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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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3장 일본불교 3. 가마쿠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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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4-06-3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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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마쿠라 불교

이렇게 헤이안 불교를 마무리하고 가마쿠라 불교로 넘어가자. 가마쿠라 불교가 형성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1192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147~1199)에 의해서 가마쿠라 막부가 출범한다. 막부시대가 열렸다. 무사들이 통치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막부시대는 약 700년 동안 지속된다. 이로써 사무라이 계급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시작에 대해 살펴보자면, 미나모토 씨족은 천황의 56대 손이었다고 한다. 당시 교토 조정과 알력 관계에 있었던 세력들로부터 조정을 지켜야했던 국경 수비대 군인들을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그 사무라이들 안에는 천황의 자손들이 궁중을 떠나 전투원이 된 이들이 많았다. 일반 군인이 아니라 천황의 자손들이 조정을 지켰던 것이 사무라이의 기원이 되었다.

이 사무라이들이 그 당시에 일정한 지역마다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어 영주가 되고 토지를 소유하는 이들로 바뀌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의 위치가 토지 소유 하급 귀족으로 변모한 것이다. 천황이 중심이 되어있는 중앙집권체제로부터 분권화로 바뀐 것이다. 강력한 지방 영주들 주도하는 중세적 봉건 사회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토지를 지배하는 일이었다. 바로 무사계급이 토지를 지배했다. 땅을 더 많이 차지할수록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는 시스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무사들간의 전쟁이 엄청나게 벌어졌던 시기도 중세이다. 무사들은 계속 바깥에 나가서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사 계급과 그의 부하들 간의 관계는 생사를 함께 하는 상당히 밀착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무라이 정신, 사무라이에 대한 향수는 그러한 인간적인 관계 때문이다. 생사고락을 나눴던 사람들이 가졌던 관계성 때문에 그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사무라이 계급이 중요시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지배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이 토지를 소유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생사고락을 나눴기 때문에 서민들과 밀착되어 있는 존재였다는 점에 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종교들도 서민들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하급 귀족으로서의 무사들은 종전의 귀족들이 서민들과 분리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서민들과 밀착되어 있었고 종교도 자연히 그에 호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가마쿠라 막부 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권의 중심 역시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바뀌었다. 정치, 문화, 종교 모든 것은 귀족들로부터 무사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불교의 분위기도 귀족에서 민중 중심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민중신앙으로서의 불교가 가마쿠라 시대에 꽃피우게 된 것이다. 등장 배경을 살펴보면, 만성적인 전쟁들로 인해 정치 사회에 격렬한 변동과 심각한 위기적 상황이 연속적으로 찾아왔다. 또 정권 교체로 인한 변화와 더불어 자연재해도 많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불안하고 자연재해로 인한 상황들이 계속적으로 생겨나면서 사람들에게 말법 시대에 돌입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시기였다.

말법은 일종의 종말사상이다. 불교에서 시대 구분을 할 때는 다음 세 가지로 한다.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가 그것이다. 첫번째 정법 시대는 부처님이 살아 생전 가르침을 직접 펼치셨던 시대, 석가불의 시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있고 그에 따른 수행도 있고 또 깨달은 자들도 속출했던 클라이맥스 시대이다. 상법 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면면히 이어지고 수행도 계속되지만 깨달은 자들이 많지 않다. 말법 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만 남고 수행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는 암흑의 시대이다. 구체적인 시간상으로 정법 시대는 부처입멸 후 약 1000년 동안이고 그 이후 1000년이 상법 시대, 그 이후의 만년이 말법 시대이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이 일본에 넘어오면서 쿠카이는 일본의 말법시대는 1052년부터 시작이라고 보았다. 1052년은 헤이안 말기이고 가마쿠라 시대가 1185년에서 1333년이다. 불교의 시대적 구분에 따르면 일본은 헤이안 말기부터 말법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 쿠카이의 주장이었다. 각 경전마다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쿠카이는 정법 시대는 B.C. 944년이 시작이라고 본다. 그래서 대략 계산하면 말법 시대는 1052년이 된다는 것이다. 쿠카이의 말법 시대라는 주장이 헤이안 말기에는 그저 이론적인 것이었지만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들이 말법 시대, 종말이 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렇듯 말법 사상의 유행은 역시 가마쿠라불교 탄생의 한 요인이 되었다. 말법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간적인 안정보다는 초세간적인 구제, 구원이었다. 또 국가나 집단 차원이 아닌 개인적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가 결집되면서 새로운 불교사상을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마무라 불교는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만 독특하게 등장한 불교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불교를 창시한 스님들은 대부분 히에이잔 출신이었다. 가마쿠라 신불교를 연 창시자들은 모두 히에이잔에서 나왔다. 히에이잔으로 출가해서 거기서 공부하다가 당시 구제불교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다시 나온다. 재출가를 한 것이다. 당시 히에이잔에서 유행했던 사상은 천태종에서 나온 천태본각사상()이었다. 사상적으로 본각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대승기신론에 나온 것인데 천태종에 와서 새롭게 변형된다. 시각을 통해서 본각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이다. 본래 깨달음이 있다는 뜻인데 실제로 내가 깨달은 자가 아니니까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태종에서 말한 천태본각사상은 좀 다르다. 본각 사상은 내가 본래 깨달음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므로 본래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힘쓴다. 이에 반해 천태본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중생즉불이라 하여 중생 그 자체가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중생즉불이 천태 본각 사상에 와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는데 수행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무용론이 나왔다. 즉, 중생즉불 사상이 천태종에 와서 천태본각 사상으로 변형되고 천태본각 사상이 지닌 문제점으로 수행무용론이 나오게 되었다. 천태종 사람들이 수행을 등한시하게 되고 여기에 밀교까지 영향을 주자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줄 때도 비밀리에 종이에 적어서 건네준다든지 말로만 전수되면서 불교는 대외적인 요청에 전혀 응답하지 못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많은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이 히에이잔을 떠나서 재출가를 했는데 이들을 ‘히지리’라고 한다. 이는 둔세승이라는 뜻인데 세상을 등지고 다시 떠난다는 뜻이다. 이들 중 서민들의 구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승불교의 자비 실천을 위해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무리도 있고 고행을 하는 무리도 있었다. 고행을 통해 보다 더 깊은 수행을 함으로써 보살행을 지향하는 이들이었다. 또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을 하며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형태로 히지리 계층이 나뉘었는데 그들 중 ‘호넨’ 이라는 승려가 있다.


1)호넨의 정토종


호넨은 가마쿠라 불교에서도 첫번째 사람으로 가마쿠라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가마쿠라 불교의 대표적인 사람은 호넨의 제자 신란이다. 호넨(1133‐1212)이 제창한 것은 정토종이었다. 정토는 서방극락을 말한다. 시방 세계는 더러울 예 자를 써서 예토라고 한다. 사실 정토가 딱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방극락은 아미타불이 계신 곳인데 정토 중 하나이다. 약사여래가 계신 곳도 정토이고 미륵불이 계신 곳도 정토이고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이 서방극락이다. 정토종은 아미타불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는 무슨 뜻인가? 아 는 부정의 의미이고 미타는 한정됨이다. 따라서 아미타는 한정됨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에 한정됨이 없는가? 빛이 한정됨이 없는 무량광불이다. 무량수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명이 무한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알 수 없는 신비한 광명을 비춰주시고 무한대의 수명을 지닌 부처님이 아미타 부처이시다. 아미타 부처가 어떻게 해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가? 대무량수경 안에 법장 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원래 왕이었는데 설법을 듣고 수행을 시작해서 법장 보살이 되었다. 보살은 원을 세우기 마련인데 법장 보살은 48원을 세웠다. 이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모두 다 정토에서 새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노라 고 원을 세웠다. 그 원이 성취되어 그가 부처가 되었으므로 그 부처를 믿기만 하면 분명히 정토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미타불 신앙이다.

 

말법 시대에는 이러한 정토종과 같은 신앙이 필요했다. 정토종은 원래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호넨 전에 이미 일본에 정토종이 들어왔고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된 종파로서 자리잡지는 못한 상태였다. 호넨은 정토종 연구를 하다가 중국 정토종의 ‘선도’ 가 지은 관무량수경소를 읽게 되었다. 정토종 경전 중에 대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이 있는데 이 중에서 관무량수경에 대한 해석인 관무량수경소를 본 것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행주좌와 –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일상의 모든 것이다‐에 오직 온 마음을 다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읊을 때 한 시도 쉬지 말라. 이것이 곧 어김없이 해탈을 가져오는 업이니 그것은 부처님의 본원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넨은 그것을 읽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읊는 것이 무엇인가? 염불을 하는 것이다. 염불을 쉼 없이 하면 반드시 해탈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는 수행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본원’이라는 말이 확 들어왔다. 염불을 하는 것은 물론 내가 하지만 이미 아미타불께서 원을 세운 것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는 것이다. 호넨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깨달음이 왔다. 호넨이 중시하는 것은 염불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염불 뒤에 있는 본원에 대한 믿음이고 신앙이었다. 이 믿음이 호넨에게는 구원의 빛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오려면 자기 안에 강한 열망, 문제 의식이 있어야 한다. 호넨이 쓴 ‘선택본원염불집’ 에는 이러한 내용이 씌여 있다. “지금은 악한 말법 시대이다. 정토문이야말로 우리가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부처님의 진리는 심오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은 약하다. 뿐만 아니라 수행 능력도 약하다. 부처님께서는 계정혜 삼학, 계율, 명상 수행, 이를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셨는데 나는 계율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많은 형태의 선정 중에서도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 그가 이렇듯 깊은 절망에 빠져있을 때 관무량수경소를 읽은 것이다. 그는 오직 아미타불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겠다고 결심했다.

호넨의 독특함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아미타불의 본원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호넨은 전수염불을 제시했다. 이것이 그의 독특함이다. 오로지 염불이다. 보통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정토종의 수행에는 정행()과 잡행()이 있고 정행 중에서도 정정업()과 조업()이 있다. 정정업은 염불이고 칭명염불이라고도 한다. 그 외는 독송, 관찰이다. 독송은 경을 읽는 것이고 관찰은 아미타 부처님의 모습을 관하는 것이다. 관하는 것은 꿰뚫어보는 것, 깊이 명상하는 것이다. 본래 정토종은 경전도 읽어야 하고 아미타 부처님과 정토 세계를 관찰하고, 예배하고, 아미타 부처님을 찬양하는 공양도 해야 하는데 이 다섯 가지가 모두 정행이었다. 종전에 중국 불교에는 정정업과 조업을 나누어서 칭명염불만을 독특하게 말하진 않았는데 호넨에 와서 전수염불이기 때문에 칭명염불 외에는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훨씬 간단해졌다. 그래서 이것을 이도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라 했다.

호넨은 전수 염불을 제창하면서 그 외의 것들‐조업에 해당되는 것들‐위에 염불만을 강조하는 독특한 사상을 펼치게 되었다. 이것이 호넨만이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 호넨의 염불은 이도로서의 염불이지만 그는 염불을 관행이나 명상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호넨이 다른 정토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점이면서 가마쿠라 불교 전수 사상의 첫번째 시작점이다.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전수사상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전수 염불을 제창하면서 호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염불이야말로 아미타불에 의해서 선택된 극락왕생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 염불만을 오롯이 닦아라.’ 이는 염불이 이도()이면서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제시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호넨은 보편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호넨의 교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는 본원에 대한 신앙과 이행, 선택 전수를 강조한다. 그래서 선택전수염불이라고도 한다. 일본불교는 이로써 널리 민중구제를 위한 실천적 종교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가마쿠라 불교 창시자중 한 사람인 호넨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종교적 능력의 평등성을 설한 것이다. 누구나 염불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 종전 히에이잔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 능력에 따라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달랐다. 그래서 천태종에서는 호넨의 사상을 매우 위험하게 여겼다. 1207년에 호넨의 제자들 중 하나가 궁녀와 안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를 구실로 전수염불이 금지되고 호넨과 호넨의 제자들을 유배길에 올랐다. 1211년까지 유배 생활이 지속되었고 이듬해 호넨은 사망했다. 호넨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신란이 등장하고 그는 가마쿠라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되었다.

2) 에이사이의 임제종


에이사이는 1141년에서 1215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다른 가마쿠라 창시자들과 마찬가지로 엔라쿠지 출신으로 히에이잔 엔라쿠지에서 수계를 받았다. 즉, 천태종에서 출가를 했다는 얘기다. 에이사이는 14살에 출가를 했는데 그 후에 송나라에 두 번 다녀오게 된다. 처음은 1168년이었고 한참 지나서 1187년 이렇게 두번을 방문한다. 처음에 갔을 때는 천태종과 밀교를 공부하러 갔는데 사실은 천태산이 선종 사원으로 탈바꿈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거기에서 임제선을 배우게 되었다.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건너왔지만 선종은 중국에서 꽃 핀 종파다. 선은 본래 다 있다 하여 중국으로 건너와서 명상을 중심으로 선종이라는 종파가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중국에서 선종을 창시했는가? 보리달마이다. 사찰에 가면 달마 화상의 그림이 많다. 요즘은 달마화상 그림이 주술적인 역할, 곧 병도 낫게 한다고 해서 많이들 걸어 둔다. 어쨌든 보리달마는 초조, 선종에서는 스승을 조사라고 부르는데 첫번째 조사이다. 그러 혜가, 승찬이  이렇게 가다가 여섯번째가 유명한 육조 혜능이다. 혜능에서 쭉 넘어와서 송대에 가게 되면 종파가 갈라지게 된다. 중국의 선종이 5가 7종으로 분열된다. 5가 7종 중 하나가 임제종이다. 임제선 역시 송나라 5가 7종 중 한 종파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선종은 조계종이다. 조계종은 5가 7종 중 하나인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생겨났을까? 조계종은 보조국사 지눌이 창시했다. 지눌은 중국에 가지 않아서 성철 스님이 지눌을 비판할 때 인가를 받지 않았다고도 했는데 선에서는 보통 스승에게 깨쳤는지를 증명받는 것을 인가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눌은 독학으로 혼자 깨달았기 때문에 성철 스님은 인정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조계종은 5가 7종에 속하진 않으나 전혀 상관없지는 않다. 한국 선종은 중국 선종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임제종과 가장 가깝다. 임제종의 사상이 조계종에 흡수되었고 그것을 보조국사 지눌이 독자적으로 풀어나간 것이다. 지눌은 임제종에 화엄 사상을 추가했다. 지눌의 깨달음은 화엄을 통해서도 이루어졌고… 어쨌거나 이것은 한국 불교 쪽 이야기이니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제종 안에도 두 파로 갈린다. 황룡파와 양기파가 그것이다. 에이사이는 임제종 황룡파의 허암 해창의 법을 잇게 된다. 에이사이가 1168년, 1187년 두 차례 중국에 갔다가 귀국한 것은 1191년이다. 돌아와서 그는 일본의 임제선을 제창하게 되었다. 그는 선을 퍼뜨리는 활동을 하면서 선종 서원 보문사를 지었다. 이렇게 되자 히에이잔 스님들이 에이사이의 선종 포교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했다. 히에이잔 스님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에이사이에게 선종 포교 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포교활동이 어려워지자 1198년에 에이사이는 조정에 상소문을 제출했다. 이 상소문을 흥선호국문()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선이 나라를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종이 흥함에 따라 국가를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논지를 폈다. 그러나 천태종 교단과 대립이 계속되어 그는 교토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에이사이는 1199년에 가마쿠라로 내려가게 되었다. 가마쿠라에는 막부 체제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에이사이로 하여금 막부 체제와 결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그는 막부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사실 선은 명상이므로 복잡한 교학 체계를 몰라도 직관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 많이 배우지 못한 사무라이들에게도 선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불립문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렇듯 에이사이는 막부체제와 결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힘을 얻어서 그는 1200년에 다시 교토로 돌아와서 선 사찰인 범인사를 세웠다. 에이사이는 순수한 선종을 퍼뜨렸다기보다는 천태종의 태밀 사상과 선이 습합된 가르침을 펼쳤다. 이것이 도겐과 에이사이가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3) 도겐의 조동종


도겐은 불교계 전체 안에서 아주 독특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일본 불교계를 통틀어서 도겐만큼 깊이 독창적인 대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천재였고 선사들은 보통 책을 쓰지 않는데 그는 책을 많이 남겼다. <정법안장>이 그것인데 우린 이를 통해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불교에는 경전 중심의 교학이 있고 선 중심의 선학이 있다. 선의 특징 자체는 불립문자이다. 문자로 서 있지 않다는 의미는 문자로서 불교의 진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으로서 전달된다는 이심전심이다. 이 역시 일상적인 용어로 많이 쓰는 표현이지만 사실은 선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런 맥락 때문에 선사들이 책을 쓴다거나 저술을 남기는 경우가 비교적 적은데 도겐은 상당히 저술을 많이 남겼다. 정법안장에서 정법은 부처님이 전수하시는 바른 법, 깨달음이다. 안장의 안은 눈 안자, 비춘다는 뜻이고 장은 포괄한다는 뜻이다. 결국 정법안장은 세상의 모든 제법들을 정법이라는 진리로 비춘다는 의미인데 석가모니 부처께서 제자인 마하가섭에게‐가섭존자라고도 하는‐ 법을 전수해주실 때 ‘내가 나의 정법안장을 너에게 전수한다’ 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래서 정법안장은 부처님이 전수하신 그 정법안장이다. 도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대체 무엇인가. 도겐은 말법 시대를 극복하는 길은 정법을 찾는 것밖에 없다고 보았다. 정법으로의 회귀가 도겐 사상의 핵심이다. 정법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도겐에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좌선이었다.

 도겐은(1200‐1253)53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다. 가마쿠라 막부가 1192년에 시작했으니까 도겐은 가마쿠라 막부가 막 시작했을 즈음에 최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3세에 부친, 8세에 모친 상을 당하면서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모친상을 당하고 나서 그는 세상이 무상함을 느꼈다고 저서에 썼다. 물론 어린아이의 무상함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당시에 벌써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릴 때의 이 무상함에 대한 체험이 끝까지 간다. 이 무상관이 도겐 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당시에는 세상이 무상하다는 정도였겠지만 사실 이 무상은 불교 진리의 핵심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연기라고 표현하는데 연기는 모든 삼라만상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연기를 바꿔 말하면 무상이다. 나라는 존재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 나는 이미 달라져 있다. 깨달음은 모든 존재의 무상함을 자각하는 데 있다. 존재의 실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무상은 결국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연기에 대한 깨달음과 일맥상통한다.

도겐은 8세에 모친상을 당한 다음에 할머니 밑에서 살다가 1213년 14세에 출가한다. 도겐 역시 히에이잔으로 출가해서 천태승이 되었다. 여기에서 사이쵸가 세운 대승계‐ 그가 소승계를 버리고 대승계를 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겐 역시 수계식에서 소승계를 받지 않고 대승계를 받는다. 그래서 그가 중국에 갔을 때 문제가 되었다. 중국은 대승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히에이잔 승려들은 소승계를 받지 않았는데 이것이 일본에서는 통용되지만 송나라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도겐은 천태승이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바로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의문이었다. 천태본각사상이 무엇인가? 중생즉불. 현세 중생 그대로가 불이라는 것이다. 도겐은 그렇다면 본래 다 부처인데 도대체 지금까지의 그 많은 제불들은 왜 발심하고 수행을 했는가? 이러한 의문을 13세부터 18세까지 갖고 살았다. 히에이잔 승려들에게 물어봤지만 제대로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히에이잔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도겐은 건인사라는 곳으로 갔다. 건인사는 에이사이가 설립했던 곳이다. 도겐이 이곳에서 에이사이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에이사이가 죽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대신 에이사이의 제자인 묘오젠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에이사이가 가르쳤던 임제선을 배우게 되었다. 묘오젠은 에이사이와 조금 달랐다. 에이사이는 선과 더불어 천태종의 밀교수행도 같이 했지만 묘오젠은 밀교 수행은 별로 하지 않고 선을 주로 했다. 도겐은 묘젠으로부터 임제종의 선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도겐은 묘젠이 입송할 때 따라가게 되었다. 1223년 도겐이 23살, 24살 이때쯤이다. 선을 본격적으로 배우고자 입송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대승계를 받았다고 해서 못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묘젠은 소승계 대승계를 다 받았는데. 도겐은 대승계밖에 못 받아서 배 안에서 3개월 정도 머물러 있어야 했다. 승려로서 인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때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 전좌라는 –어느 사찰의 노인 주방장 스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전좌스님은 주방장이니까 바닷가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다가 도겐을 만나게 되었다. 도겐이 스님은 나이가 지긋하신데 그 나이에 이런 일을 하시느냐고 묻자 전좌스님이 말하길 ‘자네는 불도를 잘 모르는군. 내가 하는 이 일이 수행이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번도를 모른다 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도겐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수행은 선수행을 하는 것이고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보통 현실에 살아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이 관점은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었다. 도겐은 일본에 돌아가서 <전좌교훈>이라는 책을 남기는데 여기에 이 체험을 적어놓았다.

마침내 도겐은 중국으로 들어가 천동 여정이라는 선사를 만났다. 그는 천동산 출신으로 이름은 여정이다. 이 분이 도겐의 스승이 되었다. 처음 중국에 가자마자 여정을 만난 것은 아니고 상당히 오랫동안 스승을 찾아 헤맸다. 그는 자기가 가진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 방방곡곡 사찰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사찰들은 제대로 수행을 하는 곳도 많지 않았고 스승으로 모실 분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천동산에 가서 여정을 만나고 이 분이 나의 스승이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나중에 회고록에 여정선사에 대해 쓴 것이 정법안장 행지 편에 나오는데, 좀 인용하겠다.


여정선사는 19세에 모든 경전, 학문을 다 버리고 참선에 들어가서 70세가 될 때까지 참선수행을 한 분이다. 그는 황제로부터 많은 자의?, 선사의 호를 받았지만 이것을 다 사양했다. 천동여정 선사는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계를 범하는 악이다’ 라고 강조했다. 명예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명예를 갖지 않는 것, 버리는 것이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명예로부터의 자기 지킴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한 선사였다. 명예나 권력으로부터 멀어짐, 출가승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 이것은 도겐이 지금껏 만난 적이 없는 가르침이었다. 얼만큼 엄격한 스님이었는지 여정은 밤 11시까지 제자들과 함께 좌선을 하고 3시에 일어나서 다시 좌선을 시작했다고 한다.

엄격한 좌선수행과 함께 세속적인 명예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짐 이것이 여정 선사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도겐은 불교의 진수를 여정 선사를 통해 경험하고 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어떤 체험이었는가? 신심탈락. 몸과 마음으로부터 떨쳐버린다. 집착하는 것들로부터 다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집착하는데 이렇게 집착하는 한 깨달음은 없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깨달을 수 있다. 집착의 대상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 명예, 권력… 집착의 대상은 다르지만 대개 우리는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신심탈락이란 이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내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것들을 다 떨쳐버리는 체험이 신심탈락 체험이다. 도겐은 여정선사 밑에서 신심탈락 체험을 했다. 이른 새벽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보통 좌선을 할 때 벽을 향해 앉는다. 스님이 중간을 왔다갔다 하면서 조는 사람을 죽비로 때린다. 그 때 여정선사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참선은 신심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졸기만 해서 무엇을 하겠냐.’ 이 말을 듣는 순간 도겐이 깨달았다고 한다. 참선은 신심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질책하면서 여정이 했던 그 말 안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선은 곧 신심탈락이요 신심탈락은 곧 참선이다.’ 무슨 뜻인가? 참선이라는 것은 수행이다. 신심탈락은 깨달음의 상태를 말한다. 깨달음의 상태를 불교에서는 증이라고 한다. 닦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닦음이 곧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수증일여.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겐이 말하는 좌선은 바로 이러한 좌선이다. 도겐은 좌선을 중시하는데 내가 앉아있는 자체가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10년 수행해서 깨달았다면 수행하는 순간순간은 깨닫지 못한 순간이다. 그러나 도겐에 오면 수행하는 순간순간들이 다 깨달음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수행이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고 수행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수증일여, 수증불이 –수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을 자각만 할 수 있으면 엄청난 일일텐데, 우리 삶은 늘 무엇을 향해서 저기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해서 가는 것이고 끊임없이 목적을 향해 가다 끝나버리는데 도겐에 오게 되면 이 순간순간들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우리 각자의 삶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지각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우리의 삶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을 수단으로 살아간다. 한번도 목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도겐 선사는 목적 지향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를 통째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보통 과거를 연연하거나 미래지향적으로 산다. 지금 여기가 없다. 대부분이 이렇게 사는데 도겐 선사가 얘기하는 수증일여는 지금 여기를 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도겐 선사는 이 깨달음에 대해 수증일여 말고도 다른 여러가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지관타좌라는 말도 많이 나온다. 도겐의 전수사상은 지관타좌라고 하는데, 지관타좌는 다만 오로지 앉을 뿐이라는 뜻이다. 깨닫기 위해서 앉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닫기 위해 앉는데 도겐은 다만 앉을 뿐이라고 가르친.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이 순간을 깨달음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목적 지향이 아니라 목적을 사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도겐은 그것을 깨달았다. 신심탈락이 가진 의미가 지관타좌의 의미이다. 좌선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깨달음으로 삼는 것 이것이다. 도겐은 이것을 깨닫고 5년만인 1227년 28세의 나이로 귀국했다.

도겐은 일본에 돌아와서 건인사로 갔다. 건인사는 부패할대로 부패해져 있었다. 묘젠은 중국에서 병에 걸려 죽고 도겐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말하길 ‘우리 일본국에 불법이 전수된지 이미 600년이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법이 전수된 것에 대해 듣지 못했다.’ 600년이나 되었지만 법이 전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겐은 정법을 전수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일본에 돌아왔건만 건인사는 엉망진창이었다. 부패와 타락이 심했다. 도겐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수행자들은 개인 방에 두껍게 칠한 벽장을 만들어서 도구를 지니고 있고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하며 재물을 축적하고 언어는 제멋대로 구사하고 예절을 게을리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건인사가 천태종 사찰로 들어가게 되니까 이것은 결국 천태종에 대한 비판이 되었는데…


3)-1 도겐의 정법안장


도겐이 귀국한 다음에 건인사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했다. 돌아가서 그 당시 저술을 하나 남기는데 건인사 시절이 1228~1232년이다. 그때 지은 저술 중에서 <변도화>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자신이 말하는 좌선의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는 좌선에 대한 19질문과 답을 써 놓았다.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좌선의 의미를 알 수 있게끔. 계정혜 삼학 중의 하나로 정학이 있는데 정은 선정이라는 의미이다. 선정은 결국 명상이라는 의미도 있고 구체적으로 수행을 포괄해서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좌선이다. 좌선은 앉아서 선을 하는 것이다. 선 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누워서, 가면서, 걸으면서 다양하다. 여러분이 수행처나 명상을 하러 가면 앉아서만 하지 않는다. 좌선 50분 하다가 한 10분 정도 행선을 한다. 보통 선방에서는 행선과 좌선을 병행한다. 행선은 걷기 선, 좌선은 앉아서 하는 것. 좌선이 수행 방법의 기본이 되는데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독 도겐은 좌선을 강조하는데, 스스로 묻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을만한 질문들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정혜 삼학이 중요하다고 했거늘, 스승님은 왜 좌선만을 중요하다고 합니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좌선이 정문인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서 삼세의 모든 여래들이 행한 불법이기 때문이다. 도겐의 문제의식은 천태본각사상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천태본각사상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중생즉불 사상이다. 이것은 이미 부처인데 무슨 수행이 필요한가 라는 수행무용론이라는 극단적 의미까지 도출해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대의단을 가지고 송나라에 갔다가 결국 이 의문을 풀어낸 것이다.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던 천태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게 맞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하여 삼세‐과거, 현재, 미래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도 부처가 있었다.

불교에서 부처는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깨닫는 자는 모두 부처이다. 우리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 전에도 부처가 있었고 석가모니도 부처이고 앞으로도 부처가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삼세의 제불 여래가 도대체 왜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여기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좌선이 정문인 이유는 바로 이 삼세제불이 닦아서 행한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선이 정문일 수밖에 없다. 그 밖에도 육바라밀‐ 대승에 오게 되면 보살이 반드시 닦아야 할 육바라밀‐을 이야기하는데 그 중에 하나로 선정이 들어간다. 좌선은 육바라밀의 하나요 삼학의 하나일 뿐이거늘 왜 그것만 유독 정문이라고 하는가 라는 질문에도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이렇듯 도겐은 좌선에 대한 확신이 대단하다. 좌선이 도겐에 와서는 선정의 차원이 아니다. 삼학의 일부인 선정이 아니라 좌선이야말로 석존으로부터 정전되어온 불법이라고 본다. 바르게 전수되어온 불법이라는 말이다. 도겐은 이것이야말로 안락의 법문이다 라고 했다. 부처님이 깨우침을 얻으신 이후에 경험하신 안락, 이는 단순히 편안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안락이다. 더 이상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 세계이다. 더 이상 깨침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미 좌선을 하는 자체가 깨침이기 때문에 깨침을 향해 나아가는 그러한 의미의 선정이 아니고, 선정이라는 말 자체에는 그러한 의미가 많이 들어있다. 선정을 통해서 깨침으로 나아간다, 선정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의 수단의 의미가 강했다면 도겐이 좌선을 안락의 법문이라고 표현한 데는 깨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변도화>는 도겐의 저술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내려오고 있다.

결국 도겐은 건인사에서 나와서 그는 교토 가까이 신초라는 곳에 흥성사라는 절을 짓는다. 1233‐1243년 동안 공사를 했는데 도겐은 자기가 중국에서 보았던 중국 사찰과 아주 유사하게 모방해서 선사를 지었다. 신초는 도심지이다. 여기서 상당히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서 도겐의 교단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 당시 도겐의 업적을 살펴보면 집필 작업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저작이 <정법안장>이다. 정법안장은 75권이 있고 후반기에 다시 12권의 정법 안장을 저술했다. 42권 정도가 흥성사 시절에 쓰여졌는데 당시 상황이 상당히 많은 집필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선은 다른 교학과 달리 저술활동을 잘 안 하는데 그것은 불립문자 자체가 문자로서 가르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겐은 글을 많이 썼던 독특한 선사이다. 비사유, 즉 사유되지 않는 세계를 사유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운 말로는 ‘비사량의 사량’ 이라고 한다. 비사량은 선의 세계를 의미한다. 선의 세계는 사유하는 세계를 뛰어넘는 세계이다. 비사량은 사유를 넘어선, 사유를 초월한 세계이다. 선이 그러한 세계이다. 사량은 언어로 표현한 세계이다. 그래서 도겐의 저술을 비사량의 사량이라고 표현한다. 선의 세계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도겐의 책을 해독하는 일이 어렵다.

다행히 <정법안장>이 남아있기 때문에 도겐 사상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많은 저술을 하고 많은 제자를 두고 초기 10년간 도겐의 교단은 번창했다. 그러나 천태교단과 대립이 심해지면서 흥성사는 파괴되고 도겐은 추방당했다. 그무렵 도겐은, 여정의 제자들이 만들어서 보내준 여정어록을 받고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자신의 스승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흥성사가 망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스승의 어록을 받고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영리를 구하지 말라는 것, 명예나 권력에 기대지 마라, 심산에 들어가서 제자교육에 전념하라 라는 가르침을 다시 새기면서 새롭게 스승의 가르침을 전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교단 확립과 함께 많은 저술을 집필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자기 처지가 좋아졌는데 스승이 마치 20년 후 다시 자신을 찾아와 육성으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심산에 들어가 영평사라는 절을 다시 짓게 되었다. 월전이라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절을 짓고 열심히 선사로서 자기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하는 데 힘썼다. 스님들이 보통 하안거 동안거를 하는데, 이를 제자들과 엄격하게 실시하고 백장 선사의 백장 청규를 철저히 지키면서 엄격한 선림 생활을 실천했다. 도겐은 이 영평사 시절에도 정법안장을 계속 집필했고 다른 저술들도 남겼다.

이렇게 하다가 도겐은 가마쿠라에 잠시 내려가게 되었다. 48세 되는 1247년에 가마쿠라에 8개월동안 가 있었다. 이것이 도겐의 생애에 있어서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고 많은 의문을 던지는 대목이다. 왜 영평사를 지어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심산에 들어가서 정통 선림을 구축하겠다는 각오로 갔는데 갑작스럽게 8개월 동안 외출을 한 것일까.

그가 가마쿠라에 가게 된 이유는 가마쿠라 막부의 막강한 세력가였던 호조 도끼요리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가 도겐을 초청했던 것이다. 호조 도끼요리는 에이사이로부터 선을 배우고 난후 선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도겐은 그가 가르침을 달라고 중생들에게 불법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갔다. 그런데 실상 자신이 마음먹었던 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평사로 돌아왔다. 간 이유는 무엇이고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도 많고, 아직도 시시비비가 많지만, 대충 정리된 이야기는 이렇다. 도겐의 가르침이 무사들에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겐의 가르침이 사실 출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무사들이나 대승들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불교가 지닌 초월의 세계를 범인들이 성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도겐이 추구했던 세계 자체가 초월의 세계였는데, 무사들이 선을 좋아했던 것은 자신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을 취하고자 했던 것이지 불교에서 말하는 초월의 세계 자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현세에 무사들이 자기의 직업을 합리화시키고 직업정신을 함양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선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서로 간에 맞지가 않았다. 에이사이도 밀교적인 측면이 많았다. 현세를 추구하는 현세의 삶. 수단으로서의 삶을 원했기 때문에 도겐은 그런 선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조 도끼요리가 도겐에게 가마쿠라에 절을 짓도록 권유하고 땅도 주었지만 도겐은 다 거절했다. 불현듯 영평사로 돌아갔을 때 도겐의 제자중 한 사람이 사찰을 지을 땅을 받게 되었다. 도겐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그를 쫓아버렸다.

이와 같이 도겐에게는 철저함이 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여정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삶으로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 때문에 현세와 밀착해서 결탁하려는 무리들에 대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마쿠라에서의 경험은 자신이 세속적인 세력과 타협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과 밀착해서 권력을 탐하고 교단도 확장할 수 있었지만 그건 자기자신이 추구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도겐은 다 버리고 영평사로 돌아갔다. 도겐은 나머지 생애를 영평사에서 보내면서 다시는 이 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만년에 여정과 똑 같은 철저하고 엄격한 수행생활을 하다가 1252년에 결국 건강을 해치고 병이 들었다. 자기 제자인 혜에게 가사를 넘겨주고 54세로 생을 마감했다.

가마쿠라라는 말법 시대에 이런 정신을 추구하며 살았던 선사는 없었다. 불행한 것은 일본 불교에 보기 드물게 불교의 정수를 몸소 살고자 했던 선사의 삶을 이어받은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겐은 자신은 부처님으로부터 온 정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했을 뿐이지 조동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종파적인 개념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선에 종파가 만들어져서 5가 7종이 되었는데, 부처님 당시에 무슨 선종이 있었냐 선종이라는 이름조차도 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식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도겐의 법맥을 조동종이라는 종파로 만들고 도겐의 법을 잇고 있는데 도겐이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과는 거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

<정법안장>에 대해 다시 정리해보자. 정법안장은 도겐의 아주 중요한 저술이다. 도겐이 송나라에 갔을 때 이미 정법안장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혜 종고가 쓴 것이었다. 대혜는 간화선을 세운 사람이다. 도겐이 송나라에 갔을 때 대혜의 간화선과 굉지의 묵조선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주로 간화선 선풍을 따른다. 도겐은 묵조선의 선풍을 따랐다. 대혜는 <정법안장>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도겐도 또 같은 제목을 붙였다. 대혜의 저술이 진짜 정법안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대혜의 정법안장은 대혜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661칙의 공안으로 편집되었다. 공안이 무엇인가? 화두를 말한다. 공안은 본래 중국에서 알릴 때 쓰는 공문서이다. 지켜야 하는 절대성을 가진 것이다. 오늘날 공안이라고 하기보다는 화두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스승이 깨침을 얻기 원하는 제자에게 한 마디 던져주는 것이다. 제자는 그것을 함구한다. 이렇게 대대로 전수되어온 화두를 모아서 선어록을 만든다. 이러한 661개의 화두를 모아서 만든 것이 대혜의 정법안장이다. 공안을 모은 것이다.

도겐의 정법안장은 고칙공안 –엣날부터 내려온 공안– 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성공안을 이야기한다. 고칙공안과 현성공안이 어떻게 다른가? 고칙공안은 화두를 중심으로 하지만 현성공안은 화두가 아니다. 공안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스님들이 준 것이 진짜 공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 이 자리에 공안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의 공안은 좌선이다. 그래서 현성공안 자체가 좌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도겐에게 좌선은 굉장히 의미가 깊다. 좌선이 자체가 현성공안의 의미를 갖고 있다. 좌선의를 좀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겐이 불교사에서 지닌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도겐이 정법안장을 현성공안 차원에서 집필해서 75권을 썼다. 화두가 아니다. 현성공안 그 자체를 나름의 비사량의 사량으로 풀어낸 것이라 읽기가 쉽지 않다. 12권의 정법안장은 영평사에서 집필한 것인데 75권 정법안장과 달리 이것은 매우 평이하게 쓰여졌다. 저술 내용이 굉장히 다른데 이 때문에 양자에 대한 비교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이 차이에 대해 제자들에게 75권 정법안장을 지어서 전수를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는 제자가 많지 않아서 눈높이를 낮춰야 함을 도겐이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12권은 출가한 승려가 처음부터 마음을 닦아야 하는 부분을 상세히 설명해주는 등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글을 쓰고자 했던 자세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도겐이 100권을 저술하고 완성하려 했는데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75권과 12권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으로 하고 대혜의 간화선과 굉지의 묵조선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

 

간화선. 볼 간에 화두 화자를 쓴다. 꿰뚫어보는 것이다. 즉 화두를 꿰뚫어서 깨침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간화선이다. 유명한 화두 기억하는 것 있는가? 무 자 화두 들어봤는가? 한국의 선방에서 제일 많이 드는 화두가 무 자 화두이다. 또 이 뭐꼬? 화두도 있다. 이게 무엇이냐? 너의 진면목이 무엇이냐? 라는 뜻이다. 무 자 화두는 역사가 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일체중생이 실유불성이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 어디에 나오는 말인가? <열반경>에 나온다.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으니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일체중생이 실유불성인데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조두선사가 무!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했는데 왜 스님은 무라고 하셨을까. 무라고 한 의미를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무문이다. 벽에 부딪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유세계로는 깰 수 없는 벽을 부딪치는 것, 그것이 화두다. 그 벽을 만나서 그 벽을 뚫어야 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무 자 화두를 든다.

굉지의 묵조선은 화두를 들지 않는다.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송대에 문자선이 있었다. 문자를 가지고 선을 하는 것이다. 종전에 많은 선어록들이 나왔는데 이것은 선사들이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내려준 화두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대표적인 선어록이 <벽암록>이다. 또 <무문관>이라는 책도 있다. 무문관에 제 1칙은 이 무자 화두이다. 이렇게 화두가 많으니 사람들이 분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자선이다. 이런 문자선이 송대에 성행했는데 이것을 비판하고 나온 것이 간화선과 묵조선이다. 대혜 선사는 사실 벽암록의 편집자인 환호 스님의 제자다. 대혜 선사는 스승이 편집한 책을 다 태워버리고 무자 화두 하나만 들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다는 것이다. 무자 화두만 활구고 나머지는 다 사구(죽은 화두)라는 것이다.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대혜의 간화선은 문자선의 병폐에 대처하기 위해 나온 것인데, 여기서 문제는 깨달음을 추구하게 된다는 데 있다. 화두를 깨뜨려서 결국 추구하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므로 좌선은 단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앉아있는 것, 깨달음의 수단이 되고 만다. 깨닫는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묵조선에서는 수증일여. 앉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 된다. 또는 수증일등, 본증묘수. 본증에 입각한 묘한 수행 이것이 굉지의 묵조선이다. 도겐은 묵조선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문제의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도겐은 천태본각사상에서부터 출발하였고 굉지는 문자선에서 묵조선으로 나아간 것이다. 도겐은 좌선의 의미를 부처님의 본래 사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정법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도겐은 좌선을 ‘불조의 대도’(佛祖의 大道) 라고 했다. 깨달은 자와 스승이 닦은 보편적인 도가 바로 좌선이다. 대도는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만 더 말하면, 도겐은 말법에 대해 당시 가마쿠라 시대 창시자들 –신란, 호넨, 니치렌‐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말법을 다른 이들이 정법 상법 다음에 오는 역사적인 구분으로 생각했던 반면 도겐은 말법을 시간적 흐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정법 상법 말법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말법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 마음은 정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겐은 말법 시대를 살면서도 정법을 추구했던 독특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은 말법 시대에 걸맞은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해서 전수 사상을 강조하면서 깨우침을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했던 반면, 도겐은 말법을 시대적 측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마음의 상태로 보았다.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내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정법일 수도 있고 상법일 수도 있고 말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법을 마음의 상태로 이해했다는 측면이 굉장히 독특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정법을 추구할 수 있었다. 정법으로의 회귀가 바로 도겐이 추구했던 세계이다. 정법이 무엇인가?가 도겐이 가지고 있었던 화두이다. 정법이 대체 무엇인가?

도겐의 사상에서 우리는 불교의 정수를 볼 수 있고 불교라는 수행을 중요시하는 종교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도겐을 통해 수행이 깨닫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우리 삶과 연결시켜 본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 here and now 의 의미가 도겐에 와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좌선이 아니라 공부할 때라도 지금 여러분이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지금 여기 자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도겐의 사상 전부이다. 또 그렇게 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진하게 사는 삶이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 삶은 끊임없이 수단으로 살 뿐이다. 지금 여기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목적의 삶을 산다. 도겐의 사상을 통해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면 지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삶의 자리로 가져가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난 것을 얻은 것이다.

4) 신란의 정토진종


가마쿠라 불교의 특징은 전수사상이다. 이는 여러 수행방법 중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넨은 염불을 중시했는데 그냥 염불이 아니라 전수염불이라는 말을 썼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호넨의 전수염불과 종전의 중국 정토종 사상가들이 말하는 염불 간의 차이점이다. 이것을 알아야 신란의 사상의 독특함도 드러난다. 사실 호넨은 선도의 <관무량수경소>에 영향을 받아서 전수염불을 주장하게 되었다. 정토종 수행 중에는 정행과 잡행이 있는데 정행 중에서도 정정업과 조업이 있다. 정정업으로서의 염불이 있고 조업으로는 독송, 관찰 등이 있다고 했다. 똑같은 염불인데 무슨 차이가 있나? 선도는 염불이 정통에 왕생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행이라고 말하면서도 여타의 제행들, 잡행이나 조업도 필요하다고 인정한 반면, 호넨의 경우는 이런 것들이 다 필요없다고, 염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전수’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호넨이 전수염불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아미타불에 대한 신심이 있다. 아미타불이 법장보살에서 아미타불이 되기전에 한 48서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것은 이 서원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뤄진 것이다. 이 본원을 강하게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된다는 것, 종전의 불교와 가마쿠라 불교의 차이점은 이 신심의 측면이다. 신심이 상당히 강조되었다. 가마쿠라 불교에서는 신심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물론 굉장히 다른 형태이지만 믿음과 신앙이 가마꾸라 불교의 창시자들에게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호넨 사상의 의의라고 한다면, 본원에 대한 신심을 강조했다는 것이 첫째이고 두번째는 종전의 염불과는 다른 염불수행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했다는 것, 세번째는 다른 수행의 가치들 위에 염불수행을 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신란은 천태종의 승려로서 아홉 살에 출가해서 20년간 수행을 했다. 신란은 자신이 지은 저서 ‘교행신증’ 에서 자신을 ‘우독신란’이라고 고백한다. 우독이란 어리석은 더벅머리라는 의미이다. 즉, 자신은 우매해서 수행을 닦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독이라는 것을 호처럼 쓴다. 우독신란이라고 스스로 부른다. ‘우독신란 1201년에 잡행을 버리고 본원에 귀의했다.’ 자신이 20년간 했던 모든 수행이 잡행이었으며 아미타불의 본원에 귀의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처럼 신란은 결국 히에이잔에서 나와서 호넨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호넨의 제자로서 염불을 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신란은 또 다른 길을 간다. 그 배경 안에는 자신의 죄악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었다. 86세에 지은 책에 보면 ‘우독비탄술회’라는 대목이 있다. ‘정토진종에 귀의했건만‐ 호넨은 정토종이다. 신란은 정토종에서도 좀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정토진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에는 정토종뿐 아니라 정토진종도 있고 입벤의 시종도 있다.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고 허하고 불실한 나로서 청정한 마음도 없구나. 겉으로는 사람마다 선하고 현명하고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 탐욕과 노여움과 거짓이 많은 고로‐이게 무엇인가, 탐진치 삼독이다. 간사함이 가득 찼도다. 악한 성품을 실로 그치기 어려워 마음은 뱀과 전갈과 같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 세계가 죄악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고백하고 잇다. 자기 실존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신란을 보면 불자라기 보다 크리스찬같은 인상을 받기까지 한다. 크리스찬처럼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진짜 불자인가 싶은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한다. 로마서에 보면 ‘내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내 마음은 늘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고 바오로는 썼다. 신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고 아, 이거 너무 비슷하네 하면서 바오로와 신란을 비교하는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란의 염불관이다. 호넨의 제자로서 염불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그러나 신란에 와서 달라진 것은 호넨에게 있어 염불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따라서 염불이 자력염불인데 반해, 신란은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바라봤기 때문에 자기는 순수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내 의지가 아니라 아미타불에 의해서 내가 염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회향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미타불이 가진 본원의 힘으로 회향되었다는 것인데 회향은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본래 회향의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미타불이 자신의 본원력을 회향시켜서 내가 염불하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력염불이다. 절대 타력 신앙이다. 불교는 자력신앙이라고 흔히 얘기하지만 여기에는 타력 신앙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절대타력신앙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일 쉬운 염불인 나무아미타불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호넨에게 염불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지만 신란에게는 아미타불이 주체이다. 그래서 신란은 염불을 무엇이라고 했냐면 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非行)이라고 했다.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비선(非善)이라고 했다. 이런 비행과 비선으로서의 염불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행이다. 비행이면서 비선이고 비선이기 때문에 대행인 염불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란의 염불은 아미타불이 나에게 주는 공덕이기 때문에 은혜에 감사하는 보은염불이다. 내가 내 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아미타불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다. 아미타불에 의해 확정된 구원에 감사하며 바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아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두번째는 신란이 지닌 신심이다. 신심도 마찬가지로 내가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신심회향이다. 신심이 아미타불에 의해서 나에게 회향된 것이다. 본원에 의해서 회향되었다고도 해서 원력회향이라는 말도 쓴다. 그래서 신란은 18원의 신앙 세 가지, 지심 신심 욕생심 이것들이 모두 아미타불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호넨은 그렇지 않았다. 호넨 역시 아미타불 본원에 대한 신심은 강했지만 자력적인 측면이 살아있었던 반면 신란에 와서는 자력적인 측면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염불도 그렇고 신심도 그렇고 아미타불이 주체가 된다면 신심도 염불도 초월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는 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이렇게 초월적인 염불과 신심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신란의 사상은 신앙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그러나 과연 이런 염불관과 신심이 모두 다 아미타불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때, 누가 과연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호넨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신란의 사상은 상당히 독창적이다. 사실 오늘날 일본 불교 중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를 지닌 종파도 정토진종이다.

세번째로 살펴볼 것은 신란의 악인정기설, 혹은 악인정인설이다. ‘탄이초’라는 신란의 제자가 편집한 책에 보면 신란이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선한 사람도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야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