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일본종교 연구

신불습합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4:37

본문

신불습합 (神佛習合, Shinbutsu-shugo)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래 불교의 융합을 가리키는 말.

-원래 마츠리가 중심을 이루는 신도에는 사상이나 교리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외래 종교사상이 전래되면서 그것에 자극을 받아 다양한 형태로 신도사상이 형성되었다. 그 최초의 형태는 신불습합사상이다.


-신도와 불교의 융합은 6세기 중엽 불교가 일본에 유입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두 종교의 융합과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한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흔히 가정에 신도의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부쓰단[佛壇]을 두고 있으며 결혼식은 신도식,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곤 한다.


-6세기경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자 그 수용을 둘러싸고 반세기에 걸쳐 소가(蘇我) 일파와 모노노베(物部) 일파 사이에 격렬한 종교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소가 일파가 승리를 거두었고 이 후 쇼오토쿠(聖德)태자를 거치면서 불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 고도의 형이상학 체계를 지닌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신도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불교 전래 초기 단계에서 신도와 불교는 대체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는 외래종교인 불교측에서 신도에 접근하는 형태로 균형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궁사(神宮寺, 신사 경내에 세워진 절)와 신전독경(神前讀經, 신사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것)의 관례이다.

7세기말 8세기초에는 신도의 가미를 위해 승려가 독경을 하는 절이 신사 경지내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신궁사 神宮寺라 한다.


신궁사 건립은 불교 승려들이 신도에 접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신궁사는 처음에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근세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신사에 신궁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신궁사에선 신전독경이라 하여 승려가 신도의 신전 앞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등 신사의 제사를 불교식으로 수행함


신불습합사상은 대체로 7세기말에서 13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다음 세단계로 전개되었다


?(1)제1단계 : 호법신으로서의 신


신불습합은 나라시대부터 나타났다. 그 때의 불교계와 불교승려들이 진자들을 절 안과 밑에 소속시켜 관리하면서 신불습합에 관한 이론과 기본틀을 불교사상을 설명하는 과정에 서서히 신불융합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일본불교계는 불교계의 본래사상을 주장하기 보다 일본사상과 절충하는 경향을 띰437.


신도와 불교의 공존양식은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741년 나라의 도다이 사[東大寺]에 거대한 불상을 조영하기에 앞서 불상 건축계획을 이세 신궁[伊勢神宮]에 모신 신도의 최고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아뢰었다.


 그러다가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 건립을 위해 이세신궁에서 의식을 행하고 우사 하치만신이 상경한 8세기 중엽에 이르면 서서히 힘의 균형이 기울기 시작한다.


신도에 대한 불교의 이와 같은 우위성은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불보살이 중생 구제를 위해 임시로 일본 신도의 가미가 되어 나타났다는 주장)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이리하여 불교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그에 따라 중세에는 불교의 교의체계에 입각한 습합신도설(텐다이신도와 신곤신도)이 형성되는 등, 본지수적설은 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널리 사람들 사이에 침투해 들어갔다.


(2)제2단계 :  本地垂迹(본지수적)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신불습합사상의 전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본지수적설이 등장하여 11세기에 이르러 널리 퍼졌다. 여기서 '본래의 근원적인 모습'을 의미하는 본지란 부처를 가리키고 수적이란 신도의 가미들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신도의 가미로 현현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의 원형은 인도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기원후 4세기경부터 불교가 인도에서 서서히 쇠퇴하고 힌두교가 성행하게 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 승려들은 힌두교의 신들이 부처의 현현이라고 설하게 된다. 이런 관념이 일본에 전래된 것이 바로 본지수적설이다.


형태상으로는 부처와 가미가 하나임을 내세우지만 내용상으로는 가미에 대한 부처의 우위성을 함축하고 있는 이 본지수적설은 수많은 유력 신사에서 채택되었고 오랫 동안 일본인들의 신불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도와 불교는 상호영향을 줄 뿐 아니라 서로 합해져 구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습합의 기본원칙은 本地垂迹(본지수적)이다. 本地는 본래의 터 즉 본체를 의미하며 垂迹은 본지가 세상에 내려와 만든 자취를 말함

이는 “불교가 본체로서 더 높고 깊은 진리이며 신도는 그것의 바깥 내지는 나타남이라는 것이다.

예) **화신불사상

관세음보살은 부처의 화신불로 봄. 



밀교의 대일여래가 일본에 나타난 것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라는 것, 이세의 신궁에는 아마테라스를 상징하는 거울과 칼 굽은 옥이 있다. 거울은 公明 특히 천황의 정치력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천황의 공평한 성품을 상징하며 칼은 平天下의 힘을 상징하며 굽은 옥은 지극히 오묘한 천황의 성품이라 하여 이것이 천황의 마음이며 모든 정치의 기본이라 했다.


또한 신도의 가미[神]는 불교의 부처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 초반에는 신도와 불교의 융합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불교이론인 혼지스이자쿠세쓰[本地垂迹說]가 등장했다.


형이상학적인 부처는 본래의 근본실체(혼지)이며 역사 속의 부처는 그 실체의 화신(스이자쿠)이라는 이론이다.

신도와 불교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처와 신도의 신은 궁극적으로 통일체이지만 부처는 혼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그 화신인 스이자쿠인 것이다.


본지수적사상은 조직화되고 이론화되어 신도론의 형태로 나타남

신도론은 신도에서, 불교에서 형성된다

불교의 신도론은 신도측으로부터, 신도의 신도론은 불교측으로부터 자극받아 형성된다.

양측이 상호자극교섭관계를 통해 신도론을 형성한다.


(3)제3단계 :

이와 같은 전개 과정에 있어 불교 색채를 띤 신도설(혹은 신도 색채를 띤 불교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텐다이(天台)신도와 신곤(眞言)신도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산왕일실신도>-천태신도(텐다이신도)


텐다이신도는 일명 산노(山王)신도라고도 불리우며, 사이쵸(最澄, 766-822)에 의해 창시된 텐다이슈(天台宗)와 습합한 신도설이다.

이 텐다이신도를 대표하는 책으로서 작자 미상의 {요천기}(耀天記)를 들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일본은 아마데라스를 비롯한 수많은 가미들이 황실을 수호하고 백성들을 품어 기르므로 신국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석가가 일본의 중생들을 불법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혹은 석가가 일본 산노(山王)의 가미로 현현했다고도 한다.


*헤이안 시대(평안시대 794-1185)에 천태종은교토의 히에이산에 본사를 두었다. 산의 신인 산왕은 석가모니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즉 석가는 대일여래이고 산왕은 아마테라스와 동일한 존재

세계의 一實(하나의 진실, 법화경에 명백히 나타나있는 진실)에 대한천태종의 가르침을 해석한 결과 산왕일실신도라는 종파가 나왔다. -이 종파는 도쿠가와시대에 번성했다.


<양부신도-신곤신도>


한편 신곤신도는 일명 료부(兩部)신도라고 불리우며, 쿠카이(空海, 774-835)에 의해 창시된 밀교의 일파인 신곤슈(眞言宗)와 습합한 신도설이다.


료부란 신곤슈(진언종)에서금강계(지의 천)와 태장계(리 지수화풍공의 5대)를 가리킴

리지불이라 하여 금강계와 태장계가 이지불이인 대일여래의 최고실재를 나타낸다고 본다. 여기서 금강계 태장계 만다라가 나온다.

즉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금강계의 지법신 태장계의 이법신 만다라를 양부만다라라 한다.

진언종ㄷ은 이 양부만다라를 이용하여 료부신도설을 만들었다. 즉 신도의 제신을 이 양부만다라에 배치한 것이다.


태장계만다라--이자나미와 아마테라스


?이세신도 : 전술한 신불습합사상의 전개에 자극받아 비로소 신도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최초의 형태가 바로 가마쿠라(鎌倉)시대 중엽 이후에 형성된 이세(伊勢)신도이다.


13세기에 성립한 이세신도는 모든 신도사상의 남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세신궁의 외궁 신관들이 주창하였으므로 외궁신도라고도 불리우며, 한편 외궁 신관들은 대대로 와타라이 가문에서 나왔으므로 이를 와타라이(度會)신도라고도 한다.이 이세신도의 경전으로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외궁 신관들이 외궁의 제신인 도유케노오오가미(豊受大神)의 지위를 고양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쓴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두차례에 걸친 몽고내습(1274년과 1281년)을 통해 국가의식에 눈뜨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에 대한 자각이 고양되어 있었던 터라, {신도오부서}에는 중세의 시대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국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신도오부서}에 의하면, 도유케노오오가미는 아메노미나카누시노가미 혹은 구니도코다치노미코토와 동일한 신이며, 나아가 아마데라스와 동격이 된다. ?즉 이세진구 외궁의 제신인 도유케노오오가미 또한 내궁의 제신인 아마데라스와 마찬가지로 황손에게 삼종의 신기를 부여한 황조신이자 모든 신들의 어버이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롭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이와 더불어 이세신도는 신도의 핵심을 기도, 정직, 청정에서 찾았다. 가령 이세신도의 대성자인 와타라이 이에유키(度會家行, 1256-?)는 청정과 정직이 근원적 신의 신성을 표상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이세신도는 다음에 살펴 볼 요시다신도 및 근세 스이카신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불교용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이후 반불교사상의 원류가 되었다


.요시다신도 :


 중세 신도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이세신도와 더불어 요시다신도를 빼놓을 수 없다. 요시다신도의 경우는 본지수적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입각하여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신도가 불교에 대한 우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요시다신도의 명칭은 집대성자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俱, 1435-1511)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일명 유일(唯一)신도 혹은 원본종원(元本宗源)신도라고도 한다.


가네토모는 주저 {유일신도명법요집}(唯一神道名法要集)에서 당대까지의 신도를 세 유형 즉, 신사의 유래에 입각하여 전개된 신사 중심의 신도론인 본적연기(本迹緣起)신도, 불교와 신도가 습합된 신도론인 양부습합(兩部習合)신도, 요시다 가문에만 전수된 신도론인 원본종원신도로 분류했는데, 이런 시도는 신도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 밖에 요시다신도는 유교, 불교, 도교, 신도의 원천은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인 구니도코다치노미코토에 있으며, 신도는 일본의 근본이고,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가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관념은 사실 요시다신도만의 특이한 개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요시다신도의 특이성은 오히려 신도의 이론적 조직화를 통해 불교에 맞서고자 한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요시다신도는 중세 신도론의 정점을 이루어, 중세말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신직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근세에 걸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이카신도 :

반(反)본지수적의 관점은 요시다신도 뿐만 아니라, 불교 대신 유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의 신도론(가령 다양한 유가신도, 요시카와신도, 스이카신도의 경우)에서도 유사한 구조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스이카신도에 대해 살펴 보자. 스이카신도는 후술할 고학신도와 더불어 근세를 대표하는 신도론으로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에 의해 주창되었다.


안사이는 원래 일본 주자학의 대표 주자였는데, 스이카신도는 그가 말년에 이르러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안사이는 신도의 가미신앙을 매개로 하여 유교적인 도(道)를 추구하면서, 주저 {신대권풍엽집}(神代卷風葉集)에서 "도(道)란 아마데라스의 도이고, 교(敎)란 사루타히코노가미(猿田彦神)의 가르침"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아마데라스의 도란 기기신화에서 아마데라스가 황손 ?니니기에게 일본을 통치할 것을 명한 신칙에 따라 황손인 천황이 일본을 통치하게 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신도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마데라스의 도란 천황이 일본을 통치하는 도를 가리킨다.


한편 사루타히코노가미는 니니기가 천강할 때 길안내를 맡았다는 가미이므로 당연히 인간의 삶을 안내해주는 가미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사루타히코노가미의 가르침이란 개개인의 수양을 위한 신도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 때 흥미로운 것은 안사이가 오행설에 입각하여 사루타히코노가미(원숭이)의 덕을 주자학의 경(敬)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즉 원숭이(申)는 오행에서 금(金)에 해당하는데, 금은 토(土)에서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토가 굳은 것이 금이므로, 토금(土金)은 일본어로 '츠츠시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곧 경(敬)이라는 것이다. 좀 더 알기 쉽게 풀어 말하자면, 토는 '츠치'(つち)이고 금은 토가 '시마루'(しまる) 즉 단단하게 뭉친 것이므로, 토금은 '츠치시마루'(つちしまる) 혹은 '츠츠시무'(つつしむ, '삼가다'라는 뜻) 즉 경(敬)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이카신도의 핵심적 사상은,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천황이 일본을 통치한다는 것, 그리고 개개인은 경으로써 늘 삼가는 마음으로 천황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스이카신도의 영향력은 실로 심대하다. 그것은 신도계에서 18세기 후반까지 가장 다이나믹한 세력이었다. 그 후 스이카신도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학신도에게 지배적인 자리를 넘겨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이카신도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1930년대 및 40년대의 군국주의 일본은 스이카신도의 사상에 의존하여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학신도 : ?통상 국학(國學)이라 불리워지는 고학(古學)신도는 불교나 유교 등의 외래 사상을 배격하고 일본 고래의 신도사상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국학의 4대 인물로 고대 언어 연구에 집중한 국학의 시조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1669-1736), {원씨물어}(源氏物語)나 {만엽집}(萬葉集) 등의 고전문학을 연구한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 국학의 대성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 황국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1776-1843)를 꼽는데, 이 가운데 신도사상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자 현대 일본에까지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노리나가에 대해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장 개관에서 이미 노리나가의 가미(神) 정의를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유명한 가미 정의의 출처인 주저 {고사기전}은 그가 30여년에 걸쳐 완성시킨 필생의 대작이었다.  이 {고사기전}의 서론으로서 그가 42세 때 쓴 {직비령}(直毘靈)은 고학신도론의 에센스라 할 만하다. 거기서 노리나가는 신도란 천지자연의 도(노장사상)와는 다른 것이며, 또한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도(소라이학)도 아니고, 오직 무스비노가미(産巢日神)의 영에 의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시작하고 아마데라스로 이어진 도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천황이 일본을 통치하는 것은 바로 가미의 통치이고 그것이 곧 신도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직비령}에서 엿보이는 신도적 인간관도 흥미롭다.   


노리나가에 의하면,?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무스비노가미의 영에 의한 것인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태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같은 유교적 덕목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노리나가는 이상적인 일본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즉 일본인은 천황의 뜻과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천황의 자비심에 의해 가호를 받을 수 있다. 모든 일본인은 가미를 모시고 각자의 신분에 맞추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겁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리나가 국학에 대한 후세인의 평가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리하여 노리나가는 오늘날에도 일본을 내면에서 규제하는 일본적 사고를 형식화한 사상가로서 간주되어 종종 '내면의 노리나가'가 문제시되고 있다. 혹은 "노리나가의 고대 일본어 연구가 그 치밀한 문헌실증주의에 있어 획기적인데 비해, 이 동일한 학자가 조야하고 광신적인 배타적 국수주의를 주창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라는 이른바 '노리나가 문제'로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고학신도의 사상은 파쇼적인 근대 천황제에 이론적, 심정적인 기초를 제공한 측면이 적지 않다.


일본인도 그들 자신의 불교를 평가할 때 세속세계를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것이 아니고 세속세계에 순응적응하려 했다고 말함.


(그러나 최근에 와서 니치렌은 성스런 세계에서 살려면 세속권력에 집착하거나 구속해선 안된다고 가르쳤다. )


**현세의 이익과 조상의 영혼을 안정시키고 그 행위로 자신들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의 최대관심사.


이와같이 현세이익적인 면과 조상영혼의 공양은 니치렘슈에서 파생된 창가학회(創價學會)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현세중심적으로 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조상의 영혼을 안정시키고 공양한다는 것과 함께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특징을 지님.-


 불교를 포교하고 전교하면서 형성된 일본적 현상이다.


5. 반본지수적설


본지수적설에 불만으로 등장

空海가 개창한 진언종은 원래 밀교의 사상적 면이 내재되어 있어 주술과다라니 시행을 적극 강조함.

진언밀교에 의해 불교와 민간신앙이 더욱 습합되어 가면서 신토계는 반본지수적설을 주장.

즉 자국의 민속신을 부처나 보살위에 둠

따라서 당시는 일본의 예술문화 신앙의 면에서도 세계적 보편성보다 일본적 관념과 통념이 주도권을 잡아나갔다.43



**국가신도 **


국가신도라는 용어는 패전 후에 일본을 지배했던 연합군사령부에서 만들어낸 용어로서 근대 천황제하 군국주의 시대의 신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국가신도는 고학신도를 토대로 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전통이다. 다시 말해 국가신도는 근대 천황제가 만들어낸 국가종교로서 신사신도와 황실신도가 결합되어 있다. 실질적인 국가신도의 형성은 1882년 교파신도의 성립부터라고 말해지지만, 그 맹아는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이미 싹트고 있었다. 즉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면서 왕정복고의 선언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제정일치의 정신에 입각한 국민국가의 재통합 및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기관(이후 신기성, 교부성으로 이어짐)이 재흥되어 전국의 신사를 관할하는 한편, 경내지를 제외한 신사와 사원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켰으며, 신직의 세습제를 금지하고 신사가 국가의 종사임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신도와 불교의 철저한 분리가 선언되었으며, 실제로 불교에 대한 신도측의 파괴적인 공격이 나타났다.    한편 1970년에는 대교선포(大敎宣布)의 칙령을 발하여 신도의 국교화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대교선포의 내용은 "지금은 천운이 순환하는 유신의 때이니 통치의 교를 밝히고 가미나가라의 대도를 선양하며 새로이 선교사를 명하여 천하에 포교케 한다"는 데에 있었다.


나아가 1871년에는 관폐사 및 국폐사 제도가 발족되었고 1872년에는 신도 포교의 근본방침으로서 삼조의 교칙 즉 (1)경신애국의 취지를 실현할 것 (2)천리인도를 밝힐 것 (3)천황을 섬기고 조정을 뜻을?준수할 것이 선포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882년 이후에는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신종교 제파들이 교파신도 체제 안에 편입됨으로써, 국가신도는 국가의 시설이며 비종교로서의 신사이고, 교파신도는 종교로서의 신사라는 이중적인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 신도가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종교와 분리된 것이다. 1884년에는 신도의 국민교화정책이 후퇴하고 국민교화가 일반 교육제도 안에 흡수됨으로써 형태상 정교분리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교조나 교전이 없고 민족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성립되었던 신사는 메이지 시대를 일관하여 국가의 시설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9년 {제국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신도는 일반 종교와는 구별된다고 하는 이른바 신도 비종교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결과 1890년 {교육칙어}에 의해 신도는 교육의 기본으로서 교전화되었고 1891년에는 소학교에서의 교육칙어 봉독과 어진영(천황의 사진)에 대한 예배가 제도화되었다. ?이로써 천황을 절대화하는 국가신도의 교의가 사상적, 법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가령 {제국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하면서 제3조에서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또한 {교육칙어}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기 위한 '국체의 교의'를 교육을 통해 강제하기 위한 것으로, "대일본제국은 황조신 아마데라스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후손인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로서, 현재의 천황도 황조신의 자손인 현인신(現人神)이시다. 국민된 본의는 억조일심으로?현인신이신 천황의 성지를 받들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체이며 이러한 국체는 오직 일본에만 있고 다른 나라에는 없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국체 사상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국가신도는 한마디로 국체신도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