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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그리스도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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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일본의 신학사상사와 자유주의의 도전
서정민(본 연구소 운영위원, 학술연구부장)
서론 - 일본의 기독교 사상 수용과정
일본 역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인 진출, 나아가 기독교 선교의 관심 대상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와 다름없는 표적으로 존재해 왔다. 초기 가톨릭 선교의 부분적 성과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여실히 살펴지듯이 근대 이전의 일본이 걸었던 기독교 수용의 과정은 나름대로 독특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국이나 중국 등 인접 동아시아권 나라들의 기독교 수용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7세기 이래 가톨릭 선교단체나 그들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확장 정책과 결부된 선교정책을 간파한 일본정부는 기독교 금지와 쇄국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1858년 미국과의 수교를 기점으로 서구 여러 나라와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여 개국의 길로 나섰고 1859년부터 미국과 영국 성공회, 개혁파, 장로교파, 그리고 회중교회 선교사들이 차례로 일본에 도착했다. 특히 근대국가로의 재편을 의도한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또한 기독교의 금교령이 해제된 1873년부터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기독교는 새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메소디스트교회.보급복음신교전도회(普及福音新敎傳道會) 등의 선교사들이 대거 도래하였다. 일반적으로 문호개방 정책 실시 이후 일본의 정책 당국자들이나 개국론자들은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수용을 의도했다고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그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과제로도 '근대화'의 문제가 집중적인 관심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였다. 그러한 초기 기독교 수용기의 현상을 수용계층의 입장에서 연구해 온 것이 널리 논의된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다만 최근에 들어 그 기독교 선교나 수용의 계층적 편중, 즉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수용을 보인 기독교는 지식인 중산층의 전유물과 같은 경향을 보이고 이에 따른 소외계층의 문제, 그리고 '근대화' 자체가 가져다 주는 민중 소외의 문제를 신학사적으로 제기하고는 있다. "기독교의 선교가 시작된 이래 일본의 신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근대화'라는 것이 커다란 신학적 과제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개국(開國)이래 일본사회가 넓은 의미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대 변동 속에 놓였던 역사의 과정을 감안해 보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 이와 같은 근대화의 프로세스는 물론 일본교회의 주된 구성원인 도시 중산계층의 중대한 관심사였으며, 그것이 신학적으로도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일본의 세속화, 도시화,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전도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라는 내용을, 근대화를 담당해 간 지식계급을 대상으로 설명한 신학서가 많이 쏟아져 나온 반면, 근대화의 저변으로 밀려나 소외감을 체험해 온 사람들의 생각은 그 신학의 시야로부터 벗어나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뿐만 아니라 초기 일본의 기독교 수용과정에서 일부 수용을 지지하는 서구지향의 엘리트들 이외에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또한 기독교 수용이 가지는 위험성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기독교가 일본의 전통적 종교, 도덕, 사회적 관습을 파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취한 이들은 이들 보수주의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서구문명이나 사상을 받아들여 일본의 '개화'를 앞당겨야 한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 중에서도 이른바 서구의 '공리주의'나 '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기독교 수용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거나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사람들은 개국론자들 중에서도, 실리론보다는 명분론을 중시하는 무사계급의 후예들, 종래에는 유교적인 습속에 깊이 젖어 있던 지도적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도 때로 현실의 정치적 권부로부터는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기독교로 지도적 이념을 형성하고자 하고 그 목표는 서구제국주의 국가와 같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서구학문'을 배웠는데, 그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접촉의 기회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본은 일찍이 문호개방과 서구문물의 수용을 결정하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모두 '탈아입구'의 입장으로 서구문화를 수용하고 그 중요한 근간이 되는 기독교에도 호의적인 수용을 단행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선입관은 내용적으로 크게 수정되어야 한다. 이 시대 일본의 경우에도 여전히 보수주의적 쇄국론자들은 존재했었고 더구나 주목해 볼 일은 서구문물을 똑같이 수용한 인사들 중에도 기독교는 선별하여 배격하고자 했던 인사들이 다수였다는 사실이다. 이미 서구에서 일련의 세속적 도전을 받은 기독교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이데올로기로서는 적합치 않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서구과학의 진화론적 관점, 철학으로서의 공리주의에 더욱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그 중에서도 일부의 개방론자들에 의해서 기독교는 수용되었는데, 이것이 일본 초기 기독교 수용의 실상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이들 소수의 기독교 수용자들의 목표와 일본의 정치.사상적 흐름 안에서의 존재양태이다. 그들의 기독교 수용 목표는 개인적 이상을 실현한 과정인 동시에 앞서 언급한 일본의 '근대화'에 효용되는 기독교 사상의 포괄이었다. 곧 기독교 채용은 방략적 과제이고 궁극적 목표는 일본의 '근대화'였다. 그리고 그 존재양식은 지극히 타협적 양상을 보인다. '비일본적인 사상과 종교'로서의 기독교 채용을 허용하는 국가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일본화된 기독교', 천황제를 축으로 하는 근대 일본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인정하고 보위하는 기독교를 형성하는 국수적 기독교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일본의 '국수적 신학'과 '천황제 예속 기독교'로 전개되고 있다. 즉 후쿠자와(福澤)나 이토(伊藤)의 '탈아입구론'에서 출발하여 니지마(新島襄)나 에비나(海老名彈正)의 '기독교적 이상(理想)'으로 연결되는 근대화 사상이다. 이는 '일본'의 필요에 의한 '기독교',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지상목표에 부합되는 기독교로의 변증을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 사상을 의미하는 초기의 경향이다. 따라서 이는 일본의 천황제 근대국가론이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자리잡을 때 기독교 신앙과의 현격한 모순이나 괴리 속에서도 이를 조화, 습합시켰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기독교 수용을 전개하였다. ... 이러한 일본 신학의 제형은 전전(戰前) 일본교회 주류의 논리가 되면서 1941년의 교파합동의 '일본기독교단'의 설립 근간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은 특히 정치적으로 변용된 토착화의 논리를 사용하였고, 천황제 하의 일본 국가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특은(特恩)을 베푼 반면 교회와 그 신학은 국가에 절대적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지금까지 살핀 초기 일본 기독교 수용자들의 기독교 효용논리, 전전시대 일본 기독교 수용의 전체적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일본의 기독교는 '일본적'이라는 넓은 의미의 '토착화 노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 '근대화'의 한 내재로서의 일본신학, 정치체제와의 타협을 추구했던 일본 기독교의 노정을 엄밀한 의미의 '토착화'로 볼 수 있을지는 별도의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같은 시대 우치무라(內村鑑三)를 중심으로 하는 무교회 그룹의 신학자들이 제기한 '일본적 기독교'가 파시스트에 영합한 제도권 교회가 사용한 같은 명칭의 기독교사상 체계와는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데에서 또한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초기 일본의 기독교 수용과정에서 상정되는 일본신학의 과제나 방향성을 기초로 일본신학사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특별히 그 흐름 속에서 감지되는 여러가지 신학적 조류의 변화 중에 '자유주의 신학'(신신학)의 도전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하는 '자유주의 신학'(신신학)이라는 개념은 세계적인 신학사조의 한 계열로서, 혹은 앞서 논의한 넓은 의미의 '토착화론'이라든가 기독교의 교리적 도그마로부터 일정 부분 열린 입장을 지닌 사상경향의 흐름을 모두 포함하는 '진보적인 신학'을 대체로 다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초기 일본의 신학사상사 속에서 거명되는 '자유주의 신학'(신신학)은 다음과 같은 개념의 한정을 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신신학이라는 것은 1880년 후반 유럽과 미국으로 부터 도입되어 유포된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신학적 경향을 가리킨다. 1885년 보급복음신교전도회의 선교사 스핀너(Wilfried Spinner)가 일본에 도착했다. 이 전도회는 그 한해 전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사학파에 속한 교회지도자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서 종교사학파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를 비기독교적인 여러 민족에게 그들 민족에 이미 존재하는 '진리계기'와 관련시켜 전하려는 것을 목표로 세운 바 있다. 또한 1887년에 미국 유니테리언협회의 나프(Arthur M. Knapp), 1890년에는 미국유니버셜리스트협회의 페린(George L. Perin)이 일본에 왔다. 그들은 모두 전통적인 삼위일체론, 기독론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들 선교회에 의해 생성된 교파는 일본에서 큰 세력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박하게 받아들이고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사조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본론 -일본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 1. 일본 개신교 교파의 형성과 신학 동향 일본에 개신교계 선교사들이 들어 오고 나름대로 선교활동을 벌인 것은 보다 앞서지만 서구교회의 교파제도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이후이다. 일본 역시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파교회 형태의 개신교회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영미계, 특히 미국교회 선교부 중심의 선교활동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며 이 또한 한국 초기 교회의 교파형 교회 형성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이 당시 지향하던 근대국가 형성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 기독교가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는 '정교분리'의 원리를 존중하는 '자유교회'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이해도 존재한다. 즉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국가교회 형태의 틀을 강하게 유지하던 유럽형 교회 보다는 여러 교파가 자파의 신조나 체제를 독립적으로 유지하며 국가는 그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미국적인 교파교회를 보다 근대적인 교회의 존재형태로 보았고 따라서 초기 일본의 기독교 수용자들은 이러한 자유교회 형태를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일본에 더욱 유효한 교회형태로 추구했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일본의 교회는 자유교회, 다시 말하면 자파의 교리, 교회제도, 선교방침을 고수하는 교파적 교회의 방향이 필연적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교회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부 교회사가나 조직신학자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보다 진전된 교회의 형태를 자유교회나 토착적인 신조를 보유한 교회가 아니라 유럽형의 '영방(領邦)교회'나 '국가교회' 형태에서 찾았던 신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처음 기독교가 선교되어 형성되는 토착교회, 나아가 자유교회적인 교파교회의 '유치한' 교회 형태로 부터 국가사회와 유기적이고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유럽형 교회를 향해 진행하는 것이 교회 체제와 신학의 발전 경로로 보고 있다. "그 자신에게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교회라고 하는 고정개념이 있었다. 그것은 일생을 두고 몰두해 온 유럽기독교사의 연구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원천으로서 종교개혁기의 교회, 특히 독일의 영방(領邦)교회, 더 나아가서 그가 기독교 원류의 한 정점으로 본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창한 '하나의 거룩한 공회로서의 국가교회'가 이미지로 구축되었다. 이러한 교회 개념이 기독교사의 본류이며, 이러한 교회 가운데 복음에 어울리는 신앙내용과 질서가 있는 조직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에 의해 성립된 교회야말로 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지닌 견해도 있다. 오히려 교파형 교회나 자유교회보다도 복음이 수용된 지역과 문화의 독특한 복음 이해가 적용된 '토착적 교회'가 더욱 진전된 교회론의 개념이며 하나의 교회가 강조되는 유럽형 교회를 그 교회 발전의 출발로 보는 입장이다. "도히는 이시하라의 이른바 '교회발전 수순'을 완전히 거꾸로 설정하였다. 즉 미숙한 일본 교회는 여러단계를 거쳐 결국은, 이시하라의 서구교회론의 안목에서는,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던 '하나의 거룩한 교회'까지 발전해야 된다는 이론을 거꾸로 뒤집었다. '국가교회 → 영방(領邦)교회 → 자유교회 → ?'의 순서가 교회발전의 원리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도히가 설정한 '?'는 일본교회를 비롯한 각 피선교국의 교회일 수도 있고, 포괄적으로는 특수한 지역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근거로 생겨난 어떤 교회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교회관의 차이는 결국 일본의 교회사나 개신교 교파의 형성사를 평가하는 사관의 차이로 연결되어 이른바 '신학적 교회사론'(이시하라 등)과 '민중교회사론'(도히)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일본의 개신교회가 교파형 교회, 즉 자유교회의 형태로 구축된 것은 그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따로 하더라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교회 형태의 교회조직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다시 구분되는 커다란 유형적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 선교 배후에 존재하는 교파적인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여, 전도지(傳道地)가 지닌 특수한 사정을 일부 감안하고, 같은 계통의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다고는 해도 원칙적으로 그 교파의 원래 전통에 충실한 교파형성이 있다. 1887년에 조직을 본 일본성공회, 1907년 조직의 일본메소디스트교회, 루테루교회, 뱁티스트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교파의 경우는 교파형성의 방향성이 명백하고, 그 방향을 향해 교파적 전통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 신학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교파에서는 신학적 논쟁이나 파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비교적 희박하다. 둘째, 일본 프로테스탄트가 교파형 교회였다고는 해도, 즉 외국의 여러 교파와 선교회에 의해 선교되고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을 거쳤다고는 해도 일본 기독교가 독자적인 교파형성을 주도한 존재 양태가 있다. 1890년에 설립된 일본기독교회, 그에 앞서 1886년에 조직된 일본조합(기독)교회 등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이들 교회는 그 창설 초기 여러가지 교회조직으로서의 미숙한 상황 속에서도 관계를 맺은 선교회의 교파적 전통과는 다른 일본교회의 독자적인 전통을 창출하기 위해 혼란과 파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두 번째의 교회 창설 형태이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에 조직되는 기독교회가 서구의 교파적 전통에 충실하기보다는 일본적인 문화적 특수성과 역사적 정황을 감안하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입장, 넓게 보면 '토착화 정신'을 근저로 삼는 신학적 사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 기독교사를 통해 볼 때 보다 구체적인 배경이 존재한다. 그것은 일본의 기독교인들 간에 기독교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강한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존재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으로 하나의 교회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872년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일본의 각 교회는 특정한 교파적 전통과는 무관한 그들 나름의 간단한 신조, 같은 명칭, 같은 조직을 부르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교파주의적 움직임은 지나치게 막연하여 결국 일종의 이상주의로 빠졌고 몇년 가지 않아 붕괴되고 마는 노정을 걸었다. 다만 그와 같은 정신은 일본에서 각 교파 간의 연합활동이나 상호 교류의 방식 등으로 잔존하였다. 또 한가지 특별한 배경으로는 일본 기독교의 가장 유력한 선교단체의 하나였던 '아메리칸 보드'의 실체이다. 이 선교회는 미국에서 대대적인 신앙각성운동의 결과 탄생한 선교단체로 이들은 교파의 구별을 단호히 거부하고 단지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집중하는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아메리칸 보드'의 영향도 일본에서 한 때 무교파주의를 강력히 창출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고 실제로 일본조합(기독)교회나 일본기독교회와 같은 독립적 자유교회를 창출하게 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성립과정에서 '교파구별 없는 하나의 교회' 조직 노력이 구체적으로 시도되었던 사례는 일본일치교회와 조합교회와의 합동 움직임과 그 결렬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877년 개혁파와 장로파 계통 선교사들의 주도로 설립된 일본기독일치교회는 1886년에 '아메리칸 보드'와 도시샤(同志社)대학 주체들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독립교회들의 연합 조직으로 결성된 일본조합교회와 합동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 노력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 갔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두 교파의 설립 주도자들이 지닌 신학적 관점의 차이, 구체적으로는 신앙신조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일본기독일치교회가 일본조합교회와의 합동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자 원래 그 교회가 추구하고자 하던 신앙상의 표준, 즉 신조.헌법.규칙을 대폭 수정하고 교회명칭도 '일본기독교회'라고 바꾼 것에서 역으로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기독교회'(전 일본기독일치교회)의 지도자요 중심 신학자인 우에무라(植村正久)는 개정된 신조와 헌법이 타 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신조의 정수를 정리한 것으로 다만 '신신학'(자유주의)의 도전 등을 물리치는 데는 유효한 수준이라고 정리하였다. "이 신앙 각조는 단순하지만 역사적이다. 어떤 면으로는 복잡하고 협애(狹隘)한 교파적 신조에 속박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비역사적 신학사상의 도전의 피해를 극복하기에 이르렀다. 수년 전 소위 신신학이 유행했을 때도 일본기독교회에 일부 좁은 신앙신조의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신조의 결과에 힘입었던 것이 아닐까. ... 현재 일본기독교회의 신앙입장은 진보적 정통파라고 통칭하지만 다른 기회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와 합동하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들의 신앙신조 때문에 합동을 방해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일본조합교회는 교회연대적 성격의 교파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각각의 개교회가 자유.자치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단지 제휴하는 형태로서, 회중교회적인 성격을 띠었다. 다만 교파의 결성시에 규약을 채택했는데, 이는 서구 회중교회의 신조를 채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846년 런던에서 개최된 복음동맹회대회에서 채택한 교리적 기초를 따랐다. 그러나 이 신앙적 규약도 강제적인 것은 아니고 각 교회와 개인별로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조합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정리한 신학자는 고자키(小崎弘道)였는데, 그는 중도적 신학자로 온건한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이를 정리하였다. 그 내용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과 속죄, 성령에 의한 새생명의 부여, 성서의 권위, 교회, 두 개의 성례전, 구원 등에 관한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총 4개조로 정리되어 있는데, 앞서 '일본기독교회'의 것보다는 훨씬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신조에 전적으로 근거한 것이다. 일본조합교회의 결성과정과 그 교파의 성격으로 볼 때 공통의 신앙신조를 채택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강제적이라든지 차별성을 배제했다든지 하는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조합교회에 가맹한 개교회가 나름의 신앙고백을 발표할 수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베(神戶)교회의 경우 독자적인 '고베기독교회신조'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의 일본조합교회의 행보를 보아도 "규약을 채용하는 일과 더불어 종래의 신앙고백은 소멸되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고자키의 제안에서 보듯이 신앙고백의 경직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앙신조 규약도 여러 차례 수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일본에 상륙한 신신학(자유주의)이 조합교회나 그 소속 신학자에게는 특별한 무리 없이 용해될 수 있었던 소지가 있다. 이상 대표적으로 살펴본 '일본기독일치교회'(일본기독교회)와 '일본조합교회'는 앞서 제시한 프로테스탄트 교파형성 유형 중 두 번째 타입, 즉 선교 본국 교회의 교파적 전통보다는 일본의 선교 적응상황이 더욱 참조된 형태에 속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일본기독교회'의 경우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강력히 전제한 교리신조의 확립으로 서구의 개혁주의 신학에 보다 철저하였다. 반면, '일본조합교회'는 표준이 되는 신조는 별도로 하고라도 개교회와 소속 신자들의 자유, 자치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신앙신조의 경직성을 피하고 자유로운 여러 신학의 접근이 가능한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성향적 차이는 두 교파 공히 일본적 상황을 보다 강조하는 설립배경을 지녔으면서도 하나의 교파로 합동하지 못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의 교파형성 과정을 거쳐 일본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일정한 형식적 틀을 갖추고 일본인 신학자들이 배출되며 그들에 의해 서구신학의 수용과 전개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의 기독교 신학은 서구신학, 특히 유럽의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로 전환되어 갔다. 즉 복음주의로 대표되는 미국교회의 선교신학의 수용을 넘어서서 일본의 신학자들이 직접 유럽의 전통적 신학사조에 접하면서 형성된 관념적 신학논의가 크게 팽배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구신학의 보혁, 양론이 끊임없이 소개되었고 때로는 심화.발전 되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일본 신학을 '서구 신학의 모방적 실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신학계에는 자체적인 서구 신학에 대한 반동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이는 곧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일본적 기독교', 혹은 '무교회주의 신학'이다. 이는 큰 범주에서의 '토착화 신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시 넓은 의미에서 보다 자유롭고 진보적인, 비전통적 창출신학의 범주에서 논의할 수 있는 신학일 것이다. "전체적인 의미로서는 일본과 일본인에게 주어진 은혜의 분수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일본인의 진정한 기독교'를 의미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별하면, 서양의 교회나 그 제도,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선교사의 불필요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서양의 교회제도와 특성을 물질적이요 독선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태도도 나타난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인의 보다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심오함을 하나의 긍지로 더하여, 기독교의 본질에 더 가까운 그 어떤 것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치무라의 신학이 제도권 교회와 상충하면서 일본 신학계의 새로운 한 흐름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과연 진보적 신학, 내지는 서구적 신신학(자유주의)의 범주에서 함께 논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도의 문제이다. 우치무라의 신학적 내용에 들어가 보면 그것이 독특한 '토착화'의 논리나 교파 배격의 이론은 가지고 있으나 복음 이해 부분의 전통적 보수성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2. 교파신학과 '자유주의'의 갈등 - 가나모리(金森通倫)의 신학과 우에무라(植村正久)의 비판 일본의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형성이, 초기 한국에서의 교파주의 교회 형성과정과 비교해 볼 때는 일부 독립적이고 자유적인 교파형성과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한국에서의 경우보다는 더욱 강력히 합동교파의 형성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이른바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 그룹의 주도로 '일본적 기독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는데, 이 역시 한국교회에서 192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적 기독교'운동에 비해 광범위하고 영향력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역시 일본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서구의 교파의식에 충실한 교회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고, 특히 그 신학에 있어서는 서구의 전통적 복음주의의 계승에 주력한 과정을 보인다. 대부분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입장은 이러한 서구의 보편적 신학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견지했고 이를 벗어나는 새로운 신학의 조류에 대해서는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이는 역시 선교사들의 보수적 신학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한국교회에서 1930년대 이후 새로운 신학적 도전에 대해 철저한 경계를 폈던 과정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도 한국과 비교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새로운 신학적 사조의 유입에 주류 교회와 신학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에 대한 적절한 '디펜스'를 시도하였다. 특히 초기 일본교회에 유입된 이른바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의 강도는 한국교회에서 문제되었던 진보적 신학 경향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울 만큼 급진적인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1885년 보급복음신교전도회 선교사 스핀너의 일본 도착과 함께 시작된 신신학 사조는 많은 일본의 신학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 동조하는 학자도 있었고 심각한 반발을 보이는 학자도 있었다. 이는 적어도 한가지 서구 신학의 조류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여러가지 검토사항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서구적 신학'과 '일본적 신학', 즉 토착화 정서의 측면으로 대별해 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고 오히려 철저히 서구신학의 체계에 심취해 있던 복음주의자나 교파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신학사조에 대한 경계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신학 체계에 대해 동의하는 일본의 신학자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나모리(金森通倫; 1857-1945)이다. 그는 도시샤(同志社)출신으로 전도자로 활동하던 중 이른바 신신학에 심취하였다. 자신의 자유주의 신학 입장을 천명한 저서《日本現今之基督敎竝ニ將來之基督敎》라는 저서를 1891년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2년 보급복음신교전도회 후원자 중의 한사람인 플레이더러(Otto Pfleiderer)의 저서《宗敎哲學》(Religionsphilosophie auf geschichtlicher Grund lage)을 편역하여《自由神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가나모리는 앞서의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폈다. "일본에는 여러가지 종교가 있으나 결국은 진리와 생명력을 지닌 종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그러나 그 종교의 진리라는 것은 한 종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를 보면, 성서의 기적 설화, 금주금연, 외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종파싸움 등 형식화된 기독교가 일본인에게 그대로 젖어 있다. 유일한 계시인 성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십자가의 속죄 등 기독교의 주장은 일종의 진리성을 지니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외형은 유치한 종교관념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 형식을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의 여러 학문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명확히 해 주고 있다." 한편 가나모리는 성서에 대한 이해도 전통적인 입장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성서는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보수적 축자영감설의 입장과는 달리 그것은 유대인의 종교문서를 모두 수집한 것으로 인간의 종교심을 키우기 위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하나님과의 화합이라고 하는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이 진리는 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는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서 전체에 대한 태도를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는 입장으로 성서관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오직', '유일'의 가치가 '비교우위', '가장', '최고' 등의 상대적인 가치로 변화되는 관점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는 출발부터 다른 시각을 표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기적.예언.영향력.무죄 등으로부터 분명히 증거된다고 믿어져 왔으나, 가나모리는 그러한 주장은 역사적으로 논증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예수는 비범한 종교가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 화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은 바로 고대인의 유치한 종교관념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관도 역시 같은 것인데, '형벌대상설'(刑罰代償說)은 고대사회의 인간관계를 원용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그대로 믿고자 하는 정통파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는 곤란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합이며, 그리스도는 그 선구자 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가나모리의 신학은 오늘날로 보아도 파격적인 것인데, 당시 일본 교회지도자들 간에는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일본 교회의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이 있었고 특히 가나모리가 속한 일본조합교회가 공통의 신앙신조를 절대적으로 강요한다거나, 개교회, 혹은 개인의 신앙표준을 일괄적으로 규정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해도 이와 같은 자유주의와 가나모리의 신학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기도 힘겨운 내용임에 분명했다. 이에 가나모리는 1892년 일본조합교회 총회에서, 자신의 견해가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허용될 수 없는 입장임을 인정하고 탈퇴를 선언했다. 총회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이 해 총회는 고자키의 초안에 의한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일본조합교회의 '신앙고백'은 강제성을 수반하거나 소속 교회나 회원이 오직 이 하나의 '신앙고백'만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은 아니었다. 이에 별도의 신앙고백을 발표하는 개교회도 있고 신앙적 내용을 일부 달리하는 회원도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 반대하는 교회와 회원들 중에는 이 '신앙신조' 발표 후에도 조합교회에 남아 있는 교회와 회원도 있었지만 혹은 교파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합교회가 '신앙고백'을 채택, 발표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에서 오는 위기감 내지는 그 신신학을 초기에 진압하려는 은연 중의 의도가 깔려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이 조합교회의 '신앙고백'은 온건한 복음주의의 입장,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전승에 비교적 충실한 내용으로 1846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복음동맹회 대회에서 채택한 신앙신조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조합교회 내에서는 가나모리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그의 탈퇴 선언을 승인하고 때를 맞추어 온건한 내용의 '신앙고백'을 채택하는 등 간접적인 대응만을 한 셈이다. 또한 채택된 조합교회의 '신앙고백'에 의견을 달리하여 교파를 탈퇴하는 회원도 나왔는데, 전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조합교회 내에 자유주의 신학이 일정 부분 확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가나모리의 자유주의 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곳은 '일본기독교회'이며 그 중에서도 당대 일본의 대표적 신학자요 기독교 지도자였던 우에무라(植村正久;1858-1925)이다. 그는 자신이 1890년 창간한〈日本評論〉, 그리고〈福音週報〉(이듬해〈福音新報〉로 개제) 지면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성을 지적했다. 그는 맹목적인 성서무오설에는 반대하고 독일의 신학계에서 대두된 성서비평학이나 비교종교학의 연구성과를 어느 정도 받아 들이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모리와 같은 견해에는 도저히 찬동할 수가 없었다. 그는 "現今のキリスト敎竝びに將來のキリスト敎"라는 논설에서 가나모리의 논지에 대해 철저한 반론을 폈다. 그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나모리는 오늘날 교회가 주창하는 성서,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등의 교리에 반대를 표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며, 그 근거가 명확치 않다. 기독교는 '절대의 종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불변의 종교이다. 더구나 일본 인민들에게 고결한 윤리심을 길러주는데, 어떻게 가나모리처럼 타종교와 똑같이 취급해야 한단 말인가. 가나모리는 성서의 기적을 비난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기적을 보이지 않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전제적인 비평을 하고 난 후 우에무라는 가나모리의 성서관,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 받아들였다고 보이는 비교종교학적 이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가나모리는 성서가 유대인의 종교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서는 역사를 통한 기독교의 생명이며, 기독교 신학은 성서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는 학문이다. 성서비평학은 역사를 통해 명백해진 계시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다. 가나모리는 비교종교학을 들어 기독교를 타종교와 동일한 차원에 자리매김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것이 서로 다른 사실, 타종교가 기독교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완전해진다는 것이 그 연구의 성과인 것이다. 가나모리는 오늘날의 복음적 기독교를 버리고 공허한 윤리적 유신론에 몰입해 있다. 그것으로는 고귀한 종교적 정조를 불러 일으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확인할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러한 우에무라의 비판에 대해 가나모리는 일절 무반응으로 대했다. 따라서 이는 신학논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결국 자유주의자 가나모리의 신학적 견해를 당시 일본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입장에서 경계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는 일본에서도 역시 새로운 신학사조가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가나모리가 스스로 소속 조합교회를 탈회했다든지, 우에무라의 비판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신학적 주장은 일본의 주류교회 내에서 공식적인 토론을 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혹 개인적 동조자나 이해의 폭이 있다고는 해도 교권과 연결된 부분에서는 세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등을 인식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가나모리를 비판하는 우에무라의 논설에서 엿보이는 '자신감'이다. 이는 당시 일본 신학의 기류가 절대로 가나모리 유형의 자유주의의 도전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일본의 복음주의적 정통신학이 더욱 발전하여 일본 기독교를 강성하게 할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의 입으로 확인하는 바, 가나모리의 주장에 포함되어 있는 외국신학의 모방에서의 탈피 주장에 대해서도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일본의 교회와 신학이 독립적인 기개를 지니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직 그럴만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이상 가나모리의 신학과 그에 대한 우에무라의 비판을 통해 일찍이 1890년대 일본에서 대두된 자유주의신학 파동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종교사학파 계열의 선교단체인 보급복음신교전도회(普及福音新敎傳道會) 선교사들의 영향이었지만 일본에 자유주의 신학이 소개된 것은 한국과 비교할 때 대단히 이른 시기였다. 둘째, 자유주의 신학에 공감한 신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일본 주류교회의 교권에 의해 치리되거나 경고를 받은 일은 없지만 스스로 교파를 떠나거나 정통신학자의 비판에 대해 맞대응치 못한 경우 등으로 볼 때 소수파로서 불이익을 받은 것은 한국의 경우와 대동소이하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도 결국은 서구 신학사조의 유입과 거기에 공감한 일본인 신학자들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그들은 일본교회와 신학의 신학적 독자성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서구 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은 철저한 서구적 신학 노선에 입각하여 이를 비판한 것도 역시 훗날 한국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 결론 - 오늘날 일본의 신학적 경향 이해 "일본 초기교회의 신학을 집성한 우에무라(植村正久)이래의 다수 신학자들의 사상모범은 유럽식 정통신학의 모형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신학 이후 유독히 바르트신학자가 많았던 일본 신학계의 한 주된 경향을 '서구신학의 모방적 실현'으로 정리한다고 해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파형성의 과정에서 선교본국의 교파체계를 그대로 옮겨 온 교파 이외에 일본 교회의 형편을 더욱 참작한 형태의 교파도 조직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일본조합교회나 일본기독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한때 제기되었던 적이 있으나 초기에 이들 교파 간에는 또한 하나로 합동하여 특별한 교파구별 없는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말기, 곧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섰을 때에는 종교단체법과 같은 외압이 작용하긴 했지만 여러 교파들이 '일본기독교단'을 형성했고 그 주체는 지금까지 일본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적 기독교'를 주장한 우치무라 중심의 '무교회주의 그룹'은 오랫동안 일본 신학계에 영향을 미쳐 왔다. 그리고 본 논문의 한 중심주제였던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비록 그 신학적 단초를 서구의 종교사학파로부터 시사 받았다고는 해도 그들의 이상 속에는 서구 신학의 모방이 아닌 일본 교회의 독자적 신학형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다. 이상의 여러가지 사실들은 일본 신학이 서구 신학으로 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논할 수 있는 소지가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신학사를 되돌아 볼 때 그 주류는 서구 신학의 철저한 모방과 수용, 심화를 목표한 과정이었음은 부인할 길 없다. 이러한 서구 정통신학의 수용과 전개를 통해 일본 신학과 교회의 성숙을 목표했던 신학자들의 의식구조는 기독교 수용을 의도했던 초기 개국론자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를 펴던 초기 사상가들의 목표와 상통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신학적 자세는 우에무라를 비롯한 초기 일본교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시하라나 구마노와 같은, 서구적 교회론의 이상을 지닌 교회사가나 조직신학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일본은 그 교세성장의 과다를 떠나 서구의 이론 신학이 가장 발달하고 심화된 아시아 지역으로 자타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사 속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국가체제와의 갈등과 협력, 전후 일본 교회의 존재양태를 두고 일어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일본 신학은 점차 그 중심주제와 방법론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그 신학적 관심의 시좌(視座)가 아시아를 향하는,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전후 일본 교회가 일정한 과정을 통해 '전책고백'(戰責告白)의 강도를 높여 나가고 특히 한국교회에 대한 사죄와 화해, 연대를 목표로 활동하면서 그 신학적 바탕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는 곧 서구교회를 이상으로 삼던 신학적 관심과 목표가 아시아, 그리고 그밖의 제3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그 첫 변화는 이른바 '아픔의 신학'을 주장한 기타모리(北森嘉藏)에게서 모아진다. "기타모리는 '말씀의 신학'에 대신하여 '아픔의 신학'을 주장했다. 이것은 성서적 하나님의 수고와 공감으로 신학을 되돌려 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특히 바르트가 주창한, 눈물도 아픔도 없는 완전한 인격의 하나님에 대한 반론은 우리들을 성서적인 수고의 하나님과 재회시킨다는 측면에서 그의 신학이 지닌 커다란 의의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역시 추상화된 유럽신학에 대한 도전이며 개인적 나르시즘을 벗어난 민중 공동체의 편에 서신 하나님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기타모리는 전후 일본 신학의 변화를 실제적으로 상징하는 중추가 된다. 그의 신학을 '아시아 문화신학'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하는데, 그는 결국 아시아인의 역사와 정황으로 성서를 읽는 일을 통해 유럽신학의 관점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고통과 수고를 새롭게 찾아낸 것이다. "기타모리는 일본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수고성(受苦性)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던 파이오니어적 존재이다. 오늘날에도 아시아 신학자들 사이에는 전통적 유럽신학에 대한 여러가지 반성을 기하여 아시아에 맞는 신론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기타모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진노하면서도 끝까지 진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분냄을 아파하는 것을 통하여 인간을 화해로 인도하고 분노의 대상인 인간의 괴로움을 아파하는 것에 의해 사랑의 하나님이 된 것을 재발견하였다. 지금까지 유럽신학이 하나님의 수고를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기타모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아픔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하고 더욱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픔에 참여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타모리 신학은 서구 중심 신학의 주제와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아픔의 신학은 아픔을 입은 자에게 진정한 해방을 선포하는 실천적 신학의 영역까지는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대단히 이론적인 체계로 하나님의 십자가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대입하는 단계에 서있다는 비평에 부딪히고 있다. "아픔은 하나님으로부터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전 우주로부터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픔이 통치한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기타모리는 자문한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아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고난이다. 하나님 아픔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 계속 서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즉 기타모리의 신학은 아픔과 고통,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일 뿐, 그 고통 중에 머물러 있는 민중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이론적인 신학의 논의로서 '하나님의 아픔'이 증명되고 있을 뿐 신학의 시좌(視座)가 '소외된 자의 자리'로 내려앉지 못했다는 제한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신학에서도 1970-80년대로 들어서면서 커다란 전환을 보인다. 이것은 결국 신학의 주제를 민중, '민중적 감각을 지닌 자', '소외된 자', 이것을 지역적이며 역사적 방향으로 돌리면, '아시아', '제3세계'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러한 신학의 주체변화와 교회사의 관점변화가 맞물려 일본신학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론적인 신학을 학문적 사변으로 소수의 엘리트 신학자가 전유하거나 변형시키는 신학작업에서, 소외된 자의 실천적 '프락시스'(praxis)로 신학작업의 양상과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며, 교회사관의 입장도 '신학적 기독교사론'으로 부터 '사회경제사적 사관'을 거쳐 '민중사론'으로 이행하는 방향성을 지닌 것이다." 1960년대 일본교회는 존재 양식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급격한 일본 사회의 변화와 고도 경제성장,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꾸준한 성찰 등으로 일본 사회 속에서 절대적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일본교회와 신학이 어떤 존재 양태를 띠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이에 비록 전체적이고 완전한 전환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본 교회나 신학의 선교적 목표로서, 곧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목표로서, '재일 한국인', '브라크(部落)민',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장애인' 등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한국의 세계적인 창출신학인 '민중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이나 '페미니즘신학'이 또한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이 지금부터 논의해 나가야 할 신학적인 테마는 일본의 피차별 브라크 차별의 리얼리티(reality)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피차별 브라크민이 체험해 온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성서가 말해 주고 있는 고난과 해방의 증언과 관련시켜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억압받아 온 민중의 고통이 하나님의 수고(受苦)와 맥을 같이 하며, 차별없는 세상의 도래에 대한 희망은, 단지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향한 갈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케리그마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의 신학은 심대한 자기정체성이 변화를 초래하였다. 앞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을 포함한 일련의 신학적 관심과 주제의 변화를 겪으며 변천해 온 일본 신학은 전후(戰後) 수십년 간에 걸친 일본 교회의 내외적인 정체성 도전 속에서 스스로의 변혁에 골몰하였던 것이다. 최근의 일본신학, 신진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그룹에 의해서 여러가지 사회 차별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역사적 관계와 현상에 대한 검토, 여성 신학을 중심으로 한 문제, 그리고 한국교회는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 교회들과의 신학적 주제와 방법론에 대한 교류와 연대 문제를 강력하게 추진해 온 바 있다.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출발한 일본신학의 구조가 파시즘에 영합하는 국수적 기독교로 변형되었다가 그것은 다시 심각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론적 서구신학에 신학적 표준을 두었던 엘리트신학은 그 또한 다원종교의 문화와 역사를 지닌 일본적 현실에 부딪혀 저변구현에 좌절하는 경로를 밟았다. 뿐만 아니라 비제도권의 소수파로 일본 토착신학의 전형을 개척한 무교회주의계 등은 교회공동체와의 완벽한 절연으로 인해 그 출중한 신학내용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실재영역에서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신학사의 대강을 지닌 일본의 기독교 신학이 다양하고 구체적인 신학적인 주제에 접근하며, 더구나 그 신학적 관점을 서구 유럽신학의 자리에서 아시아와 제3세계의 시좌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은 현대 일본신학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일본 신학에는 한 가지 지속되는 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부흥과 역동이라는 지원구조가 취약한 점이다. 이는 종전의 경우나 현대의 일본 교회나 다름없이 상존하는 문제인데 일본의 신학이 공허한 공간에 놓일 수밖에 없는 한계인 것이다. 신학의 주제나 시점(視點)이 아무리 출중한 것이고 그 새로운 전환의 폭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신학이 일차적으로 구현되는 자리로서, 또는 신학의 사회적 구현을 위한 매개적 바탕으로서 교회가 지닌 비중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일본 신학의 변화와 발전을 지지하는 교회의 성장과 지원체계가 계속적인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인지, 최근의 일본 신학은 다시 정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구적 젊은 신학자 그룹이 제기한 새로운 신학적 주제에 대한 저변확대가 기대 이하인 점, 사회적인 연결구조로서 신학의 실천적 측면이 여전이 답보 상태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에 들어 일본의 신학계가 역동적으로 몰입하는 '신학주제'를 다시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의 일본 신학자들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신학적 관심에만 심취하고 있고 때로는 그 신학사의 정리, 곧 신학적 주제와 방법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개괄적 관심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평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지 못한 각 시대별 신학적 주제와 관심의 변천 내역, 교파별 신학 성향의 차이, 저명 신학자 개개인의 신학적 입장, 여러 서구 신학 사조들이 일본에 유입된 경로와 적응과정, 그리고 이들 일본 신학사의 변천과 한국 신학사상사와의 비교 검토 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