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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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종교 연구

제8장 4. 일본 개신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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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14-09-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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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개신교의 시작


박해의 역사는 가톨릭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 있었고 개신교는 박해의 역사 한참 뒤에 들어왔다. 1853년에 안세이 조약이 체결되면서 문호개방과 함께 그리스도교 금령을 해제했다. 시대적 조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개신교는 일본에 1858년에 전래되었다. 일본과 미국간에 미일 조약이 맺어지고 같은 해에 일본과 프랑스 간에 일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불수호통상조약 4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일본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자기가 머무는 지역에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일본은 허용한다.” 이로써 1859년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가면서 개신교가 정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종전에 가톨릭은 사무라이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그 밑에 있던 가난한 서민들이 세례를 받았던 데 반해, 개신교는 도시 중산층과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도시 중산층, 지식층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주로 지식층 부류로서 이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특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 당시 가톨릭도 들어오긴 했으나 종전에는 예수회를 중심으로 일본 문화를 존중하는 입장이었던 데 반해, 당시 들어온 선교사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토착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었다. 그들은 일본 종교문화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면들이 일본 그리스도교 정착에 상당한 장애요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실패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이 보수적인 성향들로 바뀌는 가운데 개신교는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켜 종교는 개개인의 영역으로만 생각했다. 토착화는 문화와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가 정착해야 하는데, 정신세계를 그대로 두면서 신앙 자체를 고수하는 이원론화된 구조를 갖게 되면서 사실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의 경우는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상당히 많은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라는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토대들이 개신교 선교사들이나 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면은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하지만 일본 개신교는 메이지유신 시대에 국가 정책에 혁신적인 것을 제공하는 정신적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천황체제 아래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하는 측면들로 일관해서 주변세력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천황제와 그리스도교>

메이지 유신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신도를 다루면서 보았듯이 천황제가 문제가 되었다.  이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서로 융합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가 중요한 핵심이라 하겠다. 천황제 하에서의 그리스도교는 ‘습속의 그리스도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일본인들의 관습 형태로 남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천황은 마치 현인신 역할을 했다. 신격화되는 현인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서 일본을 통치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통치권이라든지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상징적인 측면이 강했고,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정부 쪽에서 천황의 자리매김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에는 국가 신도가 하나의 종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국가신도의 심볼로서 천황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였다. 신도 제의가 곧 국가의 행사가 되었고 천황은 신도 제의를 집행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메이지 정부가 의도한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민중들 가운데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기 위해 ‘가족국가론’을 생각해냈다. 가족국가론에서는 국가가 하나의 가족 형태를 띠고 있다. 천황제는 가족공동체적인 의식을 취하도록 이론화시켰다. 국가론이되 국가가 하나의 가족을 구성하는 것처럼 천황은 가부장적 아버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천황을 아버지의 위엄을 갖추고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의 상으로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국민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하게끔 했다. 곧 국민들은 천황의 자녀로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현대 일본 어르신들은 천황에 대한 존경심이 굉장하다. 정말 신격화되어 있는 상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기에 같은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일본인들 안에 천황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는 가족국가론을 통해 국가신도를 정책화시켰고 이러한 과정 안에서 다른 종교는 살아남기 위한 방책들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도가 하나의 국가종교로 정착하면서 물론 종교의 자유가 있었지만 천황제와의 관계를 잘 맺어가야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역시 천황제 체제 아래서 일본의 관습과 습성에 스며들어가 살아남고자 하는 노력을 펼쳤다. 그 예로서 들 수 있는 것이 2월 11일 –일본의 건국 기념일이다. 개신교에서는 이 날을 신교자유수호의 날로 정하고 큰 교회 행사를 치렀다. 기독교에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지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 날이 예수 탄생일이 아니다. 4세기 로마교회에서 12월 25일을 태양신 탄생일로 지내던 것을 교회가 로마에 들어가면서 이 날을 가져와 예수 탄생일로 만든 것이다. 일본교회 역시 토착화의 일환으로서 이런 작업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전국기념일을 신교 자유수호의 날로 정함으로써 국가와 그리스도교가 같이 가고자 했던 것이다.

또 일본 젊은이들은 크리스찬이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결혼하고 싶어한다. 이것도 일본 그리스도교가 신앙과는 무관한 하나의 관습이자 습성으로 일본에 정착한 그리스도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천황제에 협력해서 그리스도교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는 메이지유신 시대의 종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메이지 유신 시대의 종교정책은 어떠했을까? 당시 종교정책으로 신도를 국교화시켜 일본땅을 종교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종교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일단 봉쇄해온 종교자유를 풀었으나, 여전히 차별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국가신도를 일순위로 두고 그 다음에 다른 종교를 두는 식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국가신도의 신도이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정책은 헌법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이것은 국가의 안녕, 질서 유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천황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도 없다. ‘모든 종교는 천황의 신성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문제가 되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사건은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헌법에 제시되어 있는 것에 미루어볼 때 이것은 조건지어진 신앙의 자유이다. 메이지 정부는 그리스도교를 예속화시키는 정책을 수행했고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를 상당히 경계해야 하는 종교로 인식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화혼양재‐혼은 일본 것으로 하되 기술, 물질은 서양에서 도입한다‐라는 양분화된 정책을 그리스도교에 그대로 적용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천황제에 적응하고 국가 질서에 순응하는 종교 양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천황제 아래에 있던 그리스도교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천황제는 지배수탈의 기관이면서 은혜의 기관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천황제에 잘 적응하는 조직으로 변신되어 갔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여행하는 사람이 추울 때는 외투를 꽁꽁 여몄지만 빛이 비치니까 외투를 벗는 것처럼 천황제의 가족국가론 앞에서 그리스도교는 자기 옷을 벗고 거기에 순응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즉 국가는 그리스도교가 존속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은혜의 기관이었다. 이렇듯 국가가 은혜의 기관으로 접근하면서 교회는 감사의 보답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3교의 회동이 있었는데  불교, 신도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여기에 속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본에서 하나의 종교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국가에 순응하는 형태를 곧 취한 것이다. 불교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정부는 불교와 혼합된 신도의 형태를 벗겨내기 위해서 불교를 모두 없애고자 했다. 그래서 폐불정책을 펼쳤기에 불교는 살아남기 위해 순응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도수가 상당히 소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그리스도교는 일본사회의 변혁을 일으키는 선구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도시 중산 계층, 지식인층이 주류 일본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사회적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내적인 측면으로 파고들어 인생의 궁극적인 물음, 회의를 기독교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자연히 내면적이면서 개인적인 신앙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로 방향을 잡아가게 되었다. 다시말해 일본 그리스도교는 사회와는 동떨어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의 형태로 정착해 나갔다. 사실 이는 일본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측면에서 깊이 심화되어 가게 만든 측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천황제와 그리스도교가 갈등하는 일들이 생겨나는데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도쿄제일고등학교의 교사였다. 교사로 재직하던 무렵 1891년 1월 9일, 천황이 직접 서명한 교육칙어가 학교에 내려왔다. 천황에 관련된 여러가지를 교육정책 안에 반영한 것이다. 이 교육칙어가 정부로부터 학교에 왔을 때 이것을 받는 공개적 행사가 있었다. 이때 마치 천황이 직접 학교에 오신 것처럼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해야 했다. 교육칙어를 봉독할 때 다섯 명의 교사들이 교단에 올라가 마치 천황에게 절하듯 고개를 깊이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치무라 간조는 단상에 올라가서 칙어 앞에서 한 바퀴 돌고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냥 내려와버린 것이다. 전교생과 교사들이 보는 앞에서 천황이 보낸 교육칙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은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처럼 불경하게 간주되어 사건은 커져 버렸다.

우치무라 간조는 사실 그의 사상과 신념 때문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천황을 신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천황은 인간인데 왜 인간 앞에 절을 해야만 하는가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가 천황제 국가의 한 반역적 행위로 간주 되면서 문제는 천황제 국가에서 기독교가 과연 공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갔다. 과연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가 천황제 신앙을 갖고 있는 일본 땅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불경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을 크게 문제 삼았던 사람은 도쿄대학의 이노우에 교수였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칙어는 일본 근대 천황제 국가의 통치 근간이고 사상적 실천 요목인데 이것과 기독교는 도무지 상용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 국가적 목표 수행을 함에 있어서 기독교 제거는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이 불경 사건 이후로 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