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3) 佛性의 顯現


앞서 우리는 佛性顯在論이 지닌 위험성은 수행론의 배제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 佛性顯在論과 구별되는 도겐의 불성이해는 바로 도겐이 수행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겐은 불성이 顯現하는 때를 正當恁麽時라고 표현한다.  (“正當恁麽時는 衆生의 內外 곧 佛性의 悉有이다.”『正法眼藏』「佛性」) 여기서 우리는 正當恁麽時의 ‘恁麽’의 의미를 좀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도겐은 『正法眼藏』「恁麽」권에서 “恁麽는 우주보다 커서 우리가 어떤 수를 써도 알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역사 안에서 恁麽를 규정하고 측량하려고 애써왔고 지금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恁麽를 측량하는 일이 아니라 다만 그 恁麽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임을 도겐은 역설하고 있다. 恁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가? 도겐에 의하면 그것은 身心脫落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身心脫落은 자기의 身心을 脫落시켜 모든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佛性이 顯現하는 正當恁麽時는 身心脫落의 때를 의미하며 바로 그러한 신심탈락은 도겐이 天童如淨(1162-1227)으로부터 배운 지관타좌의 때이며 佛이 現成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불성이 顯現함은 身心脫落의 자리에서 드러나며 身心脫落은 바로 只管打坐의 자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佛性의 顯現과 只管打坐는 불가분의 관계라 볼 수 있다. 도겐은 「辨道話」에서 자신이 말하는 좌선은 修證一等이며 證 위에서의 修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只管打坐는 佛性인 證 위에서의 좌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와같이 도겐이 말하는 불성의 顯現에 대한 자각은 佛性顯在論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수행론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身心脫落의 상태에서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도겐이 깨달은 身心脫落에서 드러나는 佛性이며 只管打坐를 통해 顯現하는 佛性인 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참된 신앙이란 고착화된 믿음체계나 교리로부터 벗어나 초월의 세계에 우리 존재를 열어두는데 있다고 했다. 도겐은 우리가 그러한 신앙의 세계에 눈뜨기 위해서 벗겨내야 할 작업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불교적 교리나 관념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알게 모르게 개념화나 관념적 구축 안으로 숨어버리거나, 言說의 物象化를 통해 존재의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등, 존재의 초월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종교를 云云하고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에게 도겐은 『正法眼藏』「佛性」을 통해서 자칫 빠지기 쉬운 종교의 物象化로부터 자유로와지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겐은 「불성」을 통해 관념의 집착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존재론적 실체론과 내재론적 불성이해로부터도 벗어나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도겐은 불성이 결코 힌두교에서 말한 梵我一如와 같은 실체론적 존재와 그 존재적 근거와의 관계에서 드러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靈知, 眞我, 覺元, 本性 本體라고 불리는 신비화되고 절대시된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