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글도겐의 수증관이 지닌 독특성 10.10.25
- 다음글道元의 佛性理解 序說 10.10.25
도겐의 수증관의 역사적 배경
페이지 정보

본문
가. 1. 도겐의 수증관의 역사적 배경
나.
1) (1) 중세일본불교의 배경
2)
3) ① 정치권력의 변화
4)
일본은 고대체제―즉 고대국가와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律令政治―가 붕괴되면서 중세로 접어들게 되었다. 중세의 전기인 가마꾸라(鎌倉)시대에 일본은 전반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개혁뿐 아니라 종교의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형성된 가마꾸라신불교(1185-1333)는 일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가마꾸라신불교를 통해 일본불교는 중국불교에서 답습해오던 불교형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독창적인 신앙체제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헤이안시대말부터 형성된 가마꾸라신불교는 당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무사계급의 흥기, 무가정권의 성립은 신불교 출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 헤이안말 일본사회의 변화와 이것이 신불교 성립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자.
정치권력의 변화는 역사를 변화시키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은 다이카(大化) 1年(645)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면서 중국의 당왕조 법제를 모방하여 율령제도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 민중들은 무거운 짐에 허덕였으므로 지배계급에 거센 저항을 했으나, 그들을 위협할만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고대사회 체제하에 있던 일본은 그 후 셋칸정치(攝關政治)가 성립되면서부터 이전 사회와는 다른 특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귀족들의 역할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율령기구에서 귀족들은 관료로서 인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지만, 攝關貴族 政治時代가 되면서는 인민대중과 접촉할 기회가 점차 사라졌다. 그것은 귀족들이 맡았던 실제 정무는 하급관인이 하고 귀족들은 연중행사인 관직의 임명이나 의식만을 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귀족은 영주나 莊官(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莊園의 관리를 맡기고 그 수익의 일부를 징수만 하는 명목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따라서 그들과 농민들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 세력은 영주들에게 넘어가면서 무사武士라는 신흥세력이 형성되었다. 지주로서 세력을 잡은 무사들은 농업경영이라는 현실적 기반 위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종전의 권력자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천황제 기구의 내부와 깊이 연관되어 귀족과의 타협을 자주 했으므로 사회 전체가 봉건사회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이라(平)氏는 호오겐(保元)의 亂과 헤이지(平治)의 亂을 해결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했지만 귀족정치를 대신할 武家政治를 열지는 못했다. 그 후 建久3年(1192) 미나모또 요리또모(源賴朝 1147-1199)가 다이라씨를 멸망시키면서 막부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源賴朝도 당시 수도였던 교또와 가마꾸라의 이원적 정치지배 관계를 얼마간 지속하다가 1221년 조큐(承久)의 변을 맞았고 결국 무사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은 중국식 황실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부터, 강력한 지방지주들이 주도하는 중세적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무사가 권력을 쥐자 더 이상 국가권력은 인민을 노예처럼 부릴 수 없게 되었고 분산적인 토지지배를 통해 토지를 지닌 인민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탈바꿈해 갔다. 이처럼 토지에 대한 지배가 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봉건사회가 되자, 토지를 차지한 무사들 간에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주종의 계약관계로 맺어진 무사와 부하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한번 전쟁에 나가게 되면 생사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자연히 거기서부터 주종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건 전쟁을 통해 맺어진 인간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성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 무사들이 귀족들을 물리치고 권력장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끈끈한 인간관계가 지닌 위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가마꾸라 막부가 열리면서 정권의 중심은 교또에서 가마꾸라로 옮겨졌고 정치, 문화, 종교도 공경公卿 중심에서 무가본위武家本位로 탈바꿈했다. 특히 무사 중심의 시대가 되면서 귀족중심의 불교는 민중중심의 불교로 바뀌어 갔다. 즉 민중세력의 상승이 귀족불교와는 다른 민중신앙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앙이 싹트는 데에는 다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일본은 귀족 간의 투쟁, 무사들 간의 전쟁 등 만성적 전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의 격렬한 변동과 심각한 위기상황도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와 같이 정권교체와 세력다툼이 계속될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재해까지 덮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종전과 같은 현세기복적 차원의 불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 물음과 말법의식을 가졌고, 이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추구했다.
平安朝佛敎는 신도神道라는 현세구복적 종교와 정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습합되어 있었다. 이 때의 불교는 귀족들의 복리를 위해 기도하고 각종 의례를 행하는 주술적 종교로 변해 있었다.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는 민중들의 순수한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죄악과 참혹상을 목도하는 사람들에게현세구복적 종교는 설득력을 상실했다. 말법시대적 상황에 처한 헤이안平安 말기에 사람들은 세간적 안전보다는 초세간적 구제를 필요로 했다. 또한 국가와 집단의 종교가 아니라, 개인적 신앙을 추구했다. 즉 옛 종교의 안이한 시각을 떠나 세계와 인간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종교를 갈망한 것이다. 이러한 바램이 가마꾸라시대에 혁신적 종교운동을 발생케 한 요인이 된 것이다.
불교가 본래 지닌 종교적 가치 곧 초세간적 성격이 제자리를 잡아가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자각은 불가피하다. 사실 가마꾸라신불교 주창자들이 제창한 불교 형태는 민중의 종교적 요구를 채워주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목적은 아니었다. 신불교의 출현은 당시 불교에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의문에서 출발하여, 나름의 깊은 자각을 얻은 후 민중구제 활동으로 나온 것이다.
종전의 불교와 달리 신불교가 초세속주의적 분위기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신불교 종조들의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불교는 이들에 의해 비로소 세속을 초월한절대적 신앙세계를 구축하고 불교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간 것이다. 이는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의 다음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가마꾸라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본불교는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절대모순을 자각하고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5) ② 헤이안불교의 쇠퇴와 말법사상
6)
가마꾸라불교 운동의 배경이 된 헤이안불교는 사이쵸오(最澄: 767-822)와 쿠우카이(空海: 774-835)에 의해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사이쵸오는 9세기초에 唐으로 건너가 천태종의 교리를 배운 뒤 돌아와서 히에이잔(比叡山)에 연력사延曆寺를 세우면서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그러나 사이쵸오는 천태종만이 아니라 선종과 밀교 등 당시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를 아울러서 나라(奈良)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다. 따라서 일본천태종은 중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사이쵸오는 법화法華를 중심으로 禪, 戒, 密을 융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천태종을 열면서도 법화일승法華一乘을 내세웠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을 모아 총합적인 체계확립을 도모한 사이쵸오는 조정의 후원을 입어 히에이산에 절과 대학을 건립했다. 그는 거기에 중국에서 가져온 경전들과 천태종의 가르침을 담은 전적典籍을 소장했다. 그래서 그 곳은 당시 대표적인 불교도량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히에이산은 당시 진리탐구의 배움터만이 아니라, 수행의 도량으로도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이쵸오와 함께 헤이안불교 확립에 기여한 쿠우카이는 진언밀교眞言密敎를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같이 양자에 의해 정착된 헤이안불교는 귀족들의 귀의와 보호를 받아 융성해져서 전시대에 볼 수 없던 국가불교요, 귀족불교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헤이안불교의 중심지인 히에이산은 귀족들과 깊은 결속관계를 맺으면서 귀족들이 불교에 걸었던 기대인 개인과 가족의 현세적 이익을 위한 가지기도加持祈禱와 주술적 의례를 주로 하는 형태로 변해갔다.
천태종에서도 의식작법이 발달한 밀교를 점점 더 중시하면서 밀교 본위로 변해갔다. 이와 같이 일본천태종에 밀교적 경향이 짙어진 것은 사이쵸오가 진언밀교를 법화사상과 동일한 가치로 인정하면서부터였다. 그가 진언밀교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밀교의 수행법인 삼밀三密의 실천방법이 卽身成佛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사이쵸오는 밀교의 수행법이 천태종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을 보완해 줄 수 있다고 보아 밀교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밀교에 대한 사이쵸오의 각별한 관심은 그의 제자인 엔닌(圓仁, 794-864)과 엔찐(圓珍 814-891)에게 전수되었다.
엔닌은 唐에 가서 밀교를 배운 뒤 이를 천태교학에 접목시켰다. 그는 천태원교天台圓敎와 밀교의 관계를 이동사별理同事別이라 보았는데 이는 원교와 밀교가 리理에서는 일치하나 事는 별도로 한다는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엔찐은 밀교와 천태는 理는 같으나 事에 있어서는 밀교가 더 뛰어나다는이동사승理同事勝을 주장함으로써 밀교를 더욱 강조했다. 이와 같이 엔닌과 엔찐 때에 이르러 천태종은 밀교적 경향으로 더욱 기울어졌고, 5조인 安然(841-915)에 와서는 예산진언종叡山眞言宗을 수립해서 진언밀교야말로 일체교법을 포섭한 일대원교一大圓敎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이쵸오 때에 천태법화종의 발전을 위해 도입한 밀교가 후대에 와서 예산진언종을 낳는 결과가 된 것이다.
천태종의 이러한 변화는 당시 수행승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당시 전쟁과 천재에 시달려온 서민들에게 아무런 종교적 구제의 메시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교는 나라(奈良)시대부터 내려온 사원의 대규모 토지 획득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면서 사원의 타락과 부패의 징조는 늘어만 갔다. 사원들은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출가수도승들을 승병으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승병은 공격을 위한 군대로 전환되어 많은 부를 끌어 모으는데 이용되었고 조정을 협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승병의 반란과 폭동, 권력을 위한 투쟁, 살인, 음모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당시 불자들은 말법시대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당시 保元, 平治의 전란으로 인해서 사회질서는 해체되어 갔고, 점점 더 심각해진 당시의 사회적 위기 상황은 말법의 가르침이 현실로 드러난 것처럼 비추어졌던 것이다. 관념으로만 전해오던 말법시대가 현실화된 느낌을 준 헤이안(平安)말 상황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말법사상의 보급으로 인해 정통 불교에 위기가 옴에 따라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형태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가마꾸라신불교이다. 가마꾸라신불교의 발생요인으로는 말법시대적 상황 외에도 천태본각사상을 들 수 있다.
7) ③ 천태본각사상
8)
일본불교계는 천태본각사상이 佛敎뿐 아니라 神道, 문학, 예술의 방면에까지 두루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천태본각사상 연구를 착수한 이는 島地大等(1875-1927)이다. 그는 가마꾸라신불교의 제종諸宗을 모태로 한 것을 일본중고천태日本中古天台로 본다. 중고中古는 헤이안시대 중기(11세기말)부터 江戶 시대의 元綠, 享保期(18세기초)까지를 가리키며 그 이전을 상고上古라고 부른다. 상고천태시대와 중고천태시대의 학풍 차이는 다음과 같다.
그 학풍은 敎相主義와 觀心主義, 즉 文獻主義와 口傳主義라는 태도의 차이가 있으며 근본사상의 관점에서는 시각始覺 사상과 본각本覺 사상으로 나뉜다. 이렇게 볼 때 교상주의의 태도를 기본으로 하여 본각사상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고 뚜렷한 발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상고천태시대이다. 이에 반해 觀心主義의 학풍, 구전주의의 태도를 근저로 하여 본각사상 그 자체가 高潮 침투해서 비밀리에 구전하여 相承傳授함을 중시하기에 이른 것이 중고천태시대이다.
이와 같이 일본천태를 상고천태와 중고천태로 나누어 중고천태사상을 천태본각사상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천태본각사상의 형성은 중국의 본각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각은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표현이다.
『기신론』은 화엄종을 비롯한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에 영향을 미친 논서로 중국불교 내에서 두루 쓰여졌다. 또한 거기에 나오는 본각사상은 『기신론』이래 발전한 중국불교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천태본각사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기신론』에서 나온 본각사상부터 고찰할 필요가 있다. 『기신론』에서는 본각을 망념을 완전히 벗어버린 순일한 진여의 모습 즉 법신으로 설명한다.
覺이란 마음의 본체가 念에서 벗어난 것을 일컫는다. 念을 떠났다는 것은 허공과 같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法界의 純一한 모습이다. 즉 이것은 여래의 평등한 法身이다. 이 法身에 의지하여 本覺이라고 이름하여 말한다.
현수법장賢首法藏은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에서 본각을 수염본각隨染本覺과 성정본각性淨本覺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성정본각은 진여문에 있는 본래부터 자성청정한 본각이며, 수염본각은 생멸문에서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기신론』은 여래가 번뇌에 의해 감추어진 ‘중생심’을 중시하므로 심진여문보다 여래장을 중심으로 한 심생멸문을 중심으로 다룬다. 따라서 이는 본래 청정한 성정본각보다 심생멸문의 수염본각을 더 중시한다.
시각은 근본무명이 소멸하여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 타파됨으로써 불각不覺이 사라지고 본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시각이 불각不覺에서 각覺으로 나아감에 있어 본각은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것은 본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연善緣을 만나더라도 궁극적인 깨침을 얻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깨침의 근거로서 본각을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선연을 만나 시각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신론』은 중생의 심체心體가 본각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전제하여 무명의 비실체성을 깨침으로써 시각에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구경각究竟覺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 미혹에서 깨침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본각이 전제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기신론』은 중생의 입장에서 깨침으로 나아가는 길인 始覺的 수증관을 중심으로 본각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신론』의 본각이 지닌 내재적 원리를 크게 부각한 것이 중국화엄철학이다. 『기신론』에서는 본각이 시각적 수증관을 위해 상정된 것에 불과했다면, 화엄교학에서는 眞如, 一心 또는 如來藏(自性淸淨心)과 결부해서 논한다. 본각사상 연구의 대가인 田村芳朗는 『본각사상론』에서 “본각사상은 중국의 화엄3조인 현수법장賢首法藏(643-712)이 『화엄경』과 『기신론』을 병용하여 화엄철학을 확립한 데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法藏은 『기신론』의 주석서인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를 저술했다. 거기서 그는 본각을 중심으로 한 ‘여래장연기’를 말하는데 이는 진여수연眞如隨緣이라고도 한다. 법장은 『화엄경』과 『기신론』에서 강조한 일심一心을 진여로 보고 진여가 현실의 제법이 되어 전개한 진여수연을 논한 것이다. 법장의 진여(본각) 개념은 종밀에 와서 진성眞性이나 진심眞心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본각진성, 본각진심으로 불리웠다. 종밀은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전반부에서는 “근원은 일체중생본각진성이다. 이를 불성이라 하며 심지心地”이라고 하여 일체중생에게는 본각진성―다른 말로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 『도서』의 후반부에서는 이를 ‘본각진심’이라고도 한다. 또한 종밀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原人論』에서도 본각진심에 대해서 말한다.
一体有情은 본래부터 깨달은 참마음(本覺眞心)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끝없는 옛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존재하며 청정하고 밝디 밝아 어둡지 않고 밝게 늘 앎이다. 또한 〔이는〕 불성이라고도 하고 여래장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종밀은 본각을 본각진성 혹은 본각진심이라 하는가 하면, 불성 혹은 여래장과도 동일시한다. 종밀이 이러한 본각사상을 갖는데에는 『원각경』의 영향이 컸다. 『원각경』에 보면 “일체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마치 허공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 환화는 멸할지라도 허공의 본성은 멸하지 않나니, 중생의 幻과 같은 마음도 幻에 의해 사라지나 모든 幻이 다 사라졌다 할지라도 본각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느니라”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각묘심은 본각진심의 다른 표현이다.
이와 같이 종밀은 원각을 일체의 근원이라고 본 『원각경』에 심취하여 『원각경』에 관한 많은 주석서를 내었다. 그는 『원각경략소초圓覺經略疏秒』卷上1에서 원각을 법체法體 즉 범성불이凡聖不二의 근본법체라고 해석하면서 본각과 원각을 하나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진여나 일심을 현상배후에 존재하는 상주불변의 실재로 보는 견해를 낳았다. 사실 종밀의 사상은 화엄종뿐만 아니라 선종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고 중국불교를 이어받은 한국불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밀의 본각사상은 단지 일본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신론』의 진여사상이나 『원각경』의 원각묘심사상과 관련하여 중국의 본각사상은 상주불멸하는 실재를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진여라든가, 본각진심 혹은 원각 등은 연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중국의 본각사상이 일본 천태본각사상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 천태본각사상은 중국불교의 본각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사상들―천태, 화엄, 밀교사상―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본각사상과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럼 천태본각사상의 형성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 천태종을 세운 사이쵸오는 천태법화 교학을 연구하기에 앞서, 화엄의 논서나 『기신론』을 연구하였다. 그는 중국의 화엄교학을 수용하면서도 법화일승法華一乘 아래 불교의 총합적인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동시대 인물인 쿠우카이 역시 총합적 불교체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사이쵸오는 구극의 진리에 해당하는 『법화경』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을 근간으로 한 반면, 쿠우카이는 진언밀교의 비법을 핵심으로 삼아, 사상적 총합 체계를 꾀한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쿠우카이가 세운 진언종은 쿠우카이 이후 신비체험을 연마하는데 집중하였다. 일본 천태종은 후에 이러한 밀교의 신비적 측면을 수용하면서 화엄, 천태, 밀교의 교리가 총합된 천태본각사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쿠우카이는 중국의 본각사상이 새롭게 재해석되는데 선구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화엄교리를 빌려 밀교사상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화엄철학에 관련된 본각사상을 중시했다. 쿠우카이는 특히 본각과 현실 자체가 둘이 아님을 강조했고밀교의 즉신성불사상卽身成佛사상에 기초하여 본래부처와 범부가 둘이 아니라는 불범불이佛凡不二사상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본각 해석은 그 후 히에이산 천태종으로 이입되어 천태종 밀교인 태밀사상台密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태밀사상은 사이쵸오가 즉신성불의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한 진언밀교를 수용하여, 이를 천태법화사상에 통합시키려 한데에서 시작되었다. 사이쵸오는 수행자의 몸과 언어, 마음을 붓다의 몸과 언어, 마음과 동일시해서 보는 진언밀교의 삼밀三密 수행을 빌려왔다. 그래서 이를 통해 중생과 붓다를 동일시한 깨침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圓仁, 圓珍에게 와서 顯劣密勝라 하여 밀교를 보다 더 강조하게 되었고, 5조인 安然(841?)에 이르러 태밀사상을 중심으로 한 叡山眞言宗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安然 이후 천태종은 승려들의 교세확장을 위한 적극적 전도, 황실을 비롯한 귀족들의 시주로 인한 부유화 등으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승려들이 타락하는 등 폐해가 생겨났다. 이를 경고라도 하듯이 天慶4年(935) 根本中堂을 비롯하여 40여 堂塔이 불타 없어지고 점차로 당탑과 승방이 소실되면서 히에이산(比叡山)의 황폐화는 심각해졌다. 제18대 좌주로 취임한 良源(912-985)은 당탑을 재건하고 밀교에 빠진 천태교학의 쇄신을 착수했다. 이와 같이 양원은 밀교 우위로 흐르는 경향에 제동을 걸어 천태법화의 정통으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상에 불과했고 사상이나 내용에 있어 종전의 것을 계승하고 있었다. 결국 당시 일본 천태종은 태밀사상을 수용하면서 이것을 근저로 하여 천태본각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천태본각사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태본각사상은 본각과 진여를 동일하게 보는 『기신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천태본각사상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본각진여는 범부중생 안에 있는 理가 아니라, 중생의 모습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천태본각사상은 생멸 변화하는 현상계야말로 본래 진실한 깨침의 세계라고 봄으로써 중생이 곧 부처라는 ‘중생즉불론’으로 나아갔다. 천태본각사상은 ‘衆生心이 곧 本覺眞如’임을 현실에 적용시켜 일상의 모든 소작, 욕망까지도 부처의 산 자태로 긍정하는 철저한 현실긍정의 세계관을 펼쳐나갔다. 중생즉불이라는 相卽 논리의 극치는 결국 속세, 속사, 번뇌 등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천태종은 천태본각사상을 중심으로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절대시하는 학풍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를 전수하는 방법 역시 스승이 제자에게 이심전심으로 전달하는 비전구전秘授口傳이나 면수구결面授口決이 강조되었다. 구전이나 구결은 교상敎相이나 경설經說에 의하지 않고 스승의 내적 체험을 직접 제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또한 절지상승切紙相承이라는 전수방법도 행해졌는데 이는 작은 종이에 진리의 핵심만을 기록하여 전수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스승이 제자에게 비밀리에 구전으로 천태본각의 진리를 전수하거나 혹은 작은 지면에 요지를 적어 절지切紙의 형태로 전달한 후 절지切紙는 문서로 정리되었다. 이와 같이 천태본각사상은 헤이안후기(12세기)까지 구전 혹은 切紙相承으로 전해졌고, 헤이안후기부터 가마꾸라시대 13세기에 걸쳐 이를 수집하여 가마꾸라중기(1250년경)에 문헌화되었다. 그 후 가마꾸라말부터 남북 室町期에는 이에 대한 주석서가 나왔다. 이와 같이 천태본각사상은 구전시대, 문헌시대를 거쳐 체계화시대, 주석시대의 단계로 발전되어갔다.
천태교단은 비밀리에 법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분파, 분류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파벌적 대립과 더불어 쇠퇴의 길로 나아갔다. 그래서 천태본각사상은 가마꾸라 말기에서 南北․室町時代까지 융성했지만 에도(江戶) 중기에 慈山妙入(1637~1690)․靈空光謙(1652~1739)의 비판 속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천태본각사상은 본질 뿐 아니라 현상 속에서도 부처와 하나임을 주장함으로써 현실의 범부 자체를 본래부처의 현현으로 본다. 즉 천태본각사상에서는 본래부처의 의미가 본질이나 본원의 의미가 아니라 ‘중생의 모습 그대로’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성불의 관념도 부정되었다. 그것은 현상적으로 중생을 부처라고 볼 때 성불하기 위한 수행은 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문과 수행의 길을 닦는 것이 어렵게 되자 참된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교단을 떠나 불교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운동을 펼쳤다.
말법시대를 살아가며 현실적 인간의 고뇌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는 중생즉불사상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모순을 자각한 이들이 본각사상의 비현실성에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다. 이런 점에서 가마꾸라불교는 천태본각사상의 왜곡된 측면에 대한 자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존불교가 지닌 현세구복성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민중에게 다가서는 불교가 되고자 한 것도 가마꾸라신불교를 태동시킨 요인이 되었다.
9) ④ 성층聖層의 출현
10)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당시 히지리( 聖, ひじり)라 불리우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개 다음 4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명리영달을 싫어하여 은둔생활을 하는 자이고, 둘째 수행을 엄하게 하면서 보살행을 행하는 자이며, 셋째 고행수련과 산림수행에 몸을 바친 자이고, 넷째 단식고행하는 자들이다. 이같이 은거와 유행, 산악수행 혹은 재가생활 등 여러 형태가 섞여 있으나 이들은 종전의 불교와 달리 민중들에게 다가서는 새로운 포교방법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세 이전까지 국가불교이고 귀족불교였지 서민구제를 위한 활동이 활발해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생 구제라는 대승적 이상을 실천하려는 승려들이 증가한 것이다. 이들은 사원 밖에서 활동하면서 부처와의 결연을 위해勸進을 행하고 堂塔이나 불상을 세우거나 경전을 드리는 經筒, 死者에게 제사하는 의례를 행하면서 포교활동을 행했다. 이와 같이 대승적 이상실현을 위해 사원을 떠나는 승려들 외에도 다른 부류의 聖層이 생겼다.
그들은 천태종의 번쇄한 교학 그리고 수행의 소홀함과 세속화 때문에 히에이산에서는 진정한 구도의 길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승려 신분이었지만 기성교단과 거리를 둔 채 고행이나 유행 혹은 은둔생활을 했다. 이와 같이 자신이 출가한 사원을 나와 재출가를 시도한 이들 중에 마을사람들의 요청에 응하여 포교활동을 하는 이들과 참된 구도의 길을 걷고자 산림에 들어가 염불과 禪定을 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 鎌倉 新佛敎를 창시한 이들 중에도 이에 속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문자도 모르고 복잡한 교설도 이해할 수 없는 서민들에게 그 가르침을 요약하여 간단하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권장했다. 그럼 도겐과 동시대인이었던 가마꾸라불교의 창시자들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