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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5장 고학과 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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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4-06-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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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고학과 국학


1. 고학


주자학과 양명학이 에도시대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했으나 양쪽을 비판하고 일어난 한 파가 있으니 바로 고학이다. 고학은 말 그대로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공맹사상이 철학적으로 발전된 체계가 주자학이나 양명학인데, 고학은 신유학 이전 시기인 공맹, 공맹보다 더 이전 고대 중국의 선왕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선불교가 일어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선이 등장하면서 발생한 주자학과 양명학은 선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실 주자학이 양명학을 비판할 때 궁리하지 아니하고 마치 선처럼 수행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고학에서는 불교나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원시유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학에서는 주자학이 리기이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주자학에서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나, 쾌락을 왜 부정적으로 보는가? 주자학에선 인간의 욕망을 리에 어긋난 불순한 기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욕망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고학에서는 이를 비판한다. 주자학은 너무 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리에 치우쳐서 어떤 심정적인 측면들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고학자들은 주자학이 리를 중시하다 보니까 공리공론에 빠져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상이 되어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양명학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건 양명학이 심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이기 때문에 자기 내면만을 응시한다는 것이다. 마음만 계속 들여다보지 선현의 책들 즉 공맹, 중국 선왕들의 가르침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천지만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즉 마음 안에 리가 다 들어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것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역사 안에서 펼쳐졌던 객관적인 문화전통 성현들의 가르침이 간과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성현들이 가르친 바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마음만 들여다보고 마음 안에 모든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이라는 신유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맹 이전의 고대 선왕들의 가르침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한 고학자들 중 대표적인 학자에 대해 살펴보자.


1) 야마가 소코


 그는 원래 군학자였다. 군학자란 군사전력이나 전술 등을 연구하는 학자를 말한다. 그는 무사도, 병법이나 현실 전투의 승패, 전투의 승리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주자학에서 말하는 공리공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전쟁과 관련된 병법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주자학 이론은 공리공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주자학보다 현실에 입각한 실천적인 도덕을 추구하고자 했다. 주자학도 공맹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공자나 맹자가 주장한 것은 왕이 지닌 덕을 통해 덕치를 하는 왕도정치야 말로 공자나 맹자가 지향했던 바라는 것이다. 왕도정치나 덕치 정치를 현실 정치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시키느냐 하는 가르침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仁)이다. 인간 안에 천(天)으로부터 받은 천명(天命)이 있어 천명을 잘 구현해나가는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인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에 대해 가르쳤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자기자신을 닦고 가족 안에서 효를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 사상 에서는 두 사람만 모여도 정치가 시작된다. 가족은 작은 공동체인데 그 안에서도 정치가 이뤄진다. 그 중심에 효가 있고 그 효의 정치가 확대되고 확충되는 것이 덕치정치요 왕도정치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 문제를 공자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수기(修己)가 안 되고 가족 안에서의 윤리적인 측면들이 와해되면서 온 문제들이다. 정치인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 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데 공자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문제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과 너의 행동을 먼저 살펴 보라는 것이다. 문제는 바깥의 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제대로 못 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래서 수기부터해야 하고 우리 가정 안의 윤리를 새롭게 구현해나갈 때 이것이 사회로 확충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인간 안에 사단이 있는데 이 사단을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곧 맹자는 공자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에 사단을 세우고 이를 확충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야마가 소코가 말하는 고학의 근본 생각은 주자학이나 양명학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사상에서부터 원시 유교 공자 맹자가 말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코의 주장은 당시 에도막부가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은 시점에서 주자학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위험해 보였다. 관학으로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주자학을 받아들인 에도막부의 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한 소코의 사상은 상당히 위험한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고학은 야마가 소코를 출발점으로 해서 다른 사상가들에게 퍼져나갔다. 


2) 이토 진사이


진사이학이라는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펼친 이토 진사이는 당시 교토의 큰 재목상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가 되기 위해 주자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해 양명학, 불교, 노장사상, 선 등 두루 공부했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학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32세에 스스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사랑의 인간학’이라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 동기는 다음과 같다.

 주자는 사서 중 대학을 중시했다. 에도 시대에는 주자학이 주류였기 때문에 대학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진사이는 대학을 읽다가 주희가 대학이 공자의 저술이라는 데에 의문을 가졌다. 대학은 인간의 정념, 정에 대한 것‐성내고 슬퍼하고 근심하는‐ 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논어 안에 그려진 공자의 모습은 정이 많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공자가 무척 아꼈던 제자 중에 안해가 있었는데 그가 젊은 나이로 죽자 공자는 울면서 통곡했다. 이렇게 정이 많은 공자가 무미건조한 대학을 썼을 리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진사이는 문헌비판학을 통해 대학이 공자의 저술이 아님을 밝혀냈다. 문헌학적으로 고전을 읽고 고전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고의학이라 한다. 고전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문헌비판을 통해 접근하는 학문이 진사이학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진사이는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세계를 펼쳤다.

그는 주로 공맹사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쓴 저술 중 <논어고의>, <맹자고의>가 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문답한 것을 후에 편집한 책으로 공자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진사이가 사랑의 인간학을 어떻게 펼쳤는지 보기 전에 그의 생동적 우주관부터 살펴보자. 생동적 우주관은 무엇인가?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성인은 천지만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보고 이단은 천지만물을 죽은 것으로 본다.’ 이단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주자학처럼 리를 세우는 것이다. 천지만물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천지 인간 자연 이 모두는 생명과 활동성에 가득 차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벌써 주자학에 대한 비판임을 감지할 수 있다. 주자학은 리를 설정하고 거기서부터 기가 나온다고 본다. 그러나 진사이는 기에서부터 리를 말할 수 있지 리를 상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태극이나 무극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도 모두 비판했다.

그럼 진사이가 세운 생동적 우주관은 무엇인가? 그는 생명있는 것을 생명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도, 즉 리 대신 도를 말한다. 살아서 약동하는 진리는 ‘도’라는 것이다. 천도가 있고 지도, 인도가 있는데 그 중 진사이가 중시하는 것은 인도(人道)이다.

그가 말한 사람의 도에 대해 살펴보자. 도는 어떤 초월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즉 도는 인간의 존재 여부에 무관하게 존재한다. 도 자체는 초월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가 인간을 성인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 도가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교(敎)가 필요해진다. 그래서 진사이는 교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진사이가 말하는 교는 맹자가 말하는 선단확충설이다. 진사이는 맹자의 선단확충설을 자신의 교육방법으로 가져온다. 맹자는 인간 안에 기본적으로 사단이 있다고 했다. 사단은 선한 것이며 이 선한 사단을 확충해 가기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사단인데 이 사단을 확충시켜 인의예지를 구현해나가는 것이 진사이가 주장하는 교육의 의미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기본으로 깔면서 그는 ‘사랑의 인간학’을 펼치고 있다.

무엇이 사랑의 인간학인가? 공자 사상은 한 마디로 ‘인(仁)’ 사상이다. 그런데 진사이는 이 인을 사랑으로 해석한다. 인즉애(人卽愛) 곧 공자의 인(仁)을 애(愛)로 해석하는 것이다. 진사이 사상을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대비시켜 연구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공자의 인과 진사이의 애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되리라 본다.

종교간 대화에서 유교와 불교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티브를 진사이 학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진사이가 말한 ‘인이 곧 사랑’이라는 것은 인이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을 두고 실천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우러나서 타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펼쳐갈 때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허위이다. 이와 같이 진사이는 인을 사랑으로 해석하면서 유교를 인류의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공자가 인을 말했지만 인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고 이것이야말로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이런 점에서 원시 유교야말로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진사이는 이렇게 사랑의 인간학을 펼친다.

인의 한자를 보면 사람이 둘 있다. 사랑은 혼자서 단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인은 남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느냐는 인간관계 안에서 결정된다. 인간관계론에 대한 공자의 인(仁)을 진사이는 사랑으로 표현한다. 인간을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서로 왕래함에 있다. 참된 인간의 모습은 인간 간의 통교에 있으며 그 통교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둘 사이의 사랑이라는 인간관계를 확충해나갈 때 인의 사회화가 이루어져 나갈 수 있다. 사랑으로 관계맺음이 바깥으로 확충되어 나갈 때 인의 사회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진사이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녔기에 관직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밑에는 문하생이 약 3천명 가량 있었다. 문하생들은 진사이로부터 사랑의 인간학을 배웠다.

공자가 존경했던 인물로 주공이 있고 주공보다 더 존경했던 요순 임금이 있다. 공자는 성인이라는 표현보다 군자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다. 성인은 완성된 사람을 말하며 군자는 인격이 완성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군자라고 했고 요순 임금과 같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했다. 공자는 요순 임금을 높게 평가했지만 진사이는 요순보다 공자를 더 높게 평가한다. 그건 요순은 백성들이 알든지 모르든 태평을 구가한 정치가이지만 문제는 백성들에게 도를 자각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가 태평성대였다는 것이다. 곧 그가 죽고 나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공자는 백성들이 도를 자각하도록 가르쳤다. 스스로 덕치정치를 펼치려다 실패했지만 후대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공자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공자가 요순보다 더 높은 성인에 이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진사이는 유교를 정치적인 사상으로 보지 않고 휴머니즘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또 그랬기 때문에 당시 에도 사회와 정치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려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진사이 학이라는 독창적인 학문 체계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진사이는 사랑의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펼치고 이것이 고학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로 남았다.


3)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


진사이의 고학자로 또 한 사람을 든다면 오규 소라이를 들 수 있다. 그는 소라이학을 통해 고학 사상을 완성시켰다. 고학은 크게 진사이학과 소라이학으로 대비해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소라이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소라이학도 진사이학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진사이학이 ‘고의학’이라는 방법론을 써서 공자의 가르침을 문헌연구 방법론을 통해 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면 소라이가 제창한 방법론은 고문사학이다. 즉 그는 공자나 고대 선왕의 가르침을 문헌비판학적 방법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문헌을 따지는 방법이다. 전자가 주관적인 측면이 좀 있다면, 후자는 객관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이 방법론적 차이가 두 학문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었다. 전자가 유교를 휴머니즘적 가르침으로 봤다면, 후자는 유교를 치국안민의 정치학으로 봤다. 소라이는 이렇게 말한다 “논어에서 설해진 것은 이념이나 도덕이 아니라 현실 처세술인 정치방법론이다.” 그에게 있어 논어는 태고적 완벽한 제왕이 실시했던 정치를 기록 전승한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으로 유교를 보고 접근한 학문 체계가 소라이학이다. 물론 소라이나 진사이 모두 주자학을 비판한 측면이나 원시 유교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건 같으나 방법론에 차이가 있고 지향하는 것도 전자는 휴머니즘이고 후자는 정치적인 점에서 다르다.

소라이의 고문사학에 대해 살펴보자. 소라이는 이토 진사이를 존경했지만 진사이 연구방법론 안에 주관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비판했다.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을 삽입시켜 그것이 마치 공자의 가르침인양 이야기하는 진사이의 학문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즉 자기 주관을 삽입시켜 공자 사상을 재해석하는 진사이의 학문적 태도에 대해 소라이는 철저하게 연구자의 주관을 배제한 관점에서 공자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연구방법론을 갖고 자신의 학문을 펼쳐나갔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문헌을 대해야 한다는 소라이의 학문적 태도로 인해 그는 ‘문헌학적 연구의 개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은 문헌학 연구가 잘 되어 있는데 이는 소라이 영향도 자뭇 크다.

진사이학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것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비판을 받았다. 소라이는 문헌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논어를 연구했고, 논어에서 말하려는 것은 이념이나 도덕이 아니라 현세의 처세술인 올바른 정치방법론이라고 말한다. 즉 논어는 올바른 정치방법론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 자신이 덕치정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기 때문에 충분히 소라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자기가 어느 관점에서 그 책을 접근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사이가 지닌 문제의식은 소라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양쪽 모두 고학이라는 학문세계를 펼쳤음에도 둘이 얼마나 다른지 알 것이다. 우리가 자기 관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같은 것을 연구하더라고 무척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소라이의 말을 인용해보자. 공자의 도는 선왕의 도다. 앞서간 선왕의 도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왕의 도란 선왕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이라고 소라이가 표현했다는 것이다. 선왕의 도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선왕이라는 앞선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왕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말이다. 하늘로부터 떨어진 천도도 아니며 세상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왕이라는 고대의 뛰어난 지배자, 정치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가 선왕의 도라고 소라이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이 선왕의 도를 배우고, 배운 것을 잘 살려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이론을 펼치게 된다. 도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도가 아니라 이 선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건데 이것을 잘 이용해서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소라이의 주장이다.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어떤 농민이 생활이 어려워서 부인하고 연을 끊고 삭발 한 다음 노모를 모시고 유랑 하던 중 노모가 병이 들자 노모를 버리고 혼자 에도지방으로 가다가 중간에 잡혔다. 어버이 유기죄로 잡혀 재판받았다. 이에 대해 주자학자들은 이렇게 판단했다. ‘그 사람이 사실 노모를 버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노모의 약을 구하기 위해 에도지방에 갔을 수도 있고 돈을 벌려고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만 노모를 버렸다고 보지만 그 사람이 에도에 간 진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에도에 가서 약을 구하려 했을 수도 있고 노모를 버릴 뜻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어버이 유기죄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라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소라이는 “이것은 사실이다. 세상에 기근이 들게 되면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 우리가 이 사건을 어버이 유기죄로 재판하게 되면 기근 때 같은 행동을 한 사람도 이 같이 판결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생기게 된 것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살기 어렵고 그래서 부인과 연을 끊고 노모를 모시고 유랑했던 상황이 벌어지게끔 그 지방의 지방관이 제대로 정치를 못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사람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지방관의 책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라이는 공직에 있는 지방관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시키는 것인데, 소라이가 주장하는 것은 한 개인의 어떤 동기나 심정보다도 공인들의 정치적인 책임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라이는 공직자들의 책임윤리를 강조한다.

우리가 소라이가 선왕의 도를 중시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왕의 도가 천도가 아니라는 주장은 굉장히 차이가 있다. 유교가 기본적으로 천과 인을 연결시키는데 주자에게도 리는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천(天)과 연결된 천리이다. 공자도 천명을 이야기했지만 맹자에 오면 천명(天命)은 인간 안에서 사단이 되고 다시 주자에 와서는 천리가 된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성을 이야기하면서 인성이 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유교의 기본적인 틀이다. 그러나 소라이는 이것을 천(天)과 연결시켜 선왕의 도로 보지 않고 인위적으로 만든 도라고 보면서 유교의 기본적인 틀과는 거리가 있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라이학이 유교의 본래 사상과 차이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소라이는 선왕의 도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라고 했다. 공자는 결코 작위적인 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고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은 외래사상이 들어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2. 국학

 

고학이 공맹사상과 중국 고대 성인들의 도를 이상으로 삼았다면, 국학은 일본의 고유한 고도(古道)를 이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학은 중국의 원시 유교, 공맹과 중국 선왕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인데 반해 국학은 일본 고유의 고도(古道)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일본의 옛 도, 고유한 도를 찾아내지 못해서 그렇지,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도를 이상으로 삼아 그것을 학문적으로 전개시킨다는 것이다. 국학에서 주로 연구한 것은 일본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이다. 즉 일본 고전에 나타난 일본의 고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일본의 고도가 무엇인가? 그건 다름아닌 신도이다. 신도신학을 펼친다. 신도는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으니까 이것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 국학에서 하고자 한 것은 신도의 신학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실증적 학문으로 체계화를 시켜나가는 일을 한 것이다. 신도 자체는 학문적 체계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신화와 같이 두리뭉실하니까 이러한 신도사상을 신학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학문적인 방법론에서는 고학과 유사하다. 고문사학이라든지 실증적인 문헌학적 방법론을 쓰고자 했던 측면이 유사하다는 말이다.

국학이 지닌 기본적인 인간 이해는 어떠한가? 국학 역시 고학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이 추구한 이상적인 인간관을 떠나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하는 주정적인 인간관을 중시한다. 일본인은 정적인 것,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국학을 펼친 학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1) 게이추


먼저 국학자들 중 게이코가 있는데 게이추라고도 한다. 게이추는 일본의 고도를 귀납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방법론을 도입해서 국학운동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국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원래 진언종의 승려로서 진언종의 창시자인 쿠우카이를 존경했다. 평생 그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쿠우카이에 의해서 양부신도가 펼쳐졌는데 그 자체가 진언종 사상과 신도 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이런 점도 게이추의 사상 안에 영향을 주었다. 게이추는 쿠우카이에 의해 산스크리트 문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초기 불교를 공부하려면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봐야 하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야 한다. 그는 산스크리트 문법학을 배우면서 문헌학적인 연구방법론을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일본 고전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서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승려생활을 하다가 자기가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서 유랑을 많이 했다. 일본의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에 심취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자살에 실패한 후 그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게이추는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그는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보았다. 인간 안에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그는 정(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 안에서 정이라는 가치를 찾아냈고 이것을 일본문화의 특징으로 보았다. 즉 그는 일본 고전 안의 정 사상을 찾아내어 이것으로 일본의 옛 도를 찾고자 했다. 게이추는 국학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그의 학문 세계에 깊이가 있지는 않기에 대표적인 네 명의 국학자 안에 게이추를 넣지는 않는다.

그 다음으로 나온 국학자는 아즈 마마로이다. 게이추가 은자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아즈 마마로는 적극적인 행동주의자였다. 그래서 에도막부에 드나들면서 국학을 확산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고 국학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의견서를 막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두드러지진 않으나 진사이학과 소라이학의 영향을 받아 국학을 펼쳤다. 에도 막부와 밀접한 연관성 안에서 사회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학문적으로 두드러지지는 못했다. 


2) 가모노 마부치


가모노 마부치는 아즈마마로의 제자로서 소라이의 고문사학적인 노선을 따랐다. 문헌학자로서 학문틀을 마련했지만 거기에 머물지는 않았다. 일본의 시가집 중에서 만엽집이 있다.(일본말로는 만요슈라고 읽는다.) 이 만엽집은 나라시대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다. 마부치는 양친의 영향으로 <만엽집>을 연구했다. 마부치의 아버지는 신사의 신직을 수행했던 사람으로 만엽집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만엽집 연구에 집중하면서 이 안에 일본의 고대정신이 들어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오래된 노래들에 나오는 고대 일본인들의 고유하고 순수한 마음을 경애했다.

그는 일본고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작위를 배제한 무위자연의 세계’로 표현했다. ‘무위자연’ 하면 노자가 생각난다. 바로 일본의 고대 정신세계가 노자의 세계와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유가적인 사상은 인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노자 사상은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작위와는 반대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그는 만엽집 안에 천지 그대로의 마음,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살았던 원시 자연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고 보았다. 일본 고대인들은 자연 그대로의 생을 영위했다고 보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는 참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 도를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노자 도덕경> 1장에 서로 도가도비상도()라 하여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한 바 있다.

s그러니까 마부치는 일본인들이 도의 정신으로 살았지만 도 자체가 말로 잘 표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문헌학적으로 일본의 고대정신이 잘 연구되지 않았고 그래서 후대인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s마부치는 일본에 고대의 도가 없었던게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부치가 말하는 고대의 도는 천황이 통치하던 도이다. 마부치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고대 언어를 모르면 고대 정신을 알 수 없고 고대 정신을 모르면 고대 도를 알 수 없다.’ 언어를 알기 위해선 고대 시가집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안에 고대 일본인들의 도 사상이 들어 있으니, 이것을 알아내려면 고대 시가집을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3) 모토오리 노리나가


국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마부치의 제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이다. 도쿠가와 시대의 학자 세 명을 들라면 한 사람이 진사이, 소라이 그리고 노리나가를 꼽을 수 있다. 노리나가는 스승 마부치의 학설을 계승했지만, 스승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마부치가 연구한 <만엽집>은 남성적인 분위기를 지닌 문예작품이다. 반면 노리나가가 연구한 <신고금>은 여성적인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었다. 신고금을 통해 노리나가는 당시 일본문화 근저에 있는 정신세계를 ‘모노노아하레’라고 표현했다.

모노노아하레는 일본 문화론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일본 문예비평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일본 문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모노노아하레는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그 대상을 이성적이고 지성적으로 인식하는 것 저변에 대상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갖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알기 전의 감정, 곧 감수성과 공감이 혼합된 것이다. 대상을 인식할 때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감성의 층에까지 침전되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이성이나 지성으로 아는 건 진짜 아는 게 아니라 감성의 밑바탕에서부터 감동을 느끼고 정서적인 것들이 올라와야 그 대상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동양 사상은 이 면에서 이성 중심적인 서양사상과 차이가 있다. 맹자에서는 이걸 인지적 감정이라고 표현한다. 인지적 감정은 감정에 이성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동양에서는 이성적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감정이 먼저 통해야 한다. 맹자가 말한 사단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일본인의 문학작품 속에 모노노아하레가 잘 나타나있다. 모노노아하레는 이성으로 판단하기 전에 대상에게서 느낄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것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노노아하레에 기초한 감성과 이성을 통합한 것이 노리나가의 도 사상에 그대로 흡수된다. 이와 같이 국학에서는 일본인들이 지닌 고유한 도에 대해 말한다. 진사이, 소라이, 마부치의 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진사이의 경우는 도를 천도, 인도, 지도로 구별했는데 그 중에서도 천도와 인도 간의 유비 관계를 중시했다. 천도는 주자학의 리처럼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에서 말하는 리와는 다르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리는 생명이 없으나 진사이에게 있어 천도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 진사이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천도와 인간의 도 간의 유비관계를 중시했다. 여기서 그의 사랑의 인간학이 나온다. 소라이는 인도에 한정되어 있었고 인도 중에서도 선왕의 도를 중심으로 사상을 펼쳤다. 마부치는 유가의 인도를 인위적인 도(道)로 보았고 도가적 무위나 자연의 도를 추구했다. 마부치는 무위자연의 도를 무작정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일본의 고도라고 해석했다. 즉 일본이 옛날부터 지녀온 도를 무위자연의 도로 본 것이다.


노리나가의 사상적 배경에는 진사이, 소라이, 마부치의 도 사상이 깔려있다. 노리나가는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도 사상을 펼쳤다. 그렇다면 노리나가의 도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도가적인 도도 아니고 유가적인 도도 아닌 신의 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도는 신들의 조상에게서 비롯한 도, 곧 아마테라스의 도이다. 즉 일본이 가진 고도는 아마테라스의 도이고 천황은 아마테라스의 도를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도는 사해만국에 통용되는 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노리나가는 체계화된 신도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노리나가는 <고사기>를 연구하면서 그에 기초한 신의 도를 주창했다. 그가 제창한 아마테라스의 도는 이자나기 이자나미 신에 이어 아마테라스 신이 계승하여 전한 도이다. 따라서 이는 일본 국토를 생성함과 더불어 시작된 도이기 때문에 일본 국가 성립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노리나가는 시대에 따라 정치제도에 변천이 있어왔지만 이것은 전부 신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지금 에도 시대는 아마테라스의 계획에 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수된 것이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는 정치는 아마테라스의 도를 이은 것이므로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기반으로 노리나가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에 대해 존왕의 마음, 왕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막부를 따라야 한다.’ 메이지 유신 때처럼 존왕사상이 체계화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국학에서 존왕 사상의 기반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리나가는 왕통, 황통의 일관성에 바탕을 두어 신에 의해 지속되어 온 도가 그때그때 정부에 따라 그대로 이어져오는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상당히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사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지녀온 생활원리이다. 일본인들은 신에는 선신도 있고 악신도 있지만 결국 선신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선신에 의해 이 세상이 돌아가므로 지금 현실이 아무리 불행하고 어렵다 해도 그것이 지금 신의 계획이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므로 견뎌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일본인의 무의식에 있는 생활원리이다. 노리나가는 지금 우리의 처지는 신의 계획 안에서 전수되는 것이고 신의 뜻은 일본 역사 안에서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니까 우리가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라타 아쓰타네는 신도 신학자로서 노리나가의 뒤를 이어 고도를 신학화하는 데 치중했다. 신도에 대한 신앙심이 강했던 그는 신도를 신학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노리나가가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신도와 고전 연구를 시도했다면, 아스타네는 신앙적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좀 신비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사상으로는 영혼불멸설, 천지개벽설이 있다. 그가 어디로부터 영향을 받았을까? 당시 그리스도교 서적들이 들어오면서 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세상을 둘로 나누면 하나는 유세이고 하나는 현세이다. 유세는 저 세상을 말하며 여기를 주재하는 신은 대국주명신()이다. 이 신이 인간세상인 현세를 내다보면서 사람들의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 인간들의 행동에 따라 사후영혼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후에 영혼은 불멸한다. 죽은 후에 영혼은 진쟈나 사당에 모셔지는데 영혼은 멸하지 않고 불멸한다. 영혼불멸설, 천지개벽설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것은 그가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나 <칠극>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책에 나오는 영혼불멸설, 창조설 등을 일본의 고도(古道)에 넣어서 일본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이렇듯 신도를 신학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