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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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4장 일본유교 - 에도시대의 주자학, 에도시대의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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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4-06-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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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일본유교


1. 에도시대의 주자학


일본종교사 안에서 불교가 큰 역할을 했으나 에도시대에 와서는 주자학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등장했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주자학이 관학이 되었을까? 왜 종전시대에 불교가 관학이었는데 에도막부는 불교를 택하지 않고 왜 주자학을 선택했을까?  물론 그 전에도 주자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쇼토쿠 태자 때 중국에서 주자학이 들어오긴 했으나 주변 사상으로 자리매김했지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에도막부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로 주자학을 수용하면서 에도시대 중심사상으로 부상하게 된다

에도 시대 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자학을 채택한 것은 순수히 학문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치 사회 질서를 유지해감에 있어 주자학이 훨씬 현실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사회질서 안에 정착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주자학에서 발견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전국시대 잇코잇키 법화잇키 사건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정토진종의 잇키, 니치렌종의 잇키, 호케잇키, 잇코잇키와 같은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 안에서 불교가 지닌 힘은 위협적이다.

정토진종의 잇키를 상상해보라. 현세를 초월하는 아미타불 신앙에 빠져 있던 신도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싸웠다. 불교는 내세초월적인 측면이 강조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심에 불타게 되면 이런 잇키들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종교집단이 배타적인 신앙을 지니게 되면 무서운 집단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순교하지 않나? 그래서 에도막부는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초월적인 종교가 아니라 현세적인 이데올로기 관학으로서 주자학을 채택한 것이다. 

주자학은 주희(주자)가 원시유교 공자의 사상을 철학화시킨 것이다. 주자는 리기이원론을 펼쳤다. 리(理)는 우주 전체의 절대 보편적인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절대적 법칙으로서의 리가 구체적으로 현실 안에 드러난 것이 ‘기(氣)’이다. 구체적으로 리는 인간에게 성(性)으로 드러난다. 리가 성으로 드러난다는 데에서 성 즉 리(性卽理)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천리로서 있던 리가 인간 본성 안에 본연지성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인간 관계 안에 구현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자신이 지닌 리로서의 성을 드러내는 것이 인격의 성숙됨을 결정한다. 성즉리는 인간관계 안에서 '애(愛)'로 드러난다. 부모와 자식 간의 효(孝), 형제 간의 제(弟),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는 충(忠)으로 드러난다. 리(理)라는 보편적인 법칙에 근거하여 인간 삶의 구체적인 관계들‐ 효, 제, 충‐에서 해야 하는 당위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주자학자들은 신분제도의 당위성을 주자학 안에서 찾았고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바탕으로 한 정치 사상은 당시 에도막부 사무라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 즉 주자학의 논리 안에서 신분제도, 상하관계의 정당성을 찾았고 주자학은 관학으로 수용하게 된 것이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근세의 시대적 경향성과도 상관관계가 있다. 일본 중세는 불교가 지배적인 사상체계였기 때문에 불교적 내세구원관을 지향하는 우끼요 세계관이었다면, 에도시대에 오면 부끼요‐부세로 바뀐다. 이것은 현세중심적인 삶을 유도하는 현세지향적 세계관을 말한다. 중세의 긴 전란기를 마치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시대를 맞이하면서 질서와 안정을 희망하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 시대,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라는 긴 전란기를 거쳐 일본을 통일하면서 안정과 질서를 추구하는 현세지향적인 분위기가 퍼지면서 주자학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주자학의 세속적이고 인륜적인 성격이 맞아 떨어지면서 주자학은 일본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 후지와라 세이카와 하야시 라잔


이에야스는 자신이 새롭게 수립한 정치체계를 좀 더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주자학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에도막부가 주자학을 관학으로 채택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이다. 원래 승려였던 그는 당시 불교가 내세지향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현세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이 불교 내에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그는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잡혀온 조선의 주자학자 강항으로부터 주자학을 배우게 되었고 조선의 성리학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유교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강항과의 만남은 그가 불교 승려에서 유학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강항으로부터 주자학에 대한 깊은 매력을 느끼고 일본도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만들어야겠다는 강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세이카의 이러한 생각은 이에야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이에야스가 세이카를 자신의 막부에 초빙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을 이끌도록 했는데 세이카는 자신의 제자를 추천했다. 세이카의 제자가 바로 유명한 하야시 라잔(1583‐1657)이었다. 그는 에도시대 주자학의 중심인물이다..

에도 막부가 주자학을 관학으로 채택하는데는 당시 조선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불교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불교는 내세지향적이지 현세를 구제할 수 있는 힘, 사회개혁적 힘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왔던 유학자 강항으로부터 조선의 성리학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연구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일본도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하야시 라잔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후지와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정치계에 들어와 스승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제자 라잔을 보냈다. 그래서 라잔이 도쿠가와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 주자학이 관학으로서 자리매김 하면서 막부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라잔은 특히 봉건적 신분제도를 합리화시키는 데 주자학을 이용했다. 인간 사회의 상하관계는 천지관계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신분제도를 합리화했다. 이와 같이 에도막부는 주자학을 정치 이데올로기, 특히 상하 신분제를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그는 도쿠가와의 스승이 되어 주자학이 관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라잔 역시 승려였다가 환속해서 주자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세이카와 라잔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둘은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다. 세이카는 시대적으로 아즈찌 모모야마와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살았는데 이 시기는 일본이 국제적으로 개방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세이카는 사상적으로도 개방적이어서 주자학뿐 아니라 양명학도 수용했다. 즉 그는 양명학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지 않았고 사상적으로 열린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라잔은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실 라잔의 이런 점이 도쿠가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즉 세이카가 평등사상을 지향했다면, 라잔은 상하 차별을 두는 신분 사회 질서를 주장했다. 이와 같이 라잔은 에도시대 신분사회를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라잔의 사상은 이러하다; 인간의 상하적 신분 차별은 천지의 상하 차별처럼 선험적이다. 즉 신분차별이 본래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신분차별이 본래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주자학의 리 사상과 연결된다. 리는 절대적 진리의 세계로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리를 타고 나지만 리에는 차별이 있다. 타고나지 않은 부귀나 장수를 바라는 것은 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부귀나 신분 그리고 수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라잔의 주자학적 사유세계는 에도막부의 신분사회 구축과 기초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자학에서는 ‘경(敬)’ 이 강조된다. 경에 머물고 리를 궁구히 한다는 거경궁리(居敬窮理)는 주자학의 핵심 사상이다. 주자학에서는 절대진리로서의 ‘리’가 인간 마음에 들어온 것이 ‘성’이며 이것이 본래 주어졌다고 하여 ‘본연지성’이라 한다. 본연지성을 잘 드러낸 사람은 성인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본연지성이 잘 구현되지 않고 자기 안의 기질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을 ‘기질지성’이라고 한다. 본연지성이 감추어져 있고 혼탁한 기질지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범부이다. 주자학이 추구하는 바는 어떻게 기질지성에서 본연지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 기질지성으로부터 본연지성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바로 거경궁리이다. 거경 하고 궁리 함으로써 본연지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궁리라는 것은 사물 하나하나에 다 있는 그러한 각각의 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궁리말고도 경에 머무는 방법이 있다. 경에 머물기 위해서는 정좌 등의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

경을 중시했다는 것은 주자학의 거경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라잔은 거경사상에 따라 마음을 잘 닦는 것에 대해 엄격한 세속 윤리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양명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경 사상과 함께 주자학에서는 궁리를 중요시하는데 양명학에서는 궁리하지 않는다. 궁리를 하지 않는 양명학은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과정을 거치지 않고 마음만 중요하게 여긴다.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리이다”라고 얘기한다. 관점을 마음에 두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자칫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 라잔은 이러한 맥락에서 양명학을 비판했다. 한편 라잔은 양명학자로부터 궁리에 있어서 사물 하나하나의 리를 궁구히 하기보다 지식적인 학문 세계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라잔은 주자학이 관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2) 야마자키 안사이


주자학에서 세번째 중요한 인물은 야마자키 안사이(1618‐1682)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라잔보다 훨씬 주자학에 빠져 있었다. 라잔은 박학다식한데 반해, 안사이는 라잔과 비교하면 주자학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녔던 학자였다. 안사이는 ‘주자를 배워 잘못된다 한들 주자와 함께 틀리는데 그것에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고 할만큼 주희에게 완전히 빠져 있던 사람이었다. 안사이는 스이카 신도를 수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즉 그는 주자학자였지만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도를 수용해서 스이카 신도를 수립했던 것이다. 안사이 역시 경 사상을 중요시했다. 경은 우리 자신의 마음, 외적인 자극에 의해 정(情)이 발동되기 전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필요하다. 주자학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아직 마음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미발지심(未發之心)이라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을 성, 마음이 발했을 때를 정이라고 하는데 이미 발했으면 기발(旣發)이라고 한다. 기발지심은 이미 뭔가 부정적이고 더러운 것이 묻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의 마음, 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의 마음을 유지하라고 한다. 모든 정념, 내 안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들은 악한 것이므로 억눌러야 한다는 엄격한 사고방식 때문에 경을 중시했다. 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미발지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과 같다.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에 머물러야 한다(居敬)는 것이다.

경 사상에 근거하여 안사이는 신하의 도를 강조한다. 군주나 천황에게 지켜야 할 신하의 도나, 마음가짐이 바로 경의 마음이다. 또 안사이는 스이카 신도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스이카 신도는 신도와 유교를 결합시켜서 수립한 것이다. 안사이는 사상적으로 라잔에 비해서 주자의 사상을 내면화시키고 체계화시켜 주체적으로 수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주자학은 라잔과 안사이를 통해 관학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도쿠가와 시대에 세력이 가장 강한 학파가 되었다. 주자학의 의의에 대해 살펴본다면 하나는 리에 대한 해석인데 에도막부는 리를 상하 신분을 규정하는 원리로 이해했다. 물론 주자가 이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사회신분 규정 원리로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온 주자학도 신분차별적 측면이 강했지만 일본에서는 훨씬 더 강했다. 두번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다. 몸을 닦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자기에서 출발해서 점점 확장되어 나간다.

나라에서 천하에까지 확장된다는 이 가르침이 사무라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무라이들의 책임감‐자신이 몸을 닦아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도록‐ 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다. 또 한 가지로는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게 되면 천황 체계를 정당화시키는 존왕론이 등장한다. 주자학은 존왕론의 기반이 되어 명분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2. 에도시대의 양명학


주자는 자신의 철학세계 안에 ‘리’로 설정하고, 이 리가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성즉리(性卽理)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선하지만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주자는 그것을 기질지성으로 설명한다. 본연지성과 함께 기로써 인간에게 드러나는 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다는 것이다.

 기질에는 깨끗한 것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으며 청렴혼탁한 기도 있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기질의 차이에 있다고 본 것이다. 성인은 본연지성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여 드러낸 사람인데 반해 범인은 기질지성의 혼탁한 기를 걷어내지 못해서 본연지성이 안에 감춰져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성인과 범인이 나뉜다. 이렇게 되면 주자학에서 성인이 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즉 성인이 되기 위해 기질지성으로부터 본연지성으로 어떻게 전향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본연지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자는 ‘거경궁리’를 제시한다. 거경궁리는 무엇인가. ‘거경’은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고 정좌하는 것을 말한다. 경(敬)에 머무르는 것, 존심지경(尊心之敬)이라고 한다. 마음에 잘 집중해서 경을 지키는 것이다. 거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궁리’인데 궁리는 사물 사물마다 있는 각 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거경궁리를 통해 기질지성을 벗겨내고 본연지성을 드러냄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양명도 젊었을 때 철저한 주자학자였다. 그래서 주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거경 궁리에 힘썼다.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열심히 탐구함으로써 사물의 리를 꿰뚫고 아는 것을 거듭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왕양명은 자기 집 정원에 있는 대나무의 리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마음을 다 쏟아 대나무의 이치를 사색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왕양명은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보다가 주자학의 ‘리’에 주목했다. 리를 심(心) 위에 놓을 것이 아니라 심이 곧 리(心卽理)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왕양명은 주자가 심 위에 리를 상정한 것과 달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그는 리를 사물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효의 이치를 부모에게서 구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효의 리를 부모에게서 구하면 그것이 과연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인지, 부모의 몸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효의 리가 부모의 몸에 있다면 부모가 돌아가시면 효의 리는 없어지는 것일까? 왕양명은 이런 점에서 주자가 심과 리를 이원화시키는 심기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과 리는 이원화된 것이 아니라 심즉리라는 것이다. 주자는 마음 안에 성만 있는 게 아니라 情도 있다고 보면서 리에 해당하는 것은 성뿐이고 정은 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왕양명은 주자처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이원화시켜 자기 안에 분열이 생기게 만든다고 보았다. 주자학에서는 성은 똑같지만 정이라는 것을 설정해서 차별의 가능성을 두었지만 양명학에서는 마음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있으므로 평등사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양명학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이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알고 참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양지와 양능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데 마음에 욕망이 있어 양지와 양능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이 욕망을 없애면 된다는 것이 양명학의 논지이다.

인간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면 양지가 드러난다는 양명학적 사유는 선불교적 사유와 상당히 유사하다.  때문에 양명학에서는 정좌수행을 통해 고요하게 앉아서 흙탕물 같은 인욕을 가라앉히는 수행을 강조했다.

 양명학에서는 리와 기가 이원적이 아니고 리즉기가 된다. 주자학에서는 리기이원론이었던 것과 분명 다르다. 또 주자학이 성즉리를 주장했다면 양명학은 심즉리를 주장했다. 방법론에 있어서도 주자가 분석적인 방법을 썼다면 왕양명은 직관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주자가 각 사물의 리를 궁리하는 방식이 분석적이었다면 왕양명은 직관적이고 유심론적인 방법론을 썼다.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참으로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양지 양능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있는데 다만 인간의 인욕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주자학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여서 신분제를 합리화시키는 측면이 있었던 반면, 양명학에서는 많은 서민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서민들의 불만이 리에 합당하다고 보았다. 즉 불만의 원인이 지배자에게 있다면 지배자는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주자학의 경우에는 지배자가 중심이 되었던 것에 반해, 양명학에서의 주체는 피지배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명학은 에도막부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다. 일본의 양명학을 구체적으로 사상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사람이 나카에 도오쥬이다. 일본 양명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도오쥬는 양명학을 어떻게 펼쳐나갔는지 살펴보자.


1) 나카에 도오쥬


도오쥬는 엄격한 주자학자였는데 리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면서 양명학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도오쥬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효 사상이다. 사실 도오쥬의 효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공자에서부터 온 것이다. 공자는 효를 중심으로 인(仁) 사상을 전개했다. 공자 사상은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인(仁)을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인은 가족 안에서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에서부터 구체화되어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인의 사회화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의 기본은 ‘효’에서 출발한다. 효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망 안에서 효를 확장해 간다. 효는 자기와 직결되는 부모와의 관계인데 부모와 관계맺음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점점 확장해나가면서 관계망 안에서 원활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공자 사상이고 이것이 바로 仁의 사회화이다. 

어쨌든 도오쥬는 사무라이로서 높은 지위에 있을 때 오오미에 계신 어머님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관직을 계속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모친을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 그의 사상 안에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되었다. 리가 도오쥬에게는 효로 드러난 것이다.

리란 나와 상관없는 초월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효로 드러난 것이다. 리를 효로 표현한 것이다. 나카에 도오쥬는 “인간의 내면 안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이 하늘에서는 천도(天道)가 되고 땅에서는 지도(地道)가 되고 사람에게는 인도(人道)가 된다.” 그 인도(人道)가 바로 효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잔은 충을 중심으로 했다면, 도오쥬는 효를 인륜의 기본으로 삼았다. 

효를 충보다 위에 둔 도오쥬는 말하길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둘도 없는 보화가 있다. 이 보화는 하늘에서는 천도가 되고 땅에서는 지도가 되고 사람에게는 인도가 된다. 이 보화를 옛 성인은 효라고 이름붙였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보화가 효이다. 그래서 효를 발현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효에 대한 해석을 확장시켜 갔다.

이렇게 도오쥬는 효의 형이상학을 세웠다. 단순히 부모를 돌보고 도리를 다하는 차원을 넘어서 효는 상제, 천황에게까지 확대 심화 해석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상제에게뿐만이 아니라 상호 형제인 모든 인류에게까지 효의 사상이 확장되었다. 그것을 愛敬사상이라고 한다. 애는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잘 지내는, 정답게 사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경은 주자학에서의 경과 같은 의미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서로 사귐의 측면과 상하적인 측면이 다 포함되어 있다. 즉 도오쥬는 애경을 통틀어서 효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도오쥬의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 개념과 굉장히 가까워서 도오쥬가 에도 시대에 들어온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의문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도오쥬는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한다. 그가 자기 안에서 효의 사상을 확장시키면서 애경 사상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오쥬에게 있어 효의 의미는 부모에 대한 효라는 협의의 의미를 넘어서서 인간의 시조인 황상제‐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창조주라고 할 수 있는 천지의 주재자, 천에 대한 인격화이다. ‐ 에게 효를 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이렇게 천지를 주재하는 황상제에게 효를 한다는 식으로 도오쥬는 효에 대한 형이상학을 펼쳐졌다. 그러면서 도오쥬는 만민이 모두 천지의 자녀라면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모두 형제로 보는 만인평등사상을 펼쳤다. 즉 도오쥬에게 효는 우주의 보편 법칙으로 확대해석 된 것이다.

효는 구체적으로 인간 관계 안에서 애와 경으로서 드러난다. 애(愛)가 사람 간에 정답고 친하게 사귀는 것을 의미한다면, 경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가볍게 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오쥬 사상은 당시 정치계 안에서 비주류였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어졌다. 나카에 도오쥬의 사상을 이은 사람은 바로 구지와라 반잔()이다. 그는 도오쥬 사상 중에서도 평등 원리를 구체화시켰다. 그의 저술에서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인간이 모두 천지의 자녀라면 어떻게 미천한 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표현에서 우리는 도오주의 평등 원리가 그대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나카에 도오쥬는 관직을 버리고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지와라 반잔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평등 사상이나 도오쥬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펼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막부의 정책 안에서는 사상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반잔은 유배를 갔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에도시대에 양명학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고 비주류로 있었지만 나카에 도오쥬는 오오미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성적인 측면에서 주자학이 지니지 못한 많은 가르침을 남겼기 때문에 그는 성인이라는 별칭까지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도오쥬의 사상 중에는 ‘권’ 사상이 있다. 권은 저울의 의미이다. 어떤 것을 할 때 때와 장소와 위치에 따라서 그때그때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덕의 활동을 권이라고 한다. 권 사상은 유학에서 중요한 사상이다. 때에 맞춰 자기가 할 바를 제대로 하는 시중사상은 도오쥬 사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도오쥬는 권을 목표로 삼아 만인이 실천해나갈 것을 권고했다. 도오쥬 사상에서 핵심은 효의 사상을 확장해서 해석한 것과 권 사상이다. 양명학에서는 지행합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도오쥬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행의 측면보다 지의 측면을 더 강조했다. 그래서 도오쥬의 후기 저작에 보면 지행합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행보다 知를 더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양명학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사상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시대 상황 안에서,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화시키는 측면이 크다. 양명학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효를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 변했다. 특히 나카에 도오쥬는 효 사상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효 사상을 부각시켰다. 효와 황상제와의 관계 안에서 사상을 펼쳐나가는 식이었다. 어떤 면에서 양명학이 지향하는 바와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또 효가 천의 인격화를 시켜 상제의 개념으로 드러나는 것도 일본 신도의 신 개념이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래 갖고 있는 양명학과의 차이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