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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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8장 3. 일본그리스도교와 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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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4-09-0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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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그리스도교와 천황제


에도 시대가 끝난 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근대로 접어들었다. 메이지 유신정부는 신도를 통해 국가 정책과 신도를 결탁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그것이 천황제 이데올로기인 국가 신도이다. 국가 신도와 근대 일본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천황제는 천황이 절대 주권자로서 통치의 대권을 장악하고 그 밑에 문무관료들은 그 대권을 보필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천황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 현인신으로 급상승한 것이다. 새로운 근대 정치를 펼치려 했던 일본은 어떻게 하면 천황제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가족국가론을 만들어냈다. 천황을 중심으로 전 일본국민이 한가족이라는 이론이다. 이렇게 가족공동체적 의식을 고취시켜 가족국가론을 형성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은 국민 앞에서 아버지 같은 위엄과 사랑을 지닌 존재로 부상되고, 국민은 천황에게 경애와 신뢰를 가지고 받드는 가족 국가론을 하나의 정책으로 삼아 신도를 국교화했다.

이렇게 천황제가 창출되고 천황제를 중심으로 가족국가론이 형성되는 와중에, 그리스도교는 근대 일본의 정책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메이지 유신 시대에 종교 정책은 신도를 국교화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깔고 있었으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고 타종교의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 근대화 과정 안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일본은 헌법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국가의 안녕과 질서 유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천황의 신성됨을 모독할 수 없다.” 즉 유럽, 미국과 손을 잡으려면 서구의 정신 세계를 배제할 순 없으니까 신앙의 자유는 허용하지만 천황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 없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표명했다.

바꿔 이야기하면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가신도에 예속되는 종교통제 정책을 펼친 것이다. 메이지 시대에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예속화시키는 정책을 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인들은 기독교가 ‘사교’라는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곧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자체를 사교라고 보았던 것이다. ‘정신이나 혼은 일본의 것을 취하되 기술이나 문명은 서양의 것을 취한다.’는 화혼양재론을 내세워 기독교의 정신세계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이것에 물들지 않고 일본 것을 지키려 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문물만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 메이지 시대 정치 지도자들의 기본 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국가 신도, 메이지유신 시대의 정책 안에서 적응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작고 살아남기는 해야 하고. 그러다가 큰 사건이 일어났다. 우치무라 간조라는 사람이 일으킨 불경사건이라는 것이 크게 부각되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였는데 그가 도쿄의 제일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할 무렵, 1891년 천황이 직접 서명한 교육칙서가 내려왔다. 교육칙서 안에는 메이지 정부가 앞으로 펼칠 정책,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교육과정에 적용시킨 천황을 중심으로 한 천황 숭배정책 이었다. 천황이 직접 서명한 칙서에 대한 공개식이 있었다. 거기서 다섯 명씩 교사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직접 천황을 대하듯 깊은 경배의 예를 하도록 했는데 우치무라 간조는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는 단 위에 올라가기는 했지만 칙서 앞에서 한 바퀴 돌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내려와버린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에 대해 도쿄 대학의 이노우에 교수는 우치무라 간조를 비판하며 ‘교육 칙서는 일본 근대 천황제 국가의 통치 근간이고 사상적 실천 요목인데 이것과 기독교는 도무지 상용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 국가적인 목표 수행에 있어서 기독교 제거는 필수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에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확립시키고자 하는 예민한 시기에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가 하나의 걸림돌이 된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래서 기독교 자체적으로도 습관과 풍속의 기독교로 거듭나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들 중 하나가 2월 11일, 일본의 건국 기념일인 2월 11일을 신교 자유 수호일로 기독교에서 제정하고 교회의 한 축제일로 지내게 된 것이다. 사실 12월 25일은 예수님의 탄생일이라기 보다 로마 태양신의 탄생일로 당시 로마에서 제정하고 지켰던 날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그 날을 예수 탄생일로 지내고 있다. 이것도 당시 그리스도교가 로마 안에서 습속의 종교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또 일본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독교식으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 역시 습속의 기독교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천황제에 협력하는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 메이지 정부에서는 천황제를 지배의 기반인 동시에 은혜의 기반으로 선전했다. 이솝 우화에서 여행하는 사람이 따뜻한 태양볕에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일본정부는 천황제라는 가족국가론으로 계속 기독교를 비추면서 기독교로 하여금 옷을 벗게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기반으로 다가오는 정부의 제도들에 교회의 유지나 확장을 위해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국가에 감사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교회식으로 변형되어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당시 3교 – 기독교, 불교, 신도‐ 의 회동이 있었다. 신도는 국가신도니까 그렇다고 치고 불교도 습속으로서 일본인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기독교도 여기에 끼게 된 것이다. 그동안 불평등을 받아왔던 기독교는 3교 회동을 통해 불평등으로부터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귀족 출신 기독교인들이 천황제와 타협하면서 중앙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것도 국가 신도에 밀착되어 기독교가 습속의 형태로 변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기독교인 중에는 엘리트층이 많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도시 중간계급이나 지식인층이 기독교에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일본이라는 풍토 안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일본인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신도에서 나와 새로운 가치를 선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나름 일본인의 삶에 뿌리내렸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퍼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말에 있었던 종교의 공백기였다. 종교가 어떤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을 공백 시기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것이다. 일본에는 그런 공백기가 없었다.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도가 일본인의 가슴 밑바닥에 깊이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문제의식이 강한 사람들, 신앙에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일본 그리스도 신자 중에는 지식인이 많은 것이다. 신도를 부정하고 불교를 부정하고 새로운 뿌리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도시 중산계급이나 지식인 계층이 일본 기독교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의 궁극적 의문, 회의의 해결점을 그리스도교에서 찾고자 했다.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내면적이다. 또한 일본 그리스도교는 교회 중심이라기 보다 개인 중심이다. 내적인, 내면적인, 사적인 그리스도교이다. 우리 나라는 교회만 크고 구성원들의 신앙의 깊이는 얕지만, 일본 기독교는 교회 중심이 아니다. 우치무라 간조 같은 사람은 교회를 부정하기까지 했다. 특별히 무교회주의자들은 엘리트층이었다. 

 

1)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다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가 우치무라 간조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불경사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무교회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일본의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시켜갔고 이를 통해 일본 신학의 토착화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천황을 신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천황은 인간인데 왜 인간 앞에 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러한 그의 생각이 불경 사건을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과도 대립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서구 종교라고 보지만, 우치무라 간조는 그리스도교는 서구 종교가 아니라 일본에게도 일본인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서구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 풍토에 맞게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토착화 문제에서 그가 거론되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 스스로 성서를 읽고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우리식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엔도 슈사쿠도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일본인들이 이런 문제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우치무라는 목사나 선교사 종교의례를 배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가고자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서구 신학에서 탈피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무교회주의 신학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본 그리스도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제도와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는 자세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교회 중심인데 반해, 일본은 교회를 부정한다. 우치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랑에 의해 결속된 공동체이지 건물이 아니다. 따라서 영적 교제의 단체이어야 하며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이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서양의 교회나 제도 또 그것을 전하는 선교사는 불필요하다.”

그는 또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례전을 부정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신앙뿐이었다. 성례전을 행하는 것보다 성서 연구를 더 중시했고 나아가서 교회의 성직도 부정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교회이기 때문에 목사나 전도사가 따로 필요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일본 그리스도교가 확장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정신이 좋아도 교회라는 건물 없이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일본 그리스도교는 성장해갈 수가 없다.

 이러한 우치무라의 사상은 우리 나라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함석헌, 김교신, 유영모 이분들이 모두 우치무라 간조에게 배웠다. 무교회주의자에게는 성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집회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많은 신도수를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평화주의를 주장했는데 절대 평화주의 주장의 근저는 성서가 이루었다. ‘성서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안 된다.’ 그는 이러한 논리로서 절대 평화주의를 전개했다. 그는 또한 만민구원론을 펼쳤다. ‘종교전쟁은 자기네 종교, 소수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는 것인데 그러나 신에게 소수만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만민에 대한 구원이지 소수, 선택된 자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만민구원론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이러한 사상을 펼쳤고 많은 일본 엘리트들이 그의 사상에 동조했지만, 그들은 교회 공동체와는 절연한 비제도권의 소수파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